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5월호

2002년 북한 HEU 의혹은 美 네오콘의 정보조작?

근거는 ‘러시아 강관 수입’, 그러나 CIA의 ‘선 넘은’ 과장

  • 황일도 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7-05-04 11: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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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농축우라늄(HEU) 문제는 갑갑했습니다. 대통령께서도 새로운 정보가 없는지 계속 물으셨지만 정확한 답을 못했습니다. 관련기관도 뾰족한 답이 없었고, 미국으로부터 확정적이라고 할 증거나 정보를 받은 기억도 없어요.…초기에 미국측에 ‘HEU 문제에만 집착해서 몰아붙이면 더 위험하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습니다. 흔히 ‘잃어버린 4년’ ‘잃어버린 6년’ 얘기하는데, 결국은 내 말대로 돼서 핵실험까지 가지 않았습니까….”

    (3월28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토론회에서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의 말)

    “…요즘 역사를 다시 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HEU 문제에 대한 당시의 정보평가가 부정확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2002년 10월 켈리 차관보가 평양에 갔을 때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진짜 인정한 게 아니라, 통역상의 오류였을 거라고도 합니다.…분명히 말하지만, 2002년 여름 정보당국 사이에 의미 있는 견해 차이는 없었습니다. 이 때 우리는 매우 결정적인(conclusive) 증거를 확보했고, 이전에 있던 이견은 사라졌습니다.”

    (4월5일 미국기업연구소(AEI) 포럼에서 존 볼튼 전 미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보의 말)

    당신은 어느 쪽인가. 어느 쪽이 더 타당성이 있다고 느껴지는가. 2002년 10월 “북한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미국의 발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이른바 HEU 문제. 2차 북핵 위기의 도화선이 된 이 문제의 진실게임이 4년 반이 지난 지금 다시 수면으로 떠올랐다. 당시 한미 양국의 관련 당국자들과 전문가 분석을 통해 ‘이라크전 이후 최악의 정보실패’라고 비판받는 HEU 문제의 실체를 파헤쳤다.




    공격자들의 시각은 간단하다. 2002년 미국이 부정확한 정보를 근거로 북한을 압박해 공연한 위기를 조성했고, 이는 제네바 합의의 붕괴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및 영변 폐연료봉 재처리로 이어져, 결국 플루토늄을 통한 핵 개발의 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방아쇠는 조지프 디트라니 미 국가정보국 북한담당관이 당겼다. 2월27일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그는 “북한이 HEU를 생산할 수 있는 수준의 장비를 구입하고 있다는 정보는 높은 신뢰도를 가진 것이었다”면서도, “HEU 프로그램이 현존하는지에 대해선 중간수준의의 신뢰도(mid-confidence level)를 갖고 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정보 당국이 HEU에 대한 정보의 불확실성을 시인했다”며 ‘정보 과장’ 의혹을 본격 제기했다.

    ‘중간수준’이라는 말 한마디에 미국 언론이 이렇듯 강도 높은 의혹을 제기한 이유는 2002년 당시 부시 행정부가 만든 북한 HEU 관련 정보평가를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대표적인 것이 위기가 불거진 직후인 11월 미 중앙정보국(CIA)이 의회에 제출한 정보판단 보고서다.

    요약본만 공개된 이 보고서는 ▲북한이 약 2년 전부터 원심분리기를 이용한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지난해부터 원심분리기 관련 자재를 다량 구입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완전 가동할 경우 ‘매년 2기 이상’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우라늄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있고 ▲‘2005년 무렵(mid-decade)’완전 가동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존하는 명백한 위협’

    최근 제기되는 의혹의 핵심은 바로 ‘이 보고서의 평가가 적절했는가’로 요약된다. 보고서는 북한의 HEU 프로그램이 생산 ‘공장(plant)’을 수년 내 완공할 정도로 진척된 것으로 판단했다. 디트라니 담당관의 ‘중간수준’ 발언은 이 때의 톤에서 한참을 물러난 것이다. 비판자들은 ‘예전에는 확실하다고 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면, 당시의 판단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궁금증은 ‘생산공장’ ‘매년 2기’를 언급한 CIA의 판단은 어떻게 나온 것이었을까’로 모아진다. 과연 그 근거는 무엇이었고, ‘2005년 무렵’이라는 시간계산은 어떻게 나온 것일까.

    북한의 HEU에 대한 의혹은 199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제기돼왔다. 특히 북한이 1998년 HEU를 이용해 핵실험에 성공한 파키스탄으로부터 관련기술을 얻고 있다는 사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확인되고 있었다(상자기사 참조). 이 무렵 미국은 통신감청을 통해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원심분리기 12~20개를 입수했다는 정보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을 시도하고 있다는 징후이긴 해도, 핵무기 생산이 임박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일반인에게는 모호해 보이는 이 경계가 정보를 다루는 이들에게는 의미심장하다. 당시 한국측 정보당국 핵심에서 일했던 관계자의 말이다.

    2002년 북한 HEU 의혹은 美 네오콘의 정보조작?

    2002년 당시 북한 HEU 문제 대응의 핵심에 있던 세 사람 중 존 맥로린 CIA 부국장(왼쪽)과 로버트 조지프 백악관 NSC 비확산담당 보좌관(오른쪽).

    “‘시도하고 있다’는 것과 ‘생산시설을 건설하고 있다’에 큰 차이가 나는 것은, 미국이 안보문제에 대응하는 키워드 가운데 하나인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present · clear danger)’이라는 말과 관련이 있다. 세상의 모든 위험에 다 대응할 수는 없으므로, 어떤 위험이 ‘현존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 무력 사용이든 외교적 담판이든 등 강력한 대응을 개시한다는 개념이다. 이라크전 당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WMD)가 현존하는 명백한 위협이라는 명분으로 개전(開戰)했다.

    북한이 HEU를 연구하고 있다거나 시도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현존하는 명백한 위협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원심분리기 수십개로 무기급 우라늄을 만들려면 수십년이 걸리기 때문이다. 최소한 생산시설이 언제까지 완공되고 그 생산능력은 얼마나 될 것인지가 대체적으로라도 나와야 ‘명백해진다’. 2002년 미국은 어떤 정보를 입수했고, 그 정보에 따라 북한의 HEU가 이전과는 달리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이라고 판단했다.”

    2002년 당시 국무부 군축담당 차관보였던 존 볼튼 전 유엔대사가 지난 4월5일 AEI에서 한 연설에서도 같은 맥락의 발언이 확인된다.

    “2002년 초만 해도 정보당국 내에는 북한 HEU에 대한 이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 해 봄부터 여름 사이 어떤 정보가 입수되면서 논란은 단번에 끝났다. 많은 정보당국 관계자들이 그 정보가 얼마나 특별한(unusual) 것인지 설명해주었다. 정보는 결정적이었고, 북한이 ‘산업규모(industrial-scope)’의 우라늄 농축을 시도하기 위한 자재와 기술구입에 나섰다는 결론에 어떠한 이견도 없었다.”

    데이비드 스트로브 당시 미 국무부 한국과장 등 강경파로 보기 어려운 관계자들 또한 2002년 당시의 정황에 동의한다. 이와 관련해 살펴볼 것이 2002년 6월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CIA의 국가정보평가(NIE). 1급비밀로 분류된 이 문서는 전문이 공개된 적은 없지만,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국장은 저서 ‘공격시나리오’에서 “보고서에는 ‘북한이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설비를 건설하기 위한 재료를 구입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문제는 분량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더욱 구체적으로 변한다. 2002년 봄부터 여름 사이 미국이 입수했다는 정보는 무엇이고, 그 정보는 과연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으로 판단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나.

    2005년 6월 ‘아사히신문’은 복수의 미국 당국자를 인용해 “미국이 북한의 고강도 알루미늄 강관 수입 사실을 포착한 데서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됐다”고 보도했다. 2002년 6월 입수된 이 정보는 ‘북한이 러시아 업자로부터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2600대를 만들 수 있는 고강도 알루미늄관 150t을 입수한 사실을 파악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강관은 유럽의 우라늄 농축기업 우렌코사가 개발한 원심분리기의 외부용기(outer casting)에 사용되는 강관과 동일한 소재였다.

    볼튼 전 대사가 말하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이 강관 수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동아’가 접촉한 복수의 당시 미국 정부 관계자는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다. 최근에도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 등은 러시아로부터의 강관 수입을 HEU와 관련해 북한이 해명해야 할 핵심 포인트로 언급하고 있다.

    이 정보가 특별했던 이유는 그 분량에 있다. 원심분리기 2600대 분량이라는 숫자는 샘플 20개나 설계도 입수와는 의미가 다르다. 후자는 HEU가 연구단계에 있음을 의미하지만, 전자는 무기급 우라늄을 생산하기 위한 ‘설비건설’이 목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

    결국 이 정보는 2002년 6월 CIA 국가정보판단(NIE) 보고서에서 ‘설비 건설을 위한 재료 구입 시작’으로 기술됐고, 미국측은 이에 대한 해명을 듣기 위해 켈리 차관보를 평양에 보낸다. 이 자리에서 북한측의 시인성 발언이 나왔고(상자기사 참조), 이후 상황은 제네바 합의의 붕괴와 영변 폐연료봉 인출, 플루토늄 핵 폭탄 개발로 이어진다.

    ‘1년에 2기 생산 가능’이라는 2002년 11월 CIA 보고서의 계산 역시 이 정보로부터 추출됐다는 게 정설이다. 핵공학 박사인 강정민 미 스탠퍼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객원연구원의 설명을 들어보자.

    “파키스탄이 설계한 원심분리기 1기의 농축능력은 1년에 5~6 SWU(Separative Work Unit)이고, 북한이 갖고 있는 천연우라늄을 농축해 무기급 HEU 1kg을 생산하려면 약 200kgSWU가 필요하다. 내폭형 핵무기 1기에 필요한 HEU 양은 25~30kg이므로 5000~6000SWU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다시 말해 P2 원심분리기 1000~1200기를 1년간 가동해야 한다는 뜻이다.

    알루미늄 강관 150t은 약 2600기의 원심분리기에 해당하는 분량이고, 이는 1년간 2기 정도의 HEU를 만들 수 있는 규모다. CIA의 계산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물론 이는 오로지 외부용기에만 해당되는 얘기다. 북한이 다른 핵심 부품들을 얼마나 반입했는지에 따라 진척상황 평가는 연구개발 단계에서 대량생산 단계까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북한의 우라늄 농축 추진에 대한 증거는 이후에도 이어졌다. 2003년 5월 부산에서 열린 원자력공급국그룹(NSG) 연차총회에서는 “북한이 4월 원심분리기 부품 가운데 하나인 안정화직류공급장치를 태국으로부터 도입하려고 했으며, 일본 관계기관이 관련국과 협조해 이를 저지했다”는 일본측 발표와,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수입했던 강관과 동일한 알루미늄 강관 22t을 독일 회사로부터 수입하려고 했으며 이를 운반하던 화물선을 찾아 관련물품을 압류했다”는 독일과 프랑스 대표의 보고가 있었다.

    2004년 초 파키스탄 핵개발의 주역 압둘 카디르 칸 박사가 파키스탄과 북한 사이의 핵-미사일 기술 교환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다.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도 이를 한미 양국에 확인해준 바 있다. 당시 큰 뉴스가 됐던 ‘칸 네트워크’의 폭로 자체는, 그러나 정보 당국자들에게는 기존 정보와 평가를 재확인하는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HEU 개발 프로세스상 러시아로부터의 강관 수입보다 진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미 있었던 것은 칸 박사가 북한에 제공했다고 밝힌 P2 개량형 원심분리기의 구체적인 제원이었다. 1960년대 독일에서 개발된 원심분리기를 모델로 한 이 원심분리기 외부용기의 사이즈가,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수입한 알루미늄 강관과 ㎜단위까지 일치했기 때문. 러시아로부터의 강관 수입이 HEU 프로그램의 일환이라는 심증이 추가된 셈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구체적인 추가증거는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각국은 북한의 관련물품 수입 여부와 관련해 촉각을 곤두세웠지만, 오히려 폐연료봉 재처리를 통한 플루토늄 핵 폭탄 개발이 현안이 되면서 HEU는 잊혀져갔다. 특히 2005년 2월10일 핵 보유 공식 선언이 나오면서, 북한이 HEU 능력을 갖고 있는지 따지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 됐다고 당시 관계자들은 말한다.

    결국 북한의 HEU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2002년 6월 당시의 수준에서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HEU 연구개발 단계에 해당하는 정보는 구체화됐고, 대량생산을 위한 물품구입 시도가 확인됐지만 각국의 단속으로 좌절된 것뿐이었다. 남아 있는 분명한 정보는 러시아로부터 수입된 알루미늄 강관 150t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양국 관계자들의 일치된 설명이다.

    ‘2000년대 중반’이 됐지만…

    이제 질문은 ‘러시아로부터의 강관 수입을 북한 HEU가 ‘현존 위험’단계로 접어들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로 본 CIA의 판단은 정확했을까’로 넘어간다. 과연 그 근거는 충분했던 것일까.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3월28일 열린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토론회에서 “알루미늄 강관 얘기를 하지만, 그게 꼭 HEU에만 쓰이는 배타적인 증거로 보기는 어려웠다”고 잘라 말했다. 북핵 위기 초기 청와대에서 관련업무를 담당했던 한 고위직 인사는 “구멍이 너무 많았다”며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우리는 전문가들과 정보기관의 분석을 취합해 HEU를 가동하는 데 필요한 물품의 리스트를 만들고 개발 프로세스상 필요한 대로 순서를 매겼다. 한미 양국의 정보교류를 종합해 북한이 이미 입수했거나 자체 생산이 가능한 것에는 ○, 입수하다 좌절된 것에는 ×, 명확하지 않은 것에는 △를 쳤다. 리스트는 무척 길었고, 원심분리기 샘플이나 설계도는 리스트의 맨 앞에 해당했다.

    러시아로부터의 강관 수입이 이전의 정보에 비해 리스트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그간 파악된 다른 물품에 비해 프로세스가 더 진전된 후에 필요한 물품이라는 뜻-편집자). 그러나 그 뒤에도 여전히 긴 리스트가 있었고, 그 앞에도 여러 물품이 ×로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원심분리기를 돌리는 회전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마레이징강 초합금은 강관보다 훨씬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었지만, 이미 도입 좌절이 확인됐다. 리스트는 수많은 회의를 통해 업데이트 됐어도 의미 있는 정보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관을 지낸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은 CIA의 2002년 6월 NIE를 보다 직접적으로 반박한다. 그는 지난 2월28일 공개한 보고서를 통해 “CIA는 이라크를 공습하기 전에도 이라크가 보유하고 있는 알루미늄 강관이 원심분리기 생산용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재까지 이라크 내 어디에서도 핵개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북한 관련 정보에서도 똑같은 오류를 범한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HEU 관련 최초 정보는 한국측의 HUMINT?

    외교관 아내 피살, 초합금 도입 차단…1999년이 절정


    북한의 HEU 개발에 대한 최초의 정보는 한국에서 제공했다는 것이 미국측 인사들 사이의 정설이다. 한국 정보기관의 인간정보(HUMINT·Human Intelligence)를 바탕으로 추적해보니 파키스탄으로부터의 핵 기술 도입이 확인됐고, 이후 러시아로부터의 강관 수입이 결정타를 날렸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국측 전직 당국자들이 지목하는 사건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6월, 파키스탄 주재 북한대사관의 강태윤 경제담당 참사관의 아내 김신애씨가 저격을 당해 사망한다. 묘할 수 밖에 없는 ‘외교관 아내 피살사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던 중 북한인 세 명이 파키스탄의 칸 연구소에 파견돼 있었다는 첩보가 국정원에 입수됐다는 것. 김신애씨의 시신을 본국으로 운송하는 과정에서 그 관에 파키스탄이 제공한 원심분리기 샘플과 설계도가 들어있었다는 설도 있다. 국정원은 이러한 내용을 미국에 통보했고 함께 추적에 나서 확인하는 수확을 거뒀다.

    그 직후에는 북한이 가스 원심분리기의 회전자 재료인 마레이징강 초합금을 수입한다는 첩보가 있어 미국 정보기관과 함께 차단한 적도 있다. 초합금 수입과 관련해 당시 국정원은 북한측의 구매 영수증을 입수해 미국측에 제시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2002년 10월 신건 당시 국정원장이 국회 정보위원회에 보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외부에는 미국측이 말하는 ‘인간정보’가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 등 탈북 인사들의 진술을 뜻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지만, 관계 당국자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황 전 비서의 경우 파키스탄의 핵실험 성공 이전에 탈북했고 분야도 달랐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 적이 없다는 것. 파키스탄에 주재한 적이 있는 홍순경 전 참사관 역시 마찬가지다. 그 외에 HEU 관련 정보라며 나서서 진술하는 이들이 있었으나 사실과 다르거나 턱없이 과장된 내용 뿐이었다는 것.

    이러한 정보들은 대부분 기술개발이나 연구 수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북한이 대량생산을 추진하기 시작했다는 정보는 유럽에서 확인된 것으로 전해지는 러시아 강관 수입과 2003년 NSG에서 확인된 독일로부터의 알루미늄 강관 수입 시도 좌절이 전부라고 관계 당국자들은 전했다. 두 경우 모두 해외에서 파악돼 미국을 거쳐 한국에 통보된 정보다.


    “그 알루미늄 튜브는 세계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것인데다, 그 자체로는 가스 원심분리기 생산의 수준이나 단계, 앞으로의 일정을 가늠하는 지표가 될 수 없다. 그보다 민감한 다른 품목을 입수했는지에 대한 정보 없이 생산능력 완료시점을 예측하는 것은 막연한 추정(speculation)에 불과하다.”

    시간은 흘렀고, CIA의 의회 보고가 설정했던 ‘2000년대 중반’이 됐지만, 북한이 HEU 생산시설 건설을 완료했다는 징후는 어디에도 없었다. 미국 언론에서는 익명의 정부 당국자들을 인용해 “북한의 HEU 프로그램이 우려하던 것만큼 진척된 것 같지 않다”거나 “생산시설은 아예 없었다” “켈리 방북 당시 북한이 이를 시인한 것은 미국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는 내용을 담은 기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조작과 실패와 과장 사이

    2007년 현재 시점에서 2002년 CIA의 정보판단을 평가해보면 이렇다. 러시아로부터의 강관 수입은 분명 북한이 HEU 연구개발이 아니라 대량생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정보였다. 당시는 이라크에서의 정보 판단이 실패였음이 확인되기 전, 다시 말해 알루미늄 강관을 원심분리기 제조의 증거로 삼기엔 위험하다는 것을 CIA가 ‘경험’하기 전이었다. 따라서 미국이 이를 의미 있는 정보로 생각한 것, 이를 바탕으로 ‘1년에 2기’라는 생산능력 목표를 산출한 것은 충분히 근거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2002년 당시 북한 HEU에 대한 미국의 정보판단을 음모론적 시각에서 접근하는 것은 그리 적절하지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러시아로부터의 강관 수입 자체가 조작된 정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당시 CIA의 판단을 ‘정보조작’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 북한이 우라늄 농축기술에 대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파키스탄으로부터의 기술 도입으로도 충분히 확인된다. 다시 앞서의 당시 정보당국 핵심관계자의 분석이다.

    “그러나 CIA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생산시설 건설을 위한 재료 구입 착수’로 알려진 2002년 6월 NIE의 결론은 납득할 만했지만, 이를 ‘생산시설 건설’로 고쳐 표현한 그 해 11월의 의회 보고는 분명 ‘선을 넘은’ 것이었다. 특히 ‘2000년대 중반까지 시설구축이 완료될 것’이라는 부분은 압권이다. 공개된 보고서는 북한이 HEU 생산공장 건설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것처럼 기술돼 있지만, 이는 분명 사실과 달랐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상황이 ‘현존하는 명백한 위험’으로 발전했다는 당시 CIA의 정보판단은 분명 ‘실패’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특히 2002년 11월의 의회 보고는 ‘정보 과장’이라고 결론 내릴 만한 정황이 충분해 보인다.

    질문은 이제 막바지로 향한다. 과연 왜 이 때의 미국은 정보 판단에 실패했을까. ‘연구개발부터 대량생산까지’ 가능한 다양한 해석 가운데 왜 ‘생산공장 건설 착수’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골랐을까.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지표 하나에 의거해 완공시점까지 지목하는 무리수를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002년 10월 ‘북한 HEU 시인’ 당시 상황

    기선제압 시도한 평양, 미국 속내 몰라 오판한 듯


    북한은 과연 HEU를 인정했나.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평양을 찾은 이래 꾸준히 제기돼온 의문이다. 협상 첫날 켈리 차관보의 HEU 프로그램 추궁에 대해 전적으로 부인하던 북한측은, 다음날 강석주 외교부 부부장이 “그보다 더한 것도 가지게 돼 있다”고 말한다. 평양 주재 영국대사관을 통해 방북단의 전문을 받아본 볼튼 당시 차관보는 “내가 얘기하던(recount) 그대로여서 믿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볼튼 등 강경파들이 이후 과정을 주도했다는 점을 들어 “북한이 시인했다”는 당시 미국의 발표 역시 강경파의 조작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방북단에 참가했던 이들 가운데 한국어를 구사하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당시 강석주의 뉘앙스는 분명 인정하는 쪽이었다”고 말한다. ‘그래 있다,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것이냐’는 투였다는 것. 특히 ‘인정했다’는 결론 자체는 방북단 전원이 동의하여 내린 것이었다. 강경파와는 대척점에 서 있는 방북단 구성원들조차 지금도 북한의 시인 자체에는 이견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를 통역상의 오류나 과잉해석이라고 볼 근거는 희박하다.

    이후 북한은 공식발표를 통해 “‘더한 것’은 일심단결을 뜻했다”며 HEU 프로그램의 존재를 시인한 적이 없다고 반박한다. 그럼 북한은 협상 테이블에서 왜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일까. 27년간 미 국무부에서 일한 당시 방북단의 통역 김동현씨의 말이다.

    “북한은 협상마다 으레 강성발언으로 기선을 제압하곤 했다. 초반에 상대방의 의지를 꺾은 다음 조금씩 현실적인 논의를 진전시키는 식이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당시 평양은 미국이 새로운 대북정책을 제시할 것이라 기대했다. 따라서 미국이 강하게 나오자 HEU를 인정하는 듯한 더 강한 발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반응을 살펴 다음단계로 나아가려했던 듯싶다. 첫째 날과 둘째 날 사이 밤새도록 그런 전략을 논의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2년 가까운 대북정책 재검토를 끝낸 상태였다. 방북단의 공식적인 목적은 ‘관계개선을 위한 협의’였고, 북한은 물론 한국도 켈리의 방북이 새로운 대북정책을 전달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이 때문에 북한은 평소처럼 ‘강도 높은 기선제압’을 시도했지만, 정작 방북단의 실제 목적은 그게 아니었다.

    당시 북한의 HEU를 확신하고 있던 미국측은 켈리 특사에게 이를 추궁하라고 주문했다. ‘새로운 대북정책’이 있었다면 강경노선으로의 분명한 선회였던 셈. 따라서 둘째 날 북한의 시인성 발언이 나오자 결론을 얻은 방북단은 바로 귀국했고, 평양은 뒤통수를 맞았다. 이후 “방북단이 오만했다”며 수습을 시도했지만 상황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외교협상에 강한 북한이 남긴 오판 사례의 하나로 기록할 만하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였다”

    “부시 대통령과 딕 체니 부통령 등이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정책이나 제네바 합의를 경멸했지만(despise), 2002년 상반기까지는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추가정보’가 들어왔고, 정보당국은 HEU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부시 행정부는 켈리를 북한에 보내 ‘우리는 알고 있다. 멈추지 않으면 제네바 합의는 끝난다’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북한의 시인 발언에 대한 네오콘의 반응은 환호에 가까웠다.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어겼으니 이제 합의를 끝장낼(kill) 수 있게 됐다’는 것이었다.”

    2002년 당시 관련 핵심부처에서 북핵 문제를 다뤘던 미국측 관계자의 회고다. 역시 북핵 관련 실무에 간여했던 또 다른 미 행정부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대통령이 김정일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정말 나쁜 놈이라는 정보가 들어오면 대통령이 얼마나 좋아하겠는가. 최고결정단계는 정보의 세부사항을 따지지 않는다. 분석파트에서 내린 결론을 볼 뿐이다. 모두 그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누군가 분위기를 주도하면, 다른 이들이 제동을 걸기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대통령의 선호는 실무진에 영향을 끼치고, 실무진의 성향은 정보분석파트에 영향을 끼친다. 같은 정보를 갖고도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2002년 당시 정보판단 부서들의 과장과 실패는 그런 맥락에서 볼 수밖에 없다.”

    당시의 정보판단이 과장됐다면 그 ‘분위기’를 주도한 것은 누구인가. 미국측 인사들이 거론하는 이름은 볼튼 당시 차관보와 로버트 조지프 당시 NSC 비확산담당 보좌관, 존 맥로린 당시 CIA 부국장으로 압축된다. 각각 실무부처에서 WMD 대응을 주도하는 자리, 대통령의 옆에서 핵 문제를 조언하는 자리, 적성국 군사동향 정보를 책임지는 자리다.

    볼튼 당시 차관보와 조지프 당시 보좌관은 네오콘의 핵심인사며, 맥로린 부국장은 CIA의 대표적인 대북 강경론자였다. 이들은 모두 부시 행정부에서 승승장구했고, 근래 들어 공직에서 물러났으며, HEU 정보판단에 대해 최근 일고 있는 비판을 공개적으로 반박함으로써 당시의 결론을 변호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볼튼 당시 차관보는 앞서의 AEI 연설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추가로 입수되기 ‘전부터’ 나는 분명 제네바 합의를 중단시킬 적절한 시점을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지프 당시 보좌관 역시 아직 공개되지 않은 최근의 미국 언론 인터뷰에서 “그 무렵 (우리가) 제네바 합의를 종식시킬 기회(opportunity)를 찾았다는 말은 적절치 않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obligation)였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맥로린 전 부국장 역시 공개석상에서 여러 차례 “2002년 여름 입수된 증거는 결정적이었다”는 취지로 발언한 바 있다.

    당사자들의 공개발언을 종합하면, 그 해 10월 북한이 시인성 발언을 내놓자 이들은 ‘이제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CIA가 11월 의회에 제출하는 보고서는 이를 구체화할 절호의 찬스였다.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시인한 이상 세부사항은 문제가 될 수 없었던 듯 하다. 증거나 보고서를 물리적으로 조작하지는 않았다 해도, 그들의 ‘흥분’이 당시 CIA의 정보판단이 ‘선을 넘는’ 데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추측은 무리가 없어 보인다.

    이후 이들 3인방은 대북 중유공급 중단부터 BDA(방코델타아시아)에 이르는 초강경 정책을 주도했다. 데이비드 스트로브 당시 국무부 한국과장은 “정보판단보다 오히려 정책판단의 실수가 더 큰 문제”라고 말한다. 미국이 북한의 HEU에 대해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 식으로 접근하면 북한이 결국 플루토늄을 통한 핵개발로 나아갈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에도 충분히 예견되었다는 것이다.

    판단의 싸움, 노선의 싸움

    아이러니는, 당시 미국의 강경책과 그에 마주한 북한의 핵개발이 오히려 2·13합의를 통해 동북아 질서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주석 전 청와대 국가안보수석은 “사실 HEU 문제 자체는 미국과 북한이 풀기로 마음먹으면 장애물이 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파키스탄으로부터의 기술도입은 에너지용 저농축우라늄(LEU) 개발을 위한 것이었다고 정리하고 (강관 같은) 다른 물품은 현재 상태를 보여주면 타협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최근 미국 내에서 일고 있는 HEU 정보판단에 대한 논란은 그 과정을 둘러싼 워싱턴 내 파워게임과 관련이 깊다. 2·13합의에서 HEU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거명되지 않으면서 ‘그 문제야말로 협상 진전의 핵심’이라는 강경파들의 압박이 쏟아지자, 워싱턴 협상파들이 그 기대치와 우려를 낮추기 위해 ‘HEU 문제가 실제보다 더 심각하게 포장됐을 수 있다’는 문제제기에 나선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2002년 당시의 ‘정보 과장’도 대통령의 뜻에 맞추기 위한 것이었고, 그에 대한 최근의 비판도 대통령의 뜻에 맞추기 위한 것이라는 묘한 결론이 나온다. 그 두 대통령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더욱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2002년 당시의 네오콘과 현재의 협상파로 나뉘어 벌이는 최근의 진실게임이야말로 정보판단의 문제는 ‘노선의 싸움’임을 보여준다. 북한대학원대학교 류길재 교수의 말이다.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 국무장관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한다. 이를 근거로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북한은 남침을 감행하지만, 예상과 달리 미국은 총력을 다해 참전한다. 항구불변의 원칙이 있다기보다는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가치판단이 달라지는 존재, 미국에 있어 한국은 그렇듯 경계에 서 있는(marginal) 나라다.

    HEU를 둘러싼 2002년 당시의 정보판단과 현재의 비판은 그 경계성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본다. 우리로서는 씁쓸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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