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2월호

“오너 횡포, 노동자 고통을 이제야 알겠다”

‘재벌의 나팔수’ 공병호의 대변신

  • 이나리 <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 byeme@donga.com

    입력2004-11-15 15: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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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병호(41). 그는 전사(戰士)였다. 외환 위기와 정권 교체, 빅딜로 대표되는 재벌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기업인, 좁혀 말해 재벌의 사수대로서 두려움 없이 싸움에 임했다. 그에게선 신념에 찬 인간에게서나 발견할 수 있는 열정과 고양된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뛰어난 전사에겐 그에 어울리는 수사가 따라붙게 마련. ‘재벌의 나팔수’ ‘젊은 우익 사상가’ ‘한국식 자유시장주의자’. 1997년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자유기업센터 소장이 된 이후 그의 사회적 삶은 종종 이런 용어들로 설명되곤 했다. 그랬다. 그는 싸움꾼이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교묘한 전술로 무장한 확신범, 그래서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런 그가 달라졌다. 이제 더 이상 싸우지 않겠단다. 칼의 말과 총(銃)의 글은 저 멀리 내던져 버렸단다. 패션(열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란다. 아주 다른 사람이 된 까닭이란다. 거친 세상, 정글 같은 비즈니스판에서 참 많이 배웠단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더 이상 순진하지 않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오랜만에 만난 그는 한껏 편안해 보였다. 옷차림도 그랬다. 갈색 체크무늬 재킷에 하늘색 버튼다운 셔츠, 링클프리 면바지. 지난해 3월, 테헤란밸리 중심가 ‘인티즌’ 사장실에서 대면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당시 자유기업원 소장에서 벤처기업 사장으로 자리를 막 옮긴 상태였던 그는 낯선 일과 환경에 채 적응이 되지 않은 듯 다소 긴장된 모습이었다. 그후 1년8개월. 공병호경영연구소장이란 새 명함을 들고 대중 앞에 다시 서기까지 그의 신변과 의식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1983년 고려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공소장은 1987년 미국 라이스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국토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이 됐고, 1990년에는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산업연구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즈음 그는 하이에크(자유시장경제를 일관되게 고수했던 오스트리아 경제학자)의 저술을 읽고 그 이론에 깊이 매료됐다. 공소장은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하이에크의 방대한 저술을 섭렵하는 동안 ‘내 속에서 그런 성향(자유시장의 전사)을 발견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1997년 4월, 최종현 SK회장 체제의 전경련은 부설 연구소로 자유기업센터를 설립하면서 37세의 공소장을 그 수장으로 전격 등용했다. 이후 그는 수많은 방송 출연과 기고, 인터뷰를 통해 ‘시장경제 논리’를 설파하고 기업인의 권익을 옹호하는 데 열성을 바쳤다. 시민단체, 진보적 지식인, 경제 관료 등으로부터 숱한 비판과 비난을 받았지만 소신을 꺾지 않았다.

    재벌 개혁에 적극적이던 정부와도 첨예한 갈등을 겪었다. 정부가 고통분담 차원에서 그룹 오너들에게 사재 출연을 요구하자 이를 ‘집단 약탈’이라 비난하며 “다수라는 이유만으로 소수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영에 대한 책임은 자신이 소유한 주식만큼만 지면 된다”고 목청을 높이기도 했다. 오너의 권한이 소유한 주식의 열 배, 스무 배 이상이란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 듯 했다.

    당시 공소장은 그룹 오너 등 기업인을 종종 ‘마이너리티’라 칭하곤 했다. 마이너리티라는 말에는 ‘소수’라는 뜻도 있지만 ‘소외된 자들’이란 의미가 더 강하다. 그에게 기업인은 ‘경제적으로 성공한 자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폭력적 대중’과 ‘그들을 대리공격해 정치생명을 유지하는 정치인들’로부터 핍박받는 속죄양 혹은 ‘선한 사마리아인’이었던 것이다. 공소장은 같은 이유로 시민운동가, 정치인 등을 ‘허황된 논리를 만들어 사람들의 감성적인 면에 호소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로 폄하하기도 했다.

    1999년 11월, 정부와의 갈등이 위험수위에 달하자 전경련은 돌연 자유기업센터 분리를 공표했다. 전경련과 공소장의 공식 부인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앞다투어 ‘전경련이 정부에 대한 화해 제스처로 자유기업센터를 정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2000년 2월21일, 자유기업센터는 자유기업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금만으로 운영되는 국내 최초의 민간 독립 연구소’로 새출발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3월 중순, 공소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 사유는 KTB네트워크(사장 권성문)가 대주주인 벤처기업 ‘인티즌’으로의 이직. 한겨레신문 기자 출신의 창업 CEO 박태웅 사장과 공동대표를 맡는다고 했다.

    연구소 시절, 여권 실세 압력 받아

    그 얼마 전까지 재계로부터 연구소 기금 60억원을 출연받는 데 성공했다며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세일즈맨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으쓱해하던 그였다. “저를 믿고 있는 분들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겠다. 앞으로 30년은 더 내 생각을 전파하는 일을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

    -그런데 왜 마음이 바뀐 거지요.

    “당시의 벤처열풍 생각나시죠. 그건 바람이었습니다. 대단한 폭풍이었죠. 사실 전 그때 제가 하는 일에 상당한 피로를 느끼고 있었어요. 지루해진 거죠. 무엇보다 내면세계를 들여다보니, 40이란 나이도 있고 말입니다, 캐리어를 계속 쌓아가야 하는데 경력이 너무 단출한 거예요. 그냥 논객으로 그렇게 한 연구소에서 30년, 40년씩 몸담는 거…, 그런 게 아주 회의적으로 느껴지더군요.”

    하지만 30~40년 운운한 건 바로 당신이 아니냐고 하자 겸연쩍은 듯 답했다.

    “전 단순했어요. 정말 괜찮은 연구소를 만들어 평생 이끌어간다…. 근데 40세 전후로 맘이 굉장히 흔들리더라고요. 사람 마음 바뀌는 거 정말 순간입디다.

    그러니까 정리하면 이런 겁니다.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을 잃었고, 경력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성에다, 연구소를 위해서도 제가 없는 편이 나으리라는 생각. 펀딩에 성공해 자유기업원의 기반을 튼튼히 했고 조직도 안정된 마당에, 제게 덧씌워져 있는 ‘지나친 전경련 컬러’가 도리어 연구소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판단했어요. 어떻게 보면 매력적인 제안을 받고, 거기 응하는 걸 합리화하기 위해 부러 그런 쪽으로 더 생각을 몰아간 건지도 모르죠.”

    그는 사실 힘이 빠지기 시작한 건 1999년부터였다고 했다.

    -‘재벌의 나팔수’ 운운하는 세상의 시각이 점차 부담스러워졌던 건가요.

    “음… 공병호 하면 전경련, 전경련 하면 재벌, 그런 식의 구도는 제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 언행이 자발적이 아니었단 게 아니라, 전 제 신념을 열정적으로 표현했을 뿐 재벌 편을 들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뜻이에요. 전 확신범이었습니다. 솔직히 최회장님(고 최종현 SK회장) 모시고 있을 때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았어요. 근데 1999년 들어 빅딜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던 시점부터 서서히 입을 다물었죠. 시장자유주의의 원칙에 비추어, 전경련의 빅딜 추진에 동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TV에 출연하지 않은 것도 그 무렵부터입니다.”

    그는 무슨 말을 해도 다 재벌 옹호론으로만 비치는 현실이 답답했다고 했다.

    “전 수많은 글로 제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시장경제란 말이 일반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자부해요. 정말 치열하게 쓰고 말했습니다. 글 한줄 없는 사이비 학자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습니까.”

    -발언 수위를 조절하라는 외부의 압력은 없었습니까.

    “많았지요. 우리가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곳에서 위로 자꾸 얘기가 들어가고….”

    -직접 연락을 받은 적은 없었나요.

    “…있었습니다. 여권 실세로 통하는 분이 서너 번 전화했죠.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그래 봤자 재벌 대변자 아냐”

    -왜 하필이면 인티즌이었습니까. 이왕 벤처 행을 결심했다면 다른 업체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텐데요. KTB네트워크 권사장과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었는지요.

    “같이 나가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무슨 포럼인데, 거기서 권사장을 만났죠. 자유기업원 독립자금 모으느라 한참 정신이 없을 때였어요. 근데 권사장이 선뜻 도와주겠다는 거예요. 액수보다 대기업이 아닌 벤처쪽에서 적극 참여해 준다는 점이 고마웠습니다. 그때 권사장은 인티즌의 새 CEO를 물색중이었습니다. 저보고도 사람을 좀 추천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노력해 봤는데 마땅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어요. 지지부진한 가운데 권사장이 제게 불쑥 파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당신이 직접 와달라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을 물색해 달라 뭐 그런 건 다 해본 말이었고 처음부터 목적은 저였던 겁니다.”

    -그렇다면 권사장의 권유로 인해 처음 기업 행을 생각하게 된 거로군요.

    “처음엔 당연히 펄쩍 뛰었습니다. 어쨌거나 이제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돈 모으러 다닐 땐데…. 한데 권사장이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당신 그렇게 열심히 해 봐야 재벌 대변자밖에 더 되겠냐!’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그때부터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애써 덮어두려 했던 회의나 무력감, 지루함, 불안감, 그런 것들도 다시 고개를 들었고요.”

    2000년 3월20일 인터넷 허브사이트 인티즌은 조선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공병호 전 자유기업원장을 공동대표로 영입한다고 발표했다. 공소장의 변신은 세간에 큰 화제를 몰고 왔다. 그렇듯 자신만만하게 시작한 벤처생활이었지만 그의 앞에는 적지 않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 사건이 터진 것은 부임 후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5월 초. 공동대표였던 박태웅 사장이 재무·인사권을 둘러싼 공소장과의 갈등으로 인해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대박주’로 인식됐던 인티즌의 위상이나 두 CEO의 만만치 않은 중량감·유명세로 인해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져만 갔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 것 아니냐’며 사건의 원인을 공소장에게서 찾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그러나 사건 직후 박 전사장을 통해 들은 이야기나, 공소장의 조심스런 발언 몇 가지를 종합할 때, 가장 큰 책임은 대주주 측의 불명확한 태도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쨌든 이런저런 과정을 거치면서 공소장은 오너와 전문경영인, 혹은 직원간의 관계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 듯하다.

    분쟁의 후유증이 가라앉으면서 공소장은 인티즌 경영에 전념했다. 닷컴기업이었던 만큼, 특히 수익모델 찾기에 골몰했다. 그러나 사업은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경영 그 자체도 어려웠지만 오너와의 의견 조율, 정·관계 인사들과의 관계 설정, 직원 관리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특히 예상이나 짐작과는 관계없이 진행되는 업계의 습성 및 관행은 이론에 더 밝은 초보 전문경영인에게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제가 원래 술을 잘 안 마십니다. 연구소 시절에는 보통 저녁 10시면 자고 새벽 3시쯤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썼죠. 벤처에 있는 동안 그런 생활리듬이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저녁이면 술 마실 일이 생겼고, 꼭 그런 게 아니어도 고민할 일이 너무 많아 잠이 오질 않았어요.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거죠.”

    -힘들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습니까.

    “그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티즌 입사 자체가 성급한 결정이었던 겁니다. 회사를 옮길 때는 대주주의 평판이라던가 사업 발전가능성 같은 걸 아주 면밀히 따져봤어야 하는데 전 그러질 못했어요. 제 자신에 대한 믿음이 워낙 강한 데다, 직감대로 움직여 실패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에 방심한 거죠.

    하지만 그때의 변신을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그로 인해 열정이 식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짧으나마 경영수업도 쌓았으며, 마침내 지금처럼 제게 딱 맞는 길을 찾는 데도 성공했으니까요.”

    그가 찾은 새 길이란 ‘자영업’, 그러니까 공병호경영연구소장으로서의 삶이다. “이전부터 왜 우리나라에는 경영이나 경제 분야에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이 드물까 하는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미국의 마이클 노박이나 피터 드러커, 프랑스의 기 소르망이나 자크 아탈리, 일본의 사카이야 타이치 같은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강연, 집필, 기고, 경영자문을 업으로 삼는 1인 기업을 운영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공소장은 증권전문 케이블채널인 한경와우TV에서 ‘공병호의 독서대학’을 진행중이다. 몇몇 공중파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고정 출연하고 있다. 곧 30~40대 직장인의 자기관리에 대한 책을 발간할 예정. 요즘은 전환기의 40~50대 가장을 위한 글을 자주 쓴다. 강연과 기고 스케줄도 빡빡한 편이라고 했다. 그는 “내가 참 선견지명이 있긴 한가보다, 언젠가 방송 쪽으로 나설 기회가 있지 않을까 싶어 2년 전부터 치아교정을 시작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지 않았나” 하며 교정기를 끼운 치아를 슬쩍 내보였다.

    공소장과 대화를 하며 재삼 확인한 것인데, 그는 자기암시와 자기확신이 대단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직관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으리라. 세상살이에 있어서도 어딜 어떻게 건드리면 어떻게 풀려나가리라는 감이 대단히 빠른, 한마디로 ‘하늘이 무너져도 반드시 솟아날 듯한’ 대단한 자신감의 소유자였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고 한다. 실패를 겪더라도 ‘미래를 위해 오히려 더 잘된 일’이라는 식으로 상황을 합리화할 줄 알기 때문이다. 공소장도 마찬가지여서 벤처에서의 신고(辛苦)는 벌써 다 잊은 듯 자못 희망에 부푼 모습이었다. 인터뷰중에도 그는 여러 차례 “지금의 내 상황을 실패란 이름으로 낙인찍지 말아달라. 이 길은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공소장이 벤처업계를 떠난 건 올해 7월말이다. 마지막 직위는 코아정보통신 사장이었다. 지난해 말 인티즌과 코아정보통신간에 합병 시도가 있었다. 가격이 맞지 않아 M&A는 무산됐지만 공소장이 코아정보통신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양사간 협력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쪽으로 합의가 됐다. 한편으로 증권가에는 합병 시도 과정에서 공소장이 주가조작에 개입해 수억 원의 부당이익을 취했다는 루머가 떠돌기도 했다.

    -M&A 직전까지 가봤으니 벤처에서 겪을 일은 다 겪으셨군요(웃음). 근데 주가조작이니 뭐니 말들이 많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허, 주가조작이라니 말도 안됩니다. 무엇보다 저한테는 인티즌 주식이 없어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입니다. 합병설로 한때 주가가 뛰었으니 말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악성 루머를 퍼뜨린 거죠. 그리고 전 도덕주의자입니다. 제 브랜드 파워라는 게 어디까지나 도덕성에서 나오는 건데 제가 그걸 그렇게 쉽게 훼손하겠습니까.

    M&A로 말씀드리면, 그거 참 할일이 못됩디다. 머니게임이란 게 이런 거구나 싶었지요. 제가 코아정보통신으로 가게 된 것도 내막을 알고보면 좀 그래요. 대주주인 권사장 측과 코아정보통신이 합병을 추진하면서 약정서를 교환했는데 권사장 쪽에서 일부 사항을 위반한 겁니다. 근데 코아정보통신에서, 문제 삼지 않는 대신 공사장을 보내달라, 그렇게 나온 거예요. 결국 3월부터 코아정보통신 사장으로 일하게 됐죠. 분쟁 해결을 위해 이 한몸 던진 겁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왕 옮긴 자리, 열심히 해보겠다고 여기저기 영업하러 다니며 고군분투했는데 코아정보통신 사주가 회사를 덜컥 소프트뱅크코리아가 운영하는 M&A펀드에 넘겨버린 거예요. 고용인에 불과했던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외이사·집단소송제 필요

    자세히 언급하진 않았지만 공소장은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적지 않은 좌절감을 맛봤다고 했다. 공소장이 “이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선언하는 이면에는 짧은 시간 동안 우리 기업의 실상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보아버린 점이 크게 작용한 듯했다. 공소장은 “이제 다 용서했다”면서도 “참 별 인간들을 다 만났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실물이 아닌 머니게임으로 돈을 벌고 거래를 하는 건 대단히 위험합니다. 사실 전 그 ‘아사리판’에서 몸 하나 무사히 빠져나온 걸 하늘의 도우심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사기극에 휘말리지 않고 끝을 낼 수 있었던 게 천운이란 거지요. 저한테 요구되는 일들을 보며, 이거 까딱하면 범법자가 되겠구나, 마음도 많이 졸였습니다.”

    -범법이라니, 어떤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를 들면 인티즌이 회원제로 운영하는 인터넷 기업이니까 신용카드회사 같은 데서 얘기가 들어와요. 회원정보를 제공해주면 대가를 제공하겠다거나 그런 거죠. 그게 다 불법이에요. 물론 저는 거절했습니다. 어쨌건 그런 류의 일들이 적지 않으니 어떻게 걱정이 안되겠어요. 회사를 사고파는 과정에서도 부정이 끼어들 여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격을 어떻게 부르느냐부터 문제가 될 수 있지요.”

    -자꾸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건가요.

    “시장에 대한 제 신념의 큰 줄기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다만 기업인이나 기업운영의 현실에 대해서는 이전과 많이 다른 생각을 갖게 됐죠. 이전에 저는 기업가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마디로 기업가에 대단히 호의적이었죠. 지나치게 규제하지 않아도 시장이 알아서 보완해 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니 인간이란, 사업이란 그렇게 단순한 게 아니더군요. 무조건 선한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시장은 시장대로 돌아가겠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더라 이거죠.

    생각이 가장 크게 바뀐 게 이사제도에 대한 겁니다. 주식회사란 회사를 ‘공개한다’는 것이죠. 그런 만큼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이 있습니다. 근데 이건 어떻게 된 게 이사들 도장을 아예 받아뒀다가 여기저기 막 찍질 않나…. 주류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사업을 해보면 마이너리티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뀔 겁니다. (기업) 규제에 대한 생각도 달라질 거고요.

    예를 들어, 이전의 저는 사외이사제도가 불필요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보니 그게 꼭 있어야겠다 싶은 거예요. 또 하나, 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감시가 가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집단소송제 같은 것도 점진적으로 도입해야 한다는 거죠. 마지막으로 회계 말인데요. 이게 정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해요. 이에 대한 감시체제도 강화해야 합니다. 결국 사업가에 대한 시각 자체가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바뀐거죠. 사업가에겐 견제와 모니터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의 말 중 마이너리티란 단어가 귀에 콕 들어와 박혔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에게 ‘마이너리티’는 노동자, 혹은 국민이었다. 분명 놀라운 변화였다.

    -이제는 대기업을 이 사회의 마이너리티라 생각지 않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그때는 정말 우리(전경련)가 마이너리티라고 생각했는데 나와보니 보통 파워풀한 집단이 아니에요. 몰랐던 거죠.

    연구소 시절 저는, 기업가와 노동자는 계약을 통해 맺어진 관계인 만큼 서로 약속만 준수한다면 문제될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한마디로 그 계약이란 게 아주 잘 돌아가고 있다고 확신한 거죠. 근데 틈이 엄청나게 많더군요. 그나마 대기업이라면 어느 정도 원칙이 지켜지고 있으련만 제가 몸담았던 벤처쪽은 엉망이었습니다. 늘 일에 치여 살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그래서 벤처일 한다는 젊은 친구들을 볼 때마다 늘 그랬어요. 좀 쉬어가며 해라, 몸도 생각해라, 대우는 우째 제대로 받고 있나….”

    재벌 입노릇 다시는 안해

    -앞으로도 글을 쓰고 강연을 하다보면 재벌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사람들에게 공소장은 여전히 ‘재벌의 입’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옛날의 저는 정말 순진했습니다. 이젠 재벌이니 뭐니, 그렇게 기업가 편에 서서 논쟁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 쪽으로의 열정이나 사명감이 사라져버렸어요. 사업을 경험하고 나니 한마디로 동기 부여가 안된달까요. 어쨌건 천만금을 줘도 재벌 나팔수, 그런 건 다시는 안합니다. 이제 제 관심은 글쓰고 강연하는 거예요. 제가 가장 좋아하고 또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저요, 책 많이 쓸 겁니다. 재벌이 아니라 경제활동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주목하는 그런 글들이요. 지금까지는 내 창의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했어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입니다.”

    -코아정보통신 사장직에서 물러난 후 다시 조직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는지요.

    “솔직히 한두 달쯤 그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사실 월급장이가 얼마나 편합니까. 매달 고정된 수입이 없다는 건 두려운 일이지요. 또 연구소나 그런 쪽으로 간다면 아무래도 ‘고향’인 셈이어서 마음이 편할테고요. 하지만 자영업을 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지금 새로 시작한 이 길은 50년 프로젝트입니다. 저는 90세까지는 살 수 있으리라 보는데, 그러니 남은 인생을 두고 할일을 이제 막 시작한 거죠. 서두를 필요가 없어요. 제가 재벌의 입이니 뭐니 하는 데서 CEO를 거쳐 이렇게 홀로서기를 결심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었던 걸 천운이라 생각합니다. 제 자신이 참 대견스럽기도 한데, 어떻게 그 어려운 일들을 겪고 나와 방향전환할 생각을 다 했나, 그것도 나이가 마흔인데, 뭐 그런 데서 오는 대견함이지요.

    장사꾼은 장사의 무기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글 쓰고 방송하는 쪽인 것 같고. 자유기업원 소장 하면서도 자기를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를 많이 느꼈는데, 기업경영은 거기에 비하면 그렇게 신이 나질 않더라고요. 또 저로서는 처음으로 ‘갑’이 아닌 ‘을’의 인생을 산 건데 별로 유쾌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원하는 건 역시 영향력인가 봅니다.”

    -혼자 일하려면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습니다.

    “자영업자는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합니다. 제 침대 머리에는 자명종이 3개 있어요. 다이어리도 아주 꼼꼼하게 기록하는 편입니다. 시간은 물론 분 단위까지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실천한 후 저녁마다 평가를 해요. 여전히 새벽 3시에 기상하고 술은 거의 안 마십니다. 담배도 안 피고요.”

    -전경련에 대해서는 요즘 어떤 생각을 갖고 있습니까.

    “외환위기 후 들어간 공적자금이 148조원이라고 합니다. 그 대부분이 은행 부채를 해결하는 데 쓰였어요. 기업들 잘못인 거죠. 친정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지만 한가지 말씀드린다면, 전경련이 이익활동을 하는 건 좋은데 문제를 좀 국익차원에서 봤으면 하는 거예요. 책임감을 가져달라는 거죠. 정부에 뭘 요구할 때도 언론을 통해 포문을 여는 것보다는 다른 합리적 해결방법을 찾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국민 눈에는 힘을 이용해 정치권에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으니까요. 안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외곽에서 보니 국민들이 전경련 활동을 충분히 그런 시각으로 볼 수도 있겠더군요. 아무래도 힘이 있는 집단이니까요.”

    -내친 김에 전경련에서 직접 모셨던 고 최종현 SK회장과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에 대해서도 좀 말씀해주시죠.

    “최회장이나 김우중 회장 같은 분들을 제 30대에 만날 수 있었던 건 대단한 행운입니다. 제법 화려한 직장생활이었다고 할 만하죠. 지나간 세대, 두 번 다시 등장하기 어려운 유형의 기업인들을 가까이서 지켜볼 수 있었으니 말이에요.

    최종현 회장과 김우중 회장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제게 어떤 역할 모델이 된 분들입니다. 최회장은 일종의 ‘철학자’였어요. 재벌체제라는 게 일종의 제국이거든요. 그걸 움직이려면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 겁니다. 거대한 조직에는 반드시 밸류 크리에이션(가치 창조)이 있어야 한다는 거죠. 총수란 바로 그런 것들을 창안해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인덕경영을 한국화한 것이랄까요. 최회장님과는 한국경제연구원 시절부터 대화를 참 많이 나눴습니다. 워낙 젊은 사람들과 말씀 나누길 좋아하셨거든요.

    반면 김우중 회장과는 개인적인 친분을 쌓을 시간이 없었습니다. 스타일도 많이 달랐고요. 우리 세대에게 김회장은 우상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전경련 회장을 맡게 되셨을 땐 기대가 참 많았죠. 그런데 예상과는 다른 면 몇 가지를 발견하게 됐습니다. 제 판단을 솔직히 말하라면 ‘마무리가 명확치 않다’고 할까요. 그 큰 제국이 꼭 1인기업처럼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면 여기저기서 일을 벌이는데 그 사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보급선이 보이질 않는 거예요. 모든 것이 김우중이라는 한 사람에게 집중돼 있다보니 리스크도 그만큼 크게 안을 수밖에요. 대우의 문제는 한마디로 리더십의 위기였습니다.

    또 하나, 기업가는 정치와 불가근 불가원이어야 한다잖아요. 그런데 김회장은…. 빅딜만 봐도, LG가 사업들을 포기하는 과정을 보면…. 그런 건 옳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DJ노믹스에 가장 비판적인 경제학자 중 한 명이었는데 지금 생각은 어떻습니까.

    “IMF 위기는 어찌 보면 우리나라를 재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정면돌파할 명분이 있었거든요. 전 정부가 국민과 조금 더 고통분담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국가가 다 안아버렸어요. 결과적으로 목적한 만큼의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됐죠. 국가가 나서서 증시 부양하고 부채 해결해 주고…. 일본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강준만·장하성 교수 이제 다 이해

    -가장 큰 문제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지금 우리나라에는 미국에 내다팔 물건이 별로 없어요. 실업문제도 심각하고요. 잡 크리에이션(job creation)에 문제가 생긴 거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 내년이면 또 선거철인데 대선주자들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에 대한 청사진을 마련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해요. 건강한 기업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연구해야 한다는 거죠. 사업을 해보니 접대비용이 엄청나게 들더군요. 또 자격 미달의 인물들은 왜 그렇게 요직에 많이 앉아 있는지…. 강준만 교수의 ‘마당발 공화국’이라는 말이 아주 실감이 났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경제대국이 되려면 세 가지를 달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첫째가 금융 정상화, 둘째가 엘리트를 키워내는 교육 차별화 정책, 셋째가 정치시스템 개혁이에요. 코스닥과 관련해서는 등록과정에서부터 내수용과 해외개척용을 구분하는 방법도 있으리라 봅니다. 사실 서비스 벤처는 시너지 효과가 거의 없고 중요한 건 수출 가능한 제조 벤처인데, 그마저도 현재는 거의 내수용에 머물고 있어요. 외국인들이 왜 코스닥에 안 들어오는지 아세요. 시장은 정확합니다. 돈이 안된다고 보는 거예요. 코스닥이 활발히 움직이도록 하는 건 중요하지만 인위적인 활성화는 대단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일입니다. 해외개척 가능한 벤처를 개발해 적극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코스닥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 강준만 교수의 주장을 언급하셨는데, 1999년 말 강교수가 주관하는 ‘인물과 사상’ 12호에 유시민씨가 쓴 공소장 비판 기사가 실렸던 기억이 나는군요. 제목이 ‘위장 자유주의자 공병호의 비극’이었던가요. 공식적인 대응은 안했지만 아무래도 불쾌했으리라 짐작되는데, 어떻습니까, 요즘은 진보적 지식인이나 시민단체 인사들과도 화해할 마음의 준비가 돼 있는지요.

    “물론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이 있는데, 전 NGO가 없어져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기업처럼 감시받아야 한다고 여길 뿐이죠. 사회가 발전하려면 사상시장에서도 다양한 소리가 나올 수 있어야 하니까요. 단적인 예로 자유기업원에 보면 NGO실이 따로 있습니다.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아까도 강교수에 대해 친근한 표현을 했지만, 과거 첨예하게 대립했던 고려대 장하성 교수와도 이제는 터놓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난번 고대에 갔다 장교수와 우연히 마주쳤는데 제가 그랬어요. 욕 봤다고요. 경상도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수고 많으셨다는 표현입니다.”

    표변한 게 아니라 진화한 것

    -그럼 이전의 언행에 대해 반성하거나 후회스럽다는 생각도 갖고 있는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때는 또 그때대로 제 양심과 지식에 비추어 최선을 다해 신념을 펼친 겁니다. 정말 30대의 마지막을 원없이 멋지게 태웠지요. 그런 활동들로 인해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우리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큰 논쟁에 한 축을 담당하고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점에 있어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 이야기’에도 썼듯, 동양은 과거를 말살하는 반면 서양은 그것의 숨은 가치를 찾아냅니다. 발전하려면 우리 역시 무조건 과거를 부정하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할 겁니다. 과거의 내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도 없는 거니까요.”

    -‘왜 그렇게 표변했냐’고 비난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는지요. 방향전환 자체를 ‘앞으로 활동하는 데 더 유리한 쪽으로 선택한 것 뿐’이라 폄하할 수도 있고요.

    “임종석씨가 국회의원에 출마하고 박노해씨가 환경운동가로 변신했을 때 어떤 사람들은 ‘변절했다’며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전 웃기지 말라고 했어요. 만물은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게 이상하지요. 사람이 자기 이름을 걸고 어떤 길을 선택했을 땐 그건 변절이 아니라 변화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진화일 수도 있고요.

    저는 여전히 라이트 윙(우익)입니다. 다만 왼편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거지요. 자유주의자라는 큰 줄기는 그대로이되 세부 사항에 있어 시각 교정을 하게 된 겁니다. 서양 속담에 이런 것도 있잖아요.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나는 것이 승리다’. 이젠 절 좀 색안경 끼지 않은 눈으로 봐줬으면 좋겠어요. 40대 실업자, 50대 명퇴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글도 쓸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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