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호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 이욱연 서강대 교수·중국현대문학 gomexico@sogang.ac.kr

    입력2006-08-14 14: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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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장자제의 천자산.

    태양이 붉다못해 하얗다. 후난(湖南)성의 여름은 이렇다. 햇볕에 나가자마자 살이 익기 시작하는지 피부가 따갑다. 한낮 기온이 보통 33∼34℃라는 일기예보를 이곳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보통 38℃를 오르내린다고 말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습도가 낮아 그늘에 들어가면 그래도 견딜 만하다.

    장사(長沙)에서 마오쩌둥의 생가가 있는 사오산(韶山)으로 간다. 장사에서 약 150km, 버스로 약 2시간 거리다. 장사 일대를 하루에 모두 돌아볼 심산으로 택시를 빌렸다. 하루에 500위안, 우리 돈으로 6만원가량이다. 한국 사람이 마오쩌둥 생가를, 그것도 택시까지 대절해 간다고 하자 쩡(曾)씨 성의 기사는 신이 났다. 대부분의 후난성 사람들에게 마오쩌둥은 숭배의 대상이다. 택시기사 또한 마오교(敎)의 열렬한 신도다. 택시는 온통 마오쩌뚱으로 도배되어 있다. 마오쩌둥 사진에서부터 흉상까지 운전석 주위로 5개나 붙어 있다. 이것으로 부족했는지 그는 돌아오는 길에 마오의 사진이 박힌 장신구를 하나 더 사서 차 안에 걸었다.

    오는 9월이면 마오쩌둥이 죽은 지 30년이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여전히 중국의 심장인 톈안먼 광장에 누워 있고, 중국인의 가슴에 살아 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인간 세계를 넘어 신이 되어간다. “마오 주석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중국인들, 가게나 집 한가운데 마오 사진을 걸어두는 중국인이 갈수록 늘고 있다. 사회 계층이 아래로 내려갈수록, 특히 농민들에게 마오는 재물과 평화, 안녕을 가져다주는 신이다.

    중국인 중에서도 운전기사들, 특히 남쪽 지방의 운전기사들이 마오쩌둥 사진을 부적처럼 차 안에 붙이고 다닌다. 그야말로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지만, 여기에는 이런 유래가 있다. 그러니까 1992년 마오쩌둥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 중국에서는 마오가 죽고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최초로, 그리고 대규모로 마오쩌둥 신드롬이 일어난다. 그해 광둥 지방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전한다. 버스 교통사고가 났고, 큰 사고여서 버스에 탄 사람들이 모두 부상을 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유독 한 사람만 멀쩡했는데, 그가 마오쩌둥 사진을 사들고 차에 탄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때부터 마오는 교통사고를 막아주는 수호신이 되었고, 마오 사진은 부적처럼 여겨졌다.

    중국인이 이처럼 마오쩌둥을 숭배하는 것을 외국인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외국인뿐 아니라 중국인, 특히 문화대혁명 때 고난을 당한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마오쩌둥에 대한 숭배를 중국인이 우매한 탓으로 진단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중국인에게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중 누가 나은지를 물으면 대다수 중국인은 이렇게 답한다.



    “마오쩌둥은 중국인을 일어서게 했고, 덩샤오핑은 중국을 잘살게 해주었다.”

    아편전쟁 후 서구 제국주의와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100년 동안 시달린 치욕의 역사를 끝내고 중국을 다시 일어서게 한 사람이 마오쩌둥이고, 문화대혁명 때 잘못을 범했다고 하더라도 그 공로는 사라질 수 없다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1949년 10월1일 톈안먼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이 이제 일어섰다!”

    마오의 이 말에 중국인은 감격했다. 근대 100년 동안 겪은 굴욕과 설움이 씻겨 내려가는 기쁨을 맛본 것이다.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 여느 사회주의 지도자나 정당과 구분되는 것이 바로 이점이다. 중국인에게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은 단순한 사회주의 이념의 실천자가 아니라 민족해방을 가져다준 지도자이자 정당이다. 마오쩌둥이 중국인에게 영원히 살아 있는 이유다.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영화 ‘부용진’ 포스터.

    거리로 나선 농촌 여성

    예전에는 중국을 여행할 때 기차가 가장 편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런데 최근 들어 고속도로가 속속 뚫리면서 중국에서 자동차로 이동하는 것이 한결 수월해졌다. 장사에서 고속도로로 1시간 정도 달리니 벌써 사오산 톨게이트다. 내년 9월이면 마오쩌둥 생가 앞까지 고속도로가 날 것이란다. 톨게이트에서 생가까지 2차선 도로로 한참 가는데, 1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여자들이 길가에 양산을 들고 듬성듬성 서 있다.

    운전기사가 “뭐하는 여자들인지 아느냐”고 묻는다. 점심 무렵이라 식당으로 손님을 끌어들이려는 호객꾼이려니 했는데, 둘러보니 주위에 그럴 만한 식당이 없다. 알고 보니 50위안, 우리 돈으로 6000원가량을 받고 몸을 파는 아가씨들, 중국어로 ‘샤오제(小姐)’란다. 기절할 노릇이다. 그러고 보니 그런 아가씨들 뒤로 허름한, 우리로 치면 여인숙 같은 건물들이 있다. 시골 경제사정이 워낙 좋지 않다 보니 이렇게 거리로 나서는 농촌 여성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샤오제라는 말은 아가씨, 미스란 호칭으로 사회주의 혁명 이후에 사라졌다가 마오쩌둥 시대가 끝나고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가 열리면서 부활했다. 마오쩌둥 시대는 남녀 사이에 성적 구별이 없는 ‘무성(無性)의 시대’였다. 남성 같은 여성, 일 잘하고 힘세고 피부가 까만 여성이 제일이었다. 그 시절엔 남녀 모두 ‘퉁즈(同志)’로 불렸다. 그러던 것이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시대가 시작되면서 여성을 가리키는 호칭이 생겨났는데, 바로 샤오제다. 샤오제는 무성의 시대가 끝나고 유성(有性)의 시대가 시작됐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런데 요즘 중국에서 음식점 종업원을 부를 때 ‘샤오제’라고 하기가 조심스럽다. 남쪽 지방일수록 특히 그렇다. 술집 접대부나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을 부르는 호칭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대낮에 대로상에서 공공연하게, 그것도 마오쩌둥 생가로 통하는 길에서 샤오제들이 버젓이 영업을 해도 되는 것일까. 단속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운전기사가 4자 대구(對句)로 답한다. “지방보호, 개혁개방!” 지방경제를 위해 단속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개혁개방 시대가 아니냐는 것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엇갈린 평가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역설하면서 “파리, 모기가 들어오더라도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창문을 열어 파리, 모기가 들어와도 유분수지, 지금 중국엔 파리, 모기가 너무 많아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중국인이 갈수록 많아지고 있다. 범죄와 부정부패, 사회 비리는 늘어나고 농민과 노동자는 좀처럼 생활이 나아지지 않는 가운데 빈부격차는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한쪽에서는 1년 사이에 부동산 가격이 배로 치솟아 횡재하는가 하면 부동산 개발 때문에 하루아침에 강제로 땅을 빼앗기고 거지 신세가 된 사람이 수두룩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신좌파가 등장하고, 개혁개방,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정당성과 방향을 둘러싼 새로운 사상논쟁이 베이징 지식인 사회와 정가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후진타오도 사정이 다급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화해 사회’ 건설을 목표로 내세웠다. 그뿐 아니다. 농촌을 살리려는 ‘신농촌 건설’을 추진하고, 사회주의 가치와 목표를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사설이 ‘인민일보’에 자주 실리면서 이데올로기 통제를 시도하고 있다. 흔히 중국의 문제는 농촌의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개혁개방의 향방이,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미래가, 중국의 내일이 농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길가에 늘어선 ‘샤오제’들을 보면서 절감한다.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그늘이 짙어가고,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요즘 들어 마오쩌둥을 찾는 사람, 마오쩌둥을 기리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마오쩌둥 시대야말로 중국 농민에게는 황금시대였다는 농촌 현장 보고서들이 나오기도 한다. 1992년 마오 탄생 100주년 이후 또다시 마오쩌둥 신드롬이 일어나고 있다. 더구나 요즘 중국에서는 이른바 ‘홍색 여행’이 유행이다. 공산 혁명의 성지(聖地)를 따라가는 여행이다. 절반은 관에서 주도하고 절반은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이뤄진다. 그 홍색 여행의 출발지는 대개 최초로 공산 소비에트가 건설된 징강산(井岡山)이거나 마오쩌둥의 생가다. 지난 6월30일에도 85차 홍색 여행단이 마오쩌둥 생가에서 발대식을 치렀다.

    마오쩌둥 생가는 위치가 참으로 좋다. 앞에 호수가 있고, 뒤로는 작은 산이 있다. 별장 터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무더위 속에서도 생가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송곳처럼 찌르는 햇살 아래서 20분을 기다렸다. 하지만 오늘은 사람이 적은 편이란다. 마오쩌둥의 아버지는 쌀장사로 돈을 벌었다. 그래서 그런지 집이 꽤 넓다. 돼지도, 소도 키울 정도로 부자였다. 마오쩌둥은 아버지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마오의 아버지는 아들이 일을 배우고 장사하기를 바랐지만, 마오쩌둥은 책 읽고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의 집 앞에 있는 서당은 마오가 어려서 고전을 공부하던 곳이다.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문화대혁명 40주년을 맞아 중국에선 마오쩌둥 상품이 인기다. 한 상점 판매대에 있던 마오쩌둥 그림.

    최근 영국에 살고 있는 중국인 소설가 장룽(張戎)이 마오쩌둥 전기를 내놓았고, 부시 미국 대통령이 그 책을 언급하면서 유명해졌다. 그 책에서 장룽은 책과 공부를 좋아하던 마오의 어린 시절에 착안해 마오는 다른 사람에게는 육체노동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육체노동을 매우 싫어한 이중인격자였다고 묘사한다.

    사실 장룽의 마오 전기는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 나오는 마오의 이미지와 대척점에서 마오를 묘사한다. 장룽에게 마오는 육체노동이 싫어서 프랑스 유학을 포기한 사람, 농민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 남의 공(功)을 가로채는 사람, 권력욕이 뛰어난 사람인 반면, 스노가 본 마오는 매우 겸손하고 부드러우며, 총명하고, 독서광이고, 중국 농민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장룽은 문화대혁명이라는 비극적 경험을 토대로, 마오가 얼마나 사악한 인물인지를 드러내려는 정치적 목표 아래 마오의 모든 것을 끌어다 해석한다. 만년(晩年)의 마오로 마오의 전 일생을 해석하는 것이다. 한편 스노에게는 혁명 시기의 마오만 있고 건국 이후의 마오는 없다. 둘 다 마오의 부분적인 모습이다. 그 극단적 이미지 속에서 마오는 춤을 춘다. 중국에서도 그렇고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진시황에 대한 평가가 그렇듯 마오에 대한 평가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마왕두이 귀부인의 수모

    마오의 생가와 마오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세워진 거대한 마오 동상을 돌아보고 마을 입구에 있는 식당에 들어섰다. 식당 메뉴가 한결같이 마오가 좋아하던 요리들이다. 마오가 가장 좋아했다는 요리는 삼겹살에 간장을 넣고 볶다가 찌는 훙사오러우(紅燒肉). 흔한 중국 요리다. 별 기대를 않고 그저 기념사진 찍는 심정으로 주문했는데, 맛이 일품이다. 시골 돼지라서 그럴까, 기름이 적당히 빠지고, 돼지고기 껍질과 비계, 살코기 맛이 제대로 어우러져 고소하다.

    마오쩌둥 생가에서 다시 장사로 돌아와 한나라 때의 마왕두이 귀부인을 만났다. 후난 박물관은 오직 이 귀부인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다. 2000년 동안 잠들어 있다가 1973년에 우연히 발굴됐을 때 마치 한숨 낮잠이라도 잔 듯 생생하게 깨어난 여인, 방금 먹은 것 같은 생선뼈와 과자들, 여전한 피부색과 머리칼, 피를 주입하면 어느새 혈관을 타고 돌아 이내 얼굴에 화색이 돌 것 같은 저 여인이 2000년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고대 중국의 문명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한나라 때 귀부인의 무덤이 이 정도라면, 진시황의 무덤은 대관절 어느 정도일까.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귀부인의 시대가 너무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여서일까. 154cm, 35kg의 가녀린 몸을 아홉 겹 비단으로 감싸고 있던 여인, 숱한 시종을 거느리고 악사를 불러 음악을 듣고, 도덕경을 읽고, 그림을 즐기면서 2000년 동안 평화롭게 지내던 귀부인을 잠에서 깨워 오장육부를 들어낸 뒤 하얀 천 하나로 몸 중앙만 덮은 채 눕혀놓아 숱한 사람의 시선을 받도록 한 지금 이 문명이 너무 난폭하고 야만스럽게 느껴지고, 저 귀부인이 한없이 안쓰러워 보인다. 당나라 때도 청나라 때도 그렇게 평화롭게 땅속에 있었는데 이제 땅 밖으로 나와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수모인가, 희생인가.

    후난 박물관에서 나와 내친김에 마오가 다녔던 후난 제일 사범학교를 둘러본 뒤, “마오 주석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라는 택시 기사의 작별인사를 받으며 장자제(張家界)행 밤 기차에 올랐다. 영화 ‘부용진(芙蓉鎭)’의 무대인 왕춘(王村)으로 가기 위해서다. 왕춘은 장자제를 거쳐 가는 것이 가장 수월하다. 장자제에서 차로 2시간 거리다. 왕춘 인근의 멍둥허(猛洞河)가 래프팅으로 유명한 곳이어서 장자제엔 래프팅과 왕춘 관광을 묶은 당일 코스 패키지가 많다.

    국내 최초로 공개 상영된 ‘중공 영화’

    영화 ‘부용진’(1986)은 마오쩌둥 시대에 관한 이야기다. 마오의 고향인 후난성에서 마오 시대를 비판적으로 반추하는 영화가 나온 것이다. 구화(古華)의 동명 소설을 셰진(謝晋)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으로,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마오쩌둥 시대가 어떠했는지, 문화대혁명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억을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와도 인연이 각별하다. 중국과 수교가 단절된 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공개 상영된 중화인민공화국 영화이다. 1989년 호암아트홀에서 이 영화가 상영됐을 때 ‘중공’ 영화가 대관절 어떤지를 보려는 호기심 때문에 많은 사람이 몰렸다.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마오쩌둥 탄생 110주년이던 2003년, 후난성 사오산에서 열린 기념행사.

    영화는 부용진이라는 마을에서 1960년대부터 1970년까지 일어난 일련의 정치운동을 다루고 있다. 이 마을의 유명한 쌀두부집이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격변 속에서 사라졌다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되살아나는 내용이다. 이 마을은 영화 때문에 왕춘이라는 원래 마을 이름보다 부용진(푸룽전)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장자제 일대는 중국의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토가족(土家族)이 사는 곳이다. 영화 배경이 된 왕춘도 그렇다. 요사이 중국에는 우리로 치면 민속촌 같은 곳을 관광하는 것이 유행인데, 이 마을은 토가족의 이국적인 정취와 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서 중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이 마을에 도착해 가장 먼저 쌀두부를 먹으러 가면 이 영화를 본 사람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곳에서 영화를 찍었다는 것 정도만 아는 사람이다. 이 마을에 토가족 전통 가옥이 보존된 곳은 극히 일부다. 영화를 찍은 골목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가족의 전통 주택은 대부분 목조 건물이다. 목조 건물들 사이로 난 조그만 골목이 영화의 주요 무대다. 장충동에 가면 집집마다 ‘원조 장충동 할머니 족발집’이라고 하듯이, 골목에 들어서자 온통 ‘류샤오칭 쌀두부집’이라고 적힌 간판이다. 류샤오칭은 쌀두부집 주인 호옥음 역을 맡은 여주인공 이름이다.

    세상에 쌀두부도 있나? 쌀로 어떻게 두부를 만들까? 1989년 호암아트홀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난성 전 지역이 다 그렇지만 장자제 일대에서도 쌀이 많이 난다. 1년에 두 번 쌀농사를 짓는다. 쌀이 많이 나서 쌀로 술을 담그고, 엿을 만든다. 쌀로 두부도 만들어 먹는데, 토가족 전통 음식인 쌀두부는 이 영화 때문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후난성의 매운맛

    마을에서 한 어르신이 들려준 쌀두부 제조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먼저 쌀을 갈아서 끓인다. 여기까지는 일반 두부와 같다. 그런데 쌀두부는 쌀가루 끓인 것을 대나무 대롱에 한 숟갈씩 넣어 찬물에 떨어뜨린다. 찬물에 떨어뜨리는 것은 식혀서 모양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래서 쌀두부는 두부처럼 네모진 것이 아니라 손가락 마디 하나 크기로, 길쭉하다.

    이렇게 만든 쌀두부는 파와 간장, 고춧가루, 그리고 잘게 썰어 볶은 돼지고기를 얹어 먹는다. 한 그릇에 2위안(240원)이다. 입에 들어가는 순간 사르르 녹을 정도로 부드럽다. 참으로 별미다. 내리 세 그릇을 먹고는, 옆자리에 앉은 홍콩 관광객의 눈길 때문에 그만둔 것이 지금까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쌀두부를 먹을 때 함부로 고춧가루를 뿌려 먹지 않는 것이 좋다. 한국 사람들도 매운 것을 잘 먹지만, 후난성의 매운맛은 한국의 매운맛과 계보가 다르다. 후난성 사람들은 중국에서 가장 맵게 먹는 사람들이다. 중국에서 쓰촨(四川) 사람들이 맵게 먹기로 유명한데 후난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런 말이 있다. “쓰촨 사람들은 매운 것을 걱정하지, 겁내지 않는다.” 그런데 후난 사람들은 이보다 한술 더 떠 “혹시 음식이 맵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한다”고 한다. 쓰촨 매운맛이 박하처럼 톡톡 쏘면서 화한 맛이 곁들여진 매운맛(麻辣)이라면, 후난성의 매운맛은 단순하고 화끈하고, 지독하게 맵다(干辣).

    중국인들은 쓰촨성 출신의 덩샤오핑과 후난성 출신의 마오쩌둥을 비교할 때 그런 매운 맛의 차이로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쓰촨이 맵든 후난이 맵든 매우면서도 단맛이 녹아 있는 우리 매운 맛(甛辣)이 최고 아닐까. 사람이, 세상이 맵다 하더라도 달콤하면서 매워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오쩌둥도 후난 사람이어서 매운 것을 무척 좋아했다. 만두를 먹을 때 고추를 끼워서 먹기도 했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두 혁명가라는 이론을 설파하기도 했고, 매운 것을 얼마나 좋아했으면 마오쩌둥은 혁명을 하면서 ‘붉은 고추의 노래’를 가장 즐겨 불렀다. 이런 내용이다. 사람들에게 반찬 노릇이나 하는 고추는 자기 신세가 불만스러웠다. 그러던 중 배추, 시금치같이 아무 생각 없이 바보처럼 세상을 사는 채소들을 선동하여 마침내 봉기한다. 마오는 어쩔 수 없는 후난 사람이다. 매운 것을 좋아하는 천성적인 혁명가다.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마오쩌둥을 강하게 비판한 ‘마오-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공동 집필한 장룽과 그의 남편 존 핼리데이.

    신민주주의 혁명 포기

    영화에서 주인공 호옥음은 쌀두부 가게를 차려 돈을 번다. 돈을 많이 벌어 새로 큰 집을 짓고 개업 잔치를 하는 날, 당 간부 이국향이 마을에 들어온다. 그리고 평화롭던 마을에 정치운동이 시작되고, 여주인공과 이 마을의 비극이 시작된다. 이국향은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이 마을에 우파 분자들이 남아 있다면서 운동을 벌이기 위해 이 마을에 왔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여주인공 호옥음의 가게를 찾아가 이 집 수입이 고급 당원 수입에 맞먹는다면서 쌀을 어디서 구했느냐고 따지고, 결국 비판대회를 열어 마을 사람들 앞에서 아직도 자본주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경고한다.

    중국학자 중에는 마오쩌둥이 건국 이후 중국 혁명의 원리였던 ‘신민주주의 혁명’을 포기하고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과격하게 중국을 사회주의 사회로 개조하려 한 데서 마오쩌둥 시대의 비극이 시작됐다고 보는 이가 많다. 대부분 역사가 그렇게 흘러간 것을 안타까워한다.

    알다시피 마오쩌둥이 추구한 중국 혁명은 신민주주의 혁명이다. 서구 근대 사회와 같은 민주주의 혁명(마오의 표현에 따르면 구민주주의 혁명)도 이루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이를 토대로 사회주의의 길을 가는 것을 목표로 했다. 마오쩌둥은 자본주의 근대를 거치지 않은 중국이 바로 사회주의 사회로 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마오쩌뚱의 이러한 혁명 노선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도 매우 매력적으로 비쳤다. 서구 자본주의도, 소련식 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길로 받아들인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에서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개명한 부르주아와 소자산계급, 지식인, 노동자, 농민이 연합한 혁명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마오가 구상한 신민주주의 혁명은 첫 단계가 민주주의 혁명이고, 두 번째 단계가 사회주의 혁명이다.

    그런데 새로운 공화국이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은 1953년부터 신민주주의 혁명은 폐기된다. 마오쩌둥은 서둘러 중국 사회를 사회주의 방식으로 개조하려고 했고, 사회주의 혁명으로 나아가려 했다. 자본주의적인 것, 개인의 사유 재산을 모두 쓸어내야 한다는 마오의 생각은 그 과정에서 생겨났다. 영화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신정권이 수립되고도 쌀두부 장사를 계속하며 돈을 많이 벌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신민주주의 혁명 노선으로 신중국이 건국됐기 때문이며, 1960년대 들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이유로 자본주의 독초로 몰리게 되는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적 개조의 길로 나아가면서 자본주의적인 것을 척결해 나갔기 때문이다.

    호옥음은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것은 잘살아 보겠다는 것인데, 우리가 무엇을 잘못한 것이냐?”고 따지지만 이미 역사는 신민주주의 길이 아니라 사회주의 길을 가고 있었다. 차츰 조여오는 위험을 피해 호옥음은 그동안 번 돈을 한때 사랑했던 사이이자 의오누이 관계를 맺은 오빠에게 맡기고 잠시 친척 집으로 피신한다. 얼마 동안 피해 있다가 다시 마을에 돌아왔을 때 상황은 절망적으로 변해 있었다. 남편은 가정을 깨뜨리고 자신의 꿈을 앗아간 당 간부 이국향을 살해하려다 죽음을 맞았고, 돈을 맡았던 오빠는 자신이 혹시 위험에 빠질까봐 당에 호옥음이 돈을 맡겼다고 이실직고했다. 호옥음에게 쌀을 공급하던 곡연산도 감옥에 갇혔다.

    ‘한 쌍의 개 부부’

    호옥음은 우파로 몰려 매일 비를 들고 마을 골목을 청소한다. 그녀 옆에는 이 마을에서 오래전부터 자본주의를 찬양했다는 혐의로 우파분자 낙인이 찍힌 인물, 진숙전이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청소하던 골목이 바로 지금 토가족 민속 거리 중심에 있는 길이다. 두 사람이 거리를 청소하면서 비를 들고, “이, 얼, 싼…” 하면서 춤을 추는 것은 이 영화의 명장면 가운데 하나다. 많은 사람이 ‘부용진’ 하면 이 장면을 떠올린다. 그 춤을 넣은 것은 진숙전 역을 맡은 장원(姜文)의 아이디어다. 훗날 영화감독으로 대성하는 장원의 자질이 여기서부터 드러났던 것이다. 둘이 빗자루 춤을 추는 장면은 영화의 무거운 분위기를 덜어낸다. 고난 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내는 밝고, 낭만적인 장면이 보는 이의 가슴을 덥힌다.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후난성 장사의 거리 풍경.

    그렇게 거리를 청소하며 지내던 어느 날 호옥음이 병이 난다. 진숙전은 정성스레 간호하고 그런 가운데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하지만 당은 두 무뢰한에게 결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자 진숙전은 ‘한 쌍의 개 부부’라는 글을 써서 대문 앞에 붙이고 부부관계를 공식화해버린다. 두 사람은 몰래 술과 생선을 장만하여 둘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두 사람에게 뜻밖에도 곡연산이 술을 들고 찾아온다. 감격한 호옥음이 말한다. “모든 간부가 반장님 같으면 세상 살기가 편했을 거예요.” 그러나 불법 결혼식을 했다는 이유로 남편 진숙전은 10년 징역형을 받아 마을을 떠나고 호옥음에게도 3년 징역형이 내려진다. 임신한 호옥음은 혼자 아이를 낳다가 생명의 위기를 맞는데 이번에도 곡연산이 그녀를 구한다. 곡연산이 자기 부인이라고 속여서 읍내 큰 병원에 입원시켜 목숨을 살린다.

    곡연산은 혁명전쟁에 가담했던 옛 간부다. 영화에서 곡연산은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진정한 간부, 진정한 공산당원으로 나온다. 이국향과 곡연산은 둘 다 공산당원이고 간부이지만 천양지차다. 이국향은 마을에 정치운동 풍파를 몰고 오고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어렵게 사는 인민을 아랑곳하지 않고 닭다리를 뜯고 몰래 바람도 피운다. 영화는 중국인이 원하는 진정한 당 간부, 이상적인 지도자 이미지를 곡연산을 통해 보여준다.

    결혼 때문에 3년형을 받은 호옥음은 마을 골목길을 청소하면서 혼자 아이를 키운다. 그러던 중 문화대혁명이 끝난다. 당에서 간부가 나와 호옥음의 쌀두부가게와 압수한 돈을 돌려준다. 다른 요구 사항이 더 없느냐고 묻자 호옥음이 절규한다. “내 남자를 돌려주세요!” 호옥음은 쌀두부가게를 다시 열고 마을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그리고 호옥음의 요구대로 그녀의 남자, 진숙전이 돌아온다. 가족이 재회하고 영화는 끝난다.

    문혁, ‘소수의 악인’이 주도?

    마을 사람들이 호옥음의 가게에 모여 즐겁게 쌀두부를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 영화는 흩어졌던 사람들이 다시 모여 쌀두부를 먹는 것으로 끝난다. 첫 장면과 다른 점이 있다면 즐겁게 쌀두부를 먹는 마을 사람들 곁으로 혁명운동에 부화뇌동하면서 역사에 농락당했던 왕추사가 정신 이상이 되어 징을 들고 다니면서 “운동이야, 운동!”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왕추사는 문혁이라든가 여러 정치운동의 이념에 동의해서 가담하고 앞장선 것이 아니다. 그는 정치운동 때문에 더없이 신나게 살았고 정치운동 때문에 재미를 보았다.

    루쉰의 소설 ‘아큐정전’에서 아큐가 혁명이 일어나자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잘사는 사람들이 벌벌 떠는 것이 통쾌하고, 갖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가질 수 있고, 갖고 싶은 계집을 모두 차지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혁명당에 가담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왕추사도 그런 아큐의 후예다. 그러니 왕추사에게 있어 운동은 계속되어야 하고, 그래서 문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운동이야, 운동’을 외치고 다니는 것이다. 왕추사에서 보듯 마오 시대 역사의 상처와 후유증은 아직 남아 있지만, 마을을 비극과 재난으로 몰아넣었던 정치운동은 결국 끝이 나고 마을은 평화로워졌다. 그리고 쌀두부가게가 다시 회복되었듯 마을도, 역사도 정상으로 회복됐다.

    그런데 이렇게 문혁을, 마오쩌둥 시대를 기억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영화 속 문혁의 기억은 선명한 이원대립 구도 속에서 이뤄진다. 그 대립구도는 ‘곡연산·진숙전·호옥음과 이국향·왕추사’로 갈린다. 지식인인 진숙전은 우파로 몰리지만 호옥음의 힘이 되어주고 보호하는 인물이고, 옛 혁명 간부인 곡연산은 인자하고 선량할 뿐만 아니라 역사의 재난에 굴하지 않고 마을을 지키는 수호자 역할을 한다. 이에 비해 혁명운동을 주도하는 이국향과 왕추사 등은 혁명의 대의를 앞세우지만 기실 자신의 사적 이익과 감정 때문에 상대방을 우파로 몰고, 인민과 유리된 관료주의자, 도덕적으로 파탄난 사람들이다.

    영화 속 인물 사이의 대립은 ‘다수의 선량한 사람과 소수의 악인’ 사이의 대립이라는 도덕적 대립 구도인 것이다. 그럴 때 문혁은 이렇게 이해된다. 지식인, 옛 혁명 간부, 선량한 농민, 부지런히 일해 돈을 벌려는 사업가 등 도덕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선한 다수의 사람이 소수의 악한 사람에게 무고하게 희생당하고, 고통당한 역사적 사건이라고.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후난성 관광 코스의 백미, 톈먼산에 있는 ‘하늘로 통하는 문’ 톈먼둥.

    “중국에 문혁 연구는 없다”

    문혁이 왜 일어났는지, 문혁 때 어떤 사람들이 어떤 동기로 문혁에 앞장섰는지를 이렇게 도덕의 차원, 소수 몇몇 개인의 자질 차원에서 추궁하는 일은 말할 것도 없이 문혁의 실상을 깊이 있게 드러내고, 제대로 반성하는 데 함량 미달이다. 하지만 적어도 1980년대까지 중국 대륙에서 문혁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이런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이 영화 또한 그런 문혁에 대한 기억을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이러한 문혁 기억을 제조한 사람은 대부분 지식인이고, 이러한 문혁 기억이 중국에서 폭넓게 퍼진 건 덩샤오핑 정부가 시도하는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과거사 정리 작업과 코드가 맞았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정부는 중공당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비판 작업을 진행했고, 그래서 문혁의 착오는 당 전체의 문제가 아니라 4인방과 같은 소수 개인의 탓으로 돌려졌다. 더구나 개혁개방 정책에 도움이 되는 방향에서만 문혁을 기억하고, 해부하도록 통제했다.

    ‘부용진’은 그러한 새로운 정권의 요구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문혁을 기억하고 비판한 영화다. 이국향은 문제가 있지만 중공당에는 이국향뿐 아니라 곡연산도 있다, 노력해서 부자가 되는 건 나쁘지 않다, 오히려 그런 소수 부자가 나와야 중국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 문혁이 종결되면서 비로소 역사가 제자리를 찾았다, 마오쩌둥 시대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문혁 시기까지는 역사의 궤도에서 일탈한 시기였다 등으로 이루어진 문혁에 대학 기억은,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과 코드를 같이한다.

    요컨대 ‘부용진’에서 문혁에 대한 기억은 민간의 기억이자 덩샤오핑 정권의 기억이다. 이 영화가 1980년대 중국에서 크게 흥행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작용했다. 일부에서 당시 문혁을 다룬 영화와 소설을 두고 또 다른 ‘관방 작품’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문혁 기억의 정치성 때문이다.

    올해는 문혁 발발 40년, 문혁 종결 30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문혁에 대한 토론이나 공개적인 논의를 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다. 중국 정부와 중공당이 규정한 문혁에 대한 해석과 기억 이외의 다른 문혁 기억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여지를 차단하려는 의도다. 지금 중국에는 중국 정부가 허용하는 문혁 기억만 유통되고 있다. 그럴수록 문혁이라는 비극이 벌어진 원인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과 연구는 불가능하다. 영화에서처럼 소수의 악인,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만 문혁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왜 그토록 많은 중국인이 문혁에 가담했는지, 중국 농민과 노동자에게 문혁은 무엇이었는지 등의 문제는 여전히 쌓여 있다. 그래서 문혁은 중국에 있었지만, 문혁에 대한 연구는 중국에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문혁에 대한 기억을 봉쇄하고 있음에도 개혁개방의 혜택에서 소외된 농민과 노동자 계층은 문혁 시기를 그리워한다. 중국에서 문혁의 기억은 시한폭탄이 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게 된 원인의 대부분은 중국 정부가 문혁 기억을 철저하게 통제하면서 제대로 된 문혁 청산을 방해하는 데 있다.

    영화 ‘부용진’은 중국의 전형적인 문혁 기억을 보여준다. 그 기억이 문혁의 실체를 얼마나 여실하게 드러냈고 문혁과 같은 비극이 다시는 재연되지 않도록 하는 데 얼마나 유용할 것인지는 별도의 문제다. ‘부용진’에 담긴 문혁 기억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마오쩌둥 시대의 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개혁개방 이후 중국에서 문혁의 기억이 왜, 어떻게 제조되고 있는지, 그런 문혁의 기억 속에 어떤 정치적 동기가 개입되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후난성 여행의 세 가지 맛

    후난성엔 다양한 볼거리가 널려 있다. 후난성을 돌아보는 길은 대략 세 갈래 코스로 나뉜다. 먼저 빼어난 자연 경치와 독특한 소수민족 문화를 감상하는 코스다. 최근 들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장자제를 중심으로 위안자제(遠家界), 그리고 톈먼산(天門山)을 보고, 장자제에서 2시간 거리의 왕춘(일명 푸룽전)에서 토가족의 거주지와 문화를 체험한 뒤, 다시 여기서 2시간 거리인 펑황(鳳凰)으로 가서 묘족 문화를 체험하는 코스다.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영화 ‘부용진’의 배경이 된 왕춘의 쌀두부집 골목.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담백하고 고소한 훙사오러우(좌)와 입안에서 살살 녹는 쌀두부.



    이 코스의 백미는 유감스럽게도 한국인의 패키지 코스에 잘 포함되어 있지 않은 톈먼산과 펑황이다. 톈먼산은 장자제 시내에서 케이블카로 올라간다. 해발 1500m의 깎아지른 절벽을 장장 7200m 길이의 케이블을 타고 오르는 경험은 어느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보다 스릴 있다. 특히 999개의 계단을 올라 절벽 바위 사이에 뻥 뚫린 높이 1300m, 폭 150m의 구멍, 일명 하늘로 통하는 문, 톈먼둥(天門洞)에 서는 순간 쏟아져 오는 맞바람에 두 팔을 벌리면 그 맞바람을 타고 그대로 하늘로 오늘 것만 같은 황홀함과 장쾌한 감동을 준다. 그리고 톈먼둥까지 일부러 99개의 굽이를 만들고 999개의 계단을 만들어 9에 하나를 더하면 질적 비약이 일어나듯이 999개의 계단을 올라 한걸음만 더 내디디면 하늘로 오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그 인문적 상상력을 위한 헌신과 노고가 존경스럽다.

    ‘부용진(芙蓉鎭)’금기(禁忌)의 기억, 마오쩌둥과 문화대혁명
    이욱연

    1963년 광주 출생

    고려대 중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중국 베이징 사범대 대학원 고급진수과정 수료

    現 서강대 중국문화과 교수

    논문 및 저서 : ‘중국 지식인 사회의 새로운 동향’ ‘소설 속의 문화대혁명’ ‘개혁 개방 이후 전통 문화의 재평가와 변용’ ‘전환기의 중국 사회’1, 2(공저)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노신 산문선집’ 등



    후난성 여행에서 고대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느끼는 코스는, 우선 장사 시내의 후난성 박물관에서 2000년 만에 잠에서 깨어난 불가사의한 미라의 주인공 마왕두이 귀부인을 만나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런 뒤 성리학을 세운 주희가 후학을 양성했던 웨루서원(岳麓書院)을 둘러보고, 장사에서 배를 타고 샹장(湘江)을 유람하면서 고대 시인들이 시를 읊었던 둥팅후(洞庭湖)로 가서 악양루(岳楊樓)를 보는 코스다.

    근현대 중국의 역사를 느끼려면 역시 마오쩌둥의 흔적을 따라 나서는 것이 좋다. 사오산의 마오쩌둥 생가와 마오쩌둥이 다녔던 후난 제1사범학교를 돌아보는 것이다. 후난성은 역대 가장 많은 정치 지도자를 배출했다. 가깝게는 주룽지(朱鎔基)부터 후야오방(胡耀邦), 류사오치(劉少奇)가 후난성 출신이어서 이들 생가가 모두 보존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근대로 내려가면 황싱(黃興), 탄쓰퉁(譚嗣同)과 쩡궈판(曾國藩)의 생가와 무덤도 후난성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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