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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⑧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上

넝마주이 망태 속에 피워낸 민족문학의 꽃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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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上

작가 김달수는 단 한번도 한국 이름을, 한국인임을 거부한 적이 없다.

“오키나카시가 인간이냐?”

“1976년 12월14일자 아사히신문 투고란에 김경득(金敬得)이라는 27세 청년이 ‘변호사로 인정해달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나 김경득은 일본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이다. 올해 사법시험에 합격했으나 최고재판소(대법원)로부터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사법수습생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귀화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내 안의 ‘한국적인 것’을 거부해왔다. 한국말 배우는 것도 거부하고, 길에서 어머니를 마주쳐도 모르는 체 지나쳤다. 주위의 누군가가 내가 한국 핏줄인 것을 알까 두려웠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할 무렵 재일한국인인 내가 그렇게 희망하던 언론계에 취직하는 것이 99.9%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일본 사회의 차별을 피해 살려던 생각을 버리고, 나 자신에게 한국인임을 써붙이고 한국인으로 살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한국인 변호사’가 되어 한국인 차별을 없애는 데 앞장설 것을 내 생애의 목표로 삼기로 했다. 그러려면 참된 의미의 신뢰를 얻기 위해 일본인으로 귀화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일본의 최고재판소가 나를 한국인 사법수습생으로 채용해서 나에게 한국민족과 일본과의 참된 이해와 우호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을 간곡히 바란다.”

김경득은 결국 의지를 관철해 한국 국적을 가진 최초의 변호사가 되어 지금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1970년대에도 재일동포는 이런 처지였다. 하물며 1930년대의 일본 사회에서랴. 김달수는 “부모를 보아도 남 보듯 달아나버리는 게 동포소년의 심리 아니겠느냐”고 형을 감싼다.

궁핍한 나날이 계속됐다. 어머니는 하숙생과 아이들의 숙식을 거드는 한편, 멀리 오이마치(大井町) 마고메(馬혺)까지 가서 지반 정지공사장의 한국 인부식당(함바·飯場)에서 품을 팔았다. 지금은 번화가가 된 지역이지만 당시는 논밭과 삼림이 우거진 교외였다. 도시화가 진행되고 택지가 늘어나면서 이곳도 거주지로 변했고, 그 택지 공사에 주로 빈민 노동층의 한국인들이 노동력을 팔았다. 어머니는 몇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인부들을 위한 취사나 세탁 일을 거들었다.

어머니의 ‘알바(아르바이트)’는 이것 말고도는 더 있었다. 여덟 살 난 달수의 누이 면수를 데리고 ‘들파기(하랏파호리)’하러 다녔다. 아이들이 뛰어노는 주택가 공터는 원래 쓰레기 매립지였다. 그래서 면수랑 둘이서 쇠꼬챙이로 그 속을 파헤치면 빈 병이나 깡통 쇳조각이 나오곤 했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캐내 팔아 돈을 만들었다.

성수는 오키나카시(?仲士)가 되어 일했다. 부두의 하역노동자다. 컨베이어 벨트도, 크레인도 드문 시절이라 오키나카시는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중노동이었다. 그래서 “멸치가 생선이냐, 오키나카시가 인간이냐”는 말도 생겼다. 수입은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이 노동으로 어깨뼈가 뭉그러진 사람도 있다. 슬롯머신 제작으로 세계적인 부호의 반열에 오른 평화기업을 세운 재일동포 정모씨도 부두 하역노동자 출신이다. 그는 취재 기자에게 어깨 짐의 무게로 변형된 어깨뼈를 훈장처럼 보여주었다.

달수라고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당장 입에 풀칠하기에 급급한 형편에 미안해서라도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됐다. 열 살의 달수도 낫토 장수와 넝마주이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어 한마디도 못하는 그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었다.

“낫토, 낫토! 삼봉(三本), 주우센(十錢)(낫토가 세 꾸러미에 10전)!”

기본 어휘만 겨우 익히곤 거리로 나섰다. 낫토 장수는 10전 동전을 보여주며 손님한테 그것을 받으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손님이 한 꾸러미만 달라고 하면 “고젠(5전)!”이라고 외치라고 했다. 처음에는 창피해서 소리가 목에서 나오지 않았다. 달수는 들판에 가서 큰 소리로 연습한 뒤 낫토 상자를 등에 메고 거리로 나갔다.

낫토 장사는 달수가 세상 인심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부잣집 앞에서 마나님이 그를 부르고는 “세 꾸러미에 10엔인데, 한 꾸러미 5엔은 너무 비싸다. 3엔에 팔아라”고 깎기 일쑤였다. 그는 부자일수록 인색하게 구는 게 세상임을 알게 됐다.

낫토 장사는 아침저녁의 일거리였다. 낮에는 넝마주이를 따라다니면서 일을 배웠다. 제 키만한 넝마지게를 지고 다니며 빈 병, 빈 깡통을 주워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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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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