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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도의 한국혼 ⑧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上

넝마주이 망태 속에 피워낸 민족문학의 꽃

  • 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6년 학력의 대문호 김달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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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31년에 인쇄공장의 도제 겸 심부름꾼으로 들어갔다. 입주해서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이었다. 10년 경력이 쌓이면 월급 1000엔이라는 좋은 조건이었다. 일본어 활자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고 주인의 말귀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지만, 달수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어느 날, 형이 찾아와서는 “장래성 없는 일”이며 함께 집으로 가자고 해 그만뒀다. 형은 달수에게 학교(야학)에 다니라고 했다.

이후 달수는 시나가와 구립 오이(大井)심상야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수업은 읽기, 쓰기, 산술 세 과목뿐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낫토를 팔고 낮에는 넝마를 줍고 밤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나날이었다.

주먹 휘두르는 ‘람보(亂暴)’

1932년, 달수는 사촌이 주간(낮) 소학교에 다니는 것이 부러워 자신도 보통소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어머니를 졸랐다. 어머니는 빈궁한 형편이었지만 차마 아들의 꿈을 꺾지는 못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들어간 곳이 시나가와 구립 겐지마에(源氏前)소학교였다. 3학년에 편입했다.



이 학교에선 읽기, 쓰기, 산술에다 수신(도덕), 작문, 도화(그림), 수공(手工), 창가(음악)가 더 있어 공부가 어려워졌다. 무엇보다 야학교 학생은 한국 극빈노동자의 자녀가 대부분이었으나 이 정상 소학교는 일본 아이들의 학교였다. 아이들은 걸핏하면 “야, 조센진!” 하고 그를 놀렸다. 그때마다 달수는 주먹을 휘두르곤 해 ‘람보(亂暴)’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래도 공부는 뒤처지지 않았다. 집이래야 노동자 하숙생들과 함께 자고 일어나야 하므로 공부를 하려 해도 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책은 모두 학교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몸만 오가며 공부했다. 그는 수업시간만은 정신을 똑바로 차려 들었다. 예습, 복습이 필요없을 정도로 수업에 몰두했다.

일본인 교사들도 달수를 귀여워했다. 아이들의 놀림과 차별은 있었어도, 제법 일본말도 익숙해지고 그림 솜씨가 좋아서 미술 시간에는 교사한테 칭찬도 받았다. ‘소년구락부’라는 잡지, 다치가와(立川)문고가 내는 책을 접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문학을 향한 꿈이 싹트기 시작했다.

역사 연구가가 된 이유

김달수는 작가가 되어 소설도 많이 썼지만 역사 연구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특히 고대 이래 한반도의 핏줄이 일본 열도에 어떻게 정착하고, 어떤 유적을 남겼는가에 관심을 기울였다. 20여 년간 일본 천지를 헤매고 현장을 답사하며 ‘일본 속의 한국문화’ 시리즈 12권을 펴냈다. 이 책들은 일본 최대의 출판사 고단샤(講談社)에서 간행했다.

고대의 한일 문화교류에 관심을 갖게 된 동기는 소학교 5학년 국사(일본사) 시간에서 비롯된다. 일본사는 국정교과서 한 종류뿐이었는데 군국주의의 광기가 휩쓸던 시절이었으니 교과서도 국책에 맞추어 날조되어 있었다. 황당무계한 내용이 넘쳐흘렀다.

“황국 기원 860년(서기 200년) 중애(仲哀)천왕은 구마소(熊襲·지금의 규슈 사쓰마 지방)가 반란을 일으키므로 이것을 진압하기 위해 신공(神功)황후와 함께 규슈에 내려갔다. 그런데 도중에 중애 천황은 돌아가시고 만다.

이 무렵 한반도에는 신라, 백제, 고려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그 중에 신라가 일본과 가장 가깝고 세력도 강해 구마소와도 잘 통했다. 구마소의 반란도 배후에서 신라가 자극해서 일어난 것이다. 신공황후는 그래서 신라를 치기로 하고 병사를 이끌고 반도로 쳐들어갔다.

황후가 ‘신의 도움과 너희 병사들의 힘으로 신라를 복속시키려 한다’며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왕은 크게 놀라서 ‘동쪽의 일본이라는 신국(神國)에서 천황이라고 하는 존재가 오시는 것을 들었다. 그 군선(軍船)은 신병(神兵)들로 가득 차 있을 터인즉 어찌 막을 수가 있으랴’하면서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신라왕은 ‘비록 태양이 서쪽에서 뜨는 일이 있더라도, 강물이 거꾸로 흐르는 한이 있어도 우리 신라는 결코 매년 공물(貢物)을 빠뜨리지 않고 바치리다’ 하고 맹세했다. 신공황후는 개선해 돌아왔고 그후 백제도 고려도 우리나라에 복속하게 됐다.

조선 정벌 성공과 더불어 규슈의 구마소도 자연히 진압됐다. 그후 백제로부터 왕인(王仁)이라는 학자가 와서 학문을 전하고, 반도로부터 베짜기(織機) 야금(鍛冶) 기술자가 속속 건너와 일본의 세력은 해외에까지 떨치고, 점점 나라가 열리게 됐다.”

연대기로도 서기 200년은 터무니없는 소리려니와, 삼한은 마한·진한·변한이고, 고려는 고구려의 오기(誤記)다. 반도 정벌에 성공해서 한자와 학문, 방직 야금 기술이 들어왔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물론 소학교 5학년의 달수가 고대 역사 기술의 진위를 소상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는 나중에 술회했다.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교과서에 백제의 왕인이 천자문 한자를 가져온 뒤부터 일본에 문자가 생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삼한정벌 같은 역사는 문자가 없는데 어떻게 기록으로 전해질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선생도 당황하면서 자신 없는 말투로 ‘그거야 구전(口傳)으로 전해와서 후대가 알게 된 것이겠지’라고 했다. 그러나 그 답변에 만족하지 못한 나는 커서도 의문을 씻지 못해 한일 고대사에 매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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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식 동아일보 논설위원 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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