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호

“김일성 상징적 존재로 세워 남조선 먹어치우려 했다”

反김정일 쿠데타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 내막

  • 글·구술 김일철 | 前 북한 노동당 간부 정리·송홍근 기자 | carrot@donga.com

    입력2015-08-21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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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상징적 존재로 세워 남조선 먹어치우려 했다”
    북한에서는 왜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을까. 군부 봉기에서 비롯한 급변 사태가 일어날 수 있을까.

    한국에는 ‘쿠데타 모의’ ‘소련 유학 출신 장교들의 쿠데타 시도’ 정도로만 알려진 이른바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은 거사일까지 확정한 북한 최초이자 마지막 반(反)김정일 쿠데타다. 한국 학계가 이 사건을 북한 급변사태와 관련해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다루고 있으나 제대로 알려진 사실이 없어 의문투성이다.

    북한에서 향후 일어날 수 있는 급변 사태를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것으로만 여기는 것은 오류다.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도 마찬가지다. 쿠데타 세력은 김일성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 김일성을 일본 ‘천황’과 같은 상징적 인물로 세우고 정치·군사적 준비를 잘해 ‘남조선’을 먹어치우려는 강경한 사회주의자들이 주도했다.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하던 시기, 북한 군부의 오진우는 물렁물렁했고, 최광은 머저리였다. 쿠데타 시도 세력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의 몰락을 소련에서 지켜본 터였다. 그들은 군대가 강하지 못해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견장, 훈장 떼고 체포하라우”

    1993년 2월 8일 인민무력부 본부 성원에게 인민무력부 8호동 회의실로 집합하라는 지시가 하달됐다. 조선인민군이 창건된 날(북한군은 1948년 2월 8일 조직됐는데, 김정일이 공식 후계자로 등극한 후 김일성이 반일 유격대를 조직했다고 선전하는 1932년 4월 25일을 창건일로 바꿔 기념해왔다. 올해부터 다시 2월 8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에 즈음해 훈장을 주려나보다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회의실에 집합했다.

    회의장 주석단에는 인민무력부 총참모장 최광이 혼자 앉아 있었다. 연탁에는 인민무력부 보위국장 원흥희가 서 있었다. 성원들이 회의장에 집합하자 원흥희가 “이제부터 인민무력부에 잠입한 반당반혁명 종파분자를 숙청하겠다”고 발표했다. 회의장 좌우측 출입문이 열리면서 인민무력부 보위국 군관들과 하전사들이 완전무장을 하고 두 줄로 들어와 회의 참가자들에게 총구를 들이댔다. 일명 소련 군사 아카데미아 유학생 숙청은 이렇게 시작됐다.

    당시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홍계성 상장(빨치산 최현의 사위, 현 노동당 비서 최룡해의 매부), 총참모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중장과 재정국장, 통신국장, 교육국장을 비롯해 장령급(한국의 장성급)을 포함한 70여 명의 고위급 군관이 체포됐다. 보위국장 원흥희가 이름을 부르면 보위국 하전사 2명이 호명된 이에게 다가가 총구를 들이대고 군관 1명이 군복의 김일성 초상화와 훈장, 견장을 떼고 신분증을 회수한 후 손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어깨에 망토를 걸쳐준 뒤 데리고 나갔다. 성원들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이날부터 1998년까지 5년에 걸쳐 소련 군사 유학생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이뤄졌다.

    1986~90년 250명 소련 유학

    홍계성을 비롯한 쿠데타 모의 핵심 인사들이 모스크바 프룬제를 비롯한 군사 아카데미아 출신인 터라 ‘프룬제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소련 군사 아카데미아 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1984년 김일성이 300명 넘는 사절단과 함께 소련을 방문했다. 콘스탄틴 체르넨코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서방에 강경했다. 김일성과 체르넨코는 북한의 군사 간부와 국방 과학자 양성을 위해 북한에서 소련으로 유학생을 보내는 데 합의했다. 북한은 1986년부터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소련의 각 가맹 공화국에 있는 군사대학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소련 군사 유학은 1950년대와 1980년대 두 차례 있었다. 1950년대 군사 유학생은 100명가량으로 오극렬, 김일철, 조명록 등이 대표적이다. 오극렬은 1기다. 오극렬은 6년 만에 5년제 과정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소련에 흐루시초프가 등장해 수정주의 노선을 걸으면서 소련 유학생 철수를 검토했다. 사회 유학생(군사학 아닌 일반 학문 유학생)은 모두 소환했으나 군사 유학생은 100명가량이 남아 소련 군사대학을 졸업하고 훗날 북한군의 주력을 이뤘다.

    2차 소련 군사 유학은 1986~1990년 5년간 이뤄졌다. 사회 유학생은 5년간 1500명에 달했으나 군사 유학생은 한 해 50명가량이다. 50명이 안 되는 기수도 있다. 5년 동안 250명 정도가 소련 군사학교에 입교한 것이다. 250명은 예외 없이 집안 배경과 토대가 좋았다.

    지휘, 작전, 참모, 비행, 잠수함 등 병종(병과)별로 3인조, 5인조, 7인조로 구성돼 군사대학에 입학했다. 장령급, 좌급(영관급), 위급(위관급)을 망라해 유학생이 구성됐다. 소련 연방에 속한 우크라이나 키예프, 아제르바이젠 바쿠의 군사 아카데미아에도 북한 군인들이 입교했다.

    인민군의 각 군단, 각 병종 사령부에서 군무하던 군사 작전 및 기술 부문의 현직 군관 중 전망이 좋고, 토대가 우수한 사람들로 유학생이 선발됐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엘리트 장성과 영관급, 위관급 장교를 선별해 유학 보낸 것이다. 또한 인민무력부 산하 각 군사대학과 제2자연과학원 산하 평양국방대학(당시는 강계공업대학), 룡성약전공업대학 미림전자전대학 2~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3차례 선발 시험을 거쳐 토대가 좋은 학생 위주로 소련의 군사 아카데미아에 파견했다.

    사회주의 붕괴 현장 목격

    5년간 소련 크라스노다르의 전투기 비행사 양성소에 20여 명, 레닌그라드의 잠수함 군관 양성소에 20여 명이 나갔다. 모스크바에 있는 프룬제, 주코프, 보로실로프 군사 아카데미아에는 고급 군관들이 파견됐다.

    북한 유학생들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에서 온 동료들에게 ‘사회주의 조선’의 우월성에 대해 선전하면 다른 나라 유학생들은 그것을 반박하면서 자신들의 나라와 비교하며 북한은 ‘스탈린식 독재국가’라고 말했다. 북한 유학생들은 김일성이 20세 때 항일 유격대를 창건했고, 1937년 6월 4일 150명의 병력으로 양강도 보천보를 기습했으며, 1937년 6월 30일에는 600명을 거느리고 일본군 1500명, 위만군 500명을 궤멸시켰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을 패망시키고 조국을 해방시켰으며, 해방 후 당과 군대를 창건해 나라를 세웠고, 지금은 해마다 2월 16일과 4월 15일에 전국 어린이들에게 김일성과 김정일 이름으로 1㎏의 당과류를 선물로 주는 은정을 베푼다고 선전했다.

    그러면 소련 군사대학 교수들과 다른 나라 유학생들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활동을 부정하면서 김일성이 소련군 대위로 있었으며, 김일성·김정일의 수입이 얼마기에 그렇게 많은 아이에게 선물을 주느냐고 비꼬면서 일본은 소·미 연합군에 의해 패망했다고 설명한 후 북한은 개인 숭배의 독재정권이라고 비난했다.

    유학생들은 소련에 와서 공부하던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폴란드, 체코, 쿠바 등 다른 나라 군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하는 과정을 지켜봤고 그 원인에 대해 생각했다. 유학생들은 북한식 사회주의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조 봉건(조선 왕조) 시기처럼 오직 한 가문이 대를 이으면서 정권을 이어가야 하는가 하는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위로차 군사칭호 한 등급 높여줘

    소련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유학생들에게 평양으로 들어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잠시 귀국했다가 소련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했다. 1000명 넘는 사회 유학생들은 소환되지만, 군사 유학생은 국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학생들은 소련에 짐을 두고 귀국했다.

    평양에 돌아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방침이 바뀌었다. 인민군대의 기둥과 골간이 돼야 할 유학생이 사회주의를 내다버린 소련의 자본주의 황색 바람과 날라리풍에 물들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유학생들은 각 부대와 각 군사대학으로 재배치됐다. 소련에서 돌아온 이들은 “우리를 믿지 못해 이러는 것 아니냐”면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인민군 총정치국은 유학생들을 위로하는 차원에서 군사 칭호를 한 등급씩 높여줬다.

    소련 체류 시절 유학생들은 장령급 대우를 받았다. 군사 유학생들은 매달 장학금 110루블을 받았으며 지하철, 버스 등 교통비, 영화 관람 및 방학 기간 관광비용 등을 제공받았다. 군사 유학생이 아닌 사회 유학생에게는 장학금 85루블만 줬다. 사회 유학생은 다른 모든 것은 자부담으로 처리해야 했다. 군사 유학생은 매년 7월 방학 때 대사관 무관부에 모여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귀국했다. 방학이 끝나고 소련으로 되돌아갈 때에도 비행기를 이용했다. 사회 유학생은 2년에 1번씩만 여름방학에 기차로 평양에 다녀왔다. 매년 1월 1일에는 군사 유학생에게만 최고사령관 이름으로 인삼 술 1병과 달력 2개가 선물로 내려왔다.

    군사 유학생들은 이렇듯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나 장학금이 적어 부득불 장사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게 불만이었다. 장령급 대우였으나 110루블로 소련에서 한 달을 생활하기는 어려웠다. 대학 구내식당 한 끼 식사비가 1루블쯤 했다. 담배도 사 피워야 했다.

    유학생들은 학교 수업을 마치고 장사를 했다. 방학 때 평양에 가 고려인삼 정액, 고려인삼 인단, 고려인삼차, 수지연필, 사슴표 운동신, 일본산 테이프 녹화기, 세이코 손목시계 등을 가져다 소련인과 다른 나라 사람에게 팔아 생활비에 보탰다. 방학을 맞아 평양으로 되돌아갈 때는 소련제 냉동기, TV, 사진기, 사진인화종이, 카메라 필름, 사진 현상액, 손목시계, 각종 옷가지와 식료품들을 구입해 북한에서 팔았다.

    인민무력부 보위국에서는 3인조, 5인조, 7인조로 이뤄진 각 조의 1명을 골라 첩보원으로 삼은 후 매달 조에 속한 이들의 사상 상태를 편지로 보고하게 했다. 보위국이 스파이로 고른 이들은 동료들을 고발하지 않고 “다 잘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1993년부터 이뤄진 소련 유학생 청산 당시 이들은 유학생들의 변질 상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숙청당했다.

    “김일성 상징적 존재로 세워 남조선 먹어치우려 했다”


    상처 받은 자존심

    “김일성 상징적 존재로 세워 남조선 먹어치우려 했다”
    그 무렵 북한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레닌이 이룩한 것을 말아먹었다는 것이었다. 총정치국이 유학생들에게 새카맣게 달라붙었다. 사상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소련에서 무슨 발언을 했느냐는 식의 추궁이 이어졌다. 북한으로 철수당한 뒤 당 회의가 열려 사상투쟁이 벌어졌으며, 소련에서의 활동을 있는 그대로 말하라는 둥 비판이 이어지자 복귀한 유학생들의 불만은 고조됐다.

    사회 유학생 중에는 한국으로 튄 이들도 있다. 북한에서는 튄 자들을 ‘놀가지(노루)’라고 한다. 군사 유학생 중엔 놀가지가 단 1명도 없었다. 짐도 소련에 두고 온 데다 장사로 번 돈도 소련 은행에서 찾아오지 않았다. 조국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대우가 나빠지니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프룬제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한 작전조(작전병과)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으로 갔다. 당시 평양에는 미림전자전대학, 군의대학 정도밖에 없었다. 소련에서 못다 한 공부를 마치려 개천, 청진, 강계의 군사대학으로 흩어졌는데 울분이 치솟았다. 별(계급장)을 떼고 학생별을 달라는 말에 각 군사대학에서 알력이 벌어졌다. 50명이 자는 숙소에서 잘 수 없다며 독신 군관 침실을 달라고 요구한 이도 있다. 상실감에서 비롯한 당시의 이 같은 집단적 울분은 쿠데타 모의의 배경 중 하나다. 유학생들은 자존심과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전두환의 하나회와 비슷

    북한이 어려울 때였다. 계란 하나 먹기 어려웠다. 군사대학에선 쌀밥이 나왔으나 소련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다가 반찬을 보니 한심했다. 식탁엔 땟자국이 더러웠다. 고급 담배 피우다 막담배 피우니 억울함이 몰려왔다.

    소련 유학생 출신 군관들의 연대의식이 높아졌다. 장령이 “너 프룬제 출신이지?” 하고 물은 후 “네”라고 답하면 그날로 동지 같은 관계가 됐다. 유학생 출신 상위가 유학생 출신 장령을 ‘영감’이라고 부를 만큼 친분이 두터웠고 결집력이 강했다. 전두환의 하나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조직 내 사조직이 생긴 것이다. 비(非)조직이 정식 조직을 흔드는 일도 일어났다. 1950년대 유학생 출신들과의 유대도 형성됐다. “너 주코프에 있었다며? 나는 58년에 들어갔다가 63년도에 나왔어” 식의 대화로 뭉친 것이다. 소련 유학 출신끼리는 러시아 군사용어로 대화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유학생들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 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체사상의 모순을 인식했다. 장령급, 좌급, 위급 유학생 출신들은 하나같이 똘똘 뭉쳤다. 서로 협상해 나라를 제대로 이끌고 나가자는 데 뜻을 모으고 군부와 정권을 장악하자는 합의에 도달했으나 군사적 행동을 실현하기 전 발각돼 숙청당한 것이다. 쿠데타 모의가 적발돼 숙청될 때 북한 주요 부대의 지휘관 자리를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92년 당시 20~40대가 주축인 군사 유학생 대부분은 중앙당, 인민무력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 등의 고위 간부 자식이었다. 전병호 전 노동당 비서의 아들 등 최고위급 인사의 아들도 있었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자고자대(自高自大, 스스로 잘난 체하여 우쭐댐) 탓에 비밀 보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군사 유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포섭하지 않았는데, 오직 군사 유학생만으로 조직을 망라한 탓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한 것도 실수였다. 유학생 출신이 아니면 사람으로 안 봤을 정도다.

    최현의 사위이자 최룡해의 매부인 홍계성을 중심으로 작전을 모의했다. 5개 사단을 갖고 뒤집어 엎기로 했다. 사단장들이 죄다 유학생 출신이고, 군대 무력의 40%는 쥐었다는 믿음이 있었다. 홍계성은 1992년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후 직접 상장 계급장을 달아준 인물이다. 김정일이 “46세 에 상장이니 대단합니다. 조국통일 사업을 함께 합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서 돌아와 인민무력부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홍계성 상장,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등이 쿠데타 모의가 적발된 후 숙청됐다. 강영환은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다. 총정치국, 총참모부는 물론이고 군단, 사단, 여단의 지휘 군관 중 소련 유학생 출신이 모조리 조사를 받았다. 소련에서 공부한 군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련 주재 북한대사관 군사 무관을 지내고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장이던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던 최수연 대좌를 비롯한 무관부 출신들은 1997년 체포됐다.

    체포당할 때 거세게 저항한 이들도 있다. 군사유학생 출신들에 대한 체포가 진행되던 1993년 말 함경북도 청진시 김책공군대학에서 공부하던 군사 유학생 17명을 평양에 물자를 호송하는 형식으로 데리고 와서는 평양역에서 체포하자 이들은 맞서 싸우며 반항했다. 1개 보위중대가 동원돼 그들을 제압하고 체포했다.

    ‘더 강력한 사회주의’ 원해

    군사 유학생들은 북한 정권의 독재와 부패, 북한식 제도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동구 나라들처럼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자는 데 합의를 봤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소련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마르크스, 엥겔스가 정립하고 레닌이 실현한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올바르게 구현되지 못했다면서 인민이 주인 되는 제대로 된 사회주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유학생들에게는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였다. 소련 유학생 출신들은 더 강력한 사회주의를 원했다. 소련과 동구를 보면서 군대가 강해야 나라가 자본주의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이들이 거사에 성공했으면 한반도가 위험했을 것이다. 주축이 30~40대로 젊었다. 피가 튈 때였다. 거사 날짜를 정했다가 미룬 게 가장 큰 실책이었다. 거사를 실행했다면 성공 확률이 꽤 높았다고 본다.

    1970년대부터 권력을 아들에게 하나씩 넘기던 김일성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게 ‘최고사령관’ 직위다. 김일성은 1991년 겨울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에 추대한다. 유학생 출신들은 김정일에 반대했다.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은 김정일이 군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비토 세력을 숙청한 것이기도 하다. 김정일은 이 사건과 ‘심화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아카데미아 출신 200명 총살

    소련국가안보위원회(KGB) 인사 2명이 소련 붕괴 후 북한에 망명했는데, 이들이 소련에 포섭된 북한 인사 명단을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소련 붕괴 후 KGB 요원들이 각국의 정보기관을 상대로 정보 장사를 했다). 유학생들이 북한에서 소련의 첩자가 돼버린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소련은 평양에서 친(親)소련계 급진세력이 득세하기를 원했다. 출세가 보장된 유학생들을 상대로 포섭공작을 벌였다. 유학생 일부가 포섭된 것은 사실이다.

    소련 정보기관에서 유학생들에게 접근했다. 북한에 친소 정부를 세우는 게 장기적 목적이었을 것이다. 유학생들에게 술 사주고 백인 미녀 붙여주면서 포섭했다. 보드카 함께 마시면서 ‘에미나이’들이 꼬리치는데 넘어가지 않을 남자가 있겠는가.

    군사 유학생 출신들은 북한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다른 부대에서 근무했다. 그럼에도 공개적으로 자주 회합해 술 마시고 비밀 모의를 하다 인민무력부 보위국에서 그것을 내탐해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KGB의 정보와 보위국의 내탐으로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군사 유학생 출신을 두고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하면서 보위국에 구체적으로 알아보고 무자비하게 소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5년 동안 군사 유학생의 80% 이상이 총살을 당했다. 군사 유학생들의 쿠데타 모의를 내탐한 인민부력부 보위국은 보위사령부로 승격했다. 보위국장이었던 원흥희는 중장(소장)에서 상장(중장)을 뛰어넘어 대장으로 승격했다.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으로 30여 명의 장령과 100여 명의 좌급 군관, 70여 명의 위급 군관 등 도합 200여 명의 소련 군사 유학생 출신이 총살됐다. 중앙당, 인민무력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 고위 간부들이 자식 교양을 잘못한 책임을 지고 철직됐으며 쿠데타 모의자의 가족은 평양에서 추방됐다.

    사건 이후 많은 이가 의구심을 가졌다. 유학생 출신들이 숙청되고 고위 간부들이 직무에서 해임되자 ‘당에서 돈을 들여 키운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이 숙청되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김정일에 반대하는 쿠데타를 모의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001년 6월께 중앙당 비공개 지시문이 당 조직에 하달됐다. 소련 유학생 숙청 당시 총정치국 조직부국장이던 리봉원이 ‘남조선 간첩’이었는데, 혁명가 자녀들이 다니는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과 소련의 선진 군사 과학기술을 배운 유학생들을 남조선의 사주를 받고 의도적으로 청산한 조작 사건을 일으켰다면서 살아남은 유학생 출신을 간부에 등용하라는 것이었다(한국 학계 북한 연구논문 중 ‘리봉원이 소련에서 선진 군사과학 기술을 배운 유학생들을 없애기 위해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기술한 것이 있다. 쿠데타 모의의 실상은 모른 채 2001년의 정보만을 전한 탈북 인사의 증언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김정일에 반대하는 모의는 기록으로도 남아서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이렇게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은 종결됐다. 숙청을 피한 일부 유학생들은 모두 군복을 벗어야 했고, 높은 간부직에는 등용되지 못했다. 북한은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 이후 단 한 명도 외국에 군사 유학을 보내지 않았다.

    ※ 괄호 안은 편집자가 붙인 주석(註釋). 필자명 은 신원 보호를 위해 시용한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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