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유학생 중에는 한국으로 튄 이들도 있다. 북한에서는 튄 자들을 ‘놀가지(노루)’라고 한다. 군사 유학생 중엔 놀가지가 단 1명도 없었다. 짐도 소련에 두고 온 데다 장사로 번 돈도 소련 은행에서 찾아오지 않았다. 조국에 잘못한 것이 없는데 대우가 나빠지니 불만이 클 수밖에 없었다.
프룬제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한 작전조(작전병과)는 김일성군사종합대학으로 갔다. 당시 평양에는 미림전자전대학, 군의대학 정도밖에 없었다. 소련에서 못다 한 공부를 마치려 개천, 청진, 강계의 군사대학으로 흩어졌는데 울분이 치솟았다. 별(계급장)을 떼고 학생별을 달라는 말에 각 군사대학에서 알력이 벌어졌다. 50명이 자는 숙소에서 잘 수 없다며 독신 군관 침실을 달라고 요구한 이도 있다. 상실감에서 비롯한 당시의 이 같은 집단적 울분은 쿠데타 모의의 배경 중 하나다. 유학생들은 자존심과 자부심이 무척 강했다.
전두환의 하나회와 비슷
북한이 어려울 때였다. 계란 하나 먹기 어려웠다. 군사대학에선 쌀밥이 나왔으나 소련에서 기름진 음식을 먹다가 반찬을 보니 한심했다. 식탁엔 땟자국이 더러웠다. 고급 담배 피우다 막담배 피우니 억울함이 몰려왔다.
소련 유학생 출신 군관들의 연대의식이 높아졌다. 장령이 “너 프룬제 출신이지?” 하고 물은 후 “네”라고 답하면 그날로 동지 같은 관계가 됐다. 유학생 출신 상위가 유학생 출신 장령을 ‘영감’이라고 부를 만큼 친분이 두터웠고 결집력이 강했다. 전두환의 하나회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조직 내 사조직이 생긴 것이다. 비(非)조직이 정식 조직을 흔드는 일도 일어났다. 1950년대 유학생 출신들과의 유대도 형성됐다. “너 주코프에 있었다며? 나는 58년에 들어갔다가 63년도에 나왔어” 식의 대화로 뭉친 것이다. 소련 유학 출신끼리는 러시아 군사용어로 대화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했듯 유학생들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되는 과정에서 다른 나라 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주체사상의 모순을 인식했다. 장령급, 좌급, 위급 유학생 출신들은 하나같이 똘똘 뭉쳤다. 서로 협상해 나라를 제대로 이끌고 나가자는 데 뜻을 모으고 군부와 정권을 장악하자는 합의에 도달했으나 군사적 행동을 실현하기 전 발각돼 숙청당한 것이다. 쿠데타 모의가 적발돼 숙청될 때 북한 주요 부대의 지휘관 자리를 소련 유학생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92년 당시 20~40대가 주축인 군사 유학생 대부분은 중앙당, 인민무력부, 제2경제위원회, 제2자연과학원 등의 고위 간부 자식이었다. 전병호 전 노동당 비서의 아들 등 최고위급 인사의 아들도 있었다. 누구도 건드리지 못한다는 자고자대(自高自大, 스스로 잘난 체하여 우쭐댐) 탓에 비밀 보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군사 유학생이 아닌 사람들은 포섭하지 않았는데, 오직 군사 유학생만으로 조직을 망라한 탓에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 못한 것도 실수였다. 유학생 출신이 아니면 사람으로 안 봤을 정도다.
최현의 사위이자 최룡해의 매부인 홍계성을 중심으로 작전을 모의했다. 5개 사단을 갖고 뒤집어 엎기로 했다. 사단장들이 죄다 유학생 출신이고, 군대 무력의 40%는 쥐었다는 믿음이 있었다. 홍계성은 1992년 김정일이 최고사령관에 추대된 후 직접 상장 계급장을 달아준 인물이다. 김정일이 “46세 에 상장이니 대단합니다. 조국통일 사업을 함께 합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서 돌아와 인민무력부 부총참모장으로 승진한 홍계성 상장, 인민무력부 작전국 부국장 강영환 등이 쿠데타 모의가 적발된 후 숙청됐다. 강영환은 김일성의 외가 친척이다. 총정치국, 총참모부는 물론이고 군단, 사단, 여단의 지휘 군관 중 소련 유학생 출신이 모조리 조사를 받았다. 소련에서 공부한 군의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소련 주재 북한대사관 군사 무관을 지내고 인민무력부 대외사업국장이던 김학산 중장과 부무관이던 최수연 대좌를 비롯한 무관부 출신들은 1997년 체포됐다.
체포당할 때 거세게 저항한 이들도 있다. 군사유학생 출신들에 대한 체포가 진행되던 1993년 말 함경북도 청진시 김책공군대학에서 공부하던 군사 유학생 17명을 평양에 물자를 호송하는 형식으로 데리고 와서는 평양역에서 체포하자 이들은 맞서 싸우며 반항했다. 1개 보위중대가 동원돼 그들을 제압하고 체포했다.
‘더 강력한 사회주의’ 원해
군사 유학생들은 북한 정권의 독재와 부패, 북한식 제도의 취약성을 인정하고 동구 나라들처럼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자는 데 합의를 봤다. 여기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다. 소련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근본주의자’들이었다.
마르크스, 엥겔스가 정립하고 레닌이 실현한 사회주의가 현실에서 올바르게 구현되지 못했다면서 인민이 주인 되는 제대로 된 사회주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유학생들에게는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였다. 소련 유학생 출신들은 더 강력한 사회주의를 원했다. 소련과 동구를 보면서 군대가 강해야 나라가 자본주의에 무너지지 않는다고 여겼다. 이들이 거사에 성공했으면 한반도가 위험했을 것이다. 주축이 30~40대로 젊었다. 피가 튈 때였다. 거사 날짜를 정했다가 미룬 게 가장 큰 실책이었다. 거사를 실행했다면 성공 확률이 꽤 높았다고 본다.
1970년대부터 권력을 아들에게 하나씩 넘기던 김일성이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게 ‘최고사령관’ 직위다. 김일성은 1991년 겨울 김정일을 최고사령관에 추대한다. 유학생 출신들은 김정일에 반대했다. 프룬제 아카데미아 사건은 김정일이 군권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자신에 대한 비토 세력을 숙청한 것이기도 하다. 김정일은 이 사건과 ‘심화조’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