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대양주·동남아에 한국학 씨앗 심는 ‘한-호 아시아연구소’

일당백 끈기로 노 젓고, 韓流 순풍에 돛 달고

  • 윤필립 在호주 시인 philipsyd@naver.com

    입력2005-09-08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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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양주·동남아에 한국학 씨앗 심는 ‘한-호 아시아연구소’
    ‘지역이곧 세계다’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 관한 모든 것을 망라해 연구하는 한국학(Korean Studies)은 일종의 지역학이다. 동시에 세계학이다. 이런 용어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통 크게’ 생각하면 ‘한국이 곧 세계’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는 지구촌이라는 단어의 의미망이 더욱 확대돼 지역과 세계가 바로 연결되는 글로벌 시대다. “한국학의 본산이 한국이니, 한국학은 한국에서 연구해야 한다”는 원조 타령은 구시대적 사고일 뿐이다.

    미쳐야 미친다

    1990년대 중반, 호주에서 한국학 붐이 일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이번에는 동남아에서 한류(韓流) 소식이 들려왔다. 바로 이웃한 동남아와 대양주에서 ‘한국 바람’이 연이어 분 것이다.

    이런 지역적 상황을 적절하게 활용하는 한국학 연구소가 호주에서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다. 영어권 국가인 호주에 한국학 전진기지를 구축한 것. 시드니 소재 뉴사우스웨일스(NSW)대에 자리잡은 ‘한-호 아시아연구소(Korea-Australasia Research Centre)’가 바로 그곳이다.



    호주의 대학은 엄격한 학사관리와 우수한 연구실적으로 국제사회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뉴사우스웨일스대는 호주에서 선두를 다투는 명문학교다. 그렇다면 왜 호주학도 아닌 한국학의 전진기지가 이 대학에 구축됐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20대 초반부터 시작된 힘겨운 유학생활과 부단한 연구를 바탕으로 호주학계에 견고한 입지를 구축한 몇몇 학자가 20년도 넘게 흘린 땀과 눈물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한-호 아시아연구소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밤낮 없이 애쓰는 ‘4인방’의 지난 5년여 삶을 추적해보면 대체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그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연구소에서 학자로서의 황금 같은 중년을 다 보내면서, 합목적적인 한국학의 세계화(globalization)와 현지화(localization)에 골몰하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한국학이라는 종교에 충직한 선교사 같다.

    한-호 아시아연구소 4인방

    지적 산물의 집합체인 연구소는 구성원의 역량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또한 멤버들이 얼마나 애정을 쏟아붓느냐에 따라 연구소의 업적도 천차만별이 된다. 그런 측면에서 거의 ‘맨땅에 헤딩하기’식으로 출범한 한-호 아시아연구소의 주요 멤버들은 늘 일당백으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

    연구소의 4인방으로 불리는 서중석(48) 소장, 권승호(41) 부소장, 신기현(51) 자문위원, 김현옥(41) 부장이 그 주인공이다. 서중석·권승호·신기현 교수의 공통점은 20대 중반에 호주에서 석·박사과정을 밟았다는 것. 그만큼 호주에 정통한 학자들이다.

    연구소의 선장 격인 서중석 소장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79년 12월에 가족과 함께 호주로 이민왔다. 그는 이민 초기 숱한 고생을 했다. 용접공, 택시운전사, 공무원, 청소원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다.

    그러나 마침내 뉴사우스웨일스대에서 한국인 최초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같은 학교의 상과대학에서 한국인 제1호 교수(경제학)가 됐다. 그때 몇 가지를 결심했다. 그중 하나가 조국을 위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기여하겠다는 다짐이다.

    그는 20년 동안 뉴사우스웨일스대에서 경제학과 국제경영학을 가르치며 동남아의 인재들을 키우는 귀중한 경험을 했다. 그들이 졸업 후 자기 나라로 돌아가 학계와 정·재계에 뿌리내리면서 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2000년 한-호 아시아연구소를 설립했다.

    1990년대 후반은, 호주에서 한국학 열기가 식은 상태였고 한국 학자들도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호주 정부의 관심도 식어가고 있어 한-호 아시아연구소의 태동을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도 많았다.

    그러나 서 교수의 판단은 옳았다. 한-호 아시아연구소의 출범이 위축돼가던 호주 내 한국 연구에 활력소가 됐고, 대양주 내 한국 연구의 새로운 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 소장에겐 자신의 꿈을 나누며 같이 실현할 전략가와 전략대로 밀고나가는 뚝심 있는 동반자가 필요했다. 바로 거기에 딱 맞아떨어지는 학자가 권승호 부소장이었다. 그도 뉴사우스웨일스대에서 경영학 석·박사학위 과정을 마쳤고, 역시 한국인 최초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대양주 아시아학회장이 주는 1998년 최고 박사논문상을 받기도 했다.

    해공(海公) 신익희(1894~1956) 선생의 손자인 신기현 교수는 할아버지 못지않게 지사적인 면모를 지닌 학자다. 그는 1984년부터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에 종사해온 자타가 공인하는 호주 한국어 교육의 효시.

    2000년 한-호 아시아연구소 설립 당시 캔버라의 호주국립대에 재직하던 그는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연구소의 소장과 부소장이 모두 상경계통 학자여서 생기는 쏠림현상을 한국어학자인 그가 보완한 것.

    그는 2004년 7월, 12년간의 호주국립대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뉴사우스웨일스대 한국학과 주임교수로 일하면서 한-호 아시아연구소 자문위원을 겸하고 있다. 신 교수는 현재 대양주 한국학회장을 맡아 호주의 한국학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연구소의 안살림을 맡고 있는 김현옥 부장은 연구소에서 ‘눈썹 같은 존재’다. 4인방의 세 리더가 밖으로 나가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도록 내부업무를 도맡다시피 하는 김현옥 부장은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움직이지만, 그가 없으면 연구소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다. 눈썹 없는 얼굴을 어찌 상상이나 하겠는가.

    해외에서 연구하는 한국학

    한겨울의 쿠지비치를 뒤로하고, 뉴사우스웨일스대 6번 게이트를 거쳐서 한-호 아시아연구소가 자리잡은 렉탱클 빌딩으로 들어가다 보니, 길목에 호주의 국화인 ‘위틀(아카시아의 일종)’이 한가롭게 피어 있었다. 캠퍼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전 한때 풍경이다. 하지만 웬걸, 연구소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딴판이다. 일당백의 임무를 맡은 사람들답게 분주한 모습이 역력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바다 가까운 곳에서 일하시니 참 좋겠습니다”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권승호 부소장이 “이 근처에 바다만 있나요? 반경 3km 내에 시드니의 유명한 골프장이 8개나 있습니다” 하고 시치미를 떼더니 이내 웃으면서 “학문을 연구하기에 참 열악한 조건이지요” 하고 맞받았다. 다음은 그들과의 일문일답이다.

    -한국학의 본산이자 연구대상 자체인 한국을 떠나 해외에서 한국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

    서중석 : “한국에서 말하는 한국학은 ‘무엇이 한국적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은 정치학자이지 한국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한국 밖으로 나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한국 정치를 연구하는 것도 한국학으로 간주된다. 이렇듯 외국 사람이 말하는 한국학은 한국에 관한 모든 분야가 망라된다. 외국인이 한국을 공부하는 주된 목적은 한국을 더 깊이 연구해 자국의 이익 추구에 이용하려는 것이다. 물론 일부 학자는 예외겠지만 큰 틀에서는 경제적인 이익과 정치외교적인 관계에 귀착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신기현 : “한국 학자가 연구하는 학문을 한국학이라 한다면, 호주에서는 학문 분야에 관계없이 한국어로 된 자료에 의거, 한국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사람을 한국학자라고 하는 데 별무리가 없다.

    또한 한국학 과정을 개설한 대학의 상황에 따라 내려지는 현실적인 정의도 무시할 수 없다. 호주는 지역학에서 언어 교육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 한국어 과정이 없는 한국학 과정은 없으나 한국어 과정만으로 구성된 한국학 과정은 있다. 나는 호주 3개 도시에 있는 3개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첫 직장인 멜버른 소재 스윈번대에서는 한국어와 비즈니스를 연결하려는 학생이 주를 이뤘다. 반면 호주국립대 학생들은 대개 한국어를 배워 한국의 역사, 문화 및 북한 문제를 다루는 전문가가 되고 싶어 했다. 지금 근무하는 뉴사우스웨일스대에는 외국어로서 한국어 교수법에 관심을 갖는 학생이 다수다.”

    권승호 : “한국에서 세계로 나가는 것을 일컬어 세계화라고 하고 현지에서 뿌리내리는 과정을 현지화라고 말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연구소가 지향하는 바는 세계화와 현지화가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것을 ‘글로컬라이제이션(glocalization·세계화+현지화)’이라 일컫는다.

    동남아시아와 대양주가 서로 교류 협력하면서 한국학의 본산인 한국과 연결고리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대양주·동남아에 한국학 씨앗 심는 ‘한-호 아시아연구소’

    뉴사우스웨일스대 캠퍼스에서 만난 서중석 소장, 김현옥 부장, 신기현 교수, 권승호 부소장(왼쪽부터).

    -특별히 동남아 국가를 중심으로 한국학을 효율적으로 전파할 방법이 있는가.

    서중석 : “장기적인 안목에선 동남아 국가의 차세대 중에서도 한국에 애정을 갖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을 공부하게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각 분야에서 자질이 우수한 학생을 찾아내 그들이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갖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한국학은 유능한 현지인에 의해 현지화됨으로써 결국 국제화될 수 있다.”

    권승호 : “동남아 국가들 중에서 한국학에 관심을 갖는 나라들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경제적·정치적으로 한국과 유대관계가 깊다. 현재 한국학과 졸업생의 취업률이 80% 이상을 기록한다는 것도 동남아 학생들이 한국에 관심을 갖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는 한국학을 해외에 전파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한국이 각별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장기적인 지원과 동시에 한국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미래에 대한 전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친한파 양성소

    1990년대 초반 이후 호주는 동남아 국가들의 유학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 우선 호주는 지리적으로 동남아 국가들과 가깝다. 또한 영어권 국가인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중에서 동남아와 대양주를 학문적 차원에서 이어줄 수 있는 제반여건을 갖췄다.

    호주 대학이 실시하는 교육의 질은 매우 우수한 편이다. 호주에는 41개의 국립대 혹은 주립대가 있고, 본드대(골드코스트 위치)라는 유일한 사립대가 있다. 이렇듯 총 50개도 안 되는 대학 중 무려 10개 대학이 영국로열학회가 선정한 세계 100대 우수대학에 포함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중 선두 그룹에 속하는 뉴사우스웨일스대는 유학생 비율이 아주 높다. 대학 정원 4만명 중 약 9000명이 유학생이다. 상경대의 경우 7000여 명의 재학생 가운데 약 2000명이 유학생이다. 물론 유학생 대부분이 아시아계다. 바로 그 안에 한-호 아시아연구소가 달걀의 노른자처럼 자리잡고 있다. 동남아시아와 대양주를 잇는 호주의 대표적인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보급하면서 친한파(親韓派) 또는 애한파(愛韓派)를 양성하는 것이다.

    아무리 호주가 1973년에 악명 높던 백호주의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실마리를 서중석 교수의 에피소드에서 찾아보자.

    “호주에서 공부하고 돌아간 동남아 학생 가운데 한국인 교수 밑에서 공부했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을 사랑하게 된 사람이 적지 않다. 인도네시아 학생 보비 조리스는 대학원 과정에서 나한테 경제학을 배웠다. 그가 귀국할 때 그의 손에는 내가 써준 추천서가 들려 있었다. 몇 년 후 자카르타 출장 중에 보비를 만나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었다.

    ‘선생님이 주신 추천서 덕택에 자카르타 주재 한일은행에 취직했습니다. 한국인 교수에게서 배웠냐고 반가워하며 당장 결정을 내리더군요. 물론 제 성적이나 다른 것도 참고했겠지만 아, 이것이 한국인의 정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일은행에서 한국의 기업문화를 차근차근 배웠습니다. 업무 마치고 술자리에도 동석할 수 있게 됐고, 나중엔 한국에도 다녀왔습니다.

    1998년 자카르타에 폭동이 일었을 때 중국계 시민과 원주민계 시민 사이에 갈등이 폭발해 폭력이 난무했습니다. 퇴근도 하지 못하고 걱정하는 지점장님과 임원들을 빨리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 우왕좌왕하는 무리를 헤치고 숨을 곳을 찾았습니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부자’를 숨겨주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날 그분들을 안전하게 피신시켜 드린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뿌듯합니다.’

    나는 지금도 동남아 출장을 가면, 하루 저녁은 옛 제자들을 불러내어 저녁을 함께 먹는다. 태국 속담에 ‘한번 아잔 (Ajarn·선생님)이면 영원한 아잔’이란 말이 있다. 동남아 친구들과 내가 나누는 신뢰와 사랑이 해를 거듭해도 흐려지지 않듯이, 스승의 나라인 한국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 역시 변치 않을 것임을 안다.”

    이렇듯 서 교수의 동남아 사랑은 제자사랑으로 시작됐다. 처음에는 동남아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동남아 문제 전문가로서 한국을 연구하는 학자들을 만나게 됐으며, 그들에게 한국학 지원이 절실하다는 것을 인지하여 한-호 아시아연구소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동남아 4개국과 공동 프로젝트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움직인다고 했던가. 연구소가 출범할 즈음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한류(韓流) 열풍이 동남아에 불기 시작했다. 비록 대중문화에 국한된 사회현상이지만 한국의 드라마와 대중가요를 좋아하는 사람이 크게 늘면서 한-호 아시아연구소는 순풍을 만난 배처럼 순항했다.

    연도를 짚어보니 연구소 활동이 시작될 즈음에 베트남 한류가 시작됐다. 정확하게 동남아의 한류는 1998년 베트남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로부터 시작됐다. 베트남에 본격적인 열풍이 분 것은 2000년이고, 다른 동남아 국가들은 그 후에 시작됐다.

    그런데 동남아에서 뜬금 없이 한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도, 그 징조를 가장 먼저 감지한 곳이 호주라는 것도 뜻밖이다. 이렇듯 호주에서 한류를 빨리 감지할 수 있었던 것은 동남아 출신 유학생들 때문이다. 호주에서 한국어 또는 한국학을 공부하고 본국으로 돌아간 동남아 출신 유학생들은 자국에 불어온 한류 열풍을 확대재생산하는 한국학의 역군이 됐다.

    연구소의 지난 5년간 활동내용을 살펴보니 호주와 동남아 지역의 한국학 교육 프로그램을 지원한 것이 먼저 눈에 띈다. 호주-동남아-한국을 연결하는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한 것. 특히 동남아의 한류 현상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부터 앞날을 내다보고 본격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또한 동남아 4개국 현지인 학자들로 구성된 연구팀과 공동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모든 연구의 인프라, 네트워크 작업을 완성했다. 이렇듯 한국 내에서 한류 연구에 대한 관심이 일기 이전에 기초연구를 마친 상태여서 다른 어느 연구소보다도 높은 경쟁력을 갖추게 됐다. 연구소는 태국 촐라롱콘대, 말레이시아 말라야대, 인도네시아대, 베트남 호치민 인문사회과학대의 동남아 4개 유수 대학과 연계하여 영문 한국학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다.

    아울러 지난 5년 동안 대양주, 동남아 지역의 여러 대학과 한국학 학자들을 연계하여 심포지엄, 학술회의, 워크숍, 포럼을 꾸준히 개최해왔다. 특히 심포지엄에는 호주 연방정부 알렉산더 다우너 외교부 장관이 두 차례나 참석해 기조연설을 할 만큼 호주 정부와 학계에서도 그 권위와 영향력을 인정받았으며, 호주의 정책 수립에도 적잖이 기여했다.

    권 부소장은 예리한 학자이기 이전에 삶의 멋을 아는 휴머니스트다. “결국에는 일이 남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남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딱딱해지게 마련인 연구소를 맛과 멋이 넘치는 장소로 만든 주역이다. 권 부소장이 베트남에 뿌리내린 한국학의 어제와 오늘을 이렇게 정리했다.

    김동인의 ‘감자’가 계급투쟁 그렸다?

    “베트남에서 한국학 연구는 1992년 한-베트남 수교 이후 시작됐다. 한국 정부가 적극적인 교류정책을 펼치면서 정부간 정책 및 인적 교류가 시작됐다. 그 결과 2000년에는 약 250개의 한국기업이 베트남에 투자했으며, 한국기업은 총 7만여 명의 현지인을 고용했다. 베트남 표준 가족수인 1가정당 5인을 대입해 추산하면 당시 35만여 명이 한국경제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됐다.

    한국 관련 인적자원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한국의 대내외 한국학 지원기관과 현지 대학기관도 한국학에 관심을 가졌다. 국립 하노이 인문사회과학대(1992)를 필두로 국립 호치민 인문사회과학대(1994), 국립 하노이 외국어대(1997), 호치민 외국어 정보대(1998) 등에 한국학 관련학과가 설립됐다.

    그래서 우리는 큰 기대를 걸고 2000년 6월 베트남에서 한국 연구에 대한 현지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그러나 다른 동남아 국가들에 비교해 베트남에서 진행되고 있는 한국관련 연구 활동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당시 한국어 교육 관련학과에서 교육과정 개발과 강의를 주도한 그룹은 베트남에서 한국통 1세대라 일컫는, 북한 대학 출신의 유학파였다. 1960~70년대 북한과 제3세계 국가간 국제교류 확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김일성대와 김책공대에 유학을 다녀온 북한 출신 유학파 인물들이 1992년 수교 이후 급속하게 확대된 한-베트남 관계의 중간고리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들 북한 유학파 출신에 의한 한국어 교육 및 연구 활동은 남한에서 생각하는 해외 한국학 연구의 발전 모델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사회주의 이론에 경도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일례로 근대 한국 소설의 거성으로 추앙받는 김동인(1900~51)의 자연주의적 색채를 띤 단편소설 ‘감자’를 소개하면서 자본주의에 대한 계급투쟁의 내용으로 재해석해 한국어 교재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 직면해 한-호 아시아연구소는 태국,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의 주요 국립대와 함께 한국학 교육을 위한 전략적 교류관계를 만들었다. 베트남의 국립 호치민 인문사회과학대와 협의해 현지의 한국학 연구발전 모델을 개발했다. 특히 호치민 인문사회과학대 위엔 반 타이 부총장의 역할이 지대했다.

    그분이 2002년 한 워크숍에서 꺼낸 이야기 중 ‘한국학이 한국을 떠나면 더는 한국인의 소유가 아니다’라는 말을 잊을 수 없다. 이 말은 곧 해외에서 한국학 교육과 연구 활성화를 고민하는 현지 정책 담당자의 확고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 한마디는 지금껏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관점에서 한국학 연구를 진행해온 우리 연구소의 자세와 접근법을 더욱 가다듬게 만들었다.

    ‘한국학이 한국을 떠난다는 것과 더는 한국인의 소유가 아니다’는 말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고 어떤 면에서는 그 의미가 상충한다. 하나는 한국에 머물던 한국학의 교육과 연구가 세계화된다는 뜻이다. 이러한 세계화는 한국의 자국 이기주의를 포함한다. 또 하나는 한국학이 진흥되기 위해 그것을 수용하는 현지의 현실과 이익이 포함되는 적극적인 현지화를 의미한다. 위엔 반 타이 부총장의 말은 전자와 후자의 의미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만 해외 한국학의 교육과 연구가 발전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어 공부로 인생이 바뀐 사람들

    한국어를 한국학의 키워드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학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로 간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제대로 된 한국학 연구에 필수 요건이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호주에서 20년 이상 한국어를 가르쳐온 신기현 교수는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줬다.

    “멜버른의 스윈번대에서 가르친 학생 가운데 주한 호주대사관에 근무하면서 한국어 구사능력이 뛰어나고 금발의 미모를 갖춰 한국의 TV 프로그램에 심심찮게 출연한 여학생이 있다. 또한 호주국립대에서 가르친 학생 중에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전과목 성적이 월등해서 수석으로 졸업한 학생도 두 명이나 된다. 두 사람 모두 외교부에 근무한다.

    이런 수재형 학생들과는 좀 다른 각도에서 특별히 생각나는 학생이 둘 있다. 앵글로-캘틱 혈통의 남학생 W군과 여학생 J양이다. 이들은 외국어 공부가 원어민과의 대화수단을 습득한다는 차원을 넘어 인생 항로까지 바꿀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W군은 1학년 때 다분히 도전적인 말투로 ‘한국어를 공부하는 것이 내게 어떤 이점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1년간 한국어를 배우더니 ‘한국에 가야겠으니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래서 1년간 더 열심히 공부하면 그러마 했고, 1년 후 W군은 교환학생으로 한국의 모 대학에서 1년간 공부했다.

    W군이 호주로 돌아온 뒤 함께 술을 마실 기회가 있었다. 잔을 채워줬더니 얼굴을 옆으로 돌리며 술을 마셨다. 마치 한국의 대학생들이 교수 앞에서 하듯 말이다. 3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록 이러한 행동이 단순한 ‘연기’에 불과하더라도 1학년 때의 W군을 떠올리면 놀라운 일이다.

    W군은 한국에서 만난 한국인 여자친구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가 자기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캔버라에서 만난 한국인 교수를 든다는 것도 그의 부모를 통해 들었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 연설을 해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W군은 아마 나를 주례 후보 1호로 꼽고 있는 모양이다.

    J양 또한 전형적인 호주 여학생으로, 일본어를 조금 공부하다가 한국어로 전공을 바꿨다. 그는 W군과 함께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갔다. 호주로 돌아온 후 어느 날 그는 남자친구라며 한국인 남자 대학생을 소개했다. 여학생으로서 드문 사례다. J양은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가서 그 한국인 남자친구와 부부가 되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를 공부하지 않았다면, 전형적인 호주 젊은이인 이들에게 한국은 그저 먼 나라, 혹은 현대나 삼성, LG와 관련된 나라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한국어를 공부했기에 한국에서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냈고 결국 인생의 대사에 한국을 끼워넣었으니, 한국어는 이들에게 ‘대화수단’을 넘어 ‘인생의 전환점’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쯤에서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필자는 20년 가까이 시드니에 살면서도 한-호 아시아연구소에 대한 별다른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다 취재 과정에서 서중석 교수의 소개로 뉴사우스웨일스대에 다니는 유학생들을 인터뷰하다 연구소의 실체를 알게 됐다.

    향후 3~5년이 관건

    특히 한-호 아시아연구소의 안내책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필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훨씬 견고한 조직으로 알찬 연구실적을 보유하고 있을뿐 아니라 다양한 연구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한-호 아시아연구소와 연계되어 활동하는 호주 학자는 64명이고, 동남아에서도 20여 명의 학자가 연구소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84명의 대양주 소속 연구위원 중 29명은 뉴사우스웨일스대 소속 학자이고, 35명은 대양주 타 대학 소속, 20명이 동남아 출신 학자였다.

    이렇듯 활발하게 돌아가는 한-호 아시아연구소가 지난 5년 동안 마치 머리카락 보일세라 조용하게 움직인 이유에 대해 서중석 소장은 “일단 5년 정도 확실한 실적을 내고 세상에 실체를 드러내고 싶었다. 연구소의 성격상 자칫 허황된 얘기로 들릴 가능성이 있어서 더욱 조심스러운 행보를 견지했다”고 설명했다.

    “자갈밭을 갈아 씨를 뿌렸는데 이제 싹이 나고 자라기 시작했다. 한류 바람이 부는 이때를 놓치지 말고 그동안 닦아놓은 기초 위에 성숙한 한국학 연구성과를 올려놓음으로써 다음 세대 일꾼을 찾아 키우는 일을 본격화해야 한다.”

    특히 그는 “한국은 일본과 달라야 한다”고 강변했다. 동남아에서 일본이 막강한 경제력을 행사해왔지만 일본을 마음속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일본의 열기가 갑작스럽게 식었다는 것.

    “‘일류(日流)’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 일본의 영향력은 점점 줄어들고, 중국의 큰 힘은 아직 동남아를 덮지 않았다. 앞으로 3~5년이 동남아에서 한국학을 현지화할 절호의 기회다. 이 지역의 인재를 발굴하고 우리의 친구로 초대하는 일을 같이할 기관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앞으로 동남아의 한류 바람을 지역 내의 학계·기업·정부를 잇는 네트워크로 연결해 장기적인 관심과 교류의 기반으로 정착시켜야 한다.”



    호주의 주택은 앞마당보다 뒷마당이 훨씬 넓다. 한-호 아시아연구소는 호주의 주택형태를 닮았다. 겉으로 보기엔 여느 대학에나 있을 법한 연구소 같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자꾸 넓어지는 마당이 열린다.

    이렇듯 ‘속이 꽉 찬’ 연구소를 이끌어가는 ‘한국학 전도사들’이 향후 3~5년 동안 성취할 결과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그들이 그만한 저력과 응집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강이 먼 바다에 이른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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