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4월호

한 글자로 본 중국 | 허난성

“누가 뭐래도 우리는 中原”

豫 ‘모든 것이 시작된 곳’

  • 글 · 사진 김용한 | yonghankim789@gmail.com

    입력2016-04-04 16: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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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륙의 교차로, 정저우 기차역을 향해 바삐 걸어가고 있을 때 한 아가씨가 다가왔다. 손에 든 전단을 흘끗 보니 미용실 광고 전단이었다. 중국에 ‘삐끼’가 많기는 해도, 필요 없다고 하면 대개 더는 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아가씨는 반 블록이나 계속 따라오며 헤어컷을 하라며 졸라댔다. “한번 와서 상담 받아보세요. 헤어스타일이 달라지면 기분이 달라지고, 기분이 달라지면 인생이 달라져요.”

    ‘나라를 위하고 인민을 위하는 일(利國利民)’이라는 대의명분까지 나오지 않아 다행이었다. 연신 사양하자 아가씨는 말했다. “멋진 오빠, 저기부터 여기까지 날 데려와 놓고 필요 없다고만 하기예요?”

    아니, 누가 따라오라 했나? 그래도 아가씨가 귀엽게 입을 삐죽거리며 애교 있게 말하자 일순 마음이 약해져 ‘까짓것 헤어컷 한번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차 시간이 빠듯해 끝내 아가씨를 돌려보냈다.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허난(河南)성 사람들의 분위기를 느꼈다.



    ‘화려한 여름(華夏)’의 민족

    허난성의 약칭은 ‘편안할 예(豫)’ 자다. 사람(子)이 코끼리(象)를 끌고 가는 모양을 본뜬 글자다. 황허의 남쪽인 허난성은 코끼리가 살 만큼 풍요로웠으니 사람 살기에도 편했으리라. 고대에 기후가 변하기 전까지 이 지역의 기후는 오늘날 동남아와 유사한 열대·아열대성이었다. 드넓은 평야지대엔 온갖 기화요초가 자라고 코끼리, 거북 등 다양한 동물이 살았다. 그 위에 거대한 젖줄, 황허가 흐른다. 고대 이집트에서 나일 강이 홍수로 범람할 때마다 기름진 토양이 실려와 풍년을 맞은 것처럼, 진흙을 날라오는 황허 덕분에 허난성은 써도 써도 지력이 고갈되지 않는 화수분 같은 땅이었다.

    코끼리가 뛰놀던 시절의 허난은 고대 중국의 지리책 ‘산해경(山海經)’ 속의 전설 같은 땅이 부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곳에는 맛 좋은 콩, 벼, 기장, 피 등이 있고, 온갖 곡식이 절로 자라며 겨울과 여름에도 씨를 뿌린다. 난(鸞)새가 절로 노래 부르고, 봉(鳳)이 절로 춤춘다. 약초가 열매를 맺고 꽃을 피우며, 온갖 초목이 모여 자란다. 여기는 온갖 짐승이 서로 무리 지어 살고, 풀들이 겨울과 여름에도 죽지 않는다.”

    이 땅에서 중국의 모든 것이 시작됐다. 대제국 중국의 근원인 중원(中原)이 바로 허난성이다. “중국의 100년 역사를 보려면 상하이, 500년 역사를 보려면 베이징, 3000년 역사를 보려면 시안에 가야 한다. 그러나 5000년 역사를 보려면 허난에 가야 한다.”

    황허는 “낙양에 천 가지 꽃을 피웠고, 개봉(옛 양원)의 만경 땅을 기름지게 했다(滋洛陽千種花,潤梁園萬頃田).” 그러나 이 거대한 ‘용’은 평소에는 중원을 풍요롭게 하다가도 한번 화가 나면 무지막지한 시련을 내렸다. 치수(治水)는 황허 유역 사람들에게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전설 속 성군이며 하나라 시조인 우 임금이다. 우(禹)는 몸이 산처럼 우람해 한 걸음에 2리 반(1km)을 가고, 큰 손으로 천 석(180t)의 돌을 들었다. 그런 능력자에게도 치수는 버거운 숙제였다.

    우는 결혼한 지 나흘 만에 집을 떠나 천하 방방곡곡으로 ‘출장’을 다녔고, 13년간 집 앞을 세 번 지나치면서 단 한 번도 들를 수 없었다. 이 신화는 치수 사업이 막대한 인력을 투입해 광범위한 지역을 관리해야 하는 대역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련을 이겨내려는 분투 속에 역사는 발전한다. 중국은 초기 단계부터 치수 사업 때문에 대규모 인력동원 체제가 필요했는데, 이는 국가제도의 정비로 이어졌다. 큰 것을 숭상하던 이들은 만물이 번성하는 여름을 아름답게 여겼기에, 스스로를 ‘화려한 여름의 민족’인 화하족(華夏族)이라 불렀고, 나라 이름 역시 하(夏)라고 지었다. 훗날 통일제국 한(漢) 이후 화하족을 중심으로 90여 개 민족이 점차 통합해 한족(漢族)이 탄생했다. 즉, 오늘날 중국인의 뿌리가 바로 허난성의 화하족이다.



    ‘中州’이자 ‘神州’

    화하족은 황하의 풍족함, 많은 인구, 수준 높은 과학기술과 문화, 일찍이 정비된 국가제도 등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주변에 자신과 견줄 만한 세력이 없어지자 이들은 자연스럽게 ‘천하의 중심’이라 자부하면서 이를 매우 그럴듯하게 철학적, 과학적으로 포장했다. ‘주례(周禮)’는 말한다.

    “하지에 그림자가 1척 5촌인 곳이 천하의 중심이다. 천지가 화합하는 곳, 사시가 교차하는 곳, 풍우가 만나는 곳, 음양이 조화하는 곳이다. 그러하므로 만물이 풍성하고 편안하여 여기에 왕국을 세운다.”

    따라서 화하족의 땅은 천하의 중심이며 근원이 되는 ‘중원(中原)’이고, 여기 세워진 국가는 ‘중국(中國)’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중원은 천지만물의 조화가 아름답게 이뤄진 땅이고, 변방은 음양의 조화가 깨져 있어 상서롭지 못한 땅이다. 중앙일수록 고귀하므로 사방의 만이융적(蠻夷戎狄)은 천하디천한 오랑캐다. 순자도 이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식화했다. “사방에서 두루 가깝게 하고자 한다면 중앙만한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왕자는 반드시 천하의 한가운데 거처하니, 이것이 예다.” 중원에 살면 그 자체로 예를 지키는 것이고, 변방에 살면 그 자체로 예를 어기는 것이다.

    매우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만큼 자기네 땅에 대한 애착이 큰 탓이리라. 화하족은 황허의 물을 마시고, 황토 진흙으로 집을 지으며, 들판에 누렇게 익어가는 곡물을 먹고살았다. 모든 것을 길러내며 모든 것을 포용하는 흙에 대한 사랑은 중국인의 과학적 인식론인 음양오행론에 반영됐다. 나무·불·흙·쇠·물(木火土金水) 등 5개 요소가 상생상극하며 천지의 조화가 빚어진다는 오행론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것도 흙이다. 흙은 물이나 불만큼 개성적이지 않고 다소 밋밋하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다른 이들을 다 받아들인다. 이처럼 흙은 다른 이들을 모두 포용하면서도 자기 본연의 성질은 잃지 않는 군자의 덕(和而不同)을 지닌다. 중국인은 토덕(土德)을 구현한 황제(黃帝)를 민족의 시조로 여기고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 부른다.

    우 임금은 천하를 구주(九州)로 나누고 그중에서 예주(豫州)를 중심으로 삼았다. 예주는 곧 중주(中州)로도, 신주(神州)로도 불렸다. 중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이후로 허난은 중원의 화려함을 과시했다.



    삼국지의 무대

    중국 8대 고도(古都) 중 4개가 허난에 있다. 베이징, 시안, 항저우, 난징 등 쟁쟁한 도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허난의 4대 고도는 9개 왕조의 수도 뤄양(洛陽), 북송의 수도 카이펑(開封), 5개 왕조의 수도였으며 허난의 성도인 정저우(鄭州), 7개 왕조의 수도 안양(安陽)이다. 천하의 중심인 중원은 고도의 상징성을 가졌다. 중국의 오악(五岳) 중 허난의 쑹산(嵩山)은 동악 타이산(泰山)의 수려함도, 서악 화산의 웅장함도 없다. 그러나 중원인들은 쑹산을 중악으로 우러러봤다. 중원의 높은 산에서 기도하면 소원이 하늘에 쉽게 닿을 것 아닌가. 그래서 쑹산에 큰 절을 지었다. 천하 무술의 근원으로 더욱 유명한 천년고찰 소림사(少林寺)다.

    대륙 한복판에 탁 트인 대평원, 동서남북 어디로든 사통팔달 열린 땅. 풍부한 자원과 많은 인구, 게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상징성까지. 중원을 얻는 자가 곧 천하를 얻었다. 유방이 항우에게 승기를 잡은 성고전투, 후한의 광무제 유수가 1만 농민군으로 신(新)나라 43만 정규군을 격파한 곤양대전 등 굵직굵직한 대전들이 중원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삼국지’ 독자에게 허난성은 매우 친숙한 장소다. 원소·조조를 중심으로 한 18로(路) 제후 연합군은 후한 말 ‘최강최흉’의 군벌 동탁을 타도하러 허난으로 진격했고, 뤄양의 관문인 호뢰관에서 천하무적 여포가 유비·관우·장비 삼형제와 겨뤘다. 중원의 샛별 조조와 허베이의 패자 원소가 맞붙은 관도대전은 삼국지 3대 대전 중 하나다.


    좀도둑, 범죄자, 요괴

    허난인은 어느새 좀도둑, 범죄자, 요괴 취급을 받게 됐다. ‘허난인은 이력서를 제출하지 마시오’라는 말을 버젓이 쓴 구인광고가 심심치 않게 나왔다. 이처럼 이미지가 나빠지자 허난은 외자 유치와 경제개발에 곤란을 겪었다. 2001년 허난성 정부는 “우리는 요괴가 아니다”라며 반요괴화 캠페인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런 노력을 비웃듯 2005년 3월 광둥성 선전시의 한 공안국은 “허난 출신 사기꾼들을 때려잡자(堅決打擊河南籍敲詐勒索團)!”는 현수막을 걸었다. 참다못한 허난 변호사 2명은 국가기관이 공공연하게 특정 지역 출신을 범죄자로 취급한 것은 명예훼손에 해당된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신중국 건설 후 최초의 지역차별 소송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법원의 중재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선전시 공안국이 원고에게 사과하는 대신, 원고가 소송을 취하하기로 했다. 그런데 허난인 전체에 대한 공개 사과가 아니라 원고 2명에 한정된 사적 사과였고, 선전 공안국의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원고는 이렇게 설명했다. “여러 가지 상황이 유리했지만, 우리는 밝힐 수 없는 여러 곳으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법원은 공안국의 불법적 지역차별 행위에 대한 재판을 제대로 진행하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 또 일어날 수도 있는 다른 지역차별 행위가 처벌받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나쁜 선례만 남겼다.”

    인민의 인권보다 국가기관의 체면을 중요시한 결과다. 그리고 허난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나아지지 않았다.

    2011년에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 ‘실연 33일(失戀33天)’에서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진상 고객으로 허난 여자가 나온다. 그녀는 매우 까다롭고 골은 비었다. 겉멋만 잔뜩 들어 희한한 것, 신기한 것, 명품만 찾는 꼴불견이다. 새벽 5시에 주인공을 불러내 어이없는 요구를 늘어놓는다.

    많은 중국인은 허난인이 음흉하고 가짜를 잘 만든다고 매도한다. 실제로 그러한가. 그런 면이 없지는 않다. 리페이푸(李佩甫)의 ‘양의 문(羊的門)’은 허난의 모습을 잘 그려낸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한 촌장은 마을 전체가 가짜 담배를 만들도록 지휘했는데, 단속 나온 현 서기에게 당당히 궤변을 늘어놓는다. “담배는 사람을 해치는 물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진짜 담배는 진짜 해가 되는 물건이고, 가짜 담배는 가짜 해가 되는 물건이 아닐까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다른 성은 가짜를 안 만드는가. 다른 지역은 얼마나 깨끗한가. 소설 말미에 나오듯, 개혁·개방 초기 중국의 사정은 시 서기의 항변처럼 전국이 피장파장이었다. “시장경제는 누구도 해보지 않은 새로운 시도라고! 지금 상황은 전국이 다 똑같네. 문제없는 곳은 없어. 조사하면 할수록 더 큰 문제가 나올 거네. 가만히 접어두면 아무 문제가 안 되지만, 들춰내기 시작하면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네.”



    동족 혐오, 희생양 만들기

    결국 허난성이 가짜의 대명사, 허난인이 추한 중국인의 대명사가 된 것은 희생양 만들기와 동족 혐오에 가깝다. 피차일반이면서 자기는 깨끗하고 저놈만 더럽다고 욕하는 것이다. 허난인은 추악한 중국인의 대표라기보다, 오히려 전체 중국인의 대표다. 교육학자 양둥핑은 말했다. “‘중국인’이라는 개념 또한 무척 광범위해 결코 베이징인이나 상하이인과 같은 범주에 담아낼 수 없다. 중국인의 총체적인 형상, 문화적 근간이 어디에 있냐에 대해 굳이 말하자면, 아마도 그것은 북방의 농민이 될 것이다. 상하이인 혹은 베이징인이 대표성을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북방의 농민, 그중에서도 허난성이야말로 중국의 참모습을 대변한다. 허난성은 중국의 축소판이며, 중국은 허난성의 확장판이다. 중국은 인구대국이고, 허난성은 인구대성이다. 전체 GDP는 많지만, 1인당 GDP가 적은 점도 같다. 2014년 중국의 명목 GDP는 10조 달러로 세계 2위지만, 1인당 GDP는 7589달러로 79위였다. 또한 중국이 급속히 산업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농업 비중이 높은 점도 허난성과 판박이다. 그래서 허난인은 지적한다. “중국인이 허난인을 대하는 시각은, 외국인이 중국인을 바라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예나 지금이나, 좋은 면이나 나쁜 면이나 허난은 중국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가난과 낙후, 외성인(外省人)들의 따가운 눈총까지. 허난의 수난은 눈물겹다. 그러나 이곳은 누가 뭐래도 중원이다.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이들의 자존심은 굳건하다. 타 지역 은행의 이름은 보통 해당 지역명을 사용하지만, 허난성의 은행은 당당하게도 ‘중원은행(中原銀行)’이다. 타 지역이 오랜 역사를 자랑할 때, 허난은 조용히 은허 갑골문과 정주상성(鄭州商城)을 보여준다. 산시성이 현장법사가 천축국에서 얻어온 불경을 보관한 대안사를 자랑할 때, 허난은 중국 최초의 절인 백마사를 보여준다.

    산둥성이 인류의 스승 공자를 자랑할 때, 허난은 말한다. “주공이 예악(禮樂)을 정하다. 공자가 주나라에 와서 예를 묻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을 복원해 천하가 평화를 되찾는 것을 필생의 과제로 삼았다. 주나라 예법을 정한 이는 공자가 평생 흠모한 주공이었다. ‘노나라 촌놈’인 공자는 주나라 유학으로 예악을 배웠고, 당시 왕립 도서관장이며 당대 최고의 지성인인 노자의 가르침을 받았다. 비유하자면, 주공이 구약성서를 미리 써놓았기에 공자는 이를 기반으로 신약성서를 쓸 수 있었다. 결국 허난이 없었다면 공자도 없었다는 말이다.

    상하이와 광둥성 등 연안 지역이 압도적인 경제력을 자랑할 때, 허난은 말한다. “초나라 왕이 구정(九鼎)에 대해 묻다.” 춘추전국시대의 패자 초장왕은 주나라의 왕손 만이 찾아왔을 때 말했다. “구정은 얼마나 큽니까. 그 정도는 우리 초나라 군대의 부러진 창날만 모아도 만들 수 있습니다.” 구정은 당시 귀금속인 청동을 크고 정교하게 만든 기물로, 주나라 왕실의 상징이며 주의 경제력, 문화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신흥강국 초나라에는 주 왕실의 권위도, 구정도 별것 아니게 보였다. 왕손 만은 말한다. “천자의 권위란 덕에 있는 것이지 구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자가 덕을 밝히면 정이 작더라도 그 무게는 무거우며, 난잡하고 어두우면 정이 비록 크다 해도 가벼운 것입니다.” 급속히 부국강병을 이룬 초나라는 졸부와 같다. 비록 껍데기는 따라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안에 담아야 할 정신은 채우지 못한다. 경제력, 군사력만으로는 넘지 못하는 것이 문화다.



    중원의 자부심

    연안 지역이 오늘날 경제를 뽐내지만, 옛 초나라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달은 차면 기운다. 흥하면 쇠한다. 핵심은 흥망성쇠의 시험을 견딜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꿋꿋이 전통을 지켜온 중원의 자부심이 읽힌다.

    허난 정저우는 중원답게 교통의 중심지다. 남북으로 베이징과 광저우를 잇는 징광선(京廣線), 동서로 장쑤 렌윈강과 신장 우루무치를 잇는 룽하이선(隴海線)이 교차한다. 허난성 셰푸잔(謝伏瞻) 성장은 2015년 양회에서 ‘미(米)’자형 고속철 건설 구상을 발표해 호평을 받았다. 정저우에 방사형 고속철 네트워크를 건설해 중국 각지를 사통팔달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허난은 대륙의 허브로 재도약을 꿈꾼다. 늘 중국의 영광과 오욕을 함께해온 중원 허난이 어떤 내일을 맞게 될까.


    김 용 한


    ● 1976년 서울 출생
    ● 연세대 물리학과, 카이스트 Techno-MBA 전공
    ● 前 하이닉스반도체, 국방기술품질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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