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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 분석

‘굴신의 달인’, 13억을 움켜쥐다

21세기 중국의 새 황제 후진타오

  • 글: 홍순도 문화일보 베이징특파원 mhhong@munwha.co.kr

‘굴신의 달인’, 13억을 움켜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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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공식 후계자로 무난히 권좌를 물려받은 다음 임기를 마칠 최초의 최고 권력자가 될 것으로 기대되는 후진타오가 금세기 최초 전당대회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히게 된 것은 거저 얻어진 결과가 아니다. 그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는 얘기다.

가장 평가받아야 할 대목은 무엇보다 튀지 않으려는 후진타오 자신의 노력이다. 토사구팽이라는 말에서 보듯 천하를 통일한 한(漢)의 유방(劉邦)에게 하나씩 제거된 한때의 2인자였던 한신(韓信), 장량(張良), 소하(蕭何) 등이나 류사오치 같은 선배들의 한결같은 비극의 원인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

그는 차기 지도자로 떠오른 지난 1992년 이후 이미 이날을 대비하여 은인 자중해왔다. 이에 대해 베이징의 정치 평론가들은 “그는 지난 10여년 동안 자신을 한없이 낮췄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같이 평탄한 대권쟁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며 그의 이유 있는 굴신(屈身)을 높게 평가했다.

특히 그는 모나지 않은 돌이 되기 위한 케이스 스터디도 적지 않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를 들면 중국 내에서는 마오쩌둥보다 늦게 세상을 떠났더라면 권력을 잡았을 것으로 평가받는 2인자학의 교과서 저우언라이 전 총리, 대만에서는 굴신의 미학을 보여준 리덩후이(李登輝) 전 총통을 벤치마킹했다는 것이 분석가들의 주장이다. 그는 리덩후이의 처세를 높게 평가했는데, 리 전 총통은 80년대 행정원장 시절 전임 총통인 장징궈(蔣經國)와 독대시 언제나 딱딱한 의자에 엉덩이를 반만 걸친 채 ‘나는 전혀 야심 없는 당신의 충직한 신하’라는 믿음을 아예 몸으로 실천했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굴신에 도움이 된다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는 차기 당정 최고지도부 인선 문제를 논의한 지난 8월의 베이다이허(北戴河)회의. 당정의 원로 및 최고 지도부 전원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장주석이 권력 일선에서 전퇴(全退·완전 은퇴)할 것인가 반퇴(半退·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리는 유지하는 절반의 은퇴)할 것인가에 관한 격론이 벌어졌다. 분위기는 당연히 이른바 제4세대 지도자들에게 권력을 대거 이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그런데 후진타오가 극도로 말을 아끼던 평소와는 달리 장주석이 절대로 은퇴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강력히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굴신의 처세에 능한 그가 아니면 도저히 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뿐만이 아니다. 그는 장주석이 부시 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과 APEC회의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10월29일 열린 귀국 환영식에서도 이같은 요지의 주장을 장주석에게 재차 피력, 마지막까지 굴신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 타고난 천재성

노인 정치로 유명한 중국에서 젊은 정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게 된 후진타오는 1942년 12월에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났다. 일부 외신은 그의 원적이 안후이(安徽)성 지시(績溪)라는 사실을 근거로 지시 출신이라고 보도했으나 상하이설이 유력하다. 신상에 대해 널리 알려진 바가 없는 부친 후쩡위(胡增玉)는 차(茶)를 팔던 소상인이었다. 혁명원로 및 고위층의 자녀들을 일컫는 태자당(太子黨) 출신이 당정의 고위직을 독차지하는 중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출신 성분은 썩 좋은 편이 못 됐다.

그의 유년기는 동시대 사람들보다 더 불우했다. 부친이 상하이에서 호구지책을 위해 그나마 괜찮았던 차 판매업이 완전히 망하는 바람에 장쑤(江蘇)성 타이저우(泰州)로 야반도주와 다름없는 이주를 하는 등 어릴 때부터 쓴맛을 많이 봤던 것이다. 게다가 토산품 가게 점원이 된 부친의 수입은 변변치 못했고 그 어려움 속에서 미인이란 평판이 자자했던 모친이 병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천재성을 타고난 행운아였다. 환경은 불우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특유의 총명함으로 주위의 찬탄을 한 몸에 받았다는 것이 중국 언론의 전언이다. 후진타오의 천재성은 그가 전혀 기죽지 않은 채 비교적 좋은 환경의 동급생을 가르치면서 줄곧 학비를 벌었다는 일화에서 확인된다. 그가 1959년 명문으로 손꼽히는 칭화(淸華)대 수리공정학과에 동급생들보다 1∼2년 앞서 입학한 사실은 그의 고향 일원에서는 그리 놀랄 만한 사건이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아픔도 있었다. 상당히 우수한 실력임에도 좋지 않은 출신 성분 탓에 당시의 인기학과였던 건축학과나 기계학과 등에 지원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대학 합격과 동시에 그는 곧장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현재 자신의 최대권력 기반이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공청단)에 가입, 칭화대 지부 문화공작단 서기라는 중책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특히 사교춤에 능해 그리 많지 않은 여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고 한다.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2세 연상의 부인 류융칭(劉永淸)은 이때 만난 동급생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5년 학창 생활을 마친 그는 학교에 그대로 남아 졸업생 중 몇 안되는 정치 보도원(輔導員)으로 일하는 기회를 잡았다. 평소에 그의 성실함을 눈여겨본 학교측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탓이다. 여기에는 졸업 전해에 가입한 공산당 당원 신분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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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순도 문화일보 베이징특파원 mhhong@munwh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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