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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색깔논쟁으로는 경제개혁 안된다

  • 김윤자 < 한신대학교 교수·국제경제학 전공 >

색깔논쟁으로는 경제개혁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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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부는 처음부터 IMF구제금융의 위기에 집권한 위기관리정권이었으므로 적절한 국가개입 아래 시장원리를 배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기관리를 위해 개입하되 민주적 절차를 존중해 효율성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야당을 포괄하는 범국가적 위기관리시스템을 가동하지 못했으며 개혁에 대한 범국민적 지지기반이 집권 초반에 확충되지 못했다. 이는 내내 정책방향의 혼선과 지지기반의 혼선으로 나타났다.

특히 재벌집단과 IMF로 상징되는 국내외 자본의 정치경제적·이데올로기적 압박 에 정부는 자민련과의 공조정권이라는 속성도 속성이려니와, 재벌을 비롯한 수구 기득권집단과 어정쩡하게 타협하고, 노동계와 긴장을 고조하는 등 국민적 지지기반 확충에 소극적이었다. 구조조정의 논리로 점차 시장원리를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기득권집단의 공격에 스스로 노출한 측면이 있다. 위기관리와 시스템개혁을 위한 국가개입에 대해 기득권집단은 종종 ‘시장원리를 부정한다’는 논변으로 자신들의 저항을 포장했기 때문이다.

외환위기를 배경으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특히 신자유주의 논리와 관련해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이는 종종 개혁의 일관성 결여로 나타났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이해는 논자마다 조금씩 엇갈리지만 현상적으로는 1980년대 이후 자본운동의 국제화가 용이하게 금융시장 개방, 국가규제의 완화, 시장경쟁의 복원을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이미 자본주의 선진 각국에서 독점이 고도화하고 세계경제가 국제 독점대자본의 재생산에 좌우되는 시점에서 자유방임적 시장원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내포한다. 다만 신자유주의 정책프로젝트의 진행과정과 효과는 각국 경제의 역사적·구조적 특징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사회 전분야의 족벌체제

역사적으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에 근대화를 경험함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그와 불가분인 시민사회의 성숙이 오랫동안 지체됐다. 그 빈 공간은 민간 부르주아지를 대신해 자본축적을 주도한 국가가 채웠는데, 이때의 국가권력은 급속한 자본축적 전략에 맞춰 신속한 노동력 동원과 병영적 노동통제가 용이하도록 상당 기간 군부가 주도했다. 다른 한편 노동자들의 조직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는 1987년 이전까지 노동문제를 비롯한 사회문제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학생운동을 비롯해 급진적 지식인 운동세력이 주도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과정에 여타 집단의 사회적 조직화가 미성숙할 때 상대적으로 사회적 동원이 용이한 청년집단·지식인집단이 사회적 발언을 주도하는 예는 아직도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볼 수 있다.



1980년대를 경과하면서 최신의 온갖 진보적인 담론이 난무하는 데도 한국사회는 여전히 강고한 전근대성에 시달리고 있다. 아래로부터의 부르주아적 혁명, 곧 시민사회 형성을 진행시킨 경험이 일천한 한국사회는 근대적 개인의 합리성, 개체적 자아의 담론 등을 충분히 경유하지 못하고 전근대적 공동체집단의 ‘우리’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연대로 비약해온 면이 있다.

이는 보편적 진보 혹은 일반 민주주의적 가치인 다양성과 개(인)성의 발전, 절차의 투명성 등 비물질적 사회인프라 구축에 있어 한국사회를 매우 취약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진보진영’ 내부의 문화조차 때로 생경한 공문구 속에 ‘봉건 사회주의’(feudal socialism)의 희화로 나타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흔히 말하는 가부장주의의 잔재뿐 아니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더 나은 세상을 이야기한다면서 다양성과 개(인)성의 존중 혹은 존재 일반의 존엄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는 선정적 운동방식을 동원하는 것이 그 한 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관료적 개입의 축소와 투명하고 다원적인 경쟁시스템의 정착’이라는 요구는 한국사회의 전근대성, 특히 전근대적 족벌세습경영이라는 특징을 갖는 재벌체제에 대해 강력한 개혁동력을 내포한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총수 1인의 족벌적 세습경영’은 비단 재벌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른바 국가의 백년대계가 달려 있는 교육현장, 그것도 전체 대학의 80%에 이르는 사립대학 재단이 족벌적 세습경영으로 물의를 빚는 정도다.

제4의 권부이며 사회의 공기라는 언론사가 족벌경영과 사주의 편집권 장악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도 그 좋은 예다. 무엇보다 강령이 아니라 보스와 계보를 따라 분파가 형성되는 정치권의 행태, ‘교단정치’라는 말이 횡행하는 종교계의 구습, 연고주의가 만연한 학계의 구태 등 우리 사회는 곳곳에서 시장원리의 부르주아적 합리성에도 훨씬 못 미치는 전근대성에 신음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이러한 행태를 척결하는 데는 혁명에 버금가는 역사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가 하면, 한국의 기업은 그간의 정경유착을 통해 이미 조기독점화해 국민경제에 끼친 영향이 막대하다. 따라서 국민경제 발전에 합치하도록 이들 독점 대기업을 적정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문제는 정권 차원의 정경유착적 관리가 아니라 민주적이고 효율적인 관리가 되도록 사회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경제는 이미 시장원리만으로는 작동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한 셈이다.

철저하지 못한 정치개혁

서구의 신자유주의가 상대적으로 복지 과잉과 그에 따른 노동기율의 이완 등을 논거로 들면서 등장한 데 반해 한국은 여전히 초보적인 사회안전망도 부실하다. 노사관계도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전근대적 관행이 합리적 관계 정립을 가로막아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따라서 기업과 사회 각 부문에서 절차적 투명성과 운영의 합리성이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요구하는 한국사회의 담론은 서구의 신자유주의와 다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1994년 멕시코의 외환위기, 1997년 동남아 금융위기,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이어지는 국제금융불안 속에서 한국경제는 상대적으로 열악한 위치에 있다. 따라서 구조조정과 경제개혁의 관건은 국제 독점대자본의 일방적인 이윤논리에 희생되지 않도록 나름의 자율적인 국민경제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국민경제시스템의 확충은 기존 구조의 일정한 혁파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관건은 결국 이해관계의 조정, 그중에서도 특히 기득권의 구조조정이다.

구체적으로 이것은 경제적 의사결정구조의 개혁을 요구하고 따라서 그 핵심은 재벌체제로 상징되는 기존의 비효율적 경제구조를 얼마만큼 효율적 구조로 개편하느냐를 의미한다. 이 때문에 한국경제의 효율성은 곧 민주성을 전제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재벌문제’는 단순히 ‘대기업집단’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논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나, ‘범위의 경제(economies of scope)’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경제의 독특한 유착구조, 금융과 산업의 특수한 지배구조, 나아가 언론 문화 교육 등에 걸친 한국사회 지배이데올로기의 재생산구조 전반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경제의 효율적 재편을 위해서는 재벌체제 등 한국사회의 전근대성을 극복하려는 시민사회적 요구와 함께 이를 전체 사회경제의 거시적 운영원리와 조화시키는 민주적 구조개혁이 요구된다.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현실인식이 불명료한데다 자체 정치개혁에 철저하지 못함으로써 때로는 시장을 원용하고 때로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원용하면서 다분히 파편적으로 정책을 운용했기 때문에 개혁의 지속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뒤에서 보듯이 지식인 진영을 포함해 노동계와 시민·사회운동 진영 역시 개혁이념 혹은 개혁방향에 대한 공감대를 조성하지 못했으며 사안별로 파편적인 연대 혹은 각개약진에 그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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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Opinion Leader Magaz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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