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호

‘포스트 정주영’, 현대 형제오너 3인의 생존게임 시나리오

  • 이병기·동아일보 경제부 기자

    입력2006-08-17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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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3월 현대증권 이익치(李益治) 회장 인사파동으로 촉발된 정몽구(鄭夢九) 현대자동차 회장과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형제간의 ‘왕자의 난’이 일단락됐다. 현대차와 기아차 등 자동차 소그룹이 현대그룹에서 분리되면서 두 형제가 자기 몫을 확실하게 챙겼기 때문에 더는 부딪칠 이유가 없다.

    정몽헌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엔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증권 등 23개사가 남았다. 현대그룹은 자산 28조5000억 원인 자동차 소그룹이 빠져 나감으로써 재계 서열 1위 자리를 삼성그룹에 내주고 2위로 내려앉게 됐다. 자동차 소그룹은 재계서열 5위. 2년 뒤 정몽준(鄭夢準) 의원의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이 독립하면 현대그룹에서 다시 18조 원의 자산이 빠져나가 재계서열 3위로 내려선다. 중공업 그룹은 재계서열 9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재계 1위 그룹 총수였던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이 세 아들에게 각각 재계 3, 5, 9위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 셈이니 ‘현대왕국’이 얼마나 거대한 영토를 거느리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정몽구 회장(MK)과 정몽헌 회장(MH)은 일단 집안싸움 불을 끄고 자신들이 맡은 그룹을 키우는 데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집안싸움에 몰두하기에는 ‘시장에서의 생존’이 너무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동물적 감각의 베팅?

    난 3월 현대증권 이익치(李益治) 회장 인사파동으로 촉발된 정몽구(鄭夢九) 현대자동차 회장과 정몽헌(鄭夢憲)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 형제간의 ‘왕자의 난’이 일단락됐다. 현대차와 기아차 등 자동차 소그룹이 현대그룹에서 분리되면서 두 형제가 자기 몫을 확실하게 챙겼기 때문에 더는 부딪칠 이유가 없다.



    정몽헌 회장이 이끄는 현대그룹엔 현대건설 현대전자 현대증권 등 23개사가 남았다. 현대그룹은 자산 28조5000억 원인 자동차 소그룹이 빠져 나감으로써 재계 서열 1위 자리를 삼성그룹에 내주고 2위로 내려앉게 됐다. 자동차 소그룹은 재계서열 5위. 2년 뒤 정몽준(鄭夢準) 의원의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이 독립하면 현대그룹에서 다시 18조 원의 자산이 빠져나가 재계서열 3위로 내려선다. 중공업 그룹은 재계서열 9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재계 1위 그룹 총수였던 정주영(鄭周永) 전 명예회장이 세 아들에게 각각 재계 3, 5, 9위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 셈이니 ‘현대왕국’이 얼마나 거대한 영토를 거느리고 있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정몽구 회장(MK)과 정몽헌 회장(MH)은 일단 집안싸움 불을 끄고 자신들이 맡은 그룹을 키우는 데 전념할 것으로 보인다. 집안싸움에 몰두하기에는 ‘시장에서의 생존’이 너무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현대건설의 실상은?

    MH의 현대그룹은 자신들이 낸 계열분리 및 자구안을 정부와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이 받아들임으로써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시간을 좀 벌어줄 수 있을 진 몰라도 몸 안의 악성종양을 완전히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못된다는 관측이다. 우선 현대건설은 부채를 연말까지 4조 원으로 줄이기로 약속했지만, 건설업 전체가 심각한 불황을 겪고 있는 마당이라 이행이 쉽지 않을 전망. 일각에선 “현대건설은 가만히 놔두면 숨이 끊어질 기업”이라며 청산을 주장할 정도다.

    기업도 가계와 마찬가지로 수입이 최소한 부채 이자보다는 많아야 한다. 돈을 벌어 이자를 갚으면서 원금도 서서히 갚아 나가야 한다. 그런데 현대건설은 이 두 가지 모두가 의심스럽다는 게 일부 애널리스트들의 분석이다. 8억5000만 달러에 이르는 이라크 공사 미수금을 회수할 수 있을 지도 의심스럽고, 대북사업의 수익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표시한다.

    건설업계의 불황도 좀체 걷힐 것 같지 않다. 대규모 국책사업이 줄고 건설업체 간의 담합이 어려워지면서 공사낙찰가가 예정가의 60%대로 떨어졌다. 담합이 가능하던 시절에는 낙찰가가 공사 예정가의 90%를 웃돌아 수익성이 좋았다.

    이에 대해 현대건설측은 “숫자에만 밝은 애널리스트들이 기업을 회계적으로만 이해하려 한다”며 “건설업의 특성과 현대건설이라는 기업에 대해 제대로 안다면 그런 분석이 나올 수는 없을 것”이라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현대건설 IR담당 윤웅환 과장의 말.

    “올해 영업이익이 7800억 원에 이를 전망이다. 이 돈으로 부채 이자와 원금을 계속 갚아 나갈 수 있다. 또한 현대건설은 해외매출 비중이 34%나 되기 때문에 국내 시장의 불황을 버텨낼 수 있다. 외환위기를 전후해 수주했던 악성 공사도 지난 상반기중에 모두 끝났기 때문에 매달 1억 달러 이상의 현금이 해외에서 들어오고 있다.”

    현대측에 따르면 구체적인 계약내용을 밝힐 수는 없지만, 외국의 자산가에게 이라크 공사 미수금 어음을 할인, 곧 수천억 원이 들어올 예정이라고 한다. 남북경협사업도 개성공단이 8월20일경 착공되는 등 빠르게 전개되고 있어 건설시장의 불경기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앞으로 한두 달이 현대건설에 고비가 될 것으로 본다. 자구안을 실천하고, 자구안대로 회사가 운영된다면 생존할 수 있지만, 자구안을 실천하지 않거나 실천하고 싶어도 주변 환경 때문에 그럴 수 없다면 현대건설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리라는 것.

    MH에겐 현대전자와 현대투신도 골칫거리다. 현대전자의 부채는 8조 원이 넘는다. 한 해 이자로만 8000억 원을 내줘야 한다. 그나마 지금은 반도체가 호황기라 이만한 부채를 감당할 수 있지만, 행여 반도체 경기가 흔들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더욱이 반도체업은 매년 수조 원의 투자가 필요한 대규모 장치산업. 대규모 투자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동시에 부채까지 줄여야 하니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셈이다.

    부실투성이 현대투신도 투신권에 돈이 들어오고 증시가 활황을 보이는 선순환에 접어들어야 부실규모 축소를 기대할 수 있다.

    운명적 대북사업

    MH는 외국인 투자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의 수익모델을 빨리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도 안고 있다. 국내에서야 대북사업이 정치 논리와 감정적 차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그저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뿐이다. 현대의 대북사업을 계열사 돈 끌어들여 밑빠진 독에 물붓는 짓쯤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현대는 금강산 사업의 성공여부가 일본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데 달려 있다고 보고 이 부분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현대는 최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MH에게 ▲장전항 위락단지 및 골프장, 호텔 건설 ▲외국인에게 금강산 개방 ▲항로 단축 등의 선물을 준 데 대해 매우 고무된 상태. 현대는 8월말 일본의 관광전문가와 투자자들을 대동, 금강산을 방문할 예정이다. 일본측이 이번 방문을 통해 금강산 관광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수 있으리라는 것.

    사실 현대는 대북사업이 그저 ‘밑지지 않는 사업’ 정도가 아니라 대박을 터트리는 사업임을 증명해야 한다. 삼성 LG SK 등은 21세기 유망사업으로 정보통신과 생명공학을 선정, 막대한 투자를 거듭하고 있다. 현대는 이런 흐름에 참여하지 않고 대신 대북사업을 선택, 수천억 원을 쏟아부었다. 따라서 대북사업이라는 ‘도박’은 그룹의 명운을 좌우하게 될 지도 모른다.

    정몽구 회장은 동생보다는 한결 사정이 낫지만, 그 역시 글로벌 시장에서의 생존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제를 떠안고 있다. 르노 포드 등 세계 유수의 자동차 메이커들이 한국시장에 진출함에 따라 현대차는 더 이상 ‘땅짚고 헤엄치기’식 장사를 할 수 없게 됐다. 자동차 전문가들은 외국업체의 국내시장 점유율이 3년 안에 30%를 넘어설 것으로 내다본다. 현대가 현재 확보하고 있는 시장점유율의 50% 이상을 뺏길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국내시장에서 일부 시장을 내주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그 손실분은 해외부문에서 메꿔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 만만치가 않다. 포드 GM 다임러크라이슬러 도요타 르노 등의 메이저들이 공급초과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한편 자동차 기술과 정보통신 기술을 결합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자동차 개발에 힘을 쏟고 있다. 현대차가 이런 흐름을 잘 따라가고 있는지는 아직 미지수다.

    더욱이 MK는 “경영에서 퇴진하고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고 스스로 전문경영인임을 선언한 바 있다. 따라서 경영을 잘 못해 회사가 어려워지면 당장 시장으로부터 퇴진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최근 현대차와 기아차 판매가 호조를 보이고 있지만, 이는 외환위기 이후 크게 위축된 수요가 살아나는 ‘특수상황’ 때문이며, EF쏘나타까지는 정세영(鄭世永) 전회장의 작품이기 때문에 “MK에 대한 능력 평가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보는 업계 관계자들도 많다.

    현재 밖으로 드러난 정 전 명예회장 재산은 현대차 지분 6.1%를 처분하고 마련한 2000억 원 정도의 현찰과 현대차 지분 3%, 현대건설 현대중공업 현대상선 지분 각 0.5%씩과 약간의 부동산이 전부. 시가로는 2500억 원쯤 된다.

    김재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정 전 명예회장은 이번에 현대차 주식을 판 돈으로 우선 현대건설의 회사채나 기업어음(CP)을 매입,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를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준 뒤 현대건설이 정상을 되찾으면 이 돈으로 어린이재단 등 공익재단을 설립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왕회장이 사망하더라도 재산을 둘러싼 분란이 일어날 가능성은 없다는 우회적인 설명.

    최근에는 MK, MH 두 형제가 화해할 것이라는 기류도 감지된다. 외환은행 김경림 행장은 사석에서 기자에게 “이제 두 형제가 이끄는 회사가 법적으로 분리된 만큼 싸울 일도 없으니 현대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이 화해해야 한다”며 “정 안되면 내가 나서서라도 형제 화해를 주선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김행장은 또 “양측의 가신그룹이 사익을 위해 두 형제의 불화와 갈등을 부추긴 측면이 있다”며 “조만간 가신들이 물러나면 형제 화해도 쉬워질 것”이라고 했다.

    현대의 한 핵심 관계자도 “유교 질서를 중시하는 가풍 때문에라도 머지않아 두 형제가 화해할 것이며 외부 인사들이 두 형제에게 계속 충고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같은 낙관론을 일축하는 사람들도 있다. 왕회장이 현대 사태가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한 상황에 사망한다면 복잡한 문제들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것. 무엇보다 정 전 명예회장이 유언장을 작성해놓지 않은데다 그의 재산이 현대건설 회사채에 묶여 있는 상태에서 사망하면 2000억 원의 주인이 누구냐를 놓고 형제들 간에 분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정 전 명예회장이 유언장을 써놓았는 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보가 없다. 한때 일부 언론에서 ‘가회동 자택에 유언장을 넣어둔 금고가 있다’고 보도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현대 관계자는 “가회동 자택에는 금고가 없다”며 “정 전 명예회장이 유언장을 작성했는지의 여부는 일부 가신들과 변호사만 아는 사실이다”고 했다.

    현대자동차의 한 관계자는 “사실 왕회장이 유언장을 작성했는지는 자식들도 잘 모르고 있다”며 “그렇다고 누가 감히 이런 얘기를 입밖에 내겠느냐”고 반문했다. 건강 얘기도 못 꺼내는 분위기에 어떻게 유언장 얘기를 꺼낼 수 있겠느냐는 것. 정씨 일가 사정에 밝은 현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의사들은 노인이 병원에 실려왔을 때 자식들의 태도를 보면 노인이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줬는지 아직 안 물려줬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노인에게서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들은 하루 이틀 병문안을 오다가 걸음을 끊는다. 그러나 재산을 물려주지 않은 노인의 자식들은 변함없이 병문안을 온다. 왕회장도 인간이다. 어쩌면 이기적인 속성이 남보다도 몇배나 강했기 때문에 기업인으로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말년에도 사실상의 장남인 몽구 회장이 못 미덥다고 경영일선에서 퇴진시키려 했을 정도다. 이런 왕회장이 유언장을 만들어 놓았을 리가 없다.”

    현대에서는 왕회장의 건강문제는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금기이고, 그의 건강상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도 극소수다. 왕회장의 건강상태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몇몇 가족과 청운동 자택에 머무는 간호사와 비서, 평소 청운동 자택을 드나드는 김윤규(金潤圭) 현대건설 사장, 김재수(金在洙) 구조조정본부장 정도.

    현대측은 정 전 명예회장의 건강에 대해 “방북 이후 식욕을 잃고 잠시 기력이 떨어졌지만 건강에는 크게 이상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의 건강상태에 대해 설명하는 현대 관계자들도 그저 위에서 내려오는 ‘모범답안’을 말할 뿐이다.

    한편 관가와 재계에서는 ‘왕회장 위중설’이 파다하다. 대북사업이 평생의 마지막 사업이라며 애정을 품고 있는 정 전 명예회장이 8월 방북계획을 취소했고, 9일 동안이나 병원에 입원하는 등 심상치 않은 징후들이 드러났기 때문. 그의 건강에 대해서는 재계뿐이 아니라 청와대와 금융감독원, 정치권 등에서도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김정일 위원장도 왕회장의 건강이 걱정돼 산삼을 보내왔다고 한다.

    재계에서는 최근 국정원이 정 전 명예회장의 건강에 대해 심층적으로 조사, 고위층에 보고서를 올렸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가 현대의 구조조정을 압박했던 것도 만일 왕회장이 구조조정이 이뤄지기 전에 사망할 경우 현대의 내분이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빨려들 것이고, 그런 상황에선 구조조정이 요원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청운동 자택을 드나드는 한 관계자는 “어른의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소리나 위독하다는 소리 모두 과장된 것”이라며 “‘가족들이 염려할 만큼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밝혔다. 왕회장은 지난해 말부터 한 달 정도를 주기로 건강이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고 있는데, 특히 지난 7월 방북 이후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는 것. 3월 이익치 회장의 인사문제로 왕회장이 내용이 정반대인 두 서류에 모두 사인을 하는 등 판단력에 문제가 있음을 드러낸 것은 건강 사이클이 하강기에 있을 때였으며, 5월말 3부자 동시 퇴진을 했을 때는 사이클이 좋은 때였다는 것.

    왕회장은 방북 이후 식욕을 잃어 한달 이상을 영양제로 버텼다. 식사를 해도 초밥 한 개나 죽 한 숟가락을 드는 게 전부였다고 한다. 지난해 말부터는 시력이 나빠져 신문을 읽지 못하고 TV 시청을 즐겼다는 것. TV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들었는데, 건강이 더 나빠진 뒤에는 TV도 보지 않고 방에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측근들이 함께 식사하러 갔다가 왕회장이 누워 있는 바람에 인사도 못하고 돌아간 일도 많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볼 때 정 전 명예회장의 위독설은 다소 과장된 것이라 해도, 사실상 현대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뗄 수밖에 없는 건강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유언장 논란

    정반대의 예측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 다른 현대 관계자의 말이다.

    “말년의 왕회장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인생을 명예롭게 마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미 유언장을 작성, 대부분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거나 공익사업에 쓰도록 유언장을 작성해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김재수 본부장이 공익사업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 자체가 왕회장이 김본부장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뒷받침하듯 지난 5월 정 전 명예회장이 몇몇 측근들과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 유언장을 작성했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현대자동차측에서는 유언장 이야기가 나오면 힘을 잃는다. 정 전 명예회장의 성격상 자신의 명령을 거역한 몽구 회장에게 유리하도록 유언장을 작성했을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

    왕회장이 만약 유언장을 만들어두지 않은 상태에서 사망한다면 껄끄러운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2000억 원이라는 돈은 보통사람들에게 천문학적으로 큰 액수지만, 재벌들에게도 큰 돈이다. 특히 현대건설과 현대투신의 부실문제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면 현대로선 결코 양보하기 힘든 돈이다. 더욱이 현대자동차마저 어려움을 겪게 된다면 일은 더욱 꼬일 수 있다.

    일부에서는 “두 형제의 불화가 계속되고 가신들의 행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유언장이 있다손 치더라도 유언장의 진위여부를 놓고 또 한 차례 갈등이 빚어질 수 있다”는 말까지 들려온다. 형제간 갈등이 한창 고조되던 때인 지난 3월 현대차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정 전 명예회장의 인감을 가신들이 갖고 있다는 얘기가 있다”며 “몇몇 가신들이 건강이 좋지 않은 왕회장을 농단하고 있다”고 열을 냈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니더라도 현대차측의 이런 시각에 변화가 없다면 유언장을 둘러싼 또 한번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현대중공업 계열분리 문제를 놓고서도 마찰이 일어날 수 있다. 현대는 자동차 계열분리를 발표하면서 당초 2003년으로 예정됐던 현대중공업 계열분리 시한을 2002년 6월로 앞당긴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중공업측은 “발표 전에는 2001년 6월로 앞당긴다고 했다가 1년을 늦췄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가 주위의 눈총을 의식, 목소리를 낮췄다.

    현대그룹 관계자들이 현대중공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한 핵심 관계자가 사견임을 전제로 한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보면 짐작할 수 있다.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 아닌가. 한국 현실에서 현대중공업 오너가 대통령을 꿈꾸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국민들이 엄청난 재산가를 대통령으로 뽑아줄리 없다. 때문에 정의원은 중공업을 몽헌 회장에게 맡기고, 몽헌 회장은 정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도록 물심 양면 지원해주는 것으로 역할분담을 하는 것이 낫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령 정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돼도 문제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어떻게 현대중공업을 감독할 것인가.”

    분통 터진 중공업

    현대그룹 사정을 들여다봐도 중공업 계열분리는 만만치 않은 문제다. 현대건설이 해외에서 공사를 수주하거나 다른 계열사가 해외계약을 맺을 때 현지 금융기관들은 확실하게 현금창출을 하는 현대중공업 보증을 요구한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전자와의 2억2000만 달러의 대지급금 소송에서도 드러났듯 중공업은 현대그룹의 든든한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중공업을 선뜻 분리하고 싶을 리 없다.

    외국인들은 현대중공업이 그룹 계열사의 자금줄 역할까지 하고 있다고 의심한다. 그래서 외국인의 현대중공업 주식보유율이 5% 이하를 맴돌 정도다. 장부상 드러난 ‘매출 6조 원, 순이익 3000억 원’이라는 숫자도 의심한다. 실제로는 순이익이 훨씬 더 많은데도 중공업측이 이익을 빼돌려 현대 계열사를 돕는 데 쓰고 있다는 것.

    이에 대해 현대중공업측은 “사외이사들이 활동하고 금융당국이 감시하고 있는데 어떻게 계열사를 지원하겠느냐”며 “다만 중공업 현금사정이 좋아 그룹 차원의 대북사업에 출자하고 있을 뿐”이라는 입장이다.

    중공업이 그룹측의 계열분리 약속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데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 지난 6월 정 전 명예회장의 지분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MH 계열인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가 된 것. 이에 따라 중공업의 지분구조는 현대상선(12.46%)-정몽준 의원(8.06%)-현대건설(8.06)-정주영(0.5%)의 순이 되고 말았다. 지분구조 변동 이전에는 정 전 명예회장과 정의원이 최대주주였다.

    이런 지분구조에서는 현대측이 마음만 먹으면 상선과 건설이 가진 지분을 이용해 중공업 경영진도 교체할 수 있고, 계열에서 분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때문에 MK-MH 간에 빚어진 갈등이 MH와 정의원 사이에서도 재연될 가능성이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정의원이 지분구조 변동 아이디어가 이익치 회장에게서 나온 것을 알고 이회장 퇴진을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3부자 퇴진 후 정의원이 청운동 자택을 자주 찾아간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이와 관련해 현대의 한 관계자는 “정의원은 몽구 회장보다는 몽헌 회장과 훨씬 가깝다. 최근 정의원이 몽구 회장과 가까운 것처럼 보인 것은 두 사람이 쏜 ‘탄착점’이 일치했기 때문”이라며 “정의원과 몽헌 회장은 곧 예전 관계를 회복할 것이다. 몽헌 회장은 술수를 꾸미거나 말을 뒤집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중공업 계열분리를 약속했으면 지킨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이회장이 제거되고 정회장이 약속을 지키면 두 사람의 관계가 복원된다는 뜻이지만, 만약 조건이 맞지 않는다면 악화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한편 이익치 회장의 한 측근은 “이회장이 마치 그룹 모든 일에 관여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며 “중공업 계열분리 문제는 구조조정본부에서 알아서 할 일이다”고 해명했다.

    중공업측도 “정의원은 개인 대주주일 뿐이고 현대중공업은 전문경영인이 운영하는 회사”라며 “중공업 일을 모두 정의원과 연결해 해석하는 것은 음모론이다”고 발을 뺐다. 될 수 있으면 갈등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발언들이다.

    비록 법적으로는 현대상선이 현대중공업의 최대주주이지만 이미 만천하에 계열분리를 선언했고 채권은행과도 약정을 맺은 만큼 그룹측이 중공업 계열분리 약속을 깨기는 어려워 보인다. 만일 현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정부와 시장이 이를 방치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그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발 우리를 이대로 놔뒀으면 좋겠다. 최근 현대에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번 마음먹으면 시원하게 정리하는 게 또 현대다. 조금만 지켜보면 알 것이다. 자신들의 치부가 사회문제화하는 것을 꺼리는 다른 재벌들이 현대문제를 자꾸 확대 재생산하는 기류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제 현대는 감정에 치우치고 음모론을 좋아하는 여론이나, 명분만 따지는 정부 심판을 받지 않고 오직 시장 심판만 받으면 된다. 현대가 시장을 거스르면 망할 것이요, 시장을 따르면 다시 도약기를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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