2022년 10월호

은진미륵은 어떻게 못생긴 3등신에서 시대 앞선 명작이 됐을까

[명작의 비밀]

  • 이광표 서원대 교양학과 교수

    kpleedonga@hanmail.net

    입력2022-10-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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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물→국보→보물→국보… 네 번 바뀐 명칭

    • 미련한 졸작에서 독창적 미의식으로 평가 바뀌어

    • 특이한 생김새로 일제강점기부터 관광명소

    • 세상에 이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을까

    충남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석불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흔히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 일컬어진다. [문화재청]

    충남 논산시 관촉사에 있는 석불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흔히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 일컬어진다. [문화재청]

    2018년 4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인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고려 10~11세기)이 보물에서 국보로 격상됐다. 그런데 이 석불의 내력이 좀 특이하다. 일제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됐고 광복 이후 국보가 됐으며, 1963년 다시 보물이 됐다가 55년 만에 다시금 국보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 석불을 사람들은 흔히 은진미륵(恩津彌勒)으로 불러왔다. 은진미륵 하면 많은 이들이 “크고 못생긴” “투박하고 촌스러운” 이미지를 떠올린다. “미련한” “3등신”이란 혹평까지 받아야 했던 은진미륵이 국보로 승격되자 “대범한 미적 감각” “가장 독창적인 미의식” “한국 최고의 석불”이란 찬사가 쏟아졌다. 은진미륵은 예나 지금이나 그 자리에 그 모습 그대로인데 어떻게 해서 이런 인식의 차이가 생긴 것일까. 그 엄청난 간극에는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일까. 100년 동안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참으로 못생긴 미륵

    충남 논산시 은진면 반야산에 있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불이다. 높이 18.12m. 고려 초인 10세기 말~11세기 초에 조성됐다. 석불 조성과 관련해 전설 같은 얘기가 전해 온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968년 어느 날 사람들은 반야산에서 불쑥 속은 거대한 돌을 발견했고 이 돌의 존재 의미와 활용법에 대해 머리를 맞댔다. 그 결과 이 돌로 불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의견을 모았다. 970년 당대의 조각승 혜명(慧明)대사가 석공 100명과 함께 공사를 시작했고, 37년이 지난 1006년 불상을 완성했다고 한다.

    이 석불을 두고 관음보살인지 미륵보살인지 견해차가 있지만 현재 공식적으로는 미륵보살로 보고 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하고 56억7000만 년이 지난 뒤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나타나는 부처를 말한다. 세상이 어수선할 때 대중이 더욱 의지하는 존재가 미륵인데, 이 미륵 석불은 참으로 특이하다.

    우선, 투박하고 어색하고 촌스럽다. 인물 조각으로서 비례감이 전혀 없다. 몸통보다 머리와 손발이 지나치게 크다. 7등신, 8등신은커녕 3등신이라는 조롱을 받을 정도다. 얼굴은 이목구비(耳目口鼻)로 꽉 찼고, 두 볼은 터질 듯 부풀어 올라 욕심이 가득해 보인다. 눈은 눈썹에 비해 지나치게 길고, 입도 너무 커서 신체의 모든 부위가 부자연스럽다. 인체 조각으로서의 조화로움은 온데간데없다.

    보살상은 종교적 예배의 대상이어야 하건만 이 석불에선 성스러움이나 경외감을 느끼기 어렵다. 국립중앙박물관의 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왜 이렇게 투박하고 촌스러울까. 어떻게 해서 이런 불상이 태어난 것일까. 혜명 스님과 석공들의 조각 기술이 서툴렀던 것일까.



    3등신 은진미륵의 인기

    은진미륵은 다른 불상에 비해 머리가 크다. 머리 위에는 불상의 장식인 보개가 얹혀 있는데, 보개와 얼굴의 길이가 몸길이와 비슷할 정도다. [문화재청]

    은진미륵은 다른 불상에 비해 머리가 크다. 머리 위에는 불상의 장식인 보개가 얹혀 있는데, 보개와 얼굴의 길이가 몸길이와 비슷할 정도다. [문화재청]

    언제부턴가 ‘크고 투박하고 못생긴’ 이 석불의 인기가 높아졌다. 대략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그 인기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1911년 대전~연산~강경 구간의 호남선 철도가 개통되자 관촉사에 접근하기가 수월해졌고 관촉사 석조미륵보살, 즉 은진미륵을 찾는 사람도 늘었다. 관광객이 늘자 관촉사에 이르는 진입 도로를 확충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17일자엔 ‘연희전문교생 호남여행’이라는 제목의 단신이 실렸다. “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 4학년 상과 3학년 17명은 (…) 대전 계룡산 은진미륵 논산 부여 강경 이리 전주 군산 등지를 여행하고( …)”

    동아일보 1938년 10월 9일자엔 이런 모집기사도 보인다. “부여8경 은진미륵 공주 계룡산 탐승단 모집/(…)/회비 부여행 1인 7원 80전/(…)/주식(晝食) 지참/주최 동아일보 청주지국.”

    당시 은진미륵 관광 여행에 관한 기사는 이 밖에도 꽤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사를 통해 은진미륵이 수학여행지, 관광지로 인기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관촉사 일대에서는 신파극도 열렸으며 보물찾기와 씨름대회도 열렸다. 관촉사 은진미륵 축제를 즐기기 위해 1만여 명의 인파가 몰리기도 했다니 당시 분위기가 쉽게 짐작이 간다(신은영, ‘향유와 보호의 역설-은진미륵의 근현대 역사경험’, 2016). 1920~1930년대 관촉사 은진미륵은 이렇게 대표적인 관광 유원지로 자리 잡았다. 이런 측면은 종교적 예배의 대상이어야 할 은진미륵을 세속적 유희의 대상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국보에서 보물로, 보물에서 국보로

    그 무렵 은진미륵은 보물로 지정됐다. 공식 명칭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일제강점기, 이 땅의 문화재를 조사 분류하고 목록화해 온 조선총독부는 1933년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이라는 법령을 공포하고 1934년부터 보물, 고적 등을 지정했다.

    1934년 보물 153건, 고적 13건, 천연기념물 3건을 지정했다. 이후 1942년까지 7차례에 걸쳐 보물 등을 지정했다. 일제는 일본의 문화재만 국보로 지정하고 우리 문화재에는 국보가 아니라 보물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국권을 상실한 조선에 국보가 있을 수 없다는 식민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보물 1호는 경성 남대문(숭례문), 보물 2호는 경성 동대문(흥인지문), 보물 3호는 경성 보신각종이었다.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즉 은진미륵은 관촉사 측의 신청에 따라 심의를 거쳐 1940년 보물 346호로 지정됐다.

    광복 후인 1955년 우리 정부는 일제가 지정한 보물을 모두 국보로 바꾸었다. 물론 북한 땅에 있는 것들은 제외했다. 국권을 되찾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으니 국보 지정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지정한 보물을 정교하게 재평가한 것이 아니라 보물 전체를 국보로 바꿔놓는 차원이었다.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열악한 시절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국보 지정관리 시스템은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비로소 갖춰졌다. 1955년 지정된 국보들을 재평가해 국보와 보물로 등급을 나누었다. 국보가 최고 등급이고 보물은 그 아래 등급이다. 이때 은진미륵은 국보가 아니라 보물이 됐다. 어찌 보면 국보에서 보물로 격하된 셈이다.

    보물에서 국보로, 국보에서 다시 보물로 바뀌었지만 이와 관계없이 은진미륵은 1970, 1980년대까지 인기 관광명소였다. 1966년엔 은진미륵이 들어간 우표가 발행되기도 했다. 우표 디자인에 은진미륵이 들어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은진미륵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은진미륵이 아름다운 석불은 아니다. 세련된 석불도 아니다. 그런데 그 투박하고 못생긴 은진미륵을 사람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찾아간 것일까. 미륵은 중생을 구원해 주는 존재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한다. 사람들은 그런 미륵을 찾아가 자신의 행복을 갈구하고 욕망을 실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미륵이 투박하고 좀 못생겼으니 찾는 이의 마음이 편해진다. 몸집이 큼지막하니 왠지 더 믿음직스럽다. 너무 종교적이지 않아서, 토속적이고 민간신앙 분위기라서 세속적 욕망을 드러내기가 더 좋다. 이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면, 은진미륵이 만만해 보이니 중생이 더 좋아하는 것이다.

    대중적 인기 vs 학계의 폄하

    그러나 전문가들의 생각은 달랐다. 대중이 은진미륵을 좋아하는 것과 달리, 은진미륵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일제강점기에도 그랬고 광복 후에도 그랬다. 국내 고고 미술사 연구의 1세대인 김원룡(1922~1993·전 서울대 교수)의 평가가 대표적이다.

    “은진미륵은 3등신의 비율이며, 전신의 반쯤 되는 거대한 얼굴은 삼각형으로 턱이 넓어 일자로 다문 입, 넓적한 코와 함께 불상의 얼굴을 가장 미련한 타입으로 만들고 있다. 실체는 한 개의 석주(石柱)에 불과하고 그 위에 의미 없는 선이 옷 주름을 표현하려고 한다. (…) 신라의 전통이 완전히 없어진 한국 최악의 졸작임은 두말할 것이 없다. 이 미륵에 한국인이 놀라는 것은 그 크기 때문일 것이고, 외국인이 감탄한다면 그 원시성 때문일 것이다.”(김원룡, ‘한국미의 탐구’, 1978)

    김원룡의 평가는 냉혹했다. 다른 연구자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신라의 빼어난 전통을 상실해 버린 최악의 졸작”이라는 평가가 서슴없이 나왔다. 대중의 선호도와 학계의 평가 사이의 간극은 이렇게나 컸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은진미륵은 그저 “국내 최대 석불” “10세기 고려 불상의 지방 양식” 정도로 대접받을 뿐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조금씩 변화가 생겼다. 은진미륵에 주목하는 연구자가 하나둘 늘어난 것이다. 우선, 단순한 지방 양식으로 보는 관점이 조금씩 무너졌다. 고려 왕실의 지원 아래 중앙에서 파견된 당대 최고 수준의 조각승 혜명이 석불을 제작했다는 견해, 중앙집권의 기초를 다지는 차원에서 후백제 땅인 논산에 거대한 석불을 세웠다는 견해가 주목받았다.

    은진미륵은 특이하게도 머리에 면류관(冕旒冠) 같은 보개(寶蓋) 장식을 쓰고 있다. 그 이전까지 어떠한 불상에서도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당시 고려 광종은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옛 후백제 영토에 자신의 권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대형 석불을 세우고 거기 왕권을 상징하는 면류관을 씌운 것이라는 견해도 나왔다(최선주, ‘고려초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에 관한 연구’, 2000). 이렇게 참신한 이론이 늘어나면서 “거대하지만 수준 낮은 지방 양식”이라는 기존의 관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은진미륵은 2018년 4월 보물에서 국보로 승격됐다. 1963년 1월 보물 지정된 지 55년 만이다. 당시 문화재청과 문화재위원회는 “고려 시대 불교 조각 가운데 월등한 가치를 지닌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위상을 공유하고 이 시대 불교 조각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국보로 지정한다”고 밝혔다.

    이어 은진미륵에 대해 찬사가 쏟아졌다. “널찍하고 명료한 이목구비는 멀리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 “압도적인 크기의 화강암과 그 육중함은 고려의 권위와 상징” “통일신라 조각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이고 대범한 미적 감각” “우리나라 불교 신앙과 조각사에서 중요한 위치” “한국 불상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특색 있는 미의식” “강한 메시지와 신비감” 등 그 찬사는 엄청났다.

    그래도 여전히 투박하고 못생긴

    종교적이지도 않고, 비례감도 없던, 지방 양식의 대형 석불은 이렇게 해서 독창적이고 역동적이며 완전한 석불로 다시 태어났다. 은진미륵을 바라보는 학계의 시선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엄청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우리 문화재 가운데 이렇게 평가가 달라진 경우도 드물 것이다.

    보물이었을 때나 국보가 됐을 때나, 은진미륵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학계 평가는 달라졌지만, 은진미륵을 바라보는 대중의 생각은 그리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은진미륵은 다른 불상들이 지니지 못한 특징과 매력이 있다. 그것은 분명 투박함, 못생김, 거대함 같은 것이다. 투박함의 미학, 불균형의 미학이라고 할까. 국보로 승격됐다고 해서 이런 특징과 매력이 사라지는 건 아니리라.

    그렇기에 국보 승격과 함께 은진미륵에 쏟아진 엄청난 상찬이 조금은 당혹스럽다. 지난 시절 은진미륵을 “최악의 졸작”으로 깎아내렸던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일까. 재평가의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서일까. 어쨌든, 국보 승격 무렵 은진미륵에 대한 극찬은 다소 과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은진미륵과 함께해 온 일상의 애환

    국보나 명작은 꼭 아름다워야 할 필요도 없고, 이를 둘러싼 위대한 이야기가 필요하지도 않다. 아름다움과 위대함의 부담에서 벗어나도 좋다. 학술적인 해석과 의미 부여도 중요하겠지만, 수많은 중생은 크고 투박하고 못생기고 촌스러워서 은진미륵을 더 좋아한다. 그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기도 하다. 때로 무언가가 어긋나 균형을 잃고 뒤뚱거려야 하는 우리네 삶 말이다. 국보가 됐다고 해서 그 투박함과 못생겼음을 저만치 밀쳐낼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사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지난날 “최악의 졸작”으로 무시당했던 설움(?)도 보듬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 잠시 마르셀 뒤샹의 변기 작품 ‘샘(Fountain)’을 떠올려보자. 1917년 뒤샹이 ‘샘’을 내놓았을 때 세상은 그 변기를 미술로 취급하지 않았지만 1950년대 재평가를 통해 창의적 미술로 받아들이게 됐다. 지금은 현대미술의 문을 활짝 연 작품으로 그 위상이 부쩍 높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뒤샹의 변기가 아름답거나 세련된 것은 결코 아니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 작품이기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이다. 그것이 뒤샹의 변기가 존재하는 의미다.

    은진미륵도 그렇다. 국보가 됐다고 해서 지나치게 멋진 단어로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좋을 듯하다. 그저 토속적이고 투박하고 촌스러우면 된다. 그것이 바로 국보 은진미륵의 존재 의미다.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 산자락에 있는 마애이불입상(왼쪽). 마애이불 뒷모습 사진의 오른쪽 불상은 원형의 보개를 쓰고 있고, 왼쪽 불상은 사각형 보개를 쓰고 있다. [문화재청]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 산자락에 있는 마애이불입상(왼쪽). 마애이불 뒷모습 사진의 오른쪽 불상은 원형의 보개를 쓰고 있고, 왼쪽 불상은 사각형 보개를 쓰고 있다. [문화재청]

    경기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장지산 자락엔 고려 시대 마애불 한 쌍이 우뚝 솟아 있다. 보물로 지정된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불로 흔히 용미리 마애불이라고 한다. 오른쪽 불상은 원형의 보개를 쓰고 있고, 왼쪽의 불상은 사각형의 보개를 쓰고 있다. 높이는 각각 14.05m, 14.18m. 용미리 마애불도 큼지막한 데다 투박하고 편안하다.

    원형 보개의 마애불은 남자이고 사각형 보개의 마애불은 여자라는 이야기, 한발 더 나아가 이들이 부부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전설의 고향’ 같은 분위기가 더해져 사람들은 용미리 마애불을 좋아한다. 인간의 갈증과 욕망에 화답하고 치유해 주려면 적당히 크고 적당히 투박하고 그래서 적당히 편안한 것이 효과적이다. 고려 광종 때의 은진미륵도 마찬가지다. 불상을 만들 때는 고도의 정치적 의미가 개입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은 그 정치적 의도를 걷어내고 투박함과 편안함에 매료된 것이다.

    이 거대한 석불의 공식 이름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이렇게 공식 명칭으로 불러야 할 때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더욱 자주 은진미륵으로 불렀으면 좋겠다. 은진미륵이라는 명칭에 이 땅의 사람들과 호흡해 온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못생긴 대형 석불과 함께해 온 애환, 욕망, 갈등, 유희…. 이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고, 이보다 더한 위대함이 어디 있을까.


    이광표
    ● 1965년 충남 예산 출생
    ●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 고려대 대학원 문화유산학협동과정 졸업(박사)
    ● 前 동아일보 논설위원
    ● 저서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박물관’ ‘한국의 국보’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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