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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경주 남산 배리(拜里) 미륵삼존불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미륵 신앙에서 아미타 신앙으로 경주 남산 배리(拜里) 미륵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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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강우방 관장이 실측 조사하여 논고한 바에 의하면 경주 선도산 정상 아래 동남면한 절벽을 깎아 만든 마애삼존대불은 아미타 삼존이라 한다. 좌협시가 분명히 보관에 화불을 표시하고 있다 하였다.

그러나 암벽의 석질이 잘 부스러져 떨어지는 안산암(安山岩)이라서 높이 약 13m, 폭 약 20m의 절벽에 삼존을 다 새겨내지 못하고 주불만 제 바위에 새긴 다음 좌우 협시 보살상은 백색 화강암으로 따로 만들어 세워 삼존의 구도를 이루어 놓았다는 것이다.

(도판 8)이 있는 선도산 정상에 가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본존상은 현재 눈 부위 이상이 모두 부스러져 떨어져 나갔는데 이는 인위적인 파괴가 아닌 박락 현상에 따른 파손이라고 한다. 현존 높이가 5.9m인데 복원 수치는 약 7m에 해당한다고 한다. 시무외여원인을 지었으나 왼손의 여원인은 새끼손가락과 무명지를 꼬부려 (제 8회 도판 14)의 주불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옷주름마저 정면에서 타원형으로 중첩하는 형식을 그대로 답습하여 이 모본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우협시 보살의 형식도 의 우협시 보살 형식을 철저하게 모방하여 두 손으로 보주를 받쳐 든 모습이 같다. 천의가 정면에서 2중으로 타원형을 지으며 흘러내린다든지 두 팔뚝에서 양쪽 측면으로 발 아래까지 떨어진다든지 하는 것이 모두 같다.

그러나 양식 기법은 수나라 삼존불 입상 양식이어서 (도판 9)과 동일 양식이다. 아마 육계도 처럼 넓고 낮았을 듯하다. 입술이 얇고 입을 굳게 다문 듯 표현한 것도 수나라 불상 양식 기법을 보인 것이다.



좌협시인 관세음보살은 우협시인 대세지보살과 함께 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서, 마애 석불로 조각된 주불의 좌우 벽에 기대어 세워놓았다. 딴 산에서 떼어낸 돌을 옮겨다 조성해 세웠으므로 산 아래에서 정상까지 그 석재를 운반해 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높이가 4.55m에 달하는 거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돌을 두 덩어리로 분리하여 옮겨다가 상하를 따로 조성하여 조립해 세우는 기지를 발휘하였다. 한 덩어리의 돌로 무릎 이하에 해당하는 부분을 감실 형태로 파내 땅에 묻어 고정시킨 다음 다른 한 덩어리의 돌로 발목까지 조각한 보살신을 그 감실 안에 끼워 세우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감실 안 밑바닥에는 발의 표현이 되어 있고, 바닥 아래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가 새겨져 연화대좌를 상징하며, 감실 좌우벽은 천의자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턱진 보살신의 천의자락과 감실벽을 이룬 천의자락이 서로 맞물리도록 계산해 만들어서 서로 끼워 맞춘다면 두 돌로 하나의 석상을 감쪽같이 만들어 세울 수 있게 된다. 이런 공법으로 큰 돌을 운반해 오는데 들이는 인력 낭비를 최소화하면서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협시보살상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관세음보살상의 보관은 근본적으로 모란꽃잎 같은 꽃잎 장식 세 개를 세우고 관띠로 이를 연결 고정한 삼산관 형식인데, 이는 수나라 보살상의 일반적인 보관 양식이다. 다만 정면 꽃잎 장식 위에 화불좌상이 표현되어 관세음보살입상임을 드러내는데 아직 윤곽만 희미하게 파놓은 상태이다. 오른손으로 시무외인을 짓고 왼손으로 정병을 들고 있다.

협시보살이 시무외인을 지은 것은 특이한 예라 하겠는데, 혹시 이는 의 좌협시 반가사유상의 턱받친 손 모양을 의식하고 이런 표현을 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관세음보살상의 얼굴을 둥글게 표현하고 대세지보살상의 얼굴을 깊게 표현하여 한쪽은 미소띤 화사한 표정으로, 다른 쪽은 정색한 듯 근엄한 표정으로 만들어낸 것도 의 기본 구도를 따르려 했던 듯하다.

대세지보살이 4.62m로 조금 큰 것도 이런 구도의 영향일 것이다. 보관 윗부분에 감실 같은 흔적이 남아 있어 이곳에 정병(淨甁)을 조각해 끼워 넣지 않았던가 추측하고 있지만 아직 속단할 일은 아니다.

어떻든 선도산 정상에 거대한 이 조성되었다는 것은 신라 사회가 이제 미륵신앙에서 벗어나 아미타신앙으로 전환해 간다는 사실을 표방한 것이라 해야 할 터이니, 이런 일이 언제 어떻게 해서 일어날 수 있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다.

선도산은 경주의 백호(白虎)에 해당하는 산으로 서악(西岳)이라 불리는데 일찍이 김씨왕족이 그 동쪽 기슭을 차지하고 있었다. 법흥왕릉(사적 76호)이 동쪽 기슭의 맨 남쪽에 들어서면서부터 진흥왕릉(사적 77호) 진지왕릉(사적 78호) 태종무열왕릉(사적 20호) 김인문묘 등이 차례로 세워진다. 아마 용수의 무덤도 태종무열왕릉 군(群) 4무덤 중에 하나일 것이다.

따라서 태종무열왕이 그 8년(661) 6월에 58세로 돌아가 그 부친 용수의 무덤 아래에 왕릉을 쓴 다음 비석을 세울 때에 이 도 함께 조성되지 않았나 한다. 그러니 문무왕 원년(661)으로부터 3년(663)에 걸치는 사이에 이 조성되었다고 보아야 하겠다.

아마 법흥왕 이래 역대 김씨 진골왕들, 그중에도 진흥왕 진지왕 태종무열왕으로 이어지는 적장손 계열의 순수 진골왕들의 왕생 극락을 기원하는 동시에 태종무열왕의 추복을 비는 의미로 아미타삼존상을 조성했을 터이다. 이제는 돌아간 태종무열왕이 미륵불이 아닌 아미타불이 되어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뜻을 담고자 했을 것이다. 그래서 백제 위덕왕의 초상 조각인 을 범본으로 삼아 그보다 세배는 더 큰 규모로 태종무열왕의 초상 조각인 을 조성해냈을 듯하다. 이 은 선도산 정상에서 바로 태종무열왕릉을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상적 근거를 마련해준 것은 문무왕의 매제이기도 했던 원효(元曉, 617∼686년)대사였던 듯하다. 그는 벌써 아미타 삼존불 조성의 이념적 근거인 ‘불설관무량수경’을 완전히 이해하여 ‘불설관무량수경종요(佛說觀無量壽經宗要)’ 1권을 저술해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와 거의 동시에 백제 웅천주 출신 학승인 경흥(憬興)대덕이 나와 ‘불설관무량수경연의술문찬(佛說觀無量壽經連義述文贊)’을 지어 ‘불설관무량수경’을 일반에 더욱 널리 홍포함으로써 아미타 신앙은 점차 일반 대중에게 확산돼 나가고 이에 따라 아미타삼존상의 조성도 증가해 나간다.

백제부흥 운동

백제 의자왕(600년 경∼660년)이 그 20년(660) 7월18일에 당장 소정방에게 항복하여 백제가 멸망했지만, 백제 유민들은 즉각 각처에서 일어나 침략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되찾으려는 부흥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좌평 정무(正武)가 두시원악(豆尸原嶽, 연산 도솔산으로 추정)에서 일어나 나당 연합군을 납치 살육하고,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임존성(任存城, 대흥)을 근거로 치열한 항쟁을 벌인다. 이에 금돌성(金突城, 신창)에 본영을 차리고 있던 무열왕은 8월26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임존성을 직접 공략하지만 지세가 험준하고 저항군의 군사력이 3만여명에 이를 만큼 막강하여 실패하고 만다. 의자왕이 항복했는데도 소정방이 군율을 풀어 약탈을 허락했기 때문에 백제인들이 결연히 일어나 한데 뭉쳐 맹렬히 저항한 결과였다.

이에 소정방은 부흥의 구심점을 제거하기 위해 9월3일 의자왕을 비롯한 백제 수뇌부 93인과 포로로 잡은 백성 1만2000인을 데리고 황급히 바다를 건너 귀환하고, 낭장(郎將) 유인원(劉仁願)으로 하여금 1만 군사를 거느리고 부여에 남아 이들을 진압하도록 한다. 신라왕자 인태(仁泰)는 7000 군사를 거느리고 부장(副將)으로 이를 돕도록 하였다.

그러나 백제 저항군들은 9월23일 사비성을 공략하여 탈환하려 하고 나당 연합군은 이를 힘겹게 물리친다. 이런 와중에 당에서는 백제의 옛 땅을 직접 통치하려는 야욕으로 좌위중랑장 왕문도(王文度)를 9월28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파견하니 무열왕은 심기가 극도로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제 부흥군이 도처에서 일어나 저항하므로 이의 제압이 시급했기 때문에 10월9일에는 태자와 함께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이례성(禮城, 연산 도솔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부근 20여 성이 두려워서 모두 항복했다. 내친 김에 사비성의 탈환을 노리고 집결해 있는 부흥군 주력부대의 거점인 사비남령을 공격하여 1500인을 참수하고, 이어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을 11월7일에 격파하여 사비성 부근의 부흥군 세력을 소탕한 다음, 11월22일에 서라벌로 돌아와 백제 정벌의 논공행상을 행한다. 그 사이 백제 부흥군들은 주류성(周留城, 홍성)을 근거지로 부흥운동의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복국(復國)사업에 돌입하고 있었다.

백제 해상활동의 근거지로 무녕왕 이래 백제 문화의 선진 지역이 되어 왔던 태안반도 일대는 당시에도 당연히 백제 수군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 백제 수군이 소정방이 거느리고 온 강남 수군에게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아산만과 남양만, 강화만을 한눈에 제압할 수 있는 해상 요충인 덕물도(덕적도)를 그대로 내주었다는 것은 전략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이것이 혹시 의자왕의 무능과 전횡에 따른 전략적 실수인지 아니면 수군을 장악하고 있던 부여복신과의 불화 탓인지 지금으로서는 밝힐 길이 없다. 어떻든 백제 멸망기에 태안반도의 실력자였던 부여복신이 수군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 결과 의자왕은 수륙양군의 협공으로 쉽게 무너지게 되었다.

이후 복신은 태안반도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근거지로 본격적인 부흥운동을 일으키는데 해상세력의 수장답게 해상세력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본 수군 세력의 지원을 이끌어내려는 전략을 세운다. 그러기 위해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왕자 부여풍(扶餘豊)을 불러들여 왕으로 추대한다.

그러자 백제의 서북부, 즉 태안반도 일대가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드디어 무열왕 8년(661) 2월에 복신은 승장(僧將) 도침(道琛)과 함께 사비성 탈환을 시도하기 위해 수륙 양군으로 진격하여 포위하지만, 백마강 입구에서 다시 나당연합수군에게 대패하여 수군 1만여 명을 잃는 손실을 입고 임존성으로 물러나온다.

한편 신라 조정은 2월에 사비성의 위급을 통보받자 이찬 품일(品日)을 대당장군으로 임명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가서 이를 구하게 한다. 품일은 3월5일에 군사를 나누어 두량윤성(豆良尹城, 정산)에 이르렀으나 이후 한달 6일 동안 공격하고도 함락하지 못하고 많은 병기와 군량만 잃은 채 4월19일 회군하고 만다.

신라군의 참패소식을 들은 무열왕은 장군 김순, 김진순, 김천존, 김죽지 등을 보내 이를 구원하게 하지만 이들이 고령 가시혜진(加尸兮津)에 이르렀을 때 벌써 패군이 거창 가소천(加召川)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그대로 회군한다. 격노한 무열왕은 패장들의 죄를 물어 엄벌에 처한다. 이런 판국에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 장군 생해(生偕)와 함께 술천성(述川城, 여주)과 북한산성(서울)을 차례로 공격하여 북한산성은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내우외환이 결국 무열왕을 격무에 시달리게 하고 노심초사하게 하여 수명을 단축시켰으니 이해 6월 무열왕은 급서하고 말았다. 그래서 태자 김법민(金法敏, 626∼681년)이 즉위하니 이가 문무왕이다.

문무왕은 즉위하자마자 부왕의 장례도 치르기 전에 아우 김인문 등이 가져온 당 고종의 칙서를 받고 당의 고구려 침략을 거들기 위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출진해야 했다. 6월에 벌써 소정방이 수륙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는 것이다.

문무왕은 8월에 서라벌을 떠나 선산 시이곡(始飴谷, 餘次里津)을 지나 상주 웅현(熊峴)을 넘어 청산(靑山), 문의(文義), 청주, 진천, 죽산, 이천으로 이어지는 노정을 잡고 떠나온다. 문무왕은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삼아 진주, 흠돌, 천존, 죽지 등 장군을 친히 거느리고 남천주(이천)까지 왔던 것이다. 남천주에서는 사비를 떠나 해로로 달려온 유인원 군대와 합류하여 다시 바다로 북진하려 하니, 백제 부흥군이 옹산성(甕山城, 수원 禿山城)에 진을 치고 이를 저지하려 한다.

문무왕은 이 사실을 알고 9월25일에 이를 격파하여 배후의 근심을 없앤다. 그리고 양식이 떨어져 발이 묶인 소정방 군에 다음 해(662) 정월까지 수레 2000여 대에 쌀 4000 석과 벼 2만2000여 석을 실어다 전해주니, 소정방은 겨우 굶어죽는 것을 모면하고 회군할 수 있게 되었다.

문무왕은 북한산주(서울)에 머물면서 김유신을 시켜 고구려 영토를 지나 평양 부근까지 와 있는 소정방에게 군량미를 전달해 주게 하는데, 김유신의 군대는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오는 길에 임진강을 건너다 고구려 추격병에게 걸려 임진강 중류 호천(瓠川, 장단의 수탄)에서 격전을 벌이다가 오히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다.

한편 백제 부흥군은 승장 도침이 스스로 영군(領軍) 장군을 일컫고 복신이 상잠(霜岑) 장군을 일컬으며 군세를 더욱 불려 나간다. 그래서 유인원과 유인궤 군대를 위협하고 신라의 구원군을 격파하여 다시 나오지 못하게 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미구에 복신이 도침을 시기하여 살해함으로써(661년) 세력이 크게 위축된다.

이에 유인원 등은 문무왕 2년(662) 7월에 두량윤성(정산), 대산성(大山城, 홍산) 진현성(眞峴城, 진잠) 등을 공격해 빼앗아서 신라로부터 군량미를 운반해올 통로를 확보한다. 이렇게 세력이 약화돼 가는 중에도 부여 복신은 신왕 부여풍과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시기하여 제거하려다 문무왕 3년(663) 부여풍이 먼저 부여복신을 살해한다.

부흥운동의 근거지인 태안반도 일대의 실력자인 부여복신을 살해했다는 것은 곧 부흥운동의 기반을 포기했다는 얘기이니, 나당연합군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그래서 복신의 근거지이자 부흥운동의 근거지인 주류성을 치기 위해 수륙양군을 일으켜 사방에서 진격해 들어간다. 웅천주에서도 병선과 양곡선이 내려오고, 남양만과 덕물도에서도 병선이 발동했을 것이며, 남천주와 사벌주에서도 군사가 진격해 들어왔을 것이다.

이때 덕물도에는 손인사(孫仁師)가 거느린 당나라 수군 40만이 들어와 있었으며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 장군을 거느리고 두량윤성과 주류성 공략에 앞장섰다.

이에 풍왕은 일본으로부터 수군을 불러들여 해상에서 격파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켜 보려 한다. 그러나 당나라 수군을 격파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일본 수군은 백강 입구의 해전에서 네 번 싸움에 네 번 모두 패배하여 400여 척의 배가 불태워지는 참패를 당하고 만다.

풍왕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사한 듯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고 풍왕의 왕자들인 부여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부하를 거느리고 왜인과 함께 항복하니 나머지 백제의 모든 성들도 따라서 항복하여 백제 부흥운동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때 지수신(遲受信)만은 임존성에 웅거하며 끝내 항복하지 않았는데 이곳 출신인 흑치상지와 사타상여(沙咤相如) 등이 항복하여 적의 앞잡이가 됨으로써 결국 이들의 공격으로 임존성마저 함락당한다. 그래서 지수신은 가족을 버려둔 채 단신으로 고구려에 망명하고 말았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의 기반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

사실 임존성의 저항이 얼마나 강하였던지 나당연합군이 10월21일부터 11월4일까지 보름 동안 쉬지 않고 공격하였으나 끄떡도 하지 않아, 결국 신라군은 이를 포기한 채 11월4일 회군하면서 설리정(舌利停, 서천)에 이르러 논공행상을 베풀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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