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시사 포커스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노동자 대통령 룰라의 거대한 실험

  • 글: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2/6
상투스로 이사를 온 뒤 3년 동안 룰라는 빈민가 소년이라면 누구나 겪었을법한 일을 죄다 경험한다. 우선 축구에 몰입했다. 축구는 당시나 지금이나 가난한 소년들이 꿈꾸는 유일한 탈출구다. 둥근 공 하나면 가난이나 궁핍으로 인한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만약 눈에 띄어 프로팀에 진출이라도 할 수 있으면 팔자를 고칠 수 있는 마법의 공이기도 했다. 상파울루 시민의 영원한 고향 코린티안 팀 선수가 되는 것, 또래 아이들 모두가 그런 꿈을 꾸었다. 룰라도 성모 마리아와 오리샤(아프리카 정령신앙의 신들로 가톨릭의 성인 숭배와 결합되어 있다)에게 열심히 기도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가계에 보탬이 되기 위해 땅콩과 타피오카, 오렌지를 팔러 시내와 해변을 돌아다녔다. 그 와중에도 룰라는 글자를 읽고 쓰는 법을 깨쳤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거리의 학교’에서 인생을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1956년 가족들은 상파울루 시의 이피랑가 빈민가로 이사를 했다.

룰라는 어느새 의젓한 11세 소년이 돼 있었다. 염색공장과 전화회사의 급사로 취직했지만 오래 가진 못했다. 구두닦이도 했다. 14세가 된 룰라가 일궈낸 최초의 작은 승리는 콜룸비아 백화점의 일자리였다. 난생 처음 자신의 책상에 앉아 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에 얻은 직장인 파라푸주스 마르치 공장은 미래에 대통령이 될 소년에게 또 한번 도약할 기회를 주었다. 그곳에서 그는 국가가 기능공을 신속하게 양성하기 위해 만든 전국직업학교(Senai)의 선반기계공 양성과정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브라질 노동자당 연구로 명성이 높은 정치학자 마가렛 켁 교수(존스홉킨스 대)는 당시 분위기를 이렇게 전한다.



“룰라에게 거대한 ABC(상투 안드레, 상투 베르나르두, 상 카에타누의 약자로 상파울루 근교 공단 지역을 말한다) 공장들은 신분상승의 기회를 의미했다. 그곳에는 노동자 계급의 엘리트들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대 쿠비세키 정권이 다양한 산업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나아가 1964년에 성립된 군정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경제성장에서 찾고자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고 ABC공단도 그만큼 바빠졌다. 룰라는 어떤 의미에서 군정이 만든 상황 속에서 기회를 찾은 역설의 인물이기도 하다. 켁 교수의 말은 이어진다.

“사회적 이동이 잦은 시기였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계급 하층이 될 수 있는 시기였다.”

드디어 룰라는 선반공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직장을 얻는다. 구두닦이 소년이 일군 결코 작지 않은 성과였다. 그는 예쁜 아가씨를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사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룰라가 엿본 브라질의 꿈은 그리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그에겐 시련이 가로놓인 앞날이 열려 있었던 것이다. 18세가 된 어느 날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힘겹게 작업을 하다 왼손이 기계에 끼어버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잘린 손가락은 그에게 닥칠 시련의 세월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형의 투옥으로 세계관이 변하다

1964년 브라질 군정이 들어서기 전 몇 년간은 혼란의 시기였다. 정치세력은 좌우로 나뉘었고, 시가지는 연일 데모대로 들끓었다. 마리겔라를 위시한 과격화된 학생운동 세력 일부는 도시 게릴라가 되기도 했다. 민족해방연합(ALN)은 미국 대사를 납치하고 기업인을 인질로 잡기도 했다. 브라질 사회는 끓어 넘쳤다. 군부 엘리트들은 이 모든 혼란을 종식시키고자 탱크를 몰고 시가지로 나왔다. 그들은 질서당의 최후 보루였다. 브라질 국기에 그려져 있는 ‘질서와 진보’(Ordem e progresso)를 확고하게 믿는 실증주의적 진보 관념을 20세기까지 밀어붙여 온 콩트의 진정한 제자들이기도 했다. 프랑스 철학자 콩트는 대서양 너머 브라질에서 배신을 모르는 충성스런 신도들을 얻었던 것이다.

군정은 노동자들에겐 악몽의 시대였다. 이 시절 룰라는 가정적으로도 행복하지 못했다. 1966년 군정이 확고하게 질서를 잡았을 때, 그는 금속산업 공단지역이던 상베르나르두 두 캄푸에 있던 인두스트리아스 빌라리스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시절 우연히 만난 마리아 데 루르디스와 연애를 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1969년의 결혼으로 이어졌다. 그가 꿈꾸던 행복한 가정이 이제 손안에 들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행운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오리샤의 장난이었을까? 루르디스는 1년 뒤 임신을 했지만 몸이 자주 아파 입원을 했다. 헤파티티스를 앓고 있었지만 공공병원의 어느 의사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룰라는 의사의 실수로 손가락에 이어 부인과 첫아이를 잃게 된다. 룰라에게 닥친 최초의 큰 시련이었다.

이어 간호사와 잠깐 동거하면서 딸 루리안을 낳았지만 결혼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노동자 세계에선 빈번한 일이었다. 그러다가 마리사 레티시아 다 실바를 만났다. 아들이 하나 딸린 이혼녀인 그녀와 룰라는 마침내 결혼을 하고 아이도 셋을 더 낳았다. 가정은 이제 안정을 찾는 듯했다.

인두스트리아스 빌라리스 시절 룰라는 형 프레이 쉬쿠의 권유로 상베르나르두 두 캄푸의 금속노조에 가입했다. 상베르나르두는 룰라의 제2고향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노조와 정치의 세계에 입문했고 후일 브라질 정치를 바꾸는 노동자당과 제2노총인 CUT를 창설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모범 노동자 룰라였다.

그는 마르크스, 레닌, 트로츠키의 이름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렇지만 동료들 사이에선 인기가 높았다. 1950~60년대 산업화로 탄생한 이 노동자들은 공산당이나 신좌파 세력들이 치고 받고 싸우는 이념투쟁에 탐닉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였다. 1969년 그는 금속노조의 지도부에 참여했다. 룰라는 타고난 언변으로 협상 테이블에 앉았고 경영주 앞에서 노동자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그렇지만 아직 이념이나 신념에 뿌리를 둔 행동가는 아니었다.

그의 세계관에 큰 변화가 온 것은 형인 프레이 쉬쿠가 노동운동을 하다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다. 쉬쿠는 공산당에 연계된 노동운동가였다. 그 이유로 군정은 그를 고문했고 감옥에 넣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군정을 증오하게 되고 차차 정치화했다. 전기는 이 시기를 이렇게 전한다.

“당시 노조를 장악하려는 엄청난 내부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룰라는 모두가 놀랄 만한 일을 이룬다. 급진파나 온건파 모두가 그를 지도자로 추대한 것이다. 1975년에 첫 번째 당선에 이어 1978년 두 번째 금속노련 의장에 98%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군정이 주도한 중화학 공업화는 이른바 ‘브라질의 기적’을 낳았지만 후반에 들어서는 점차 균열 조짐을 보였다. 경제관리에 어려움이 가중되자 피게이레두 정부는 스스로 정치 일선에서 퇴각하는 ‘통제된 재민주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이런 와중에 1978년 정부가 물가지수를 조작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고, 이에 상파울루 지역의 금속노동자들이 주도한 파업이 발생했다. 당시 임금은 물가지수에 연동되어 산출되고 있었기에 노동자들은 지수 조작을 간과할 수 없었다. 파업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노동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거리에 나섰다. 룰라는 당연히 파업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2/6
글: 이성형 세종연구소 객원연구위원
목록 닫기

“빈민에겐 밥을, 남미에는 희망을”

댓글 창 닫기

2019/1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