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토종 골프클럽으로 세계정복중”

(주)랭스필드 양정무 사장

  • 곽희자 < 자유기고가 >

    입력2005-04-04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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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입브랜드가 장악한 국내 골프클럽 시장에서 10년째 토종 브랜드 시장 확보를 위해 필사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랭스필드 양정무(梁正武·41) 사장. 그는 이런 자신을 “일에 미친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필사의 노력 덕에 국산채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국내 골퍼들 사이에 최근 수입브랜드 대신 국산채를 쥐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국내 골프시장에도 영향을 끼쳐 1990년대 초 0%에 가깝던 국산 골프클럽의 시장점유율이 지금은 15%대를 기록하고 있다.

    15%는 수치상으로는 미미하지만,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세계 유명 브랜드들의 높은 장벽을 넘어 국산품을 정착시키고 수입대체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 공로가 인정돼 지난 상공인의 날 양정무 사장은 스포츠용구업계 최초로 대통령표창을 받고, 1월의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랭스필드는 골프클럽 단일 품목으로 연간 150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매출액 가운데 85%는 내수에서, 15%는 수출에서 벌어들인다. 일본, 중국, 동남아 등 세계 30여 개국에 랭스필드 상표로 수출을 하고 있다.

    회사가 어려울 때면 OEM(주문자 상표 부착방식) 생산으로 쉽게 벗어날 수 있지만 그는 자사브랜드 생산을 고집했다. 그의 이런 오기와 자존심은 10년 세월이 지난 지금 빛을 발하고 있다.

    최근 ‘골프매거진’이 네티즌 골퍼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의 54.5%가 국산 클럽 중 가장 갖고 싶은 것으로 랭스필드를 꼽았다.



    이렇게 랭스필드가 수입브랜드의 높은 장벽을 뛰어넘고 국내 골프클럽 시장에 정착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차별화한 마케팅 전략과 프로선수들과 유관대회를 통한 브랜드 알리기에 성공했기 때문. 여기에 국내 골프 인구의 급증도 한 요인이 됐다.

    양사장은 먼저 기존 제품들에 맞서 차별화 전략을 구사했다. 외제가 한국인 체형에 맞지 않다고 판단, 한국인 체형에 맞는 골프클럽을 만든 것. 직접 사용해 본 사람의 구전만큼 확실한 광고가 없다는 생각에 개인에게 맞는 맞춤식 클럽을 제작해 주었다. 여기에 가격도 수입품의 절반 정도인 중가로 정했다. 가격이 너무 싸면 제품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진다고 생각해 저가 책정은 처음부터 배제했다. 이 전략은 적중했다.

    처음엔 거저 줘도 사용 않겠다던 고객들이 한번 사용해 보곤 몸에 잘 맞는다며 구입하기 시작했다.

    펄신, 강수연을 내세운 마케팅

    프로선수들을 이용해 대대적인 브랜드 광고도 했다. 프로골퍼 펄신과 강수연의 스폰서로 나서 펄신을 통해서는 해외에, 강수연을 통해서는 국내에 랭스필드를 알렸다. 이렇게 프로선수를 이용한 스포츠마케팅이 성공하면서 브랜드에 대한 인지도가 크게 높아졌다.

    랭스필드는 1999년부터 3년째 한국프로골프(KPGA)선수권대회를 주최하고 있다. 양사장은 “중소기업으로서 한 차례에 6억∼7억원이 소요되는 경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이 경기를 끌어가는 이유는 “단순히 랭스필드의 이미지 광고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국내 골프선수들에게 기량을 닦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줌으로써 장차 세계무대에 나가 나라를 빛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이런 전략적인 요인과 함께 랭스필드가 국내시장에 자리잡은 결정적 계기는 국내 골프인구의 급증이다. 대한골프협회와 관련 단체들이 파악한 우리나라 골프 인구는 약 400만명. IMF 이후 3년 사이 100만명이 늘어난 것이다. 과거 일부 특권층이나 치던 골프가 대중화하고 골퍼들 가운데 무조건 비싼 외제클럽만 고집하지 않고 실리를 추구하는 이들이 생겨나면서 랭스필드의 판매고도 늘어났다.

    사업 초기 한 달 실적에 맞먹는 매출을 지금은 하루에 올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차별된 마케팅 전략과 시류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려운 현실을 딛고 성공하다 보니 랭스필드 뒤엔 항상 부도설이 따라다녔다.

    “10년째 부도설에 휘말리고 있어요. 한 달에 4억∼5억원의 어음을 막고 있지만 월매출액이 10억원이 넘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도 위기에 놓인 회사가 어떻게 한 차례에 6억∼7억원씩 드는 대회를 끌어가겠습니까? 모두 수입브랜드들의 음해입니다.”

    그는 기업의 성장을 위해 항상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자금난은 불가피하지만 지금 랭스필드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현재 국내 골프용품 시장 규모는 약 1조20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이중 골프클럽이 4000억원, 골프공 장갑 골프백 등이 1000억원, 골프의류가 7000억원으로 미국, 일본에 이어 세계 3대 시장으로 꼽힌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중저가 보다 고가제품이 많이 팔려 부가가치 측면에선 세계 최고시장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런 황금어장이다 보니 국내에 들어온 수입 브랜드만 130여 개가 넘는다. 경기는 불황인데도 골프 인구는 꾸준히 늘어 국내 골프산업은 더욱 활기를 띨 것으로 보인다.

    흔히 사업가는 타고난다고 말한다. 이는 사업을 하려면 어느 정도 기질과 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점에서 양정무 사장은 타고난 사업꾼이다.

    전북 순창의 산골마을에서 3남1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전주 영생고를 졸업하고 1979년 군산수산대학에 입학한 그는 학생운동을 하다 2학년 때 자의반 타의반으로 자퇴를 한다. 2년 후 전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하지만, 이미 사회물이 든 터라 공부보다는 돈 버는 데 더 관심이 많았다.

    선배와 친구 한 명과 ‘대양신용주식회사’라는 신용카드 DC회사를 만들어 선배는 사장, 친구는 기획실장, 자신은 영업 부장을 맡아 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익힌 영업 실력은 대학을 졸업하고 1988년 세계일보 광고국에 입사하면서 제대로 발휘되었다.

    그는 광고국에서 광고를 가장 많이 유치한 영업맨으로 특별수당에 차까지 지원받았다. 그 무렵 그는 접대를 위해 골프의 필요성을 느껴 골프용품 매장에 골프채를 사러 갔다.

    “골프채를 사겠다니까 외제만 보여줘요. 그래서 국산채는 없냐고 하니까 ‘무슨 국산채를 찾느냐’며 무시하는 눈빛으로 봐요. 너무 기가 막혀 직원을 불러 세워 한마디 해주고 나오면서 다짐했어요. 내가 국산채를 만든다, 미사일도 발사하고 탱크도 만드는 나라에서 그깟 골프채 하나 못 만들겠냐고.”

    오기에서 비롯된 순간적인 다짐은 1년 뒤 현실로 이루어졌다. 매장을 다녀온 후 양사장은 골프클럽 사업이 가능성이 있는지 진지하게 검토했다. 당시 국내엔 삼성을 비롯 금호, 코오롱, 반도 등 5∼6개 업체가 클럽을 만들고 있었으나 수입품에 밀려 거의 판매되지 않았다. 대신 많은 중소기업들이 해외 유명브랜드 제품을 OEM방식으로 수출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양사장은 제품 생산은 이들 업체에 외주를 주면 문제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시장성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어렵지만 시간이 지나면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건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스포츠는 국민소득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2000∼3000달러일 때는 주로 농구나 배구를 하고 4000∼5000달러가 되면 좀더 넓은 공간을 사용하는 축구를 합니다. 그리고 5000달러가 넘어서면 기구를 이용한 야구나 볼링을 하고, 1만달러 정도가 되면 스키를, 1만 5000달러가 넘으면 골프를 합니다. 당시 국민소득 1만5000달러가 넘은 나라에선 모두 골프가 대중화돼 있었습니다. 이걸 보고 우리나라도 머지 않아 1만5000달러 시대에 돌입할 거고 그러면 골프가 대중화될 거라고 확신했어요.”

    국민소득 6000달러 시대에 그는 1만5000달러 시대가 반드시 올 거라고 생각하고 골프사업은 하면 된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사업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일거리를 찾았다.

    그는 제조업은 돈이 있어야 하지만 출판과 무역업은 큰돈이 없어도 가능하다고 생각해 출판사와 무역업을 하기로 했다. 양사장은 당시 자격증 바람이 부는 걸 보고 국가자격증 시험 책자를 출판해 팔기로 했다. 또 도자기를 만들어 일본에 수출키로 했다. 출판사를 차리기 위해 회사에서 30만원짜리 가계수표 두 장을 받아 선배 사무실 한켠에 전화 두 대와 직원 두 명을 채용해 한국고시출판사를 차렸다. 처음엔 책을 떼어다 판매했다. 광고가 나가면서 책은 날개돋친 듯 팔려 나갔다. 승산이 있다고 판단한 그는 직접 책을 출판했다. 책이 출판되면서 수익은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무역업은 국내 수출업자간에 가격경쟁이 심해 타산이 맞지 않아 6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하지만 출판사는 잘 되었다. 여기서 수익이 생겨나면서 양사장은 본격적으로 골프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1991년 세계일보를 그만뒀다.

    1992년 7월 자본금 6억원으로 랭스필드(Lance Field·초원에서 창을 던지듯 홀을 향해 공을 쏜다는 뜻)를 설립했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누가 국산채 쓰나”

    경기도 시흥에 60평짜리 공장을 얻어 직원 7명을 데리고 조립부터 시작했다. 우드 헤드는 직접 만들고 나머지 아이언과 샤프트는 외주를 주었다. 판로도 없이 물건부터 만든 것이다. 양사장은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어떻게든 팔릴 것이라 생각하고 만든 제품을 직접 들고 골프 매장들을 찾아다녔다.

    “매장에 들어서면 ‘이 사람아, 누가 국산을 쓴다고 국산채를 가지고 오나’하고 반말부터 해요. 그리곤 거들떠보지도 않아요. 그래서 처음엔 골프채 얘기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매장 유리창도 닦아주고 다른 얘기만 나누다 돌아왔어요. 다시 며칠 후 찾아가 눈도장을 찍었어요. 이렇게 계속 찾아가니까 국산채말고 외제채 가져오면 팔아주겠다고 해요. 그래도 10여 차례 우리 채를 들고 가니까 물건 놓고 가라고 해요. 그 다음에 찾아가면 물건이 진열돼 있지 않았어요. 물건 어딨냐고 하면 그때서야 미안해하며 겨우 한쪽에 진열을 해주는 거예요.”

    어렵사리 한두 군데 진열이 돼도 거의 판매되지 않았다. 그래서 직판장을 만들기로 했다. 매장은 샐러리맨이 많은 강북에 열었다. 샐러리맨이라면 제품이 좋고 값이 싸면 살 거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매장을 찾은 손님들은 외제가 없다고 하면 그냥 발길을 돌렸다.

    “손님들이 왔다가 그냥 나가버리니까 직원들이 외제를 갖다 놓자고 해요. 그래서 우리 제품을 선전하지 못하고 손님 구미에 맞춰 외제품만 팔면 평생 대리점 신세밖에 되지 않는다며 국산 파는 것이 애국하는 것이니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당당하게 팔라고 했어요.”

    제품이 팔리지 않아 회사 운영은 점점 어려워졌다. 처음 1년간은 출판사에서 생긴 이익금으로 충당했지만 1993년 출판사가 문을 닫으면서는 직원에게 월급도 주지 못할 형편이 되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 1993년 ‘공직자 골프 금지령’이 내려 그나마 안 팔리던 골프채는 더 더욱 팔리지 않았다.

    “대통령 말 한마디에 골프가 사치 금지품목이 되면서 하루아침에 골프사업자 코드가 룸살롱 코드와 같이 취급되었어요. 제조업인데 골프산업이란 이유만으로 대출이 금지되고 대출된 돈도 모두 회수당했어요. 자본이 다 빠져나가니 열악한 중소기업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죠. 이때 우리나라 골프산업은 망가졌어요.”

    랭스필드도 이때 부도가 났다. 부도액은 모두 13억원. 그는 2년 안에 원금을 갚겠다고 채권단을 설득해 어렵게 어음을 돌려 받았다. 그 동안 쌓아온 신뢰가 바탕이 됐던 것이다. 이 약속은 2년 후 지킬 수 있었다.

    이때 해외 브랜드들이 OEM 생산을 주문해 왔다. 그러나 양사장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대신 그는 수출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해외로 눈길을 돌렸다. 그 첫 대상국으로 미국을 택했다. 그러나 겁없이 달려들었다가 “이제 시작한 나라에서 뭘 안다고 만드느냐”며 된통 무안만 당하고 돌아왔다. 그래서 눈을 돌린 곳이 후발국들이었다. 중국, 모스크바, 태국,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 쪽을 타깃으로 삼았다. 이 나라들은 품질은 좋으면서 미국이나 일본 제품보다 가격이 싼 데 매력을 느끼고 수입을 원했다.

    이렇게 수출길이 열리고 국내에선 대전엑스포 공식제품으로 선정됐다. 이때부터 조립생산에서 직접생산으로 바꿔 한국인 체형에 맞는 골프클럽을 제작했다. 주 판매대상은 초보자로 삼았다.

    매장에 피팅 시스템을 갖춰 놓고 손님에게 직접 스윙을 해보게 한 후 체형(신장, 몸무게, 팔길이, 장력)을 재 맞춤 골프클럽을 제작해 주었다. 제품을 구입한 고객들은 직접 사용해보고는 매우 만족해했다. 이들의 입소문을 타고 서서히 매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영상의 어려움은 계속됐다. 1995년 양사장은 또 한 차례 위기를 겪어야 했다. “1억3000만원의 어음을 막아야 하는데 8000만원이 부족했어요. 너무 답답해서 우이동에 있는 도선사에 가서 저녁내 앉아 있다 새벽 4시에 내려오는데 절 앞에 ‘신념무적(信念無敵)’이란 경구가 붙어 있어요. 그걸 보는 순간 자신이 생기면서 갑자기 여러 사람에게 적은 돈이라도 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아침 8시부터 수첩에 쓰인 ㄱ,ㄴ순서대로 무조건 전화를 걸어 이유는 묻지 말고 100만원을 보내 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통장번호를 불러줬어요. 이렇게 낮 12시까지 130명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이날 오후 4시까지 1억원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무사히 막았어요.”

    양정무 사장은 위기에 처할수록 불굴의 힘이 솟는다고 한다. 그 힘은 오기에서 나오는 것으로 그의 오기는 어려서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키가 작았던 그는 키 큰 아이들이 건드리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끝까지 붙어 싸웠다. 오기와 함께 그는 용기와 끈기도 중요하게 여긴다. 양사장은 용기가 없었다면 외제가 판치던 골프사업에 뛰어들 수 없었을 것이며, 끈기가 없었다면 어려운 시기를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전두환·김종필씨도 고객

    1997년에 들어서면서 랭스필드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1998년 IMF로 외제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커지고 환율이 크게 오르면서 국산 골프클럽 사용자도 크게 늘어났다. 이와 함께 박세리 선수가 LPGA에서 우승하면서 경기불황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골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크게 바꾸어 놓았다.

    골프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 골프 인구도 증가했다. 이런 시류를 타고 랭스필드는 불경기였으나 1998년 전년보다 무려 두 배나 매출이 늘어났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가 외제 골프채를 사용하는 걸 보고 비서를 통해 “일국의 총리께서 외제 골프채를 쓰시면 잘못된 것 아니냐, 우리 국산 골프채를 보내드릴 테니 써 보시고 마음에 들면 돈을 주십시오” 하고 골프클럽 한 세트를 보냈다. 김총재는 이 골프채로 평소보다 10타를 잘 쳐 마음에 든다며 돈을 보내왔다. 전두환 전대통령도 랭스필드 고객이다. 그는 자신이 써 보고 잘 맞는다며 참모들에게도 모두 랭스필드로 바꾸게 했다는 것.

    양사장은 “랭스필드 고객 중에는 군인, 경찰, 공무원 등 주로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며 아무래도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현재 랭스필드는 경기도 일산에 제1, 제2 공장을 두고 1공장은 물류창고로, 2공장은 제품 생산공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공장의 하루 생산 가능량은 골프클럽 300세트. 현재는 하루 100∼150세트를 생산한다. 아이언과 우드 헤드는 직접 생산하고 샤프트는 외주를 주고 있다. 모두 25종의 골프클럽을 생산하는데, 가격은 100만∼600만원으로 다양하다. 서울과 지방 등 6개 직매장의 하루 판매량은 대개 80∼90세트로 2톤 트럭 한 대 분량.

    현재 랭스필드는 동남아지역에 가장 많이 팔려 나가 이 지역 골프장 어디서든 랭스필드를 쉽게 볼 수 있다.

    랭스필드가 자리잡으면서 양정무 사장은 지난해 11억원과 3억5000만원을 각각 투자해 인터넷 포털사이트인 (주)랭스아이와 골프투어 전문여행사인 (주)랭스투어를 설립했다. 랭스아이는 인터넷을 통한 제품 판매를 위해서, 랭스투어는 1년이면 40여 만명이 해외로 골프를 치러 나가는 걸 보고 조금이라도 국부의 해외유출을 줄이기 위해서 만들었다. 한해 40여만 명이 나가 1인당 100만원을 쓴다고 해도 4000억원, 이 많은 돈을 소비하는 걸 보고 조금이라도 저렴한 경비로 여행을 즐길 수 있도록 랭스투어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제2의 애니콜신화 만든다

    현재 랭스투어는 중국, 태국, 말레이시아 등에 골프 여행객을 송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운동하기 힘든 겨울철에 고객이 가장 많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 랭스투어를 통해 골프를 즐기러 나가는 여행객들에겐 현지에서 무료로 랭스필드 클럽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현지 골프장들도 랭스필드 대여를 위해 벌써 몇백 세트씩 랭스필드 클럽을 구입해 갔다고 한다.

    양정무 사장은 랭스아이, 랭스투어 모두 골프 관련 사업으로 설립함으로써 랭스그룹은 골프전문 기업으로 수직계열화를 이뤘다고 자평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골프웨어를 생산할 계획이라고 한다.

    “골프채는 한 번 구입하면 5년 정도를 사용해 재구매까지는 많은 시일이 필요해요. 이처럼 재구매 시일이 길면 회사는 성장할 수 없어요. 그래서 소비재인 골프웨어를 생산할 계획입니다.”

    랭스필드는 현재 방콕과 중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 인건비 상승으로 국내 생산원가 부담이 높아져 수출 물량은 중국 공장에서 생산할 계획으로 만들었다. 중국공장이 세워지면 내수 제품만 국내에서 만들 예정이다. 현재 랭스필드는 계열사까지 모두 120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는 맨발로 뛰었지만,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이 갖춰졌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제대로 신발끈을 묶고 달릴 것”이라는 양정무 사장. 그는 애니콜이 한국지형에 맞는 휴대폰을 만들어 모토로라를 몰아냈듯이 랭스필드로 골프시장에서 제2의 ‘애니콜 신화’를 만들고 싶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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