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호

사모펀드 세계 평정한 ‘미국식 자본주의 요리사’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회장

  • 하정민│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입력2013-06-19 17: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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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초호화 전세기로 세계를 누비면서 수조 원짜리 기업을 장난감 사고팔 듯하며 금융계와 산업계 판도를 좌지우지한다. 맨해튼의 궁전 같은 펜트하우스에서 살고, 밤이면 각국 유명인사를 모아놓고 화려한 파티를 즐기며, 휴가는 카리브 해의 멋진 별장에서 보낸다. ‘자본주의의 총아’로 떠오른 세계 유명 사모펀드 경영진의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세계 최대의 사모펀드 블랙스톤을 이끄는 스티븐 슈워츠먼 회장은 월가의 새 황제로 불릴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사모펀드 세계 평정한 ‘미국식 자본주의 요리사’

    스티븐 슈워츠먼 블랙스톤 회장

    “사모펀드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제왕(New king of Capitalism)” -‘이코노미스트’

    “슈워츠먼은 월가의 새로운 황제(New King of Wall Street)” -‘포춘’

    펀드는 자산관리 전문가가 자산 보유자를 대신해 국내외 투자자산(채권, 주식, 외환, 원자재, 부동산 등)에 투자해주는 금융상품이다. 불특정 다수의 투자자에게서 돈을 모으는 공모(公募)펀드와 소수의 거액 투자자에게서 돈을 모으는 사모(私募)펀드로 나뉜다. 투자 가능 주식의 숫자나 비중 등에 제한이 있는 공모펀드와 달리 사모펀드는 거의 무제한의 자유로운 운용이 가능하다. 이에 따라 많은 사모펀드가 특정 기업을 인수해 기업 가치를 높인 뒤 주식시장 상장(IPO), 분사, 인수합병(M·A) 같은 방식으로 대규모 수익을 올린다. 상장기업과 달리 분기별로 사업 보고서를 제출할 필요도 없고 각종 규제에 시달릴 필요도 없다.

    사모펀드의 대표적 수익창출 기법으로 꼽히는 차입매수(LBO·leveraged buy-out)는 M·A 대상 기업의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해 회사를 합병한 뒤 회사 자산을 팔아 빌린 돈을 되갚는 방식을 말한다. 사모펀드는 LBO 과정에서 대규모 인력 구조조정을 비롯한 비용 절감 노력 등을 통해 기업 가치를 높인 후 기업을 인수하기 위해 진 빚을 해당 기업이 보유한 알짜 자산을 팔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을 통해 갚는다. 이후 높은 배당금을 챙기거나 회사를 비싼 값에 팔아치워 투자자들에게 수익을 돌려준다. 자기 돈은 거의 들이지 않고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구조 탓에 ‘금융기법을 가장한 사기’라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블랙스톤(Blackstone)은 차입매수 기법을 활용해 세계 최대 사모펀드로 성장한 회사다. 경영난을 겪는 기업을 인수해 상장 폐지한 다음 대량 해고, 사업부 분사 및 매각과 같은 메스를 가차없이 들이대 수익성 높은 회사로 탈바꿈시키고 비싼 값에 되파는 LBO를 통해 인수합병 시장은 물론 세계 산업계의 지형을 바꿔놨다는 평가를 듣는다.



    ‘미국 최고의 자본가’

    1960~1970년대 미국에서 태동한 사모펀드는 2008년 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 이전만 해도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1988년 사상 최대 규모의 M·A로 화제를 모았던 글로벌 사모펀드 ‘콜버그 크라비스 로버츠(Kohlberg Kravis Roberts·KKR)’의 ‘RJR 나비스코’ 인수가 대표적이다. KKR은 1875년 설립돼 100년 넘은 역사를 지닌 알짜 기업 RJR 나비스코를 시장가격(170억 달러)보다 훨씬 비싼 260억 달러에 사들였다. 이때 KKR이 직접 출자한 금액은 겨우 15억 달러. 인수자금은 대부분 빚이었다. 경영권을 인수한 KKR은 가차없는 구조조정으로 RJR 나비스코의 주요 사업부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냈다. ‘월스트리트저널’ 기자 2명이 이 인수 뒷얘기를 ‘문 앞의 야만인들(Barbarians at the Gate)’이라는 책으로 출간하면서 사모펀드의 악명(?)이 널리 알려졌다. 화제를 모은 이 책은 세계 유명 경영대학원의 교재로 쓰이면서 그 내용이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투자 대상 다변화

    ‘어두운 밀실에서 돈 많은 개인 투자자 몇 명이 넘치는 돈으로 머니 게임만 벌인다’는 이미지에 갇혀 있던 사모펀드가 월가의 주류로 도약한 것은 2007년 6월 블랙스톤이 업계 최초로 기업공개(IPO)에 나서며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서부터다. 이를 계기로 사모펀드도 투자 상황과 실적을 투명하게 공개해 월가 주류 금융회사와 당당히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

    블랙스톤을 이끄는 사람이 바로 스티븐 슈워츠먼(Stephen Schwarzman·66) 회장이다. 예일대와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전형적인 미국 엘리트인 그는 젊은 시절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에 잠시 몸담았으나 1985년, 38세의 나이에 리먼 시절의 동료와 함께 블랙스톤을 차렸다. 이후 30년간 지칠 줄 모르는 승부욕으로 과감한 투자를 거듭해 블랙스톤을 세계 최고의 사모펀드로 키웠다. 슈워츠먼은 ‘LBO라는 레시피로 미국식 자본주의라는 체제를 누구보다 맛있게 요리해내는 요리사’라고 할 수 있다. 미국 경제전문 방송 CNBC는 슈워츠먼 회장을 ‘미국 최고의 자본가(Premier Capitalsist in America)’라고 표현했다.

    슈워츠먼은 1947년 미국 필라델피아 인근 어빙턴의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필라델피아에서 침구류와 생활용품을 파는 가게를 운영했고 아버지가 가업을 이어받았다.

    1965년 예일대 심리학과에 입학한 그는 예일대 우등생들의 집합소로 유명한 동아리 ‘해골과 뼈(skull and bones)’에서 활동한다. 당시 이 동아리의 1년 선배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었고 둘은 한때 같은 방을 쓰기도 했다. 슈워츠먼은 열렬한 공화당원이며 공화당 정치자금 모금회에 종종 부시 전 대통령과 나란히 참석해 친분을 과시하기도 한다.

    예일대를 졸업한 후 세계 최고의 MBA로 꼽히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1972년 MBA를 졸업하고 나서는 리먼브러더스에 입사해 기업금융 업무를 맡았다. 이곳에서 남다른 재능을 발휘하며 불과 31세에 이사 자리에 올랐고, 곧 글로벌 인수합병 부문의 총 책임자가 됐다. 탄탄한 앞날이 보장돼 있었지만 그는 1985년 리먼 시절의 상사인 피터 피터슨과 함께 사모펀드 블랙스톤을 창업했다. 회사 이름은 두 사람의 이름을 합쳐서 만들었다. 슈워츠먼에서 ‘슈워츠(Schwarz)’는 독일어로 ‘검다(Black)’는 뜻을 지니고 있다. 피터슨의 ‘피터(Peter)’는 그리스어로 ‘돌(Stone)’을 의미한다.

    초기의 블랙스톤은 작고 보잘것없었다. 창업 당시 자본금은 40만 달러에 불과했고 두 창업자를 제외한 직원이 2명이었다. 최대 경쟁자인 KKR은 블랙스톤보다 20여 년 먼저 창업했고 RJR 나비스코 인수라는 초대형 거래를 성사시키는 등 질주를 거듭하고 있었다.

    후발주자인 블랙스톤은 KKR의 강점인 LBO에 섣불리 도전하지 않았다. 그 대신 부동산,헤지펀드, 부실기업 등 투자 대상을 다변화했고,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모하다고 여겨질 만큼 공격적인 입찰가격을 제시해 경쟁자를 물리쳤다. 덕분에 KKR보다 늦게 시장에 뛰어들었지만 블랙스톤의 운용자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블랙스톤이 상장한 2007년에 이미 운용자산이 830억 달러에 달해 KKR의 2배에 육박했고 현재 운용자산은 1370억 달러가 넘는다. 2010년 사업보고서에서 밝힌 창립 후 연평균 수익률은 25%에 달한다.

    슈워츠먼은 어릴 때부터 ‘월가의 새로운 황제’가 될 만한 기질을 보였다.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고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악착같이 물고 늘어질 정도로 승부 근성이 남달랐다. 그는 15세 때 소규모 잡화점 운영에 만족하는 아버지에게 “상점을 계속 늘려야 한다”고 독려했다. 학창 시절에는 167cm라는 단신을 극복하기 위해 고난도의 농구 기술과 전술을 연마했다.

    “먹잇감을 전멸시켜라”

    슈워츠먼의 이 같은 승부 근성은 블랙스톤 설립 당시에도 발휘됐다. 그는 처음부터 10억 달러짜리 대형 펀드를 조성하려 했지만 동업자 피터슨은 20분의 1인 5000만 달러짜리 펀드 조성을 제안했다. 둘은 애초에 스케일이 달랐다. 이렇게 탄생한 첫 펀드의 규모는 8300만 달러였지만 슈워츠먼의 승부사 기질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1980년대 말 저축대부조합위기(S·L Crisis), 1990년대 말 닷컴버블 등으로 미국의 거대 기업이 속속 무너진 것은 블랙스톤에 큰 호재였다. 이 기간 블랙스톤은 100여 개의 유망 기업 인수에 참여했다. 부동산 인수합병의 귀재인 헨리 실버먼과 손잡고 부동산 투자에도 뛰어들었다. 재간접펀드, 메자닌펀드 등 다양한 형태의 펀드에 투자하고 유럽지사를 설립해 해외 기업에도 손을 뻗쳤다.

    금융위기 이전 세계 금융시장이 최고 호황을 누리던 2000년대 중반에는 바이오멧, 힐튼호텔, 선가드, 닐슨 등 대형업체들의 인수전을 주도하며 세계 금융시장과 산업계의 큰손으로 부상했다. 슈워츠먼은 2004년 독일 화학기업인 셀라니스를 인수할 때도 승부욕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처음 그는 셀라니스 측에 주당 17달러를 인수가로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자 이를 떨어뜨리기는커녕 오히려 주당 24달러로 대폭 올렸다. 그래도 거절당하자 28달러, 32달러까지 인수가를 높이더니 결국 주당 32.50달러에 셀라니스를 손에 넣었다. 이후 블랙스톤은 6배의 차익을 남기고 셀라니스를 되팔았다.

    2006년 9월에는 당시 세계 최대 휴대전화용 반도체 제조업체인 프리스케일 세미컨덕터 인수를 놓고 업계 최대 라이벌인 KKR과 격돌했다. KKR이 먼저 프리스케일에 시장 가격의 2배에 가까운 파격적인 인수가를 제안했다. 슈워츠먼은 곧바로 KKR보다 8억 달러 많은 176억 달러를 제시해 프리스케일을 사들였다. 당시 그는 프리스케일 이사회에서 “24시간 안에 결정을 지으라”며 이사진을 강하게 압박했다.

    2007년 2월 블랙스톤은 미국 최대 오피스 빌딩 소유업체인 에쿼티오피스 프라퍼티를 두고 부동산 신탁회사 보나도 리얼티 트러스트와 맞붙었다. 블랙스톤이 먼저 에쿼티오피스를 인수하기로 하고 계약 성사 일보 직전 단계까지 갔지만 보나도의 추격도 끈질겼다. 슈워츠먼은 이때도 입찰가격을 계속 올리는 한편 에쿼티오피스에 “우리가 맺은 계약에 따라 블랙스톤이 인수하지 않으면 당신은 우리에게 막대한 계약 파기 보상금을 물어야 한다”고 위협했다. 에쿼티오피스가 빠져나갈 수 없게 퇴로를 차단한 셈이다. 당시 블랙스톤은 에쿼티오피스 인수에 실패해도 보상금으로만 7억2000만 달러를 벌 수 있었다. 블랙스톤은 결국 보나도를 물리치고 389억 달러에 에쿼티오피스를 인수했다.

    사모펀드 세계 평정한 ‘미국식 자본주의 요리사’
    돈은 ‘존재의 이유’

    압권은 인수 직후다. 슈워츠먼은 인수 계약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에쿼티오피스가 보유한 알짜 자산인 130억 달러짜리 빌딩을 팔아치웠다. 그 자리에서 인수금의 3분의 1을 회수한 것이다.

    이런 예에서 보듯 슈워츠먼은 먹잇감을 발견하면 일격을 가하고 ‘전멸(kill off)’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공격적 성향을 갖고 있다. 그가 “나는 소소한 전투를 계속 벌이기보다 대전을 원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다.

    블랙스톤은 2007년 6월 사모펀드 회사 중 처음으로 뉴욕 증권거래소(NYSE)에 입성한다. 블랙스톤은 기업공개(IPO)를 통해 당시 IPO 금액 중 최대 규모인 41억 달러(약 4조5510억 원)를 조달했다. 블랙스톤은 이 돈을 바탕으로 더 많은 기업을 사들여 덩치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22년 전 블랙스톤이 불과 40만 달러로 출발한 점을 감안할 때 엄청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슈워츠먼이 상장을 결심한 계기 또한 KKR과의 경쟁의식 때문이었다. KKR은 2006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KKR이 운용하던 펀드 중 하나를 유럽 최대 주식시장인 유로넥스트에 상장시켰다. 이에 슈워츠먼은 선수를 빼앗겼다며 불같이 화를 냈고 자신이 운용하는 펀드가 아닌 블랙스톤 자체의 상장을 결심했다.

    운도 좋았다. 블랙스톤이 상장하던 2007년 6월은 리먼브러더스 파산이 촉발한 세계 금융위기의 핵폭탄이 터지기 불과 1년 전이었다. 1년 후 닥쳐올 파국을 인지하지 못한 월가에는 돈이 넘쳐났고 투자자들은 앞다퉈 블랙스톤 주식을 샀다. 금융위기 후 상장을 단행한 칼라일, 포트리스 등 다른 사모펀드들이 당초 예상보다 낮은 자금을 조달한 것과 대조적이다. 블랙스톤의 성공에 놀란 라이벌 KKR도 곧바로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상장신고서를 제출했지만 KKR의 상장은 무려 3년 뒤에나 이뤄졌다. 2008년 갑작스럽게 닥친 금융위기로 비싼 값에 주식을 팔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블랙스톤의 상장으로 슈워츠먼은 엄청난 부자가 됐다. 슈워츠먼은 상장 당시 자신이 보유한 블랙스톤 지분 중 5.7%를 팔아 단숨에 6억7720만 달러를 벌었다. 올해 3월 현재 슈워츠먼의 자산은 65억 달러(약 7조2150억 원)로 미국 52위 부자다. 슈워츠먼은 뉴욕 맨해튼의 최고 부촌 파크애비뉴의 방이 35칸이나 되는 초호화 펜트하우스에 살고 있다. 집 안에 사우나, 도서실, 11개의 벽난로, 13개의 욕실에다 모네 등 세계 유명 화가의 작품이 곳곳을 장식한 현대판 궁전이다. 그는 2000년 존 록펠러 주니어로부터 이 아파트를 3000만 달러에 구입했다. 현재 집값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올랐다.

    기부에도 열심

    상장 직전인 2007년 2월 슈워츠먼이 연 60세 생일파티는 성공한 사모펀드 업계 사람들이 얼마나 화려한 삶을 사는지를 잘 보여준다. 전설적인 팝 가수 로드 스튜어트가 열창하는 가운데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 존 코자인 전 뉴저지 주지사, 콜린 파월 전 국무장관 등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고 최고급 바닷가재 요리와 값비싼 샴페인이 넘쳐났다. 당시 로드 스튜어트가 30분 동안 노래 몇 곡을 부르고 받은 돈이 100만 달러(약 11억1000만 원), 생일잔치 전체에 들어간 돈이 300만 달러(약 33억3000만 원)에 달했다.

    그럼에도 슈워츠먼은 여전히 더 많은 돈을 갈구한다. 그에게 돈이란 단순히 성공의 척도가 아니라 자신의 승부욕을 충족해주는 ‘존재의 이유’와 같기 때문이다. 블랙스톤 상장 당시 한 지인이 슈워츠먼의 어머니에게 “당신 아들이 세계적 거부가 됐군요. 이제 그에게 돈은 더 필요 없겠죠?”라고 말하자 어머니의 답이 걸작이었다. “내 아들을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은 돈이에요.”

    슈워츠먼에게 따라붙는 ‘월가의 새 황제’라는 수식어가 칭찬만은 아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문 앞의 야만인’으로 불릴 만큼 사모펀드 업계의 수익창출 방식이나 경영자들의 호화로운 생활 행태가 일반인에게 탐욕스럽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슈워츠먼 역시 생일 파티로 33억 원을 쓰고 한 끼 식사에 3000달러(300만 원)를 대수롭지 않게 쓴다.

    하지만 그는 사모펀드 업계에 대해 거부감을 갖는 일반인이 있다는 점,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부유층의 활발한 기부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흔쾌히 인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슈워츠먼은 2008년 뉴욕공공도서관 확장을 위해 1억 달러를 냈고, 올해 4월에는 사재 1억 달러와 투자 유치한 2억 달러를 중국 베이징의 칭화대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 칭화대는 중국 이공계의 최고 명문으로 꼽히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모교다.

    슈워츠먼의 장학재단은 이제껏 중국에 설립된 장학재단 중 규모가 가장 큰 데다 중국인도 아닌 미국인이 만들었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장학재단 자문위원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1970년대 핑퐁 외교로 미국과 중국의 관계 개선에 크게 기여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 흑인 여성 최초로 미국 국무장관이 된 콘돌리자 라이스 스탠퍼드대 총장,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중국계 미국인 첼리스트 요요마 등이 그들. 이 자문위원단 역시 슈워츠먼이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구성한 것이다.

    슈워츠먼은 2016년부터 매년 미국 아시아 남미 등 세계 각지에서 200명의 학생을 장학재단을 통해 선발해 1년간 칭화대에서 석사 과정을 밟도록 지원할 예정이다. 또 50년간 1만 명의 유학생을 배출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슈워츠먼 장학재단이 롤모델로 삼은 장학재단은 영국 옥스퍼드대의 ‘로즈 장학금’이다. 로즈 장학금은 1902년 다이아몬드회사 ‘드비어스’의 창업자이자 정치가인 세실 존 로즈가 만들었으며 세계 각국의 총명한 학생들에게 영국 유학을 장려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슈워츠먼은 한 인터뷰에서 도서관 확장, 장학재단 설립 등 교육사업에 활발히 기부하는 이유를 “유대인 특유의 교육열이 작용한 결과”라고 밝혔다.

    세상의 많은 일이 그렇듯 자본주의도 양면성을 지녔다. 경제 발전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체제임은 분명하지만 빈부격차 등 자본주의가 일으키는 문제점도 많다. 현대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총아인 사모펀드는 자본주의가 지닌 양면성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모펀드 경영자들은 기업을 샀다 팔았다 하면서 수천억 원의 돈을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들이지만, 해당 기업 직원은 직장을 잃거나 월급이 깎이는 비운을 맞는다. 사모펀드 경영자들은 이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돈으로 호화롭게 생활해 비판받지만 또 그에 걸맞은 대규모의 자선 활동을 벌여 과도한 부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는다.

    싫든 좋든 우리는 사모펀드가 좌지우지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다. SC제일은행, 한미은행, 외환은행 등 한때 한국 금융을 책임졌던 은행들 또한 외환위기 이후 사모펀드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됐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다른 은행에 합병됐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 깊숙이 파고든 사모펀드 업계 종사자들을 단순히 ‘돈 많이 버는 사람’이나 ‘나와 별 상관이 없는 존재’로 인식하지 말고 이들의 행보를 주시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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