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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전문가가 분석한 태국 정치파동의 실체

레드 셔츠, 옐로 셔츠, 블랙 셔츠, 그리고 민주주의의 파멸

  • 글·피터 워│호주국립대 명예석좌교수│ 번역·강찬구│동아시아재단 간사│

서구 전문가가 분석한 태국 정치파동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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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빈곤층도 경제성장으로 혜택을 보긴 했겠지만 부유층은 훨씬 많은 혜택을 받았다. 같은 기간 비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평균 국민소득에 비해 크게 감소했다. 특히 농업 부문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감소하고 있지만 전체 고용인력 가운데 농업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율의 감소세는 훨씬 더디다. 태국의 이러한 모순 때문에 농촌지역의 소득은 평균소득에 비해 오히려 줄어들었다.

최근에 나타난 문제는 더욱 눈여겨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과도한 수출의존형인 태국 경제는 2008년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태국 수출품에 대한 전 세계 수요가 25% 줄어들면서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가장 심각하게 피해를 본 분야는 태국 북부와 북동부 지역 출신의 미숙련·준숙련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던 노동집약 산업이었다. 금융위기로 이들 가운데 많은 이가 해고됐다. 아피싯 총리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태국 경제가 몸살을 앓게 된 시점에 집권한 것이다. 태국 국내의 선동가들은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총리 책임으로 돌리고 이를 2001~06년 탁신 총리 집권 시기의 호황기와 대비해가며 세력을 확장해가기 시작했다.

농촌지역 출신 노동자들이 태국 경제 발전의 성과를 분배받는 과정에서 소외되면서 이들의 경제적 지위는 특히 최근 수년 사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해 포퓰리스트 성향의 선동정치가들이 “도시 엘리트들이 농촌 대중을 희생양 삼아 자신들의 배를 불렸다”고 선동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탁신의 정치적인 성과는 바로 이 같은 민심을 정확히 포착해 이를 기회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간 원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탁신 정권이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6년 9월 발생한 군사쿠데타였다. 쿠데타의 주동자들은 탁신 총리의 부패로 인해 군부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탁신은 이미 억만장자였음에도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남용해 자신과 친족들의 배를 불리는 유혹을 이겨내지 못했고, 태국의 엘리트 계층은 이러한 위법행위가 용인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결국 탁신은 방콕의 전통적 엘리트 계층의 손이 닿지 않는 태국 북부와 북동부 지역에 독립적인 권력기반을 수립함으로써 오랫동안 유지되어온 정치적 힘의 균형을 뒤집고자 시도했다. 더욱이 암묵적으로 빈곤층의 수호자로 신성시돼왔던 국왕의 지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이후 이어진 두 번의 친(親)탁신 정부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 것으로 비쳐진 법원의 판결 때문에 무너졌고, 북부와 북동부 출신 노동자를 주축으로 하는 레드 셔츠 시위대는 자신들의 참정권이 박탈당했다며 분노했다.



탁신은 간디가 아니다

간디는 저항운동 내에 폭력적인 세력을 용인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간파하고 있었다. 1921년 한 지역 경찰서가 자신의 지지자들에 의해 전소돼 경찰관 23명이 사망하자, 간디는 이들의 잘못된 행동을 즉각 규탄하고 그 책임을 통감하는 의미의 단식에 들어갔다.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정부를 뒤집으려면 비폭력을 통해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보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간디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레드 셔츠 시위를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간디의 이러한 비전이나 도덕성을 갖춘 이는 없었다. 탁신이나 그가 이끈 타이락타이(TRT) 당, 이후 등장한 정치적 후계자들 모두가 그러하다.

시위 기간에 탁신은 매우 모호한 입장을 견지했다. 정부는 탁신이 이번 시위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하면서 테러를 조장한 장본인이라고 주장했다. 5월 초 정부와 시위대는 협상을 통해 5개 조항의 평화 로드맵을 채택했고, 그 가운데 하나는 레드 셔츠 시위대가 방콕 중심부 점거를 중단하고 대신 11월에 조기 총선을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시위대는 처음에는 이를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나중에는 추가 요구사항을 내밀며 거부했다. 방콕 시민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로드맵을 뒤늦게 거부하며 평화적 해결을 향한 마지막 희망을 저버린 것은 바로 시위대였다. 당시 시위대가 거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탁신이 전화상으로 거부의사를 밝혔기 때문이라는 루머가 나돈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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