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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수교수의 역사 뒷이야기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 박성수

중국 금나라 시조된 마의태자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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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마의태자는 혼자서 경주를 떠나지는 않았다. 마의태자를 지지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일행도 많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의태자의 조부 효종랑(孝宗郞)은 1000명이나 되는 화랑도(花郞徒)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서울(경주)을 점령하여 경애왕(景哀王)을 폐위하고 경순왕을 새 임금으로 옹립한 것도 경순왕이 바로 효종랑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의태자는 그런 훌륭한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버지가 비굴하게 항복하는 것을 반대하고 결연히 개골산으로 떠났고, 그런 태자를 따르는 신라의 충신과 의사가 많았던 것이다.

왕건에게 귀부(歸附)하러 가는 경순왕의 일행은 향차(香車)와 보마(寶馬)가 30여 리나 이어졌다고 하는데 마의태자 일행도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경순왕 일행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따가웠지만 마의태자 일행을 보는 군중의 눈에서는 망국의 눈물이 맺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마의태자 일행은 강원도 인제 설악산 기슭에 도착한다. 그러면 왜 하필이면 깊은 산골인 ‘하늘 아래 첫 동네’를 택했을까. 바로 그곳에 한계산성(寒溪山城)이라는 이름난 산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국여지승람’은 “한계산성은 인제현 동쪽 50리 거리에 있다. 산성은 둘레가 6278척, 높이가 4척의 석성(石城)이다. 지금은 퇴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한계산성의 정확한 위치는 인제군 북면 한계 3리 1번지다. 인제읍에서 원통 면사무소를 지나 오른쪽 44번 국도로 꺾으면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가는 길인데, 가다 보면 향토공원이 나오고 옥녀탕이 보인다. 거기서 하차하여 가파른 산길을 기어가다시피해 30분 정도 올라가면 평탄한 능선에 오르게 되고 이윽고 아름다운 성벽이 나타난다. 성안에서는 냇물이 흘러 소리가 요란하다. 냇물을 건너가면 성의 남문이 나온다. 이 남문 자리가 해발 1000m라 한다.

성문 안으로 들어서서 성벽에 올라섰으나 병사 500명이 들어설 수 있다는 넓이 600여 평의 대궐 터와 절터가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외성이고 훨씬 더 올라가면 내성이 또 있는데, 그곳에 대궐 터가 있다는 것이다. 내성은 너무 험해서 산악 전문가가 아니면 올라갈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내성에 우리가 찾는 천제단(天祭壇)이 있는 것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적과 싸우기 전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 필승을 다짐했다. 한계산성의 천제단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이른바 ‘삼신단(三神壇)’이다. 또 거기에 비명(碑銘)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는 의선운장(義仙雲將) 김성진(金成鎭), 선천주(仙天主) 신광택(申光澤) 그리고 김세진(金世震)이라는 세 사람의 이름과 경오(庚午), 신미(辛未)라는 간지(干支)로 판독되었다고 한다.물론 세 사람이 어느 시기의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간지의 정확한 연대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의선운장이란 의병장을 말하는 것이니, 김성진과 김세진은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장군 아니었을까. 그리고 두 사람은 신라의 왕족 경주김씨 아니었을까.

간지의 연대도 마의태자 때라면 경오, 신미년은 각각 고려 광종 20년(970), 21년(971)이었을 것이다. 신라가 망한 해부터 헤아리면 36년 내지 37년 뒤가 된다. 만일 이 가설이 입증된다면 이 산성은 신라 멸망 이후 고려 제4대 광종 때까지 적어도 37년간 마의태자를 따라온 신라 유민들이 장악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성에 올라서서 동쪽을 보면 한계령 고갯길이 눈 아래 훤히 내려다보인다. 아마도 동해안 쪽에서 한계령을 너머 침입해오는 고려군을 감시하고 또 막기 위해 이 자리에 성을 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 지도를 보면 개성에서 인제 땅은 너무 멀다. 이곳을 공격하자면 육로보다 동해안에서 진부령을 넘는 것이 훨씬 쉽다. 지금 동해안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이 있는데 진부령의 본시 이름은 김부령(金富嶺)이었다는 말이 있다.

한계산성에도 전설이 많다. 이 험한 산에 성을 쌓을 때 동네 사람들이 일렬로 서서 돌을 손에서 손으로 넘겼다는 이야기, 그리고 한계산성 아래 동네 총각에게는 시집가지 말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왜 그런 말이 돌았을까. 마의태자와 운명을 같이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천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일까.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강원도 인제에서는 마의태자가 설악산에 들어와서 광복운동을 했다고 믿고 있다. 인제 땅은 본래 신라 영토가 아니라 고구려 영토였다. 그래서 고구려 말로 구토(舊土)회복이라는 단어인 다물(多勿)이 이곳에 한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일설에 한계산성은 맥국(貊國)의 동쪽 국경을 지키는 산성이었다고도 하니 일찍부터 인제 땅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한계산성 같은 난공불락의 산성이 있었던 것이다. 마의태자가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러면 마의태자가 살다가 죽었다는 금강산은 어떻게 되는가. 지금 금강산 구경이 한창이다. 우리나라 관광객은 동해안 쪽으로 가서 외금강을 보고, 금강 중의 금강이라 하는 내금강(內金剛)을 보지 못하고 돌아온다고 한다. 금강산은 철원 쪽에서 들어가서 단발령을 넘어 먼저 내금강을 본 다음에 외금강, 해금강 순으로 보는 것이 구경의 원칙이다.

개골산이 금강산인가

그러니 지금 가는 금강산 유람으로는 내금강을 못 볼 뿐만 아니라 마의태자 유적도 볼 수 없다. 비로봉 밑에 있다는 전설의 태자릉(太子陵)도 못 볼 것이다. 아무튼 사람들은 태자릉을 마의태자의 무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삼국사기’를 들여다보자.

“왕자는 통곡하며 왕을 사별(辭別)하고 곧 개골산(금강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를 입고 초식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는 이렇게 마의태자의 최후를 적고 있다. 지금까지 이 기록을 믿고, 마의태자가 비관한 끝에 금강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또 실제로 금강산에 들어간다는 것은 곧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동국여지승람’은 “금강산은 그 봉우리가 모두 1만2000봉이나 되는데 비로봉이 제일 높다고 하며 골짜기마다 108개나 되는 불사가 산재한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금강산에는 민가가 한 채도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곳에 경작지가 전혀 없어 외부의 식량지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산은 바위 봉우리가 벽처럼 서 있어 이르는 곳마다 천길 만길이라 몸을 의지할 만한 암자도 움집도 없었으며 채소나 과일을 심어서 먹을 만한 흙 한 줌도 없었으니 여기에 산다는 것은, 구멍에 숨거나 나무 위에 둥지를 짓고 사는 새나 짐승과 같이 거처하지 않는 한 하루도 머무를 수 없을 것이다.”

금강산은 최남선의 말처럼 커다란 바윗 덩어리요, 온갖 기묘한 변화를 나타낸 하나의 화강암 덩어리에 지나지 않은 것이요, 금강 없는 금강산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산속으로 태자 일행이 들어갔다는 것은 죽으러 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금강산에 가보면 마의태자 유적지가 남아 있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먼저 금강산의 이름부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삼국사기’는 고려시대의 원본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중간(重刊)된 것이다. 그래서 개골산에 괄호를 하고 금강산이라 주석을 단 부분은 고려 때 나온 ‘삼국사기’ 원본에 있었다 하더라도, 삼국시대 당시에는 개골산은 물론 금강산이란 이름도 없었다.

즉 마의태자가 갔다고 하는 개골산을 삼국시대에는 상악(霜岳) 또는 설악(雪岳)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32 제사(祭祀)조에 보면 강원도 고성군의 상악과 역시 강원도 수성군(지금의 간성군)의 설악에서 소사(小祀), 즉 산신제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개골산이나 금강산이란 지명이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고 상악이라고만 나오는 것이다. ‘삼국유사’도 마찬가지다. 도대체 삼국시대에는 개골산이니 금강산이니 하는 지명조차 없었던 것이다.

개골산과 금강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부터다. 그러나 ‘고려사’에는 주로 금강산으로 나오지 개골산은 드물다. 또 금강산은 중앙에서 모반죄 같은 큰 죄를 지은 정치범의 유배지로 등장한다. 고려시대에는 금강산에 유배되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운 곳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후대에 조작된 금강산 태자 유적지

그러다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금강산은 유학자들의 수도장으로 변했고, 금강산이라는 불교 냄새 나는 이름 대신에 개골산이니 풍악산이니 하는 이름을 갖게 된다. 조선시대에 나온 ‘동국여지승람’ 회양도호부조에 보면, 금강산에는 이름이 다섯가지나 있다고 기술한다.

“산 이름이 다섯 있는데 첫째 금강, 둘째 개골, 셋째 열반, 넷째 풍악, 다섯째 지달이다.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은 풍악이지만 중 무리는 금강산이라 한다. 이 금강이란 이름은 화엄경에 근본한 것이다.”

그러니까 삼국시대에는 상악이라 불렀고 고려시대에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이름을 고쳐 지었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스님들이 금강산이라 불렀지만 일반인은 풍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개골산도 풍악이란 이름과 함께 조선시대에 일반화된 이름으로 생각된다. 또 금강산과 설악산이 연접돼 서로 암수 하는 사이이고 보니 혼동될 우려마저 있는 것이다. 하물며 삼국시대의 상악(금강산)과 설악(설악)은 구별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산 이름보다 더 중요한 의문점은 금강산에 있다는 마의태자 유적지는 분명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처음으로 지적한 학자가 육당 최남선이다. 그는 일찍이 금강산을 등산, 태자 유적지를 보고 ‘금강예찬(金剛禮讚)’(1927년)이란 기행문에서 이것은 가짜라고 말했다.

“신라 태자의 유적이란 것이 전설적 감흥을 깊게 하지만 그것과 역사적 진실과는 딴것입니다. 첫째 세상만사를 다 끊고 이 깊은 산골에 들어온 태자에게 성이니 대궐이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까. 태자의 계마석(繫馬石)이니 마구간(馬廐間) 터니 하는 것은 다 옛날 예국 때의 천제단이요, 태자성(太子城)이란 것도 제단으로 들어가는 성역 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의 태자 유적들이 후대에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최남선 특유의 지명학(地名學)을 터득해야 한다. 본시 금강산은 예국의 영산(靈山)이었다. 신라가 이를 계승하여 해마다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이르러 골짜기마다 불사가 들어서서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 불단으로 변하고 금강산 봉우리마다 불교 이름이 지어지고 말았다.

태자 유적지도 그런 것 중 하나인데 태자성은 둘이나 있고 망군대와 장군봉이 모두 마의태자가 조국 광복을 위해 군사를 지휘하던 산으로 이름지어졌다. 심지어 단발령까지도 고려 태조 왕건이 이곳에서 멀리 금강산 절경을 보고 중이 되려고 머리를 깎았다고 전해지고 있으니 금강산의 전설은 믿기 어려운 것이 많다.

여하간 금강산의 마의태자 유적지도 설악산의 마의태자 유적지와 같이 마의 초식하다가 춥고 배고파서 죽은 무기력한 마의태자상을 부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국 광복을 위해 당당하게 싸우다 죽은 씩씩한 태자상을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마의태자가 ‘삼국사기’ 같은 정사에 나오는 나약한 태자가 아니라 정의에 불타는 전설 속의 대장부였다면 금강산으로 가지 않고 설악산으로 갔을 것이 확실하다.

그리고 조국광복을 위해 떠난 태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었다면 하나는 설악산으로 가고 다른 하나는 금강산 기슭 어딘가 갔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면 금강산에 그를 추모하고 아끼는 유적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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