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11월호

“중국 눈치 보는 대한민국이 불쌍하다”

추방 위기 중국 반체제인사 쉬보의 3년 체한기

  • 글: 곽대중 자유기고가 bitdori21@kebi.com

    입력2002-11-05 09: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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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눈치 보는 대한민국이 불쌍하다”
    중국정부엔 ‘아홉수’가 있다고들 한다. ‘9’로 끝나는 해마다 큰 일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우선 1949년은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을 선포한 해로, 현 중국정부로선 기억하고 싶은 추억의 해다. 반면 그 이후 아홉으로 끝나는 해는 잊고 싶은 악몽의 날들일 것이다.

    1959년은 ‘대약진운동’이 절정에 달한 해다. 공업화 이전에 농업집단화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주장에 따라 농촌을 인민공사로 재편한 이 운동이 실패로 귀결되고 자연재해까지 겹치면서 최소한 2000만명 이상이 굶어 죽은, 중국 현대사의 비극적 장면 중 하나다.

    1969년은 홍위병을 앞세워 마오쩌둥의 노선에 반대하는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한 ‘문화대혁명’이 절정에 달한 해다. 1979년은 당시 29세의 공원(工員)이던 웨이징성(魏京生)의 반(反)공산당 격문으로 유명한 ‘베이징(北京)의 봄’ 민주화운동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주지하듯이, 1989년엔 중국 공산당을 집권 이래 최대 위기로 몰아넣은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있었다.

    이와 같은 ‘아홉수’의 싹을 잘라내고 싶었던 것일까. 1999년을 한 달 앞둔 1998년 11월30일 중국정부는 쉬원리(徐文立), 왕유차이(王有才), 천융민(秦永敏) 등 민주화운동가 10여 명을 일시에 체포구금했다. 쉬, 왕, 천은 이른바 ‘조당(組黨) 인사’로 1998년 6월 중국 최초의 야당인 ‘중국민주당’을 결성,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던 인물들이다.

    이들에겐 구금 이후 가족 면회가 허용되지 않았고 변호인도 없는 상태에서 재판을 치러 11∼13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죄명은 ‘국가전복기도 및 국가기밀누설죄.’ 재판은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으며 시종 삼엄한 경비속에서 취재진의 접근도 허용되지 않았다.



    체포된 사람 중 쉬원리는 ‘체제전복세력’ 중국민주당의 주석(主席)으로 발표됐다.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보면 ‘수괴(首魁)’인 셈이다. 그래서 쉬원리의 집은 체포 열흘 전 특별히 압수수색을 당했다. 중국민주당 관련문서는 물론 다수의 공산주의 비판 서적이 발각됐다. 구속을 각오한 쉬원리는 압수된 문건에 적힌 사람들에 대한 ‘정리작업’에 들어갔다. 전화와 인편을 통해 “빨리 몸을 피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홍색 파쇼’의 저자, 쉬보

    쉬원리의 메시지를 전달받은 사람 가운데 당시 37세의 청년이 있었다. 이름은 쉬보(徐波). 그는 가택수색이 있기 며칠 전 쉬원리에게 자신이 쓴 책의 원고를 맡겼다. 책 제목은 ‘홍색 파쇼(紅色法書斯).’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중국 공산당을 신랄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쉬원리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책에 이름이 쓰여 있지만 찾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니 그동안 중국을 떠나라”고 했다. 책 내용으로 볼 때 10년형은 족히 받을 것이라며 “당신은 젊으니 해외로 나가 중국의 인권상황을 세계에 알리라”는 말도 덧붙였다. 1998년 11월20일경이었다.

    쉬보는 곧장 여권 발급신청을 했다. 중국에서 여권이 나오는 시간은 신청 후 대략 한 달 정도. 그동안 공안당국의 수사망은 좁혀질 것이다. 하루 빨리 여권이 나와야 할 텐데…. 40일이 지나도 여권이 나오지 않자 혹시 당국에서 자신을 이미 파악한 게 아닌가 걱정됐지만, 해를 넘겨 1999년 1월10일 기다리던 여권이 나왔다. 여권을 받자마자 급하게 짐을 챙긴 쉬보는 홍콩(香港)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족에겐 잠깐 여행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홍콩행 비행기 안에서 쉬보는 생각했다. 어느 나라로 갈까?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는 게 중국의 인권상황을 알리면서 해외에서 중국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기에 유리하다. 더구나 미국엔 중국 민주화운동의 대부(代父) 웨이징성 선생이 있다.

    1979년 베이징의 봄 사건 이후 18년간 복역한 웨이징성은 현재 미국에 망명해 ‘해외중국민주연합(Overseas Chi nese Democracy Coalition, OCDC)’을 이끌고 있다. 유럽에도 민주화운동을 하다 망명한 사람이 많고, OCDC 지부도 몇 곳 있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은 비자를 얻기 어렵다. 일단 제3국으로 가 망명을 신청한 다음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미국이나 유럽으로 갈 발판이 될 제3국으로 어디가 좋을까? 망명신청을 잘 받아들이는 나라여야 한다. 문득 호주가 난민 인정에 관대하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호주로 가자.

    홍콩에 도착한 후 호주로 가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중국은 여행 법규상 개인의 독자적인 해외여행이 까다롭다. 집단으로 여행하는 팀에 끼어 해외로 나가는 게 수월하다. 10명이 채워져야 1개 팀이 된다. 그런데 이틀을 기다려도 호주 여행단은 10명이 채워지지 않았다. 거리에서 공안원을 보면 자기를 체포하러 오는 것 같아 불안하기만 했다. 내일이라도 당장 잡혀갈 판에 인원이 채워지길 기다린다는 게 무모해 보였다. 더구나 계절은 여행 비수기인 겨울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중국을 떠나야 한다. 그렇다면 어느 나라로 갈 것인가?’

    그때 쉬보의 눈에 띈 것이 한국으로 떠나는 여행단이었다. 여행사 깃발을 앞세우고 노란색 모자를 똑같이 쓴 모습이 활기차 보였다.

    한국! 쉬보의 머릿속에 한국에 대한 영상이 흘러갔다. 민주화운동을 하다 박해받고 쫓기듯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한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 위에 반세기 만에 기적적인 경제성장과 정치민주화까지 이뤄낸 나라! 반세기동안 공산주의 국가와 대치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어느 나라보다 자유민주주의 정신이 투철한 나라일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 한국이다!

    공항 내 여행사에 한국 여행 신청을 했다. 한국 여행단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인원이 채워졌다. 쉬보는 망설임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999년 1월27일 쉬보의 중국 집은 가택수색을 당했다. 쉬원리의 집에서 발견된 불온서적 ‘홍색 파쇼’의 저자를 드디어 찾아낸 것. 그러나 쉬보는 이미 한국에 있었다. 며칠만 늦었으면 꼼짝없이 잡혀갈 뻔했다.

    1월13일 쉬보는 김포공항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여행단에 끼어 서울 시내를 관광했다. 한국의 발전상은 역시 놀라웠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한밤중에도 환히 밝혀진 도시의 모습에서 ‘역동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기회를 봐서 대열을 빠져나와 망명 신청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중국 눈치 보는 대한민국이 불쌍하다”

    월세 20만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쉬보

    1월15일 여행단은 88올림픽이 열렸던 잠실종합운동장을 찾았다. 사람들이 각자 사진을 찍는 자유시간을 이용해 운동장 밖으로 나왔다. 미국대사관을 찾아가야겠는데 한국말을 한마디도 모르니 택시를 탄다 해도 갈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행인을 붙잡고 중국말을 아느냐고 물어봤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운이 좋았는지 화교(華僑)를 만날 수 있었고, 그가 택시운전사에게 말해주어 미국대사관까지 갈 수 있었다. 이제 바라던 바의 90%를 이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가 절망의 시작이었다.

    “미국대사관에 가서도 한참 만에야 통역할 사람을 찾았습니다. 과장급 정도로 보이는 사람에게 ‘나는 중국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체포될 위험에 처해 도망쳐 나온 사람’이라 소개하며 미국으로 망명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망명은 대사관에서 하는 게 아니라며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R)로 가라고 했습니다. 좀 허탈했지만 ‘그것이 절차인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서울시 중구 정동의 UNHCR 한국사무소를 찾았다. 다짜고짜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담당직원은 “UNHCR은 세계 난민을 보호·지원하는 기구이긴 하지만 특정 국가로 망명을 보내줄 수는 없다”며 “한국정부에 먼저 망명신청을 하라”고 했다. 여기저기 떠넘겨지는 기분이었지만 담당직원이 한국정부에 망명신청하는 절차를 자세히 가르쳐 줘 며칠 후 서류를 준비해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갔다.

    거부된 난민인정신청

    출입국관리소 담당직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먼저 한국에 어떻게 왔는지부터 물어봤다. 여행단에 끼어서 왔다고 하니 살짝 웃으며 중국에선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었다. 사실대로 자동차부품판매상을 했다고 답했다. 그랬더니 혹시 생계가 어려웠느냐, 불법취업을 하면 실정법에 어긋난다는 등 엉뚱한 말을 했다. 장사하는 사람이 무슨 민주화운동이냐고 무시하는 듯한 표정과 말투였다.

    “일단 서류는 접수하겠지만 한국정부는 지금까지 한번도 난민을 인정해본 적이 없다”며 담당직원은 돌아섰다. ‘지금까지 한번도’란 말에 앞이 캄캄해졌다. 혹시 농담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민주화운동을 했고 망명 경험이 있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서 난민을 인정한 적이 없다니….

    한국정부의 난민인정 절차는 길고도 지루했다. 1999년 2월8일자로 제출된 난민인정신청서가 ‘난민인정협의회’를 거쳐 통지가 오기까지 딱 2년이 걸렸다. 2001년 2월17일 대한민국 법무부장관에게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제야 됐구나’하는 부푼 기대에 열어본 서류봉투. 그러나 담겨있는 서류 상단엔 허가(acceptable)란 단어 대신 거절(refusal)이란 단어가 보였다. ‘난민인정불허통지서(Refusal notice on the recognition of refugee status)’였다.

    ‘귀하의 난민인정신청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사유로 난민인정을 하지 아니하기로 결정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사유-신청인이 작성했다고 주장하는 원고(原稿)가 발송되었는지, 서문립(쉬원리)이 그것을 수령했는지,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원고가 정부에 의해 실제로 몰수되었는지를 입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신청인이 박해받을 것이라고 인정할 수 없으므로 신청인의 난민인정신청 사유는 난민협약 제1조에 규정한 ‘박해를 받게 될 것이라는 충분히 근거 있는 공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없음.’

    이에 대한 쉬보의 반론은 이렇다. 먼저 법무부가 의심하는 것은 책으로 출판하려 한 ‘홍색 파쇼’의 원고가 정말로 쉬원리에게 전달됐는지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쉬보는 “쉬원리 선생은 감옥에 있으니 확인해줄 수 없어도 쉬원리 선생의 부인은 내가 책을 전달할 때 옆에 있었으니 증언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래서 난민인정 담당직원에게 쉬원리 선생의 집 전화번호도 가르쳐줬다. 한번 확인해 보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홍색 파쇼’가 쉬원리에게 전달됐다 하더라도 그것이 쉬원리 집에 대한 압수수색과정에 몰수됐는지 증명할 방도가 없다는 부분. 쉬보는 “1999년 1월27일 우리 집이 압수수색을 당한 걸 보면 ‘홍색 파쇼’가 중국당국의 손에 들어간 건 확실하지 않으냐”고 말한다.

    법무부는 일개 자동차부품판매상이 무슨 민주화운동을 했겠느냐고 하지만, “그렇다면 일개 자동차부품판매상의 집을 무엇 때문에 수색했겠느냐”고 쉬보는 반문한다. 그는 “중국의 우리 집에 전화를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텐데 한국정부의 관리들은 책상에 앉아 서류만 살펴볼 뿐 전혀 조사나 확인은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법무부가 제시한 난민인정 불허사유의 다른 하나는 ‘중국으로 돌아간다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느냐는 것. 이 부분에서 쉬보는 허탈하게 웃으며 “그럼 본국으로 돌아가 공안당국에 끌려가야만 한국정부는 그때서야 ‘탄압받는구나’라고 확인하고 다시 데려와 난민인정을 해줄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1998년 끌려갔던 중국 민주화운동가들이 체제전복을 모의했다는 심증만으로 11∼13년에 이르는 중형을 받았는데, 자신처럼 머릿속에 담긴 생각을 책이라는 물증으로 남겨 놓은 경우는 더 큰 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된 느낌이 없지 않지만, 쉬보는 “15년형은 족히 받을 것”이라 이야기한다. 실제로 현재 중국엔 3000여명의 정치범이 감옥이나 노동개조소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의 구속 이유는 대개 “공산당을 반대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쉬보는 한국에 온 이후 ‘라디오 프리 아시아(Radio Free Asia)’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등을 통해 ‘홍색 파쇼’의 주요내용을 소개했다. 이 방송들은 중국에서도 청취된다. 영국 BBC에도 쉬보의 사연이 소개됐다. 중국 땅을 밟는 순간 쉬보의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리란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다.

    법무부의 난민인정 불허통지에 대해 쉬보는 이의신청을 했다. 그러자 7개월 후 또 하나의 통지서가 날아왔다. 이통지서의 제목은 ‘Disapproval(불승인)’으로 시작됐다. 이의신청을 기각한다는 것. 기각 사유는 7개월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아무런 추가조사나 검토도 하지 않다 때맞춰 통지서만 보내준 것이다. 쉬보는 낙담했다.

    한국정부로부터 ‘우리는 당신을 절대 난민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최후통첩까지 받게 되자 쉬보는 대한민국에 체류할 근거를 잃어버렸다. 여지없이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다. 이젠 한국정부의 체포위협에 직면하게 됐다. 체포되면 중국으로 송환될 것이고, 그러면….

    다시 UNHCR을 찾았다. 희망은 그곳밖에 없었다. UNHCR의 난민인정 절차는 신속히 이뤄졌다. 서류심사와 면담절차를 거친 후 열흘 만인 2001년 9월18일 쉬보는 UNHCR로부터 난민인정서를 받았다. 체류중인 국가로부터 난민 인정을 받았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유엔의 보호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정한 난민을 UNHCR은 위임난민(mandate refugee)으로 인정해준다. 위임난민 판정을 받은 사람에 대해 체류국은 국가안보 또는 공공질서를 이유로 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추방해서는 안된다. 이는 유엔난민협약(1951)과 난민의정서(1967)에 명시된 내용으로, 한국은 1993년 3월 이 협약에 서명했다. 쉬보의 위임난민 인정 기한은 1년이다.

    사실 2년 동안이나 난민 인정 여부를 심사한 우리 정부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불안에 떠는 난민들에게 그 긴 시간 직업을 가질 자유도 주지 않은 채 무작정 ‘기다려라’는 것은 ‘어서 스스로 떠나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1999년 2월 한국 법무부에 난민인정신청서를 제출했던 당시 쉬보는 갈 곳이 없었다. 담당직원에 따르면 최소한 6개월은 걸릴 것이라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 땅에서 어떻게 기다릴 수 있을까. 처음 접한 한국음식에 아직 적응이 안됐을 뿐 아니라 식당에 가도 음식을 주문할 수조차 없다. 참으로 막막했다. 며칠 전 관광가이드가 ‘한국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라 소개했던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내려다보는 광화문 거리를 인파에 휩쓸려 정처없이 걸었다.

    지난 며칠간의 경험을 되짚어보니 ‘대한민국은 과연 지금 나를 위기에서 구해줄 수 있는 영웅의 나라인가’하는 의구심이 밀려왔다. 중국에서 갖고 나온 돈은 인민폐 1만위안(한화 약 150만원). 이 돈으론 석 달도 견디기 힘들 것이다. 몸이 움츠러들었다. 유난히 추운 그해 겨울이었다.

    며칠을 여관에서 지내다 할 수 없이 다시 UNHCR을 찾았다. 거처가 필요하다고 부탁했다. UNHCR은 자신들은 난민신청자를 보호할 만한 시설이 없다며 경기도 안산의 ‘외국인노동자센터’를 소개해줬다. 그곳에서 1개월을 보냈다.

    4월이 되자 드디어 생활비가 바닥났다. 노동자쉼터에 계속 신세를 지기도 미안했다. 일자리가 필요했다. 노동자센터에 부탁해 서울의 모여대 식당에 일자리를 얻었다. 오물을 치우고 설거지하고 바닥 청소를 하는 잡일이었지만 이국 땅에서 스스로 벌어 살 수 있다는 게 뿌듯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청소를 하다 손을 다쳐 일을 못하게 됐다. 두 달 만에 다시 안산으로 내려왔다.

    외국인노동자 쉼터에 있을 때 서울 명동에 대만 국민당 사무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곳에 가면 중국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무작정 명동으로 갔다. 중국인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에게서 생계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일을 전해들었다.

    최목사와의 인연

    “그때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최목사님을 만나기 전이었지요. 6개월 동안 한국내 중국인들을 상대로 공중전화카드를 판매하고, 컴퓨터도 가르쳐주고, 식당 일도 했습니다. 잠자리는 여관방을 전전했는데, 싸고 허름한 곳을 찾아가면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중국사람이 왜 여기 왔느냐며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쉬보가 말하는 ‘최목사’는 서울조선족교회 최황규(39) 부목사다. 쉬보는 그를 1999년 12월 이화여대에서 열린 ‘북한 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에서 만났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 난민문제와 관련한 국제회의가 열린다는 것을 알았고, 그곳에 가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도움을 받을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자리는 난민 중에서도 ‘탈북(脫北)난민’에 대해서만 토론하는 자리였다. 자신의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때 유일하게 쉬보에게 관심을 가져 준 사람이 최목사였다. 쉬보는 초면에 대뜸 “나를 먹여주고 재워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최목사는 쉬보를 집으로 데려가 그날부터 6개월간 함께 살았다.

    최목사는 쉬보를 처음 봤을 때 ‘평범한 불법체류자’라고 생각했다. 조선족교회에 있기 때문에 중국동포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주는 게 그의 주임무라 할 수 있는데, 중국어를 모르는 최목사는 쉬보의 하소연을 여느 불법체류 외국인의 “갈 곳 없으니 나를 좀 살려달라”는 말쯤으로 여겼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 중국동포에게 통역을 부탁해 사연을 들어본즉 이 청년은 자신이 ‘중국 민주화운동가’란다. 더구나 “중국으로 가게 되면 감옥에서 15년은 족히 살게 될 것”이라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런단 말인가. 이때부터 최목사의 ‘쉬보 탐색전’이 시작됐다.

    최목사는 우선 “너를 곤경에 빠뜨린 그 책을 한번 보자”고 했다. 원고지 몇 장 정도일 것이라 생각했던 책은 A4용지로 무려 535쪽에 달했다. 그것도 타이핑을 한 게 아니라 작은 글씨로 직접 쓴 것이었다. 목차를 보니 16개의 장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고, 내용 곳곳에 각종 자료를 스크랩한 것도 보였다. 언뜻 봐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것이 정말 네가 쓴 것이냐”고 물으니 직접 글을 써보였다. 필체가 같았다. 쉬보가 쓴 책이 틀림없었다.

    중국동포를 불러 책을 보여주고 내용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돌아온 답은 “큰 일 낼 책”이라는 것이었다. ‘우연찮게 참 대단한 사람을 만났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최목사는 그를 ‘쉬보 선생’이라고 불렀다. 낱장으로 된 원고를 책으로 묶으니 백과사전 한 권 정도의 두께였다. 그것을 5권 복사해 두었다.

    ‘홍색 파쇼’는 중국 공산당의 허위와 기만을 고발한 책이다. 중국 공산당이 인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 사실을 왜곡·과장한 것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쉬보는 중국 공산당이 건국 이전 일본군과 맞서 싸우면서 이룬 전과(戰果)를 과장한 것을 든다.

    “중국 공산당은 일본군과 싸워 50만 명 이상을 죽였다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내가 공산당의 여러 기록을 정리해본 바에 의하면 당시 홍군(紅軍: 1930∼40년대 중국 공산당이 지도했던 군대)은 약 4만명을 죽였을 뿐입니다. 항일전쟁 당시 실제로 주축이 됐던 부대는 국민당 부대였습니다.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다고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되죠. 이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저는 중국정부에 가장 크게 실망했습니다.”

    “전과가 과장됐다 하더라도 싸우지 않은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쉬보는 “거짓말을 일삼는 정권에겐 희망이 없다”고 대답했다. 더구나 ‘인민’을 앞세우는 사회주의국가가 그런 식으로 인민을 우롱하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는 “공산당은 종국에 행복을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재앙을 가져다줄 것”이라면서 “중국 민주화운동을 통해 이런 왜곡을 바로잡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인민의 이익을 지켜낼 것”이라 말했다.

    개인적 체험에서 비롯된 ‘투쟁’

    쉬보의 법적인 나이는 33세다. 외국인등록증과 여권, UNHCR의 난민인정서 등에도 1970년 12월2일생으로 돼 있다. 그러나 실제 그가 태어난 해는 1961년. 여기엔 사연이 있다. 쉬보는 중국 남서부에 위치한 구이저우(貴州)성 구이양(貴陽)시에서 태어났다. 구이양시는 ‘녹색도시’란 애칭대로 자연풍광이 빼어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는 찬사를 받는 곳. 그곳에서 그는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모두 의사이며, 누나도 의사, 매형도 의사다. 큰형은 행정공무원으로 한국의 서기관급에 해당하며 형수도 공무원이다. 그래서 가정형편은 유복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형제가 모두 대학을 나왔지만 혼자 전문학교를 나와 한국의 농협과 비슷한 궁샤오사(供銷社)에 근무하던 쉬보는 뒤늦게야 대학진학을 결심한다. 그러나 25세 이상은 입학이 불가능한 규정이 앞길을 가로막았다. 할 수 없이 호적을 고쳐 나이를 열 살이나 낮춰 구이저우 차이징(財經)대학교에 입학했다. 1988년이었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1987년이 ‘누구나 거리로 나와 시위에 참가했던’ 해라면, 중국 대학생들에겐 1989년이 바로 그런 해다. 구이양시 역시 그런 흐름에 예외는 아니어서 연일 집회가 열렸고 쉬보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른바 주동자는 아니었다. 그는 “그저 열심히 시위대를 쫓아다니는 평범한 학생들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쉬보는 시민들 앞에서 육성으로 즉석 연설을 하며 박수를 받던 그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탱크와 군화발에 시위가 진압되고 1만2000여 명의 학생이 구속됐다. 다른 학생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쉬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992년 학교를 졸업했다. 무슨 일을 할까 고민하다 샐러리맨으로 살기는 싫어 부모의 도움을 얻어 자동차부품판매회사를 차렸다. 회사를 운영하며 쉬보는 중국사회의 부패상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중국 공산당은 자유경쟁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론 자유경쟁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있지 않습니다. 사업을 하려면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하고 어떻게든 공무원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중국 공산당은 부패를 척결한다고 떠들지만 실제 가장 큰 부패는 공산당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이런 점들을 고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도서관을 오가며 중국정부가 발간한 각종 문헌을 검토했다. 신문·잡지를 빠짐없이 읽고 중요한 내용을 기록해두었다. 이렇게 1년 동안 집필한 끝에 1998년 5월, 원고 맨 앞장에 ‘홍색 파쇼’란 제목을 붙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로지 혼자 힘으로 이뤄낸 성과물이다.

    원고를 마무리하긴 했는데 이것을 어떻게 책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가 막막했다. 그러던 중 ‘미국의 소리’ 방송을 듣다가 홍콩에 반(反)공산당 잡지인 ‘개방(開放)’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7월에 여행 삼아 홍콩으로 가 ‘개방’ 편집장 진중(金鐘)을 만나 원고를 보여주며 출판을 의뢰했다. 진중은 그에게 “베이징에 있는 쉬원리 선생과 상의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쉬원리를 만났고, 이때 ‘홍색 파쇼’ 원고 복사본을 전했다. 얼마 후 가택수색을 당하면서 이 책은 중국 공안당국의 손에 들어갔고, 결국 쉬보로 하여금 대한민국에서 ‘투쟁’하게끔 만들었다. 쉬원리를 만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느냐는 질문에 쉬보는 “중국 민주화운동의 큰 지도자를 만나게 돼 영광이었고 지금도 그를 존경한다”고 답했다.

    현재 쉬보는 월세 20만원짜리 반지하 단칸방에서 살고 있다. 눅눅한 습기가 느껴지는 그의 방에 들어서면 컴퓨터와 팩스, 그리고 자신의 각오를 적어 놓은 글귀가 눈에 띈다. 책장 옆엔 한국어 낱말을 적은 쪽지를 가지런하게 붙여놓았다. 그는 요즘 모대학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중이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 중국 민주화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수정하고, 중국 민주화운동의 해외 근거지를 한국에서 확보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이다.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한국어로 간단한 대화도 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중국과 지리적·역사적으로 가까운 한국이야말로 중국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해외 근거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월22일 쉬보는 미국에 있는 ‘해외중국민주연합’ 본부의 웨이징성 주석으로부터 한국지부장으로 임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의 작은 방은 개인의 거처이자 ‘해외중국민주연합 한국지부’ 사무실이기도 하다. 쉬보는 이곳에서 하루종일 책을 읽고 웹 검색을 하면서 공부하는 한편 ‘해외중국민주연합’ 각 지부와 팩스를 주고받으며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에 올 때는 혼자였지만 이젠 든든한 ‘동지’들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지난 8월22일. 늘 ‘거절’과 ‘불승인’의 소식만 전해주던 한국정부로부터 뜻밖에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시가 외국인을 상대로 실시한 ‘제2회 사이버토론회’에서 대상 수상자로 선정된 것이다. 쉬보는 이 토론회에 그동안 한국에 살면서 느낀 점을 정리한 ‘한국의 발전전망’과 ‘서울시 발전을 위한 건의’란 제목의 논문을 2편 제출한 바 있다. 들뜬 마음으로 9월5일로 예정된 시상식을 기다렸다.

    시상식 날 깨끗하게 옷을 차려입고 기다리는데 서울시 공무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상식이 취소됐으니 올 필요가 없다는 것. 받게 될 상금은 차후 전달하겠다고 했다. 처음엔 그저 사정상 시상식을 생략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상 수상자 쉬보’ 때문에 취소된 것이었다. 쉬보가 대상을 받게 되면 중국과 불편해질 것이라 생각한 국가정보원이 시상식을 취소하도록 서울시에 권고한 것이다.

    “내 경력을 모르고 대상 수상자로 선정한 서울시가 아마도 무척 난감했나 봅니다. 나중에 담당직원에게서 전화가 와 만나자고 하길래 나가보니 상금이 든 봉투를 건네며 ‘축하한다, 이것으로 마무리하자’고 하더군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통장으로 상금을 입금했지만 그렇게 하면 흔적이 남으니 내겐 현금으로 직접 지급한 겁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과연 이 정도로까지 중국정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나 싶어 조금 불쌍했습니다.”

    참다 못해 녹음 내용 폭로

    지난해 9월18일 UNHCR로부터 받았던 쉬보의 위임난민 인정 기간은 1년. 그 이후론 또다시 불법체류자가 돼 추방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올해 9월18일을 앞두고 서울출입국관리사무소를 여러번 찾았다.

    그의 주장은 역시 “한국정부가 망명을 허가해달라”는 것.

    그러나 담당직원은 번번이 “당신은 난민이 아니다”는 말만 반복했다. 자꾸 찾아가 따지니 한국의 관련 법규를 보여주며 “당신이 계속 그런 식으로 하면 우리도 법에 따라 집행할 수밖에 없다, 법에 따르면 당신은 강제추방하게 돼 있다”고 협박했다. 너무도 화가 난 쉬보는 다음에 갔을 때 담당자의 말을 녹음해 언론에 공개했다. 다음은 녹음 내용 중 일부.

    쉬보: 나는 중국 민주화발전을 위한 성원(成員)이다. 따라서 현재 중국 민주화운동을 하고 있다.

    담당자 : 내가 예전에 말했다. 한국 법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외국사람이 정치운동을 하면 안된다.

    쉬보 : 내가 그 일을 계속한다면 어떠한 처벌을 받게 되는가?

    담당자 : 만약 당신이 계속 정치운동을 하게 되면 나는 당신을 중국으로 강제추방할 것이다.

    이 녹음 내용이 공개되자 담당자는 보도자료를 통해 “법규와 관행을 알려준 것에 불과하므로 압박이나 위협적인 발언이라 할 수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녹음된 내용을 들어보면 다분히 고압적으로 발언한 것임에 틀림없다. 더구나 아무리 원칙과 법규에 따라 일하는 공무원이라 할지라도 추방되면 혹독한 탄압을 받게 될 도망자에게 ‘강제추방’을 강조하는 것에는 다분히 감정이 실려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출입국관리사무소 관계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쉬보가) 톈안먼 민주화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주장하는데 그는 그런 적이 없으며 심지어는 중국의 주요 반체제인사의 이름조차 모른다”며 쉬보가 과연 중국 민주화운동가가 맞는지 의문스럽다는 요지로 흠집을 냈다. 그러나 쉬보는 톈안먼 민주화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대학에 다닐 때 톈안먼 사태가 일어나 자연스럽게 참여했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중국 주요 반체제인사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담당자의 말도 실소를 자아낸다. 주요 반체제인사의 이름을 모르는 것과 정치적으로 탄압받고 있다는 것에 무슨 연관이 있는가. 담당자는 꼭 무슨 거대한 조직에 소속되고 굵직한 직책을 맡았던 사람만 정치적 난민으로 인정할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DJ에게 항의서한 전달

    이 소식은 미국에 있는 웨이징성에게도 전달됐다. 올해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추천된 웨이징성은 쉬보를 대하는 한국정부의 태도를 전해듣고는 고개를 저으며 믿지 않았다고 한다. “김대중씨가 대통령으로 있는 나라에서 설마…”하며 말이다. 그러다 자세한 소식을 안 뒤로는 격분하여 얼마 전 김대중 대통령에게 항의서한을 전달했다.

    이 서한은 “쉬보가 중국으로 돌아가면 탄압받는다는 것은 내가 잘 알고 있으며, 그는 중국 민주화운동가임이 확실하다”고 확인해주는 내용과 함께 “탈북자를 송환하는 것에 반대하는 한국정부가 비슷한 처지에 처해 있는 중국 민주화운동가를 본국으로 추방하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란 주장을 담고 있다.

    그런데 쉬보는 여전히 난민 인정을 받지 못한 채 3개월간의 체류연장 허가만 받았다. 오는 12월18일까지만 체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또다시 체류연장 허가를 받아야 하고, 3개월에 한번씩 출입국관리사무소를 찾아가야 한다. 매번 쉬보와 한국정부의 입씨름은 되풀이될 것이다. 그러다 만약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체류연장을 허가해주지 않는다면 그는 곧장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

    취재중 만난 한 정부 관계자는 “쉬보가 중국 민주화운동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우리도 알고 있다. 그가 중국으로 돌아가면 탄압받을 것이라는 것도 알지만 중국과의 관계 때문에 그의 망명신청을 받아줄 수 없다”고 털어놨다. “그럼 쉬보에게 솔직히 그렇게 말해주면 되지 않는가”라고 되물으니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는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겐 강한 것. 이것이 대한민국 인권 외교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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