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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필립 시인의 시드니 통신

호주이민 성공列傳

사흘 용접하고 나흘 골프치는 남자, 아이들이 행복해 더 행복한 여자

  • 글: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호주이민 성공列傳

2/10
[후배 K에게,

맹하게 꽃들만 지천으로 피워놓은 시드니에서 나는 통곡한다.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딱 한 가지 ‘서울의 가을’만큼은 죽어서도 잊지 못할 것이다.

너는 모른다. 서울의 가을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겨운지를. 붉게 물든 활엽수들로 치장한 수락산과 송추계곡이 세계 3대 미항 운운하는 시드니 하버보다 더 아름답다는 것을.

K야, 큰 서점들이 있던 종로거리와 가난한 시인들의 아지트였던 인사동 골목의 정취를 차마 잊을 수가 없구나. 보도블록 위에 나뒹구는 노란 은행잎을 주워들고 초저녁부터 선술집에 들르던 추억, 서울의 가을 때문에 나는 한동안 앓아야만 할 것 같다.

K야, 넌 서울의 가을 속으로 걸어갈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나보다 백 배 천 배 행복한 남자다. 계절이 수없이 바뀌어도 찬술 한 잔이 없는 시드니에서 詩가 운다.]



가끔은 자기가 써놓은 글에 취해서 맥없이 우울해질 때가 있다. 지극히 감상적인 편지를 후배에게 보내놓고, 건강 때문에 절제하고 있던 술까지 한 잔 기울이고 나서 ‘가을 편지’라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 때문이었을까. 필자는 실제로 ‘가을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게 종로거리의 은행잎까지 곁들인 종이 편지였으면 좋으련만, 컴퓨터 모니터에서 깜박거리는 커서를 따라 읽어야 하는 이메일이었다.

게다가 ‘가을 편지’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민망할 정도로 삭막하기 그지없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가 늘 사용하던 ‘바다 건너에 사는 선배에게’라는 머리말도 생략된 ‘반박성명서’ 같은 K후배의 이메일.

[선배는 참 한심하오. 지금 서울이 어떤 지경인데 ‘서울의 가을’ 운운하면서 사람 열받게 만드는 겁니까.

지금 서울엔 선배가 말하는 가을 같은 거 없어요. 곧 겨울이 올 텐데, 석유값까지 올라 아파트 관리비 엄청 나오겠다는 걱정과 긴 한숨만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시인들이 가까이 있는 사물이나 현실보다는 멀리 있는 이미지와 관념을 조준하는 경향이 있다지만, 선배는 해도 너무한 것 같습니다. 서울 쪽 뉴스는 아예 보지도 않고 삽니까?

길게 말할 것 없고, 나는 12월 말일까지만 직장에 나갑니다. 자진해서 그만두는 게 아니고 잘리는 겁니다. 선배는 ‘사오정’이란 말 들어봤어요?

나도 호주로 이민 갈 겁니다. 선배만 믿고 있으니까, 봄이니 가을이니 하는 개똥 같은 얘기는 그만 하시고 이민수속에 필요한 정보나 좀 보내주세요.]

절교로 끝난 이민논쟁

후배의 편지는 무례하다 못해 모욕에 가까웠다.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괘씸한 생각보다는 후배의 처지가 궁금해졌다.

그를 어떻게 위로하고 도와야 할지 막막했다. 20년 가까이 이민생활을 하고 있는 필자이지만, 이민절차에 관해 아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너무나 갑작스런 상황이라 그의 이민을 도와야 하는 건지 말려야 하는지조차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제나처럼 아내에게 자문을 구했다.

아내의 첫 반응은 “후배를 잘 달래보라”는 것이었다. “실패라곤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라 상대적으로 상처가 컸던 것 같으니 홧김에 일 저지르지 말도록 다독여줘야 한다”는 것.

마침내 IT(정보기술)전문가로 대기업에 근무하는 K후배와의 길고 긴 ‘이민논쟁’이 시작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메일이 오갔고, 필자의 휴대전화는 한순간에 이민 컨설턴트의 도구가 되었다. 필자는 팔자에 없는 이민전문가(?)가 되어 각종 이민관련 법조문과 사례를 모아서 이메일로 보냈고, “이런 건 나도 다 알아요. 뭐 새로운 뉴스 좀 없어요?”라는 후배의 퉁명스런 전화를 수도 없이 받아야 했다.

그는 이미 여러 권의 이민관련 책자를 독파한 상태였고,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정보들을 모아서 몇 개의 파일을 만들었다고 했다. 이민설명회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가해 새로운 정보를 챙기는가 하면, 필자말고도 다른 사람과의 이메일을 통해서 이민정보를 얻는 중이었다.

후배와의 이민논쟁은 시작부터 중구난방이었다. 피차 전문성이 없는 탓도 있지만, 이민을 말리고 싶은 필자의 입장과 하늘이 두 쪽 나도 이민을 결행하겠다는 후배의 강한 의지가 사사건건 부딪쳤기 때문이다. 보통 한 시간씩 이어지는 국제전화로 거친 말들이 오갔고, 급기야 후배로부터 절교편지를 받게 됐다. 허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자는 그의 절교편지에 답장을 쓰면서, 1995년에 펴낸 산문집 ‘시드니에는 시인이 없다’ 중 ‘잘못 든 길이니 돌아가시오!(Wrong Way. Go Back!)’라는 글의 한 대목을 인용했다. ‘Wrong Way. Go Back!’은 호주의 길거리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도로표지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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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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