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호

‘대륙의 황태자’ 시진핑 국가부주석

화합 지향 성품으로 군심·민심 한손에 쥔 집단지도체제형 리더

  • 하종대│동아일보 국제부 차장, 전 베이징 특파원 orionha@donga.com│

    입력2010-08-04 09: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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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의 황태자’ 시진핑 국가부주석
    ‘중국의 가장 유력한 차세대 최고지도자’로 꼽히는 시진핑(習近平·57) 국가부주석. ‘황태자’로 불리는 그에게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고 있지만 정작 중국 대륙에서는 그를 소개하는 자료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국의 대표적인 검색사이트인 바이두(百度)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관련 법률 법규와 정책에 의거해 일부 검색 결과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라고 나온다. 보이는 자료는 대부분이 그의 공식 활동과 연관된 내용뿐이다. 중국 정부가 이미 차세대 지도자의 이미지 관리를 위해 ‘통제’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지도자급 인사에 대한 내용은 철저하게 차단하고 관리한다.

    하지만 최근 홍콩 등 중화권에서는 그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반영하듯 그에 대한 전기가 속속 출간되고 있다. 2008년 1월 홍콩의 우밍(吳鳴)씨가 ‘시진핑 평전(習近平傳)’을 처음 펴낸 데 이어 올해 4월엔 가오샤오(高曉)씨가 ‘앞으로 중국을 이끌 시진핑 전기(他將領導中國 習近平傳)’를 출간했다.

    ‘황제 등극’에 이변 없을 듯

    10년 전까지만 해도 시진핑을 주목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엔 모두 ‘중국 공산당의 혁명 원로 시중쉰(習仲勳·1913~2002)의 아들’ 또는 ‘중국의 유명 민족 성악 가수 펑리위안(彭麗媛·48)의 남편’으로 기억했지 ‘시진핑’이라는 이름 석 자는 안중에도 없었다. 심지어 2006년 12월 ‘뉴스위크’아시아판은 ‘내일의 스타’ 특집에서 리커창(李克强·55) 당시 랴오닝(遼寧)성 서기(현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겸 국무원 부총리)만 소개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바뀌었다. 현재 시 부주석은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 내지 ‘황태자’로 불린다. 황제가 승하하면 황태자가 자연스럽게 보위(寶位)를 이어받듯 시진핑은 시간이 흘러가면 중국의 최고지도자인 당 총서기에 선출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현재 그의 지위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먼저 그는 현재 ‘중국 정치권력의 심장부’로 불리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서열 6위의 상무위원이다. 중국 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리는 2012년 가을이면 권력서열 1위인 후진타오(胡錦濤·68) 당 총서기부터 우방궈(吳邦國·69·서열 2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원자바오(溫家寶·68·서열 3위) 국무원 총리, 자칭린(賈慶林·70·서열 4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 리장춘(李長春·66·서열 5위) 상무위원은 모두 ‘연령 제한(선출 당시 만 68세)’에 걸려 물러나야 한다. 같은 5세대 지도자인 리커창 부총리는 서열 7위의 상무위원인 만큼 그가 앞선다.

    그는 또 중국 공산당의 일상 업무를 관할하는 중앙서기처의 제1서기다. 중앙정치국에서 결정하는 중요한 정책은 모두 중앙서기처를 통해 집행된다. 결국 모든 당무는 그의 손을 거쳐야 하는 셈이다.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후진타오 국가주석 바로 다음 자리인 국가부주석이기도 하다. 국가주석은 외교와 국방을 주로 담당(내치는 국무원 총리가 담당)하지만 사실상 국가업무 전반을 통할한다. 부주석은 이런 주석을 보좌하는 만큼 국정 전반을 훤히 꿰고 있을 수 있는 자리다.

    중앙당교 교장과 중앙홍콩·마카오업무조정소조 조장도 맡고 있다. 중앙당교는 현장(縣長) 이상의 중국 공산당 간부를 재교육하는 기관이다. 당교 교장은 말 그대로 중국 공산당의 이념과 노선을 틀어쥐고 있는 자리다. 중국 정부로서 매우 중요한 정치문제인 중앙홍콩·마카오업무조정소조 조장을 그가 맡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인 홍콩과 마카오 문제도 시 부주석이 중국 공산당의 이익에 맞게 잘 처리할 것이라고 중국 지도부가 신뢰하고 있다는 증거다.

    일각에서는 2007년 10월 제17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과 리커창이 똑같은 직급에 해당하는 상무위원에 선출된 만큼 누가 후계자가 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후진타오 총서기는 최고지도자로 등극하기 10년 전인 1992년부터 당의 최고지도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 데 반해 시 부주석은 2007년에 상무위원에 선출된 데다 그것도 리커창 부총리와 똑같이 상무위원회에 진입한 만큼 아직은 누가 총서기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은 이 같은 분석의 근거로 시 부주석이 지난해 9월 열린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제17기 4중 전회)’에서 예상과 달리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선출되지 못한 점을 들고 있다.

    ‘대륙의 황태자’ 시진핑 국가부주석

    중국 공산당 원로이자 부총리를 지낸 아버지 시중쉰과 함께한 시진핑(오른쪽). 1980년대 초에 찍은 사진이다.

    물론 중국이 서방과 달리 ‘정치의 예측가능성’이 높지 않은 만큼 앞으로 후계구도가 달라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시 부주석이 정치적 실수를 범할 경우 후계자는 다른 사람으로 바뀔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특히 인화(人和)에 능한 데다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고 신중한 시 부주석의 평소 성격으로 보아 정치적 우(愚)를 범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중국의 저명한 한 학자는 시 부주석이 2012년에 중국의 최고지도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첫째 퇀파이(團派·중국공산주의청년단 출신)를 제외하고는 상하이방(上海幇)이나 태자당(太子黨) 등 모든 계파가 그를 지지한다. 심지어 장쩌민(江澤民) 등 원로그룹과 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 대부분도 그를 선호한다. 둘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 겸 비서장이었던 겅뱌오(耿飇)의 비서로 3년간 일한 경력 때문에 군내 지인이 많다. 군부에 지지자가 많다는 뜻이다. 게다가 차세대 지도자 가운데 이런 군 경력을 가진 사람은 시 부주석뿐이다. 셋째 남의 얘기를 경청한다. 이는 갈수록 집단지도체제 성향이 강해지고 있는 중국 지도부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넷째 성격이 담대해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이 학자는 따라서 시 부주석이 ‘황제’가 되기 전에 중간에 낙마할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최근 들어 시 부주석의 언론 노출은 갈수록 늘고 있다. 그가 지난달 호주와 뉴질랜드 등을 방문할 때 신화(新華)통신의 톱기사 32개 가운데 9개가 시 부주석의 활동을 전하는 기사였다. 반면 후 주석은 두번, 원 총리는 단 한 번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으로 후 주석이 국가부주석이던 시절엔 꿈도 꿀 수 없는 현상이었다.

    소박, 겸허, 온화, 대범

    ‘平實(평실), 低調(저조), 謙和(겸화), 大氣(대기).’ 2007년 10월22일 중국 공산당 제17기 중앙위원회 제1차 전체회의에서 시 당시 상하이(上海) 당 서기가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자 홍콩에서 발행되는 ‘다궁(大公)보’는 10월23일자 기사에서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平實이란 소박하고 수수하다는 뜻이다. 低調는 재능과 능력이 뽐내거나 자랑할 만하지만 이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중국에서는 사람으로서 행동할 때는 ‘低調(로키)’하되 일을 할 때는 ‘高調(하이 키)’하는 것을 모범으로 삼는다. 일은 적극적으로 하되 자랑은 소극적으로 하라는 뜻이다. 謙和는 겸허하고 온화하다는 말이다. 大氣는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의미다.

    대단한 칭찬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또 사상이 자유롭고 시야가 넓으며 언론매체와 잘 교류하고 정보시대와 시대정신에 잘 적응하며 도광양회(韜光養晦)할 줄 아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의 정치적 미래가 밝다고 말하는 것도 그의 이런 품성 때문이다.

    그는 푸젠(福建)성장 시절(1999~2002년) 이례적으로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중화쯔뉘(中華子女)’의 편집장 양샤오화이(楊篠懷)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개인적인 선전을 원하지 않아 지금까지 개인에 대한 인터뷰를 100번도 넘게 거절했다”며 “우리(고위 관료)가 어떤 일을 하는가 하는 것도 마땅히 해야 할 직무이지, 무슨 선전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2007년 5월 제17차 당 대회를 앞두고 그가 젊었을 적 일했던 허베이(河北)성의 ‘스자좡(石家莊)일보’에서 한 면을 할애해 ‘정딩(正定)에서의 시진핑’을 크게 소개하자 그는 현지 지방 정부 관리에게 전화를 걸어 “왜 이런 기사가 나가도록 가만히 있었느냐”며 크게 화를 낼 정도였다.

    그는 또 재능이나 업적보다 인화를 더 중시한다. 그는 항상 아래 직원들에게 “인화단결이 목표는 아니지만 인화단결을 잘 하면 일은 항상 비교적 잘할 수 있다”며 “하지만 인화단결을 잘하지 못하면 일은 언제나 잘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평소 너그러웠던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친 시중쉰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마라(己所不欲 勿施于人)’는 공자 말씀을 자녀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반복해 교육했다.

    이는 같은 태자당 소속으로 현재 충칭(重慶)시 서기인 보시라이(薄熙來·61)와 크게 비교된다. 보 서기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걸핏하면 부하들에게 화를 내고 상사와는 공명(功名)을 다투기로 유명했다. 다롄(大連)시장 시절 그는 차오바이춘(曹伯純) 서기와 물과 불처럼 화합하지 못했고, 랴오닝성장 시절엔 원스전(聞世震) 성 서기와 관계가 좋지 않았다.

    태자당 같지 않은 태자당

    물론 그에 대한 이런 칭찬은 그가 차세대 최고지도잣감으로 거론되면서 부풀려진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주변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다. 현재의 ‘황태자’ 자리에 그를 오게 한 것도 이런 몸가짐 덕분이다. 예의 바르면서도 성실하고 겸허하면서도 당당한 그의 품성을 차세대 지도자군 가운데 따라올 자가 없기 때문이다.

    태자당은 중국 당정군 및 재계 고위층 인사의 자녀를 일컫는 말로 4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태자당은 상하이방이나 퇀파이와 함께 중국 정계의 3대 계파 중 하나다. 이들은 학교나 직장, 또는 혈연을 통해 끈끈한 관계를 맺으며 당정군의 요직에 포진해 서민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사실 시진핑은 ‘태자당 중의 태자당’이다. 바로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과 정무원 비서장, 국무원 부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을 지낸 시중쉰이 아버지다. 부친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주요 조력자이자 ‘중국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의 절친한 친구였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고위 관리들의 자제를 일컫는 태자당의 무리처럼 혜택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가 아홉 살이던 1962년 가을에 일어난 류즈단(劉志丹·1903~ 1936) 사건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대 영웅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는 류즈단은 ‘산간혁명의 근거지’인 시베이(西北) 홍군 및 시베이 혁명근거지의 창건자로 활약이 대단했으나 1936년 4월 33세의 젊은 나이에 혁명전투 중 전사했다. 문제는 이런 류즈단의 생애를 묘사한 소설이 공교롭게도 ‘산간이 중앙 홍군을 구했다’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의 가장 아픈 부분을 건드린 점이다. 결국 산간혁명 근거지를 만들 때 함께 고생했던 시중쉰은 하루아침에 마오쩌둥에 의해 반(反)혁명분자로 몰려 부총리직에서 해임됐다. 이후 무려 16년간 구금과 감호 생활을 해야 했다.

    부친이 갑자기 숙청된 뒤 1966년 문화대혁명까지 터지면서 그 역시 고급간부 자녀가 다니는 81학교에서까지 쫓겨나 농촌으로 하방(下放)됐다. 하지만 이런 고난은 그가 성공적인 삶을 일구는 하나의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농민의 몸에 득실거리는 이가 옮겨올까봐 농민이 가까이 오는 것조차 두려워했던 그는 처음엔 농촌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3개월 만에 베이징(北京)으로 몰래 돌아왔다가 적발돼 구금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농촌에 돌아가 벼룩과 음식 (농촌)생활 노동 사상 등 5대 관문을 통과하면서 농민들과 친숙해졌고 나중엔 하방된 량자허(梁家河) 산촌 마을의 서기로까지 승진했다. 7년간의 하방생활을 통해 민중의 삶을 철저히 체득할 수 있었던 그는 “나의 성장 진보는 산베이(陝北)에서 시작됐다고 말해야 한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그는 다른 태자당 소속 고위 관리들에게서 풍기는 오만함이나 자만심 등이 전혀 보이지 않고 서민적 정서를 갖고 있다. 그가 다른 태자당과 비교되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1976년은 중국에 청천벽력과 같은 해였다. 새해 초인 1월8일 ‘중국 인민의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1898~1976)가 사망해 중국 인민에게 큰 슬픔을 안겼다. 같은 해 7월28일 중국 10대 원수 중 하나인 주더(朱德·1886~1976)가 세상을 떴다. 이어 두 달 뒤인 9월9일엔 마오가 사망하면서 세상은 바뀌기 시작했고, 다음달인 10월18일엔 왕훙원(王洪文), 장춘차오(張春橋), 장칭(江靑), 야오원위안(姚文元) 등 극좌파 사인방(四人幇)이 제거됐다.

    1978년 2월 부친은 65세의 나이로 정계에 복귀했다. 두 달 뒤인 4월3일 부친은 광둥성 제2서기로 전보됐다. 1978년 8월엔 부친을 실각시키고 16년간 감옥과 감시로 몰아넣었던 류즈단 사건이 당에서 오류로 평가돼 시정됐다. 반당(反黨)소설이 아니라 무산계급 혁명가를 찬미하고 혁명투쟁사를 묘사한 소설이라는 재평가였다.

    잘 알려진 일은 아니지만 부친은 경제특구 구상의 아이디어를 처음 내놓은 인물이다. 광둥성 서기 겸 성장으로 재직하던 1979년 초 특구 설치의 필요성을 덩에게 강력하게 제기했고 덩은 이를 받아들여 선전(深?) 주하이(珠海) 등 4곳에 특구를 설치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이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시중쉰이 처음으로 제안한 특구가 광둥성에서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시중쉰은 중국에서 ‘개혁의 선구자’로 추앙받고 있다. 시 부주석의 고향 사람들은 그래서 시중쉰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대륙의 황태자’ 시진핑 국가부주석
    그의 고향 산시성 푸핑(富平)현에 가기 위해 시안에서 푸핑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면 푸핑현 입구에 ‘시중쉰의 고향(故里)’이라고 크게 쓰여 있다. 현지 고향 사람들이 그의 부친에 대해 얼마나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 때문인지 덩과 장쩌민 집권 기간 내내 그는 중용됐다. 1979년 칭화대 공정화학과를 졸업한 뒤 국무원 판공청에서 겅뱌오 부총리 비서로 배치됐다. 겅뱌오는 당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이자 국무원 부총리로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장까지 겸하고 있었다. 부친 덕분에 배치를 잘 받은 것이다.

    이어 29세의 나이로 허베이성 정딩현 부서기에 임명됐다. 32세엔 샤먼(廈門)시 부시장이 됐다. 부친의 건의로 설치된 경제특구 중 하나인 샤먼시에 특별 배치된 것이다. 이어 연해 지역의 푸젠성장과 저장(浙江)성장을 잇달아 역임했다. 1997년 15대 때에는 보시라이를 포함한 5세대 태자당 인사들이 중앙위원회 중앙위원과 후보위원선거에서 대거 탈락했지만 그는 덩의 장남 덩푸팡(鄧樸方)과 함께 중앙위원회 진입에 성공했다.

    지방 경력은 풍부하지만…

    ‘허베이에서 연마하고 푸젠에서 하늘로 올라 저장에서 날개를 달고 상하이에서 날다.’ 그의 정치 경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1982년 처음 지방인 허베이성 정딩현으로 내려간 그는 1985년 푸젠성으로 옮겨간 뒤 무려 17년 남짓 푸젠성에서 일했다. 이어 저장성과 상하이의 당 서기를 역임했다.

    하지만 정딩현의 부서기에서 푸젠성장까지 20년에 걸친 그의 지방 근무기간 중 그의 정치적 업적 성과는 좋지 않았다. 푸저우(福州) 시장으로 무려 6년이나 재직했지만 그의 치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그가 의욕적으로 추진한 ‘창러(長樂)국제공항 건설’과 삼방칠항(三坊七巷) 구도시 개발 계획은 모두 실패로 끝이 났다. 엄청나게 크게 지은 창러국제공항은 4년 반 만에 무려 11억위안(약 1942억원)의 적자가 났고, 홍콩의 유명한 사업가 리자청(李嘉誠)이 함께 한 삼방칠항 정책은 주민 반발과 엄청난 사업비 때문에 지지부진하다 결국 철회됐다.

    푸젠성장 역시 대리성장 기간을 포함해 6년이나 재직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푸젠성은 되레 주변의 상하이나 저장, 광둥성에 비해 경제성장이 크게 뒤졌다. 이에 따라 주민 사이에서는 ‘(경제특구인) 선전에서는 주식에 투자하고 (중국의 경제수도인) 상하이에서는 돈을 세는 데 푸젠에서는 사회주의 사상 교육을 한다’는 비아냥이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2000년 6월엔 영국에서 네덜란드 화물차를 검사하던 중 냉동칸에서 무려 58명의 중국인이 밀입국을 시도하다 사망한 사건까지 발생했다. 이들 중국인은 전원 푸젠성 사람이었다.

    ‘대륙의 황태자’ 시진핑 국가부주석

    2009년 12월17일 이명박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방한한 시진핑 부주석(왼쪽)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이 대통령과 시 부주석은 이날 조찬을 함께했다.

    시진핑이 푸젠성에서 근무하면서 유일하게 잘한 것은 성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서민의 고충을 듣고 그들과 함께 호흡한 것이었다. 이는 나중에 그의 큰 정치적 성과로 평가됐다. 2000년 8월 ‘런민(人民)일보’는 ‘평상심으로 주민의 일을 처리한다’는 제목으로 시진핑의 이런 행적을 보도해 평민성장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그러나 시진핑의 정치적 업적은 2002년 저장성 서기가 된 이후 크게 달라졌다. 그는 저장성 서기로 있을 때는 1인당 총생산을 전국 최고인 3000달러까지 끌어올려 5년 만에 저장성을 중국에서 민간기업이 가장 발전한 성으로 키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과보다 인화 중시

    대부분의 고위 관리는 자신의 임기 내에 정치적 업적으로 삼을 만한 성과를 거두려 한다. 또 전임자와의 차별을 위해 가능한 한 전임자의 성과를 깎아내리고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펼치려 한다. 하지만 시진핑은 정반대였다. 가능한 한 전임자의 정책 노선이나 추진 과제를 폐기하지 않았다. 또 새로운 일을 추진하더라도 반드시 자신의 임기 내에 성과를 내겠다는 과욕을 부리지 않았다. 정치적 업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도 이런 업무 자세와 연관이 있다.

    중국에서 ‘관리가 새로 부임하면 3가지 새로운 일을 벌인다(新官上任三把火)’는 말이 있다. 나관중(羅貫中)이 지은 중국 4대 명저 중 하나인 ‘삼국연의(三國演義)’에 나오는 이 말은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의 군사(軍師)가 된 뒤 3번이나 화공(火攻)을 통해 조조(曹操)의 군대를 전멸시키다시피 했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새로 부임한 관리가 서둘러 정치적 공적을 쌓으려다 큰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경계의 말로 쓰이고 있다.

    시진핑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되레 거꾸로 했다. 푸젠의 대리성장으로 임명됐을 때 시진핑은 업무의 연속성과 인화 2가지를 강조했다. 그는 전임 성장이 다져놓은 기초 위에서 일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는 “업무란 릴레이와 같은 것”이라며 “바통을 잘 이어받아서 잘 들고 달려야 한다”고 말했다. 시진핑은 지도부 간 불화를 경계해 “지도자는 정무에 종사하면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처리하는 데 정력의 70%를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시진핑은 정치적 업적은 걸출하지 않았지만 어디를 가나 같은 지도부 내에서 내홍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정딩, 샤먼, 닝더, 푸저우 등 어느 곳에서도 그와 근무를 함께 하면서 갈등을 빚은 사람은 없었다. 좋아하는 역사적 인물도 진시황(秦始皇)이나 한무제(漢武帝), 당태종(唐太宗) 같은 불세출의 영웅이 아니었다. 되레 유방(劉邦)이나 유수(劉秀), 유비(劉備)와 같은, 뛰어난 지력과 재능은 없어도 인화단결을 잘하는 사람을 더 숭앙하는 편이다.

    가족 관리가 운명 가를 수도

    시진핑은 1987년 9월 34세의 나이로 9세 어린 펑리위안과 결혼했다. 하지만 펑리위안이 첫 부인은 아니다. 그의 첫 부인은 전 주영(駐英)대사였던 커화(柯華·95)의 딸이었다. 커화는 옌징(燕京)대를 수료하고 항일전쟁이 터지자 산시성의 팔로군에 자원입대했다가 이후 중국 공산당 시안시 선전부장, 부서기 등을 거치면서 시진핑의 부친 시중쉰의 직계 부하가 됐다.

    시진핑이 첫 부인과 왜 헤어졌는지는 알 수 없다. 부인이 영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깨졌다는 설과 시진핑이 젊고 예쁜 펑리위안을 만나면서 헤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모두 확인되지 않는다. 중화권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그의 첫 부인에 대해서는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시진핑의 형제자매는 7, 8명으로 추정된다. 이 중 3, 4명은 이복 형과 누나다. 형 시정닝(習正寧)은 부친의 풍격을 닮아 사람 됨됨이가 너그러웠으나 애석하게도 1998년 부친보다 앞서 세상을 떴다. 이복 첫째누나 시허핑(習和平)은 문화대혁명 기간 중 사망했다. 이복 둘째누나 시첸핑(習乾平)은 평범한 할머니다. 시진핑은 이들과 비록 모친은 달랐지만 자랄 때 사이가 매우 좋았다.

    친누나는 두 명이다. 큰누나 치차오차오(齊橋橋·61)는 현재 베이징중민신(北京中民信)부동산개발유한공사의 이사장으로 남편 덩자구이(鄧家貴)와 함께 베이징에서 부동산 개발에 종사한다. 베이징의 노른자위 땅에 초호화 아파트를 지어 분양했고 현재 엄청난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학원을 졸업해 불어에 능한 둘째누나 치안안(齊安安)은 베이징에서 산다는 설이 유력하나, 호주로 이주했다는 말도 있다. 이들은 모두 당초 성이 시(習)였으나 고교에 입학하면서 모친 성인 치(齊)로 바꿨다. 이들이 고관자제들이 다니는 베이징(北京)101중에 들어갈 성적이 안 되자 당시 부총리였던 시중쉰이 일반 학교로 진학시키면서 주위 사람들이 부친을 알아볼 수 없도록 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두 살 아래인 시위안핑(習遠平)은 문화대혁명으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 선반공으로 일하다 군에 입대했으나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동생은 범죄사건에 연루돼 체포됐다 석방된 기업인과 가깝게 교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권을 앞둔 시 부주석으로서는 부동산 거물인 큰누나와 행실이 방정하지 못한 동생을 어떻게 잘 관리하느냐가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 셈이다.

    하지만 시 부주석이 그동안 보여온 품행으로 보아 집안 단속 역시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1994년 4월 푸젠성에서 사회주의 중국 건국 이래 최대 밀수사건이 터지면서 푸젠성의 고위 간부는 거의 일망타진되다시피 했지만 푸젠성 상무위원 중 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중국 해관총서(세관) 감찰반에 따르면 라이창싱(賴昌星) 위안화(遠華)그룹 회장이 밀수한 금액은 무려 530억위안(약 9조4200억원), 탈세액만도 300억위안이나 됐다.

    남편만큼 유명한 아내 펑리위안

    스무 살에 ‘국민스타’ 된 전통 가수


    ‘대륙의 황태자’ 시진핑 국가부주석
    중국의 차세대 최고지도자로 가장 유력한 시진핑 국가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은 중국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기 가수다. ‘중국 당대 민족 성악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국가1급 가수. 민족 성악이란 민요 창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중국 특유의 음악 장르다.

    인기 가도를 달리던 그는 1986년 말 푸젠성 샤먼시 부시장이던 시 서기를 만났다. 친구 권유로 마지못해 만남의 자리에 나온 그녀는 처음에 ‘늙어 보이고 촌티 나는’ 33세 시 서기의 모습에 마음이 얼어붙을 정도로 실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대화를 하면 할수록 마음이 끌렸다. 둘은 만난 지 9개월 만인 1987년 9월1일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함께 있을 때보다 떨어져 있을 때가 더 많고, 심지어 거의 모든 중국인이 쉬는 춘제(春節·중국 설날) 때도 둘은 함께 시간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지방에서 근무하던 시진핑이 부인을 만나러 베이징에 왔지만 펑리위안은 매년 이때 중국중앙(CC)TV의 음력 섣달 그믐날 프로그램에 출연하느라 새벽 1~2시가 돼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럴 때면 시진핑은 만두를 빚으면서 아내를 기다렸다고 한다.

    서로 따로 지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한때 시진핑이 푸젠성 둥난(東南)위성TV 여성진행자 멍(夢)모씨와 밀접한 관계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하지만 펑리위안은 남편에 대해 무한한 신뢰와 행복감을 표시했다. 실제로 이들 부부의 금실은 어느 부부보다도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둘 사이에는 외동딸 시밍쩌(習明澤·17)가 있다.

    펑리위안은 1962년 11월20일 산둥성 윈청(펛城) 현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현의 문화관장을 지냈고 모친은 극단 단원이었다.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했지만 문화대혁명이 발발하면서 부모와 함께 농촌으로 하방돼 노래와 멀어졌다가, 1976년 문화대혁명이 끝나면서 14세의 나이로 산둥성 예술학교에 입학했다. 1978년 전국 민가(民歌) 가창대회에서 순수하고 청아한 향토적 분위기로 주목을 받아 입선하면서 곧바로 지난(濟南)군구의 전위가무단 단원으로 채용됐다. 1981년 중국 최고의 명문음대인 중국음악학원 성악과에 진학해 중국의 유명한 민족성악 교육가인 진톄린(金鐵霖)을 스승으로 사사했다. 1990년 5월엔 중국 대륙음악계에서는 처음으로 민족 성악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스무 살이던 1982년 CCTV가 춘제를 맞아 주최한 가요대회에서 ‘희망의 들판에서’라는 노래를 불러 수상하면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됐다. 1984년에는 전위가무단에서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어 1985년엔 중국 문화부가 주최한 제1회 전국 녜알·싱하이(?耳·星海)성악작품 경연대회 민족창법조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같은 해 7월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중국음악협회 최연소 이사로 추천됐다.

    펑리위안은 현재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치부 가무단의 예술지도, 최연소 문관 장군이면서 중국음악학원 객원교수, 상하이 사범대학 음악학원 겸직교수를 맡고 있다. 그는 또 1993년 3월부터 네 번째 연속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전국 정협)’ 위원을 맡고 있다. 중국 언론은 “(그의 목소리는) 천부적인 미감(美感)이 있어 솔직하고 친근하며 청춘의 향기가 충만하다”며 “맑고 감미로운 목청과 질박하고 자연스러운 감정, 분명한 발음, 소박한 지방 사투리로 개성이 뚜렷하고 위풍당당한 동방여성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낙마 가능성은 없나

    중국 고위지도부에서 우스갯 소리로 회자되는 얘기가 있다. 시진핑은 미래가 밝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 속에 바로 그의 조력자가 3명이나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習)-윗세대의 장점을 배우는(習) 데 뛰어나고, 진(近)-중앙 지도부와 지방 인민 사이의 심리적 거리를 좁히는(近) 데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며 핑(平)-평소 간부로서 태도는 소박하고(平) 겸손, 온화하며 대범하고 당당하다는 것.

    이러한 이유로 정치분석가들은 ‘4대 천왕’ 가운데 그가 가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다고 말한다. ‘4대 천왕’이란 이번에 중앙정치국에 진입한 5세대 선두주자들로 시진핑, 리커창 랴오닝성 당서기, 리위안차오(李源潮) 장쑤(江蘇)성 당서기, 보시라이 상무부장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그는 지난해 가을 열린 ‘제17기 당 중앙위원회 제4차 전체회의(4중 전회)’에서 예상과 달리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12년에 1인자 등극에 이상기류가 형성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기우다. 그는 지난해 11월 중국을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직접 영접했다. 그가 여전히 차세대 1인자임을 대내외에 공표한 셈이다. 또 권력의 원천인 중국 인민해방군도 차세대 지도자군 가운데 그를 절대 지지한다. 장쩌민 전 국가주석을 비롯한 원로그룹의 지지도 두텁다. 현 지도부 내에서도 후 주석의 공청단 계열을 제외하고는 다수가 그를 지지한다. 서민들 역시 그의 성품에 호감을 표시한다. 만약 2012년에 그가 최고지도자 자리에 오르지 못한다면 중국에서 정치적 동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정치분석가들의 경고가 회자될 정도다.

    이처럼 인기가 높은 이유는 그가 시대가 필요로 하는 성품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이라고 정치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중국의 정치는 1인 독주체제에서 점차 실질적인 집단지도체제로 옮겨가고 있다. 앞으로는 지도자의 카리스마가 필요한 게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의견을 잘 수렴하고 조화시킬 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탁월한 최고 지도자 한 사람의 지도 능력보다 합리적인 다수의 지도력이 더 낫다는 게 오랜 경험을 통해 얻은 중국 공산당의 결론인 셈이다.

    시진핑 부주석의 한국 내 인맥

    김하중 전 주중대사, 박준영 전남지사와 오랜 인연


    시진핑 국가부주석을 잘 아는 한국 내 인사는 많지 않다. 한국인이 많지 않은 푸젠성에서 17년 남짓 장기간 근무했기 때문. 하지만 중국의 영도자(부총리)급 이상 지도자 가운데서는 그래도 한국 내 지인이 많은 편에 속한다.

    시 부주석과 가장 두터운 인연을 맺은 인사는 ‘한국 내 최고의 중국통’으로 불리는 김하중 전 주중대사다. 시 부주석보다 7세 위인 김 전 대사는 시 부주석이 지방 성장과 당 서기로 재직하던 때부터 호형호제(呼兄呼弟)하며 가깝게 지내온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까지 주중대사를 지낸 신정승 대사도 시 부주석을 지근거리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다. 신 대사는 지난해 5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상희 국방장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 부주석과 만나 인사를 나눴다. 시 부주석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났을 때 “저희 아버님과 같은 연배의 지도자”라며 매우 깍듯이 모셨다고 한다. 2002년 5월 작고한 시 부주석의 부친 시중쉰은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11세가 많았다.

    신 대사는 시 부주석에 대해 “매우 온화하고 평민의 냄새가 많이 나는 지도자”라며 높이 평가했다. 그는 또 “시 부주석이 나서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말을 못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라며 “(옆에서 들어보니) 목소리가 묵직하고 말을 천천히 하되 매우 조리 있고 무게 있게 잘 하더라”고 전했다.

    지방 지도자로서 시 부주석과 가장 많이 교류를 한 사람은 박준영 전남도지사다. 박 지사는 2005년 시 당시 저장성 서기가 한국 외교통상부의 중국 고위인사 초청 프로그램으로 처음 방한했을 당시 광주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당시 시 서기는 10여 명의 성 정부 고위인사와 60여 명의 무역사절단을 이끌고 방한해 저장성 투자설명회와 인재교류회를 주관하고 전남 광양제철소와 제주도 등을 방문했다.

    시 부주석과 세 차례 만난 박 지사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는 일화는 2007년 시 부주석이 상하이 당서기이던 시절의 일이다. 박 지사는 당시 대한민국의 상하이임시정부 청사가 헐릴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 서기에게 왜 상하이임시정부 청사가 보존돼야 하는지를 10여 분에 걸쳐 상세히 설명했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시 서기는 박 지사의 긴 설명을 끝까지 들은 뒤 곧바로 현장에서 관련 조치를 지시했다. 시 서기는 이어 “그것(상하이임시정부 청사)을 보존하려는 한국인의 희망이 이뤄지도록 이 자리에서 모두 지시했다”고 말해 박 지사를 감동시켰다.

    박 지사는 “시 당시 서기가 내용을 잘 모르는 것 같아 굉장히 길게 설명했다”며 “이를 끝까지 경청한 뒤 곧바로 지시하는 것을 보고 판단력과 결단력을 갖춘 지도자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사실 시 부주석은 한국과 인연이 깊다. 저장성 서기이던 2005년 7월18일 한국을 방문한 데 이어 지난해 12월에도 이명박 대통령의 초청으로 16일부터 19일까지 나흘간 한국을 다녀갔다. 2007년 11월30일 복원돼 다시 문을 연 항저우(杭州)임시정부 청사도 그가 중앙정부의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써 이뤄진 것이다.

    시 부주석은 “한국과 중국은 역사적으로 가까운 이웃으로서 서로 보완하고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져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한국 지도부와 만날 때 이런 의견을 자주 피력했으며 “그런 관심을 갖고 해나가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이세기 한중친선협회 회장도 시 부주석의 지인이다. 재계 인사로는 윤종용 삼성전자 상임고문과 구본무 LG그룹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 최태원 SK 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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