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호

영어보다 괴로운 영국의 겨울

비바람 몰아치는 ‘어둠의 터널’ 5개월

  • 전원경│작가,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박사과정 winniejeon@hotmail.com│

    입력2010-11-03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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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보다 괴로운 영국의 겨울

    구름과 비 때문에 햇빛을 아예 볼 수 없는 날이 지속되는 영국의 겨울철에는 큰 명절이 많다. 10월 마지막 날인 핼러윈은 원래 미국의 명절이지만 영국에서도 국민적 축제일로 사랑받는다. 영국인들의 핼러윈 축제.

    영국 생활에 어지간히 익숙해진 지금도 외국살이가 주는 어려움은 도처에 존재한다. 이 어려움들은 평소에는 잘 숨어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두더지 잡기 놀이처럼 여기저기에서 불쑥 머리를 내민다. 그 어려움은 여전히 잘 통하지 않는 영어이기도 하고, 저녁 하늘을 볼 때 문득 숨 막히게 차오르는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영국에서 살면서 가장 힘든 점이 뭐냐”고 묻는다면(실제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나는 ‘날씨, 외로움, 영어, 물가’이 네 가지라고 대답하겠다. 그중에서도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게 날씨다. 그리고 다음은 외로움, 영어, 물가의 순일 것 같다.

    내가 이렇게 답하면 독자들은 ‘영어가 첫 번째,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어려움이라니 영어에는 웬만큼 친숙해졌나 보네’ 하고 생각하실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다. 글래스고에서 산 지 이제 2년이 되어가는 지금, 굳이 내 상황을 설명하자면 영어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 자체는 확실히 줄었다. 이젠 낯선 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도 별로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답하고, 연구실 동료들과 수다 떠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영어 실력이 영국 학생 수준으로 올라갔는가 하면 그건 결단코 아니다. 내 영어는 ‘영국 대학에서 외국 학생들이 하는 영어’ 딱 그 수준일 뿐, 절대 그 이상은 아니다(아니, 그 이하일지도 모른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요즘은 영어 실력을 더 늘려보려는 시도 자체를 아예 하지 않아서 그만큼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덜 받을 뿐이다.

    희찬이와 희원이는 나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영어에 익숙해져서 이 녀석들은 이제 자기들끼리는 영어로 농담도 곧잘 한다. 며칠 전 학기마다 정기적으로 있는 초등학교 교사 면담에 갔더니 희원이의 담임교사인 미스 맥그리거가 이런 말을 한다.

    “우리 반 아이들이 제게 자꾸 물어요. 왜 희원이보고 외국에서 온 친구라고 하느냐고요. 애들 듣기에는 희원이의 영어가 자기들이 하는 영어랑 똑같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들이 보기에는 희원이도 자기들처럼 스코티시(Scottish)인데, 선생님은 희원이는 외국 학생이라고 하니까 그게 이치에 안 맞는다, 이런 주장을 하는 거죠. 하하하.”



    조만간 나는 여섯 살짜리 딸내미에게 영어 코치를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영어를 그럭저럭 하게 된 탓인지 아니면 영어 배우기를 아예 체념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나는 요즘 일상에서 영어 때문에 그리 큰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어느덧 이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박사과정 학생이라 영어로 페이퍼를 쓰는 일이 여전히 큰 어려움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많이 뻔뻔스러워진 게 사실이다.

    얼마 전에는 지도교수께 e메일로 필드워크 리포트를 보내면서 ‘교수님, 사실 이 리포트는 영어 튜터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냥 저 혼자 썼습니다. 그러니까 문법상의 실수가 속출하더라도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라는 메시지를 덧붙였다. 필립 교수님은 내 e메일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그저 ‘리포트 잘 받았다. 질리언(나의 두 번째 지도교수)과 의논해서 튜토리얼 날짜를 잡아 알려주겠다’고만 답장하셨다. 속으로는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배짱만 두둑한 아줌마라고 혀를 끌끌 차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서론이 참 길었는데, 결론적으로 이곳 글래스고에서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영어도 물가도 아닌 날씨다. 곧 겨울이 다가올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몸이 절로 으스스 떨려온다. 그렇게나 겨울이 추운가 하면 사실 꼭 그런 건 아니다. 영국은 한국에 비하면 그리 춥거나 덥지 않다. 아무리 더워도 한여름 기온은 25~26℃이고, 겨울에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은 거의 없다. 글래스고의 1월 평균 기온은 3℃, 7월 평균 기온은 17℃쯤 된다.

    북해의 차디찬 비바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1년 내내 똑같은 옷을 입고 다녀도 큰 문제가 없는 날씨다. 사시사철 긴팔 티셔츠에 청바지 입고 다니다가 겨울에는 외투 하나 걸치면 되니 말이다. 북위 65도쯤에 있는 스코틀랜드에서는 여름에도 짧은 소매를 입기에는 좀 서늘하다. 이처럼 1년 내내 기온이 크게 오르내리지 않을 뿐 아니라 지진이나 태풍, 홍수 등도 거의 없다. 날씨로 인한 자연재해는 한국에 비하면 드문 편이다.

    딱히 자연재해도 없는데 왜 날씨가 문제라는 걸까. 결정적인 문제는 영국이 1년 365일 중 평균 190일 이상 비가 오는 ‘비의 나라’라는 점이다. 비가 올 때는 비만 오는 게 아니라 꼭 바람이 같이 분다. 통계적으로 일주일에 4일쯤은 비가 온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영국의 여름이 아무리 짧다고 해도 여름인 6월 중순부터 8월 중순까지 두 달 정도는 비가 잘 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나머지 기간, 특히 겨울인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사흘 중 이틀은 반드시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비가 안 오는 날이 드물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영국은 서머타임제를 실시해 10월부터 3월까지는 안 그래도 짧은 낮이 더 짧아진다. 11월이 되면 오후 3시부터 어둠이 내려앉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9시 무렵까지 열대여섯 시간 동안 먹물처럼 깜깜한 어둠이 지속된다. 지난해 11월말, 교수님과 2시30분부터 튜토리얼을 시작했는데 이야기가 좀 길어져서 4시가 다 돼서야 연구실을 나온 적이 있다. 1시간 반에 걸친 긴 시간 동안 두 교수님께 이리저리 지적당하고 깨지느라 나는 완전 ‘그로기’ 상태였다. 울고 싶은 마음으로 학과 건물을 나섰는데, 어느새 진한 어둠이 깔리고 교정의 오렌지빛 가로등들이 일제히 켜져 있었다. 그리고 예외없이 북해의 차디찬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쳤다.

    아, 그 순간의 막막한 심정이라니. 내가 어쩌자고 이 멀고 먼 나라까지 와서 뭔 공부를 한답시고 찬바람 맞으며 헤매고 있나…하는 근본적인 의문이 목까지 차 올라와 숨이 막혔다.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가는데 바람은 불지, 비는 세차게 내리지, 날은 한밤중처럼 어둡지, 정말이지 그 자리에 턱 주저앉아 엉엉 울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처음엔 왜 영국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좀처럼 쓰지 않는지 참 신기했다. 비 오는 날에도 영국의 거리에서는 우산을 쓴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슈퍼마켓 같은 곳에서 우산을 잘 팔지도 않고 그나마 우산 값이 무척 비싸다. 이 사람들이 우산이 비싸서 안 쓰는 건가? 영국 사람들은 대부분 후드가 달린 방수 점퍼를 입고 다니다가 비가 오면 후드를 뒤집어쓴다. 그마저 귀찮은지 아예 모자 없이 비를 맞으면서 걸어 다니는 사람도 많다.

    영국인들이 우산을 안 쓰는 까닭

    좀 다른 이야기지만 이렇게 비를 맞고 다니고 젖은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아서인지, 영국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머릿니가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1980년대에 이미 머릿니가 자취를 감춘 우리 기준으로 보면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전에 런던에 있는 한인 미용실에 갔다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영국인 손님들의 머리를 만지다 보면 머릿니가 슬슬 기어 다니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거다. 그런 손님들을 기분 상하지 않게 돌려보내는 게 미용실 처지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 학교에서 매달 오는 뉴스레터에 아이들의 머리를 정기적으로 검사해 달라는 당부가 써 있을 정도로 머릿니 문제는 제법 심각하다.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인데 분명 사실이다.

    아무튼 왜 영국인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안 쓰는 걸까. 이곳에서 몇 달만 살아보면 이 의문은 금방 풀린다. 비바람이 워낙 거세게 불어서 우산을 써봤자 머리와 얼굴만 빼고 온몸이 흠뻑 젖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찬 바람에 우산이 홀랑 뒤집히기도 하고 우산에 질질 끌려가기도 한다. 요컨대 비가 올 때 우산을 써본들 큰 소용도 없고 우산 때문에 걷기만 더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영국에서는, 특히 겨울의 영국에서는 좋은 옷 입고 좋은 신발 신을 이유가 전혀 없다. 어차피 금방 젖고 금방 망가지기 때문이다. 대신 방수 점퍼와 장화 없이는 살아가기가 무지 어렵다.

    이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해는 겨우 몇 시간밖에 뜨지 않고, 그나마 구름과 비 때문에 햇빛을 아예 볼 수 없는 날이 며칠이고 지속되는 게 영국의 겨울이다. 그리 춥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어둡고 엄청나게 우울하다. 그래서인지 영국에는 10월부터 12월 사이에 국민적 명절이 많다. 10월 마지막 날인 핼러윈은 원래 미국의 명절이지만 영국에서도 국민적 축제일로 사랑받고 있다. 모든 학교에서 핼러윈 파티가 열리고 아이들은 귀신이나 마녀, 해적 등으로 분장하고 핼러윈 파티에 간다.

    엄마들은 또 엄마들대로 마트에 가서 아이들에게 핼러윈 옷을 사 입혀야 한다. 과거에는 핼러윈 파티 의상을 직접 지어 입히는 엄마들이 꽤 있었다는데, 희원이 친구의 엄마인 루스에게 물어보니 “에이, 그거 그냥 마트 가면 싸게 파는데 누가 직접 옷을 만들고 있겠어?” 한다. 나도 10월이 되자마자 대형 마트인 ‘세인즈버리’에 가서 희원이의 마녀 의상을 샀다. 가격은 10파운드. 우리 돈으로 2만원이 조금 안 되니 영국 물가를 생각해보면 참 착한 가격이다. 희찬이는 “1년에 한 번 입는 옷을 뭐 하러 돈 주고 사냐”면서 지난해에 입었던 해적 의상을 그대로 입고 가겠단다. 이 녀석이 요즘 철들었나 보다.

    12월 내내 크리스마스 무드

    영어보다 괴로운 영국의 겨울

    맑은 여름날이면 영국의 공원은 일광욕을 하러 나온 사람들로 뒤덮인다. 글래스고 식물원 잔디밭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11월5일에는 겨울이 오는 것을 기념하는 ‘가이 포크스 데이’라는 영국만의 명절이 있다. 1605년 11월5일 공화주의자였던 장교 가이 포크스와 그 부하들이 국회의사당을 폭파해 왕과 각료들을 한꺼번에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사건을 기념해서 지금도 영국 국회가 개원하는 날이면 횃불을 들고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의 지하를 수색하는 행사가 열린다고 한다. 기원을 되짚어보면 영국을 공화국으로 만들려는 야망을 키우다 형장의 이슬로 스러진 가이 포크스의 한이 서린 날인데, 이제는 그런 정치적 의미는 다 사라지고 그저 겨울이 오는 걸 기념하는 명절이 돼버렸다. 이날 저녁에는 영국 전역에서 거대한 불꽃놀이가 열린다. 거리마다 젊은이들이 몰려나와 폭죽을 피융피융 터뜨려대며 밤늦게까지 논다.

    가이 포크스 데이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바로 크리스마스 준비에 돌입한다. 대형 마트와 거리의 상점에는 빠짐없이 크리스마스 트리와 장식품, 카드들이 줄줄이 진열되고 사람들은 ‘올해의 카드와 선물 리스트’를 들고 챙겨야 할 사람들을 일일이 세어가면서 카드와 선물을 사고 포장하고 보낸다. 크리스마스 선물 공세는 학교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박사과정 학생들은 지도교수에게, 그리고 초등학교 학생들은 선생님에게 카드와 선물을 보내야 한다. 이걸 챙기는 일 또한 만만하지 않다. 거의 한 달 가까이를 선물과 카드 리스트를 들고 빠진 사람이 없는지 꼼꼼히 챙겨야 한다. 박사과정의 외국인 학생들끼리 모여 “너, 올해에는 지도교수님께 무슨 선물할 거야?” “다른 교수님들께는 카드만 보내도 되겠지?” 같은 의논을 하기도 한다.

    그저 선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크리스마스 휴가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다 모이는 가족 파티가 열린다. 이외에도 친구들, 직장 동료들, 연인들, 클럽과 학교 등에서 수많은 크리스마스 파티가 열린다. 내가 영국 친구들에게 “우리 남편은 올해에 쓸 수 있는 휴가를 다 써버려서 이번 크리스마스 휴가 기간엔 영국에 못 온다”고 하면 대부분 기절할 듯이 놀란다. “아니, 크리스마스에 가족이 모이지 못한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게 기막힌 일이…”하면서 말이다.

    영국 영화 ‘러브 액추얼리’는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모든 갈등과 짝사랑이 다 해소되고 가지각색의 사랑이 맺어지는 동화 같은 해피엔딩을 이루는데, 실제로 영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크리스마스가 바로 이런 모습니다. 으르렁대던 양당 정치인들도 크리스마스에는 휴전 모드로 돌입하고 어디든 “자, 한 해 동안 수고 많이 했으니 힘든 일은 모두 잊고 따스한 크리스마스를 즐겨요!” 하는 화해 무드가 넘실댄다. 해마다 BBC TV에서 여왕의 크리스마스 담화가 발표되는 것도 영국만의 특이한 행사라면 행사다.

    그럼 12월25일이 지나면 이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대번에 사라져버릴까. 천만의 말씀. 26일부터 31일까지는 ‘복싱데이(Boxing Day)’라고 해서 쇼핑센터와 상점들이 일제히 반액 세일을 실시한다. 사람들은 1년 내내 기다리던 크리스마스가 끝나버렸다는 허전함을 쇼핑으로 왕창 풀어버린다.

    이러니 12월 내내 영국 전역에선 크리스마스 무드가 넘실댄다.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과장되게 크리스마스를 챙기는 걸까.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아마 크리스마스를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길고 어두운 겨울의 우울함을 잠시나마 잊어보려는 게 아닐까 한다.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이라도 하지 않으면 3시부터 다음날 아침 9시까지 줄기차게 계속되는 밤, 그리고 사흘 중 이틀은 비바람이 부는 우중충한 날씨를 어떻게 견뎌내겠는가 말이다.

    ‘태양전지들의 충전 예배’

    사시사철 햇빛 만나기가 어려운 데다 흐리고 비 오는 날씨가 일상처럼 계속되다 보니 영국에선 해가 나는 여름이면 그야말로 난리가 난다. 공원이든 식물원이든 아니면 집의 정원이든 간에 잔디가 깔린 곳이면 어디에나 너나 할 것 없이 나와 팔다리 드러내고 일광욕을 하는 것이다. 한여름의 맑은 날에는 런던의 하이드파크처럼 드넓은 공원조차 일광욕 인파로 가득 찬다.

    그런데 그 일광욕하는 모습들이 누가 영국인 아니랄까봐 얼마나 진지한지 모른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잔디밭에 눕거나 엎드려 있으면 웃고 떠드는 사람도 있고 도시락을 까먹거나 뛰어다니는 아이들로 무척 소란스러울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햇볕을 쐴 기회가 없기라도 한 듯, 사람들은 하나같이 햇볕 아래 조용히 누워있거나 엎드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다. 오죽하면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영국의 이런 일광욕 현상을 가리켜 ‘태양전지들의 충전을 겸한 태양 숭배 모임’ 같다고 했을까. 영국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 법한 표현이지만, 여름의 일광욕 장면을 볼 때마다 나 역시 ‘태양전지들의 충전 예배’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다.

    영국의 날씨가 참으로 변화무쌍하다는 점도 우리 눈에는 신기하게 비치는 부분이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햇볕이 쨍 내리쬐는 등 날씨가 극적으로 바뀐다. 영국 텔레비전의 일기예보는 하루 날씨를 아침·정오·오후·밤 이렇게 4번, 혹은 아침·낮·저녁의 3번으로 나눠서 한다.

    영국에 관련된 속설 중에 ‘하루 동안 4계절 날씨를 모두 체험할 수 있는 나라’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로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전에 햇빛이 비치는 걸 보고 ‘음, 오늘은 날씨가 좋네’하면서 우산이나 방수 점퍼를 안 챙겼다가는 오후에 비를 흠뻑 맞고 돌아오기 십상이다. 변화무쌍한 날씨라고 해도 대개는 ‘바람 불고 흐리고 비 옴’이 영국 일기예보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기한 점은 날씨가 이렇게나 정신없이 바뀌는데도 일기예보는 기가 막히게 잘 맞는다는 사실이다.

    막상 영국에서 살아보면 햇빛을 볼 수 있는 날이 너무나 드물다는 게 큰 괴로움이다. 흐린 날이 며칠이고 계속되면 절로 마음이 침울해지고 기운이 빠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없던 신경통도 생겨난 듯, 전에 없이 팔다리가 쿡쿡 쑤신다. 아직 해가 안 뜬 건지, 아니면 비가 와서 해가 가려진 건지 구분조차 안 가는 어두컴컴한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다. 더구나 단열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영국의 집들은 겨울 아침마다 냉장고 속처럼 차갑게 식어 있기 일쑤다.

    영국인들도 이 길고 긴 어둠에는 좀체 익숙해지지 않는 듯, 겨울을 나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다. 영국인 사이에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는 단연 스페인인데, 그 이유는 당연히 사시사철 햇빛이 눈부신 스페인의 날씨 때문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영국 사람들은 늘 자기들끼리 ‘영국 날씨, 정말 끔찍하다’는 식으로 나쁜 날씨를 탓하면서도 외국인들이 “아유, 영국은 왜 이렇게 날씨가 나빠요?”하고 날씨를 험담하면 그걸 속으로 굉장히 기분 나빠 한다고 한다.

    기나긴 어둠의 터널 앞에서

    이제 10월이니 곧 길고 긴 영국의 겨울이 시작될 것이다. 영국에서도 북쪽인 스코틀랜드의 겨울은 아무리 짧게 잡아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5개월쯤은 계속된다. 곧 오후 3시면 날이 어두워질 것이고, 창밖으로는 칠흑처럼 짙은 어둠이 끝없이 펼쳐질 것이다.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배경이 된 도시가 바로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인데, 스코틀랜드의 겨울은 이 소설이 묘사하는 음침한 분위기, 무언가 악마적인 힘이 숨어 있는 듯한 으스스한 분위기와 여전히 똑같다.

    영어보다 괴로운 영국의 겨울
    전원경

    1970년 출생

    연세대, 런던 시티대 대학원(석사) 졸업

    월간 ‘객석’, ‘주간동아’ 기자

    저서 :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짧은 영광, 그래서 더 슬픈 영혼’ ‘역사가 된 남자’ 등

    現 영국 글래스고대 문화정책 전공 박사과정 재학 중


    올여름 최악의 무더위를 뚫고 한국으로 필드워크도 다녀왔고, 자료도 눈앞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 올겨울 나는 한눈팔지 않고 연구에만 매달려야 한다. 이번 겨울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앞으로의 연구 성패를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연구실 창밖에 늘 가득할 음산한 어둠과 유리창을 덜컹덜컹 흔들며 지나갈 차가운 비바람을 생각하면 내 마음은 겨울 하늘처럼 컴컴해진다. 더구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유럽에는 이상한파가 덮칠 것이라는 보도까지 접하고 보니 마음은 더 무겁다. 이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무사히 빠져나와 내년 봄 교정에 무리지어 핀 수선화를 웃으며 바라볼 수 있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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