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8월호

유동인구 30만 거대 지하도시 코엑스 몰

소비자본주의 시대의 기획된 해방구

  • 안이영노 문화평론가

    입력2006-09-19 14: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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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구정동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다!? 내가 코엑스 몰에 관해 물었을 때 들었던 첫 대답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그것은 무척 흥미있는 답이다. 명동 역을 떠나 삼성 역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다시 한번 코엑스 몰이 어떤 느낌이냐고 물었다. 그녀의 대답은 똑같았다. 거긴 압구정동을 통채로 옮겨놓은 것 같아.

    왜 압구정동일까? 물었을 때 그녀의 대꾸는 역시 간결하고 분명했다. 지금 그곳으로 가면 어른은 별로 찾아볼 수 없으니까.

    놀라운 일이다.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관’이라든지 거기 가면 무엇이든지 다 있다고 외치는 코엑스 몰의 광고를 보고, 또 주변의 이야기를 들은 바로는, 그곳이 젊은이들의 소비 공간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내가 받은 느낌은 가족들을 위한 엔터테인먼트 공간이라는 것이었다. 마치 63빌딩이나 롯데월드처럼 난 코엑스 몰을 생각했던 게다.

    북적거리는 여름 휴일 낮. 코엑스 몰에 들어서서 내 눈으로 확인한 것은 실제 아이들과 젊은이 외의 어른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아이를 업은 젊은 부부, 초등학생과 함께 온 30대 부모를 제외하고는 어린 아이들 밖에 없다. 그날따라 내 눈에 20대 젊은 애들만 들어오는 게 아닌가.

    그러나 코엑스 몰은 10여 년 전의 압구정동 거리가 아니다. 압구정동 거리는 거기에 거주하는 중상류층 아이들과 그곳을 관광하고픈 서울 시민들, 그리고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공간이다. 그런데 코엑스 몰을 구성하는 것은 기회를 노리는 영세 상인도, 레스토랑과 숍을 운영하는 부르주아도, 소비에 대해 우호적인 신흥 중산층도 아니다. 이 쇼핑 몰은 전능한 재벌이 창조한 것이고, 몇몇 국제적 기업들이 일구어낸 것이다.



    도심의 지하에 커다란 놀이 동산을 온전하게 만들겠다던 롯데월드의 꿈처럼, 그야말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 그것은 어마어마한 기획이다. 옮겨심듯이 도시를 만든다는 것 자체로도 인구에 회자되는 이벤트다. 아침에 불을 켠 후로 저녁에 불을 끌 때까지 움직이는 거대한 지하 세계, 도시처럼 움직이는 커다란 지하 숍. 날마다 벌어지는 ‘도시’라는 이름의 이벤트…. 이 얼마나 엄청난 자본과 에너지를 필요로 할 것인가.

    70년대의 명동, 90년대의 압구정동

    압구정동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다고?

    옮겨 놓았다는 표현은 옳다. 그러나 압구정동과는 완전히 다른 논리인 게다. 명동 역으로부터 삼성 역 코엑스 몰을 향해 지하철에 몸을 싣고 있는 이상, 차라리 1970년대의 그 번성하던 명동과 대비해보는 것이 낫겠다.

    당시의 명동은 전통적 시장이면서도 아주 모던한 곳이었다. 현대적인 빌딩과 상가 건물 형태를 지닌 채 전통적인 시장이 만들어졌다고 할까. 재래 시장과 현대적 빌딩이 공존하는 곳, 남대문 시장의 수직 상승 꼴, 따라서 명동은 겹겹이 다양한 시대가 중첩된 공간이었다. 정리되지 않은 거리, 현대적 건물의 타일 사이로 녹슨 건물이 보이고, 튼튼한 일본식 건물의 금간 벽과 뒷골목의 전깃줄이 깨끗한 1990년대식 건물 사이로 겹쳐 튀어나오는 명동은 마치 지저분하면서도 초현대적인 홍콩과 같은 곳이다.

    반면 압구정동 거리는 신도시를 개발하면서 바둑판 모양으로 도로 교통망이 설계된 것과 같다. 압구정동 역시 1980년대 들어서 모던의 이름으로 자발적인 군집이 진행되었다. 상인과 시민들이 몰려들어 번성한 압구정동. 이곳은 어느 정도 표준화된 틀이 있기 때문에 거리의 모든 숍과 카페들은 한 세트처럼 느껴진다.

    코엑스 몰은 바로 이런 것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이다. 남대문 시장의 기능을 기대하면서 롯데백화점을 설계하듯, 거대한 쇼핑의 도시를 계획할 때는 압구정동과 같은 하나의 거리 전체가 불러들일 파급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사고의 스케일로 볼 때 이곳은 분당과 일산처럼 신도시를 그대로 옮겨 놓은 개념이다. ‘퍼다 옮겨 놓은’ 신도시처럼 지었기 때문인지, 나에게 이곳은 편리하면서도 썩 편치가 않다. 제주도에 가서 인공적으로 ‘조성된’ 민속촌을 보는 느낌이랄까, 제주 성읍 민속마을을 찾아가 사람이 없는 생활을 보고난 느낌이랄까. 관광객으로 찾아갔으나 온전하게 내추럴한 것을 볼 수 없었기에 내심 속은 것만 같은 허탈함이다.

    코엑스 몰 입구로 들어섰다. 처음부터 주는 복잡함이라는 느낌. 세일 기간에 물건을 사러 오겠다는 분명한 마음을 먹고 오전 10시에 산뜻하게 들어서는 백화점 입구와 같은 깔끔함이 없다. 정처 없이, 특별한 목적 없이 거리를 걷듯 오게 되는 이곳은 그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도 분명치 않을 뿐 아니라 입구부터 어지러운 느낌 일색이다.

    도대체 코엑스 몰의 입구가 몇 개인 지는 지금 여기를 걷고 있는 사람들 아무도 모를 것이다. 아니, 지상의 여기 저기로 연결된 입구들로 미루어 짐작할 때, 엄밀한 의미로 코엑스 몰이라는 경계도 분명하지 않을 것이고 딱부러지게 정해진 수의 입구가 있는 것도 아님이 틀림없다.

    입구. 뭐랄까. 쾌적하고 문턱 높은 호텔 로비 같은 격조의 공간이 아니다. 고급 인테리어를 갖춘 대형 백화점이 인파 때문에 북새통이 되어버리듯 이곳 역시 천박한 공간이다. 그리고 대량 소비를 위해 그걸 의도한다. 고급 분위기라는 인테리어 컨셉은 이미 운집할 보통사람을 알고 계획한 것이지, 그 군중들과 불협화음을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제 고급 쇼핑 몰이 격조가 떨어지는 재래 시장의 고객들을 빨아들이기 위해 ‘천박한 북새통’을 예상하면서도 고급의 이미지로 설계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내가 들어선 입구는 신축 호텔의 로비. 입구는 이처럼 정숙하고 거만한데, 에스컬레이터에 몸을 실은 몇 초 후부터 시끌벅적하다. 어떻게 한 공간 안에 엄숙함과 소음이 칸을 하나 사이에 두고 공존할 수 있을까. 잠시 후에 마치 시장 바닥 같은 극장 앞 매표소가 나온다. 호텔 로비에서 금방 맞닿기에 더욱 그 대비가 인상적이다.

    새로 지은 인터콘티넨탈 호텔이나 아셈 회의장은 첫 인상부터 대중 공간으로 사람을 끌어당기지 않는다. 그런데 한 겹 안은 정반대다. 코엑스 몰로 들어서는 각각의 입구는 호텔은 호텔대로, 지하철 역은 역대로 저마다의 격조, 품위, 대중성이나 지저분함을 통일시키지 않은 채 그대로 노출한다. 그야말로 콤플렉스, 이질성의 복합체다. 롯데호텔로부터 롯데백화점, 롯데월드로 연결되는 지하철 역에는 고급 공간과 대중 공간이 자연스럽게 구별되는데, 코엑스 몰에는 그러한 이원적인 통일성이 아예 없는 거다.

    코엑스 몰의 지상은 호텔과 국제 회의장 건물에 백화점, 공항터미널, 지하철 역사와 같은 대중적 상업문화 공간을 삽입한 것이다. 그 위에 다시 신축 호텔과 국제 회의장이 들어섰다. 따라서 대중 공간과 상류층 문화의 이질적 혼합이 드러난다. 이른바 포스트 모던의 결정체.

    하지만 바글대는 인파들은 구분된 경계를 절대 넘어서지 않는 듯하다. 코엑스 몰을 찾은 대부분의 대중은 호텔 로비나 국제 회의장을 그저 통과할 따름이다.

    마치 술래잡기하는 어느 섬 원주민 아이들 같다. 식민지 군 부대와 자신의 마당 사이를 구분 없이 뛰어다니는 영화 속 천진난만한 아이들 말이다. 호텔 로비로부터 코엑스 몰 입구까지 구분없이 뛰어다니는, 천민적 공간과 거만한 고급의 격조를 구분하지 않는 아이들에게서 국제주의적인 느낌을 얻는다.

    엄청난 소음과 인파의 급류가 흐르는 코엑스 몰과 그런 분주함을 잠시 잊을 수 있는 여백의 땅인 호텔 로비 사이. 대중 여가의 공간과 권태의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아이들의 얼굴에서 나는 순수한 원주민적인 면을 본다.

    땅속에도 문화가 있다.

    땅 속. 그토록 깊숙이 지하로 내려가다.

    지하철 5호선 보라색을 탈 때마다 난 한강 밑을 달리기 위해 너무 깊게 팠다는 점에 숨이 막히곤 한다. 2호선에서 4호선보다 훨씬 깊어, 항상 5호선은 3계단 이상을 땅 속으로 내려가야 한다. 문명은 땅 위를 다 개척하고는 이제 자리가 없어 신대륙으로 가듯 지하로 파고들었다. 4호선까지 이미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파해쳤기 때문에 5호선은 더 깊이 파야만 했을 것이다. 지하 한 두 층 높이에는 이제 남은 땅이 없다고나 할까?

    사람들은 보통 지하를 판다고 하면 관념적으로 한 층 정도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지금 내려가는 이곳은 단순한 지하 보도가 아니다. 거대한 지하도시처럼 그 안에 모든 것을 갖추어놓고 커다란 입술을 열어 날 맞이하는 자족적인 문명권. 에스컬레이터의 검붉은 손잡이들은 마치 큰 아가리를 갖춘 그 문명의 입술 같다.

    더 깊이 내려갈수록 드러나는 휘황한 문명의 시장. 쾌적한 에어컨 바람과 동시에 내 가슴을 압박하는 것이 있다. 지하에 건설한 낙원은 한없이 아름답다. 하지만 지하에 건설한 천상은 최소한 그 입구로 들어설 때만은 그것이 지하임을 끔찍할 정도로 각인시킨다. 우리의 산업 문명은 대구 지하철 사고, 높은 데서 추락하는 성수대교, 땅 속에 묻혀버리는 삼풍의 돌무덤을 떠올린다. 고소 공포와 폐쇄 공포가 겹쳐진 듯한 느낌(아니면 지독한 ‘저소 공포’). 아이러니컬하다. 빨려들듯 예쁜, 엄청한 규모의 지하 도시에서 빽빽한 사람들 사이에 서서 난 광장의 공포 대신 밀폐의 두려움을 아련히 간직한다.

    마치 쥘 베른의 ‘타임머신’에 나온 미래의 지하 세계를 보는 것 같다. 그것은 문명인 동시에 공포다. 그것은 외계(E.T.)가 아닌 내부에 있는 미지의 세계(I.T.). ‘지상족’은 ‘지하족’의 가혹한 노동으로 인생을 즐기기만 하는데, 가끔은 지하족이 지상으로 올라가 그들을 잡아 먹는다. 시민이라고 부르는 지상의 귀족들이 소비하러 몰려드는 코엑스, 거기에는 가끔씩 그들을 잡아먹는 것들이 있다. 그 이름은 대중 문화, 생활 엔터테인먼트, 페밀리 문화 산업이며, 바로 몰 안에 즐비하게 들어선 점포들이다.

    코엑스 몰은 별세계다. 하나의 지하 도시. 전쟁이 나서 지상으로 통하는 입구를 닫아도, 그 안에서만 살 수 있다는 양 전능을 과시한다. 그러나 거긴 논밭도 공장도 없고, 유통과 소비가 있을 뿐이다.

    지하의 별세계는 그 위에 늘어선 호텔, 공항터미널, 백화점, 무역센터와는 무관하게 돌아간다. 전혀 별개의 세계다. 심지어 내가 선 이 위치가 어느 건물 아래인지도 알기 힘들 뿐 아니라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암기하는 버스 노선이나 이면도로 같은 지상의 교통 체계와는 다르다. 서울 시민 대부분이 지하철 역의 구조를 외우는 대신 표지를 따라 이동하듯, 이곳에 들어오면 표지를 보고 걸어갈 뿐, 아무도 무엇을 외우지 않는다. 그것이 지하 세계의 문화다.

    코엑스 몰을 거닐면서 천장을 보았는가. 한번 보라, 얼마나 높고 찬란한지. 우리가 그곳을 즐기는 사이, 우리는 전력의 무한한 혜택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 하늘에는 인공 별이 무수히 떠있다. 대중 문화의 총아처럼 밝은 조명들이다.

    아무도, 단 한사람도 천장을 유심히 보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우리가 태어난 지구별처럼 서울 사람들에게 자연스러운 곳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보다 영화관이 더 재미있는 이유

    코엑스 몰을 말할 때마다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드는 것은, 짓기 전부터 소문으로 퍼진 복합 상영관 시설이다. 메가박스 시네플렉스는 16개의 영화 상영관을 한 곳에 집합시키면서 “영화보다 더 재미있는 영화관”을 표방했다. 내가 케이블 채널에서 본 광고는 국제적 규모를 띤 세계적 명소로 그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었다. 슈퍼마켓이 하이퍼마켓이 되듯, 백화점이 쇼핑 몰이 되는 것은 대규모로 더 싸게 많은 것을 얻기 때문이다.

    메가박스 시네플렉스에는 1980년대 방식의 ‘전시 파워’ 위에 1990년대 방식의 ‘이미지 소비’가 어우러져 있다. 산업화와 부국의 꿈을 갖게 된 1970년대 수출 드라이브 이후로, 우리 국민들은 세계 최고, 세계 최강에 집착하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는 동양 최대의 건물을 짓고, 동양 최고 높이의 건물을 올리고, 세계 최대 규모의 올림픽을 달성해야 하는 전시 행정의 시대였다. 메가박스 시네플렉스에는 점점 커지는 자본의 힘이랄까, 규모가 커질수록 이윤이 커진다는 규모의 경제가 도사리고 있는데, 이는 과거에 그러했던 전시 행위의 욕구와 마찬가지로 거대한 전시 경제인 것이다.

    수출의 시대에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해 보여주던 규모의 사업은 1990년대 들어서 내수가 증가하면서 국민들이 그러한 전시를 즐기고 환호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기점으로 휘황찬란한 이미지와 상품 디자인 그리고 일대 장관을 소비하는 식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국민들은 이벤트 뿐 아니라 카페와 같은 작은 공간에서도 분위기와 격조와 상표를 소비하고 즐기게 된 것이다.

    코엑스 몰에는 규모의 과시와 더불어 그 공간 전체의 초현대적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위세가 자욱하게 배어있다. 따라서 영화 하나 하나보다 영화관 자체를 소비하라고 외치는 것이다.

    백화점의 원리는 박물관학에 바탕을 둔다. 만물을 모아 놓는 것은 분류와 분석에 더불어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것은 근대성의 산물로, 동물원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살아 있는 동물원은 관객이 구경거리가 되는 것과 같은 불안 심리를 일으킬 때가 있다. 한편 도심의 유흥가로 나갈 때 우리는 다른 관객을 엿보려는 관광 심리를 갖기도 한다.

    우리는 다양한 만물상과 쇼윈도 외에도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코엑스 몰에 간다. 사람이 거기 있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철 지난 해수욕장이나 스키장에 가지 않는 것은 계절 때문이 아니다. 사람이 없다면 우리는 가서 즐길 맛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도 우리는 그곳의 인테리어와 몰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내가 엿보고 구경하는 사람들은 날 피곤하게 만드는 인파다. 노는 시간에까지 부딪쳐야 하는 나의 경쟁자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은 관음증을 유발하지 않는가. 나에게는 훔쳐보는 즐거움이 있다.

    굳이 인터넷 카페로 들어가지 않더라도 우리는 가상 현실 속에서 산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지를 과잉 소비하면서 거기 온 사람들의 외모와 유행과 패션과 젊음과 ‘방송 연예적인’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때로는 지나가는 아이의 바지나 구두 상표를 살피거나 앞사람의 굽힌 허리 사이로 속옷을 훔쳐보면서 자신이 올 가치가 있는 곳임을 확인한다. 내가 지금 걷고 있는 현실 공간인 코엑스 몰은 가상적인 아름다움 혹은 상품 포장지, 브랜드, 그리고 소비할 이미지가 된다. 압구정동과 명동, 신촌, 홍대 앞, 그리고 롯데 월드와 코엑스 몰에도 가상 현실이 넘쳐 흐른다.

    과거를 떠올려보라. 여기는 그저 삼성역 무역 센터였지 고유의 이름을 갖지 못했다. 삼성역이 코엑스 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바로 메가박스 시네플렉스 덕분이다. 아셈 회의장도 신축 인터콘티넨탈 호텔도 아니다.

    영화관 입구는 눈이 아플 지경으로 현란한 보라색 네온 등이 온통 천장을 덮고 바닥까지 반사되고 있다. 이것은 시각 디자인 면에서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영화관을 다 모아 놓는다는 개념 역시 한때는 비상식이었다. 그런 난센스를 커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을 극복할 정도의 자본을 들인 규모의 경제다. 이곳은 그야말로 비상식의 공간이다. 모두 질끈 눈을 감고 그 보라색 공간을 통과해야만, 이미지의 천국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패스트푸드점이 극장 주변에 들어오고, 위층에는 12관에서 16관까지, 아래층은 1관에서 11관까지 총 16관에서 각기 다른 영화를 상영한다. 아무도 이 극장에서 뭘 하는지 미리 알고 오지 않는다. 상영관을 1에서 16까지 번호를 매기고 예약하면 그뿐이다. 이제 마음 먹은 영화 마니아는 하루 종일 이 코엑스 몰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모든 물질을 땅 밑에서 해결해준다고 해서 지하족이 되지는 않는다. 땅 속에서 온전하게 마니아의 욕구를 충족해줄 수 있는 환경이라면 진실한 의미의 지하족이 탄생할 수 있다. 모든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이 지하에만 사는 마니아도 생길 것이다.

    지하철 역이나 몰 입구로부터 영화관까지는 구매욕을 자극하는 동선이 계획되어 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보라색이 빨아들인 거창한 입구와 달리 나가는 출구는 작은 글씨로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뿐이다.

    수족관과 통조림 공장

    구매의 동선은 수족관에도 있다. 아쿠아리엄은 가족 동반족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이다. 마치 컨베이어 벨트를 타듯 아셈 빌딩 입구로부터 자연스럽게 길을 따라 가면, 몰 입구로부터 아쿠아리엄에 도달한다. 길게 늘어선 줄을 견디고 티켓을 끊으면 가족 관객은 생선 통조림처럼 한 선을 따라 보게 된다.

    바다와 어패류에 대한 동영상을 본 후 처음 들어간 곳은 인공 바위와 폭포가 흐르는 지하 세계를 연상케 한다. 통로를 따라 나오면 유리 수족관이 보인다. 체험관은 조개류를 중심으로 만지면서 볼 수 있는 곳으로 청소년 아동을 위한 학습 현장이다.

    에스컬레이터 자동 보도는 고객 중심의 안락한 보행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지만, 입장객이라는 상품을 실어나르는 공장 컨베이어 벨트를 연상케 한다. 어쩌면 동물원처럼 여기서는 인간이야말로 ‘볼거리-상품’인지 모른다.

    나오는 길 역시 판매라는 목적에 맞추어 고안되었다. 기념품 가게에는 물을 주제로 한 봉제 인형, 목걸이, 가방 등이 발걸음과 눈길을 붙잡는다. 악어, 거북, 상어 등 과거에는 추하고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 귀여운 캐릭터로 디자인되어 사람들을 부른다. 안 사고는 못 배길 연인과 아이들이 많다.

    1990년대는 죽지 않았다

    1990년대는 시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코엑스 몰을 걸어 정처없이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여기는 2000년대도, 밀레니엄도 아니다. 우리가 떠나보냈다고 생각하는 1990년대는 아직 죽지 않았다. 넌덜머리나는 IMF의 실패라든지, 무너진 산업화의 대교, 산업화의 백화점, 산업화의 지하철, 그리고 거식증 환자가 갑자기 대식가로 돌변한 것 같았던 소비 축제, 졸부의 풍요…. 시행착오 때문에 은근히 잊고 싶은 1990년대.

    코엑스 몰도 우리가 떠나보냈다고 생각하는 유흥과 풍요의 공간, 그리고 ‘일찍 딴’ 샴페인의 공간이다. 1990년대부터 확산되고 발전해온 소비 문화 공간의 집대성이고, 그 첨병의 하나다. 이곳은 너무 ‘1990년대적’이다. 지난 10년의 대중 문화 산업과 신세대 기호와 유행 소비가 녹아 있다. 지식 정보나 국제성이나 독창성을 지닌 대체 문화 생산을 지시하는 2000이라는 숫자가 연상되기보다는 1990년대의 산물로 보인다.

    나는 이곳을 걸으면서 10년 전의 롯데 월드와 부산 광안리에 번창한 카페 숲을 떠올렸고 88 올림픽이 벌어지던 시절의 대도시 서울을 연상했다. 인터콘티넨탈 호텔과 현대백화점, 공항터미널을 아우르는 코엑스 무역센터의 지하 쇼핑센터는 그 당시에도 하나의 소비 도시를 지향했다. 규모가 2배 이상으로 늘어난 지금처럼 코엑스 몰이 인구에 회자되어도 그 주소지는 여전히 1990년대인 것이다.

    IMF를 겪고서도 소비 자본주의는 무한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이제 지상을 지나 지하로 파고든다. 사이버 스페이스로 가고, 버스를 타도 벽에 붙거나 횡단보도 앞에 보이는 전광판을 파고 든다. 우리 손 안의 휴대폰, 그리고 골목의 빈 구석을 파고 든다.

    1990년대 소비 자본주의가 아니라 1960년대를 상기하라. 무한한 운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지칠 줄 모르는 우리의 산업화다. 우리의 굶주림과 상처로 얼룩진 자부심-고속 산업화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병폐를 지녔든, 강한 힘을 가졌든 간에 군부 독재와 결합한 독과점 자본주의의 전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코엑스 몰을 걸으며 내 안경 너머로 보이는 인간 군상. 휴일을 맞아 소비를 즐기고 한가롭게 놀고 있지만 이들은 몽매한 대중도, 전원에서 풀 뜯는 소 같은 우중도 아니다. 이들은 여전히 광기로 일터를 달구던 산업 역군이다. 이들은 지금 쉬러 와서도 무한정 앞만 보고 달리고 있다. 노동 현장의 관성이 휴일 낮에 브레이크를 걸고 정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속도대로 여가를 보내는 것이다. 이 인파의 여가에는 맹목성이 있다. 1970년대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마찬가지의 속도감이 있다.

    코엑스 몰은 ‘달리는 자들’의 공간이다. 멈추고 쉬는 자들의 공간이 결코 아니다. 엄청난 굉음을 내고 소비하는 잠재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경쟁하는 경제적 인간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산자들, 노동자들이 이 몰에 보인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여기 이 인파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뿜어내는 ‘빨리빨리 증후군’에 중독된 사람들. 바로 한국의 소비자들이다. 이 소비가 없다면 우리의 경제도 없다.

    달리는 소비자들, 일하는 속도로 여가를 보내는 인파들. 이런 사람들 사이로 퍼져가는 새로운 인종이 있다. 이들 역시 1990년대의 산물이지만, 요즘 들어 점점 늘어나는 새로운 경향, 바로 축제주의자와 풍요를 찬미하는 사람들이다.

    게으를 권리를 외치던 소비의 총아들, 호모 루덴스, 쉴 권리를 주장하고 노는 법을 창안한 1990년대적 인간, 이런 아이들의 표정을 코엑스 몰에서 자주 마주친다. 기성세대의 표현대로 이들은 고생이라고는 겪어보지 않은 듯 해맑은 표정으로, 과잉된 웃음, 방송에서 보는 듯한 행복한 미소를 지니고 있다.

    그런 ‘나일론 스마일’을 발견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육체적 기쁨을 즐기고 놀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브랜드로 위치를 표현하는 사람들, 부지런히 사고 쓰면서 죄책감 없이 웃을 수 있는 아이들, (금액은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부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탕진을 통해 자기 몸에 엄청난 테러를 하는 반항아들, 날라리들. 그리고 게으름뱅이들…. 코엑스 몰과 같은 소비의 첨단 도시는 자연스럽게 게으른 자들의 공간이 된다. 점점 서울의 바쁜 곳들과 이 도시 소비 문화의 빈틈들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다.

    사람들이 소외되기 쉬운 대도시일수록 이탈자, 백수, 게으름뱅이, 그리고 느림보를 위한 공간이 많다. 쇼핑 몰의 구석, 호텔 로비로 올라가는 계단 등에 앉아 있는, 대학생 또래의 반바지들을 난 오늘만도 다섯 차례 이상 보았다. 마치 배낭 여행 가듯이, 빈틈 없이 짜인 이런 몰의 틈새에 앉아서, 그들은 게으름과 나른한 느낌, 잡담과 스킨십 같은 사소한 유희를 즐기는 것이다. 이것은 IMF 이후 증가한 우리 도시의 모습이다. 가난하게 여가를 보낼 곳을 찾는 수많은 서울 사람들. 이런 게으른 자들이 발견한 곳은 모두 한국 산업화의 틈새들이다. 이제 빔 벤더스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와 같이 한낱 작은 도시에서 소외된 사람이 소소한 희망을 찾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일상에서 신비를 찾아 도시 속에서 방황하고 구도하는 이들이다.

    이탈자와 백수의 공간

    1990년대 이후 나타난 다른 경향은 근대화 이후 최초로 권태를 느끼는 세대가 나왔다는 점. 현대 사회 특유의 소외 속에서 기분 전환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아이들이 권태 속에서 대중 문화를 갈구한다. 하지만 내가 바라보는 새로운 지루함의 세대는 반대로 대중 문화 속에서 권태를 느끼기 시작하는 아이들이다. 1990년대적 풍요 속에서 이를 즐기면서도 일말의 저항감을 느끼는 사람들, 도시의 권태를 회의와 사색으로 이끌어내는 세대들, 산업화의 조증과 모두 인파의 물결에 휩쓸리는 광기 속에서 우울하고 진지한 아이들, 소비의 환희 속에서 여백을 찾는 아이들을 본다.

    역시 나만의 착각일까. 주말 한낮 코엑스 몰의 엄청난 인파 속에는 지루함을 느끼는 표정이 자주 보인다. 권태는 풍요 속에 나타나는, 부럽기 그지 없는 표정이다. 귀티가 나는 아이들의 얼굴은 무관심으로 얼룩져 있는 듯하다. 점점 더 거창한 것이 많아지는 부자 나라에서 태어나, 더 이상 대단하고 거창한 것은 없다는 듯 무감각하다. 물론 1990년대 신세대 뿐 아니라 많은 기성 세대도 그 점에서는 지루함과 따분함을 겪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이 그냥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태만과 쾌락에 대해 회의하고 당당하게 논리를 편다는 점이다. 자신 있으면서도 무심한 듯 나른한 표정들. 마치 남들이 못 보는 귀신을 보듯 나는 코엑스 몰과 같은 큰 도심을 걸으면서 무수히 이런 아이들을 마주친 것 같다.

    이런 경향이 대세인지, 실제 이런 세대가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백, 뒷골목! 이 시끄러운 몰에도 태풍의 눈 같은 진공이 있다. 소음이 한순간 사라지는 신기한 공간들, 그곳에는 바쁜 도시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평범한 천사들이 앉아 있는 것이다!

    계단의 아이들, 호텔 로비 한가운데 소파를 차지한 젊은이들, 외곽 벤치에서 돈 없이 여가를 보내는 듯한 대학생 커플. 그들의 한 손에는 휴대폰이, 또다른 손에는 자판기에서 뽑은 캔음료가 있다. 뛰면서 즐기는 나만의 여유! 혹은 뛰는 인파와 이들은 별상관이 없다.

    국제 회의장 지하에 놓인 하얀 피아노 앞을 지날 때 난 중학생 둘이 건반을 두드리며 아름다운 멜로디를 연주하는 것을 듣는다. 언제 호텔 웨이터가 와서 제지할지 모르는데, 그 아이들은 한가롭게 그 짧은 시간을 즐긴다. 긴장의 이완을, 여가를, 또 소비 속에서 권태를 습득한 사람들은 코엑스 몰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법을 안다. 지겨운 하루하루의 반복적인 소비 속에서 한편으로는 무감각하고 한편으로는 언뜻 역겨운 지루함을 이겨낼 줄 안다. 이 아이들의 감각은 대중 소비로부터의 분산과 일탈?

    이탈자와 백수의 공간이 분명히 있다. 그저 소비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유희하고 나름대로 권태를 이기고 태만을 생산한다. 이 젊은이들이 거대한 쇼핑 몰 속에서 그럴 권리는 분명히 있다. 이들은 코엑스 몰로 들어서는 통행세를 이미 치렀다. 그리고 수족관이나 영화관처럼 유명한 곳도 아니고, 지금 한적한 공간의 여백을 소비하려는 것뿐이다.

    면세점 거리의 선진국형 걸음걸이

    새로 지은 아셈 빌딩으로 들어서서 에스컬레이터로 지하로 내려간다. 메가박스 시네플렉스와 수족관을 지나면 갑자기 한적한 곳이 나타난다. 위치 상으로는 새로 지은 인터콘티넨탈 호텔 아래가 분명하다.

    무척 한산하다. 방금 지나온 인파의 시장과는 대비가 심하다. 이곳은 내국인 공간이 아니다. 면세점이다. 놀라운 것은 면세점이 이전처럼 내국인들이 발을 들여놓고 싶어하던 희구 공간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아이스버그, 카무소, 폴리니 같은 고급 의류와 피혁 제품을 지나 국내 공예품이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이곳은 숍 도어와 윈도 쇼핑이 결합한 기능적 공간으로 짜여 있다. 그러나 백화점처럼 내국인이 윈도 쇼핑(아이 쇼핑)을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내국인에게 이곳은 주차장 등으로 가기 위한 쾌적하고도 한적한 통로다. 그러나 간혹 ‘소요학파’와 이탈자들에게 이곳은 산책로가 된다. 이미 영화관과 수족관을 지나 소음의 통행세를 치른 사람들에게 이곳은 공원처럼, 걷고 눈의 피로를 씻고 사색에 잠기는 공간이다.

    벽에 기대서서 관찰하니 사람들에게서 특유의 ‘선진국 걸음걸이’가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기름진 소비의 거리를 유유히 걷는 고소득 국민의 걸음걸이가 아니다. 나라는 부유하지만 국민은 가난하고 검소한 곳에서 나오는 걸음걸이, 스위스와 일본에서 보듯, 즉 후기 산업 사회에서 여가를 확보한 사람들이 걷는 명상과 여유의 걸음걸이다.

    이곳에서 내가 본 사람들은 소수지만 아주 특별하다. 일상의 신비를 찾는 국외자들, 의미 그대로 관광객을, 즉 여유를 갖고 서울 도심을 걷는 한국인 관광객을 본다. 아이 쇼핑을 부끄럽거나 쑥스럽게 생각하던 과거와는 다른 모습들. 눈에 띄지 않던 게으른 보행자, 소요하는 산책가들이 바로 여기에 출몰하는 것이다.

    나는 산책한다. 고로 존재한다.

    유행은 삼성역 지하를 과거로 만들어버렸고, 대자본은 코엑스 몰이라는 더욱 거대한 공간을 선보였다. 그야말로 새것이다. 아직도 흐르는 바니스 냄새, 사람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 새로운 것이 아니라 새로움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새것(NEW)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제품(BRAND-NEW)을, 말하자면 상품이 끊임없이 나오기를 바란다. 아무리 완전한 것이 나와도 사람들은 다음 것을 기다린다. 그것이 현대성이니까.

    여기 오는 서울 사람들은 대부분 서울에 살지만 서울을 고향으로 생각하지 않는 존재, 즉 고향 없는 유랑민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유롭게 사고하는 존재로서 유목민을 택하기도 한다.

    특히 이 인파 중의 많은 젊은이들은 아예 소비 시장을 고향으로 생각하는 신종 인류다. 1990년대 이후로 시장에 터를 내리고 자유와 저항을 외치는 이상한 아이들이 늘고 있는 거다.

    인파의 급류같이 빠른 템포에 항의하는 존재, 차라리 지루함을 즐길 수 있는 존재, 근대화의 속도를 다소 거스르는 게으른 존재, 우유부단하고 저항하는 유랑민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소비의 현장으로부터 간격을 두면서 보는 비판적인 국외자나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관광객의 눈’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소비의 현장을 생각하고 고민할 줄 아는 보행자가 필요하다. 산책하는 존재, 사색하고 명상하는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도시의 근대화는 유랑적 존재가 박멸되는 과정이라고 했다. 현대 교통 수단에서 내려 보행자들의 리듬으로 코엑스 몰을 유유히 산책할 보행자가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곳곳에 널브러져 빈 공간을 활용하는 아이들이야말로 급하고 바쁜 인파가 흐르는 코엑스 몰의 아름답고 소소한 경치라고 여기는 것이다.

    [관람객의 말]

    놀고 쉴 수 있는 곳이 많아야 문화 공간입니다



    이희광 씨는 서울의 웬만한 문화 공간은 다 돌아다닌다. 코엑스 몰은 친구를 만나러 또는 영화를 보러 4번 정도 왔다. 평소 걷기를 좋아하는지라 처음 왔을 때 몰 전체를 샅샅이 돌아보았다고 한다. 삼성역에서 영화관에 이르는 큰 길은 사람도 많고 잘 꾸며놓았지만 나머지는 잘 조성하지 못했다고 분석한다.

    가장 좋았던 곳은 역시 메가박스 시네플렉스 영화관이라면서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어 질서 정연한 점, 영화 사이의 간격이 30분이 넘어 여유있게 크레디트까지 볼 수 있다는 점 등 관객에 대한 배려를 들었다. 그리고 흡연자를 위한 복지 시설에 놀랐다면서, 그럴 듯하게 커다란 공기 흡입구를 보니 담배를 피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고 농담을 한다.

    사람들은 메가박스 시네플렉스 하나 때문에 코엑스 몰에 오는 것이라고 잘라 말하면서, 실질적으로 쇼핑 몰에서 살만한 것이 백화점처럼 많지도 않고, 놀거나 보러 오지 그것을 사기 위해 코엑스 몰에 오게 되지는 않는다고 한다.

    “놀 데가 별로 없어요. 특히 오래 걸어 지쳤을 때 앉을 데가 없습니다. 저는 차라리 인터콘티넨탈 호텔 로비 같은 곳에서 쉬지요.”

    소비 공간이나 문화 공간으로 아직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그는 특히 다리를 가릴 데스크도 없이 길 한가운데 긴 탁자를 두고 군중을 상대해야 하는 ‘도우미 언니’들이 너무 힘들겠다고 인정어린 말을 잊지 않았다.


    [관람객의 말]

    처음 가는 사람들도 편할 수 있었으면



    웹진 를 만드는 최윤정 씨는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코엑스 몰은 메가박스 시네플렉스로 영화 ‘비밀’을 보려고 한 번 갔을 뿐이다. 코엑스 몰의 인상에 대해 무엇보다 너무 복잡하고 불편했다고 답한다. 특히 길찾기가 힘들어 헤맸다는 것이다.

    “제가 갔을 때는 설명서가 부실했고, 처음 오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이었어요.”

    윤정 씨는 화장실 시설도 좋고 외국인 친구가 오면 한번쯤 보여줄 수 있는 수준과 규모를 가진 곳이라고 말하면서, 철저히 문화 소비자의 위치에 서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앉아서 쉴 수 있는 곳으로 그나마 돈 적게 드는 패스트푸드점 정도가 떠오릅니다. 휴식처가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복잡하고 넓은 공간이니 만큼 쉽게 길을 찾을 수 있게 좀더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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