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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풍 배제한 신라 고유미, 상원사 동종

  •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중국풍 배제한 신라 고유미, 상원사 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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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소재 오대산 월정사의 산내 암자인 상원사(上院寺)에는 국보 36호인 (도판 1)이 있다. 이 동종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용뉴(龍; 용 모양을 하고 있는 종의 꼭지, 걸쇠로 사용됨)의 양 옆에 새겨져 있다.

‘개원(開元) 13년(725) 을축 3월8일 종이 이루어져서 이를 기록한다. 도합 놋쇠가 3300정(鋌)이다. 원컨대 널리 모든 중생에게 들리게 하소서. 도유내(都唯乃) 효○(孝○), 한 해 동안 일을 맡은 여러 승려 충칠(忠七) 충안(安) 정응(貞應), 단월 유휴(有休) 대사(大舍; 제12관등)댁 부인 휴도리(休道里), 덕향(德香) 사(舍; 제13관등), 상안(上安)사, 조남(照南)댁 장인, 사○(仕○)대사.’

개원 13년은 성덕왕 24년으로 소덕왕후가 돌아간 바로 다음해이다. 통일신라문화가 황금기로 접어드는 불국시대 초반이라 자못 건실한 창조정신이 신라 고유색을 발현해 나가던 시기로, 의상대사의 직제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신라화한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종지를 활발하게 펼쳐 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미술양식에서도 신라 고유색이 점차 노골화되고 있었으니 불보살상에서는 제16회에서 살펴본 것처럼 (제16회 도판 2)과 (제16회 도판 1) 같은 신양식의 출현이 이를 대변한다. 초당양식을 수용하면서 북위 극성기에 이루어지는 운강석굴의 고전적 불보살상 양식을 근간으로 하여 신라고유색을 창안해 냈던 것이다.

을 보면 동종에서도 이런 맥락으로 여러 선구 양식을 독창적으로 절충하여 신라 고유양식을 창안해내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불교 교단은 대중의 집단 수행생활을 전제로 하여 형성된 것이므로 교조인 석가모니 시절부터 비구의 소집을 알리기 위해 건치( 稚)와 북, 소라 등 법구(法具)로 소집신호를 보내게 했다는 내용이 ‘오분율(五分律)’ 권18에 실려 있다. 이중에서 건치는 나무 속을 파내 종처럼 만들고 나무토막으로 이를 쳐서 소리를 내는 기구였다고 한다.

그런데 ‘대지도론(大智度論)’ 권2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수제자인 마하가섭이 이를 동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인도에서도 초기 불교시대부터 동종과 비슷한 건치라는 법구가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 건치가 중국에 들어와 중국 동종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중국 범종(梵鐘)으로 탈바꿈하는데 이는 불교가 중국화되어 주도이념으로 부상하던 남북조시대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사실은 일본 내량(奈良)국립박물관에 소장된 남조 진(陳) 선제(宣帝) 태건(太建) 7년(575)명이 새겨진 (도판 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동종은 높이 39.1cm, 입지름 21cm밖에 안 되는 소형 동종이지만 몸체가 원통형(圓筒形)으로 생기고 두 마리 용으로 이루어진 쌍룡형 용뉴가 달려 있으며 표면에 십자형(十字形)의 줄무늬가 양각되어 있고 그 교차점에 앞뒤로 활짝 핀 연꽃 모양의 당좌(撞座; 종 치는 망치, 즉 종채를 맞는 자리)가 돋을무늬로 새겨지는 등 이후 중국 범종의 기본 틀을 모두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원 8년(720)명이 있는 절강성박물관 소장의 당나라 범종도 이와 동일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원래 중국에서는 은(殷, 서기전 1401∼서기전 1121년)·주(周, 서기전 1122∼서기전 780년)시대에 벌써 동종을 악기로 만들어 쓰고 있었는데 그 모양은 암키와 두 장을 서로 맞붙여놓은 것 같은 납작원통형(扁圓筒形)으로 주둥이가 복숭아씨처럼 생겼다.

이를 춘추(春秋)시대(서기전 781∼서기전 404년)에 만들어진 (도판 3)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기에는 손잡이인 용(甬)이 달려 있다. 걸쇠인 용뉴나 죽절뉴(竹節紐; 대나무마디처럼 생긴 고리)가 달려 있는 것도 있으니 춘추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도판 4)과 같은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중국 동종의 외형장식과 순수 원통형의 인도식 건치가 합쳐져서 원통형의 종신(鐘身; 종의 몸체)에 용뉴와 당좌, 십자무늬띠 장식을 갖춘 중국범종 형식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범종 안에서도 남북이 양식적 차이를 보이고 있으니 과 과 같은 계열은 양자강 이남의 남방종이고 이나 측천무후(則天武后, 684∼704년)시기에 만들어진 감숙성 무위(武威) 종루에 걸려 있는 등은 북방종에 해당한다.

남·북방종이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나 남방종은 과 같이 주둥이가 수평으로 되어 있는 평구(平口) 형식이고 북방종은 (도판 5)처럼 주둥이가 물결치듯 곡선이 반복되는 파구(波口) 형식이다. 그리고 남방종보다 북방종의 주둥이가 넓어서 우람한 맛은 있으나 단단한 긴장감이 부족한 것이 서로 다르다.

중국 종과 다른 신라 고유의 종

이런 중국 종과 별도로 신라에서는 신라 고유 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에서 확인해 보기로 하겠다. 은 조형에서 중국의 남·북방 어느 쪽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은·주시대 이래 중국에서 만들어져 온 중국 동종의 특성을 완전히 파악하고 인도에서 전래해 온 건치의 용도를 철저히 이해한 위에서 이 양대 동종의 기능을 종합하여 전혀 다른 제3의 동종형식을 창안해낸 것이다.

우선 종의 몸통을 원통형으로 한 것은 인도의 건치를 본받은 것인데, 이는 주둥이가 배 모양으로 생긴 납작원통형의 중국 종으로는 긴 소리를 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음색을 맑게 하여 소리를 널리 퍼지게 하기 위해서 중국 종의 표면에 부착했던 젖꼭지 형태의 매(枚; 요즘은 이를 乳頭, 즉 젖꼭지라 부른다)를 부착하였는데, 어깨 아래에 네 군데로 나누어 네모진 구역을 만들고 그 안에 각각 9개씩을 배치한 모양이다(도판 6).

젖꼭지는 둥근 연꽃잎 받침 위에 앵두 모양의 꼭지를 올려놓고 활짝 핀 연꽃 한 송이로 끝을 마무리한 형식인데 가로 세로 각각 셋씩 배치하여 아홉을 만들어 놓고 있다. 9는 10진법에서 홀수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숫자로 하늘과 남성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유두를 가둬놓은 네모난 틀은 종신의 윗부분을 죄어 마무리지은 상대(上帶)를 일변으로 삼아 3변의 띠를 보태어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네모난 틀이 정사각형이 아니라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마름모꼴이다. 따라서 좌우 양쪽 띠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상태이며 아랫변은 또 직선이 아니라 약간 둥근 맛이 나는 호선(弧線)이다.

넓은 띠는 이중의 구슬무늬 장식띠와 은행잎 장식띠로 안팎을 마무리짓고, 가운데 넓은 공간에는 인동무늬를 늘씬하게 돋을새김해 채워놓았다. 그 가운데로는 두 줄의 매화무늬띠와 박쥐무늬띠가 타원형 호(弧)를 이루어 놓았는데 그 안에 젓대를 불거나 가야금을 타는 등 음악을 연주하는 주악천(奏樂天;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소리가 가장 크게 울리게 하기 위해 원통형의 몸체를 항아리 모양으로 위는 좁고 아래는 넓게 하되, 당목(撞木; 치는 나무)을 맞아 소리를 내는 부위는 가장 불룩하게 솟구치도록 하였다. 그 솟구친 부위에 앞뒤로 활짝 핀 연꽃을 돋을새김해 놓았으니 이것이 당목을 맞아 종이 소리내는 당좌(撞座)이다.

당좌는 허리 아래에서 그 중심보다 약간 위로 치우쳐 있는데 연꽃은 씨방과 꽃술을 두루 갖춘 겹꽃이고, 그 둘레에는 2중 구슬무늬띠 안에서 힘차게 덩굴을 뻗어나가며 휘감고 돌아간 인동무늬 장식이 돋을새김되어 있다(도판 7).

이 당좌는 춘추시대 동종인 (도판 4)에서 그 의장을 따온 것이다. 당좌와 당좌 사이의 공간에는 한 쌍의 주악천이 마주보고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모습을 돋을새김해 놓았다(도판 8).

생황(笙簧)을 불고 공후()를 타는 모습인데 구름을 타고 허공을 헤엄쳐 날아오는 동작이 음악의 선율을 따르는 듯 자못 율동적이다. 허공을 타고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자니 옷자락은 모두 하늘로 치솟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닥가닥의 천의(天衣)자락과 구슬띠는 바람을 머금고 위로 솟구쳐 오르게 되니 옷자락이 겨드랑이에서도 나오고 허리 뒤에서도 나오며 두 무릎 근처에서도 나와 힘차게 나부껴 오른다.

가늘고 날카로운 옷주름선이 가볍고 상쾌한 느낌을 자아내어 바람 타고 내리는 구름 위의 하늘 세계를 실감나게 하는데 웃음 띤 얼굴에서 6년 전에 이루어진 (제16회 도판 1)의 표정을 그대로 읽어낼 수 있다. 치마의 옷주름선이 두 다리를 따라 매미날개처럼 겹쳐 내리는 것도 비슷하다.

종의 주둥이 부분도 다시 주악천과 인동무늬로 장식한 넓은 띠로 장식하였는데 당좌 부분에서부터 서서히 좁혀 들다가 다시 바짝 죄어 조붓하게 마무리지음으로써 소리가 갑자기 흩어져 달아나지 못하게 하였다. 따라서 입으로 한꺼번에 다 빠져나가지 못한 소리는 종 안을 맴돌아 위로 오르게 될 터이니, 이를 위해 종 머리는 용통(甬筒)을 마련해서 위로 오른 소리가 빠져 하늘로 오르도록 하였다.

용통은 춘추시대 (도판 3)과 같은 용종(甬鐘; 자루 달린 종)의 자루에서 생각을 얻어낸 것이다. 중국 용종의 용(甬)이 다만 손잡이 구실을 하는 단순한 종자루에 불과하여 속이 막혀 있었던 것을, 속을 뚫어 소리가 이곳으로 빠져나가 하늘로 오르게 하였다. 대담한 변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종을 거는 걸쇠꼭지는 역시 의 포뢰(浦牢)형 걸쇠꼭지에서 그 형상을 빌려다가 고유화시켰다. 에서는 두 마리의 포뢰가 꼬리를 마주 대고 머리를 양쪽 밖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인데 에서는 한 마리의 포뢰가 등에 용통을 짊어진 채 종머리 천판(天板; 천장반자) 위에서 네 발로 힘주어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다.

따라서 용통을 짊어진 포뢰의 등줄기는 휘어 오르게 마련이니 이 휘어오른 포뢰의 등줄기가 바로 종을 거는 걸쇠가 되었다. 용통은 고사리 무늬가 장식된 연꽃잎을 둘러 붙여 꾸몄는데 아랫단은 장구통처럼 연꽃잎을 아래위로 마주대며 구슬무늬띠로 나눠 놓았고 윗단은 위로 솟은 연꽃잎만 표현하였다. 포뢰는 입을 있는 대로 벌려서 힘겹게 소리치는 모습이다(도판 9).

이런 모습으로 표현한 데는 이유가 있다. 삼국 오나라 때 사람인 설종(薛終)이 ‘서경부(西京賦)’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바닷속에 큰 물고기가 있으니 고래라 하고 또 큰 짐승이 있어 포뢰라 한다. 포뢰는 본디 고래를 두려워하여 고래가 포뢰를 치면 문득 크게 운다. 무릇 종으로 하여금 소리를 크게 내도록 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까닭으로 포뢰를 위에 만들고 치는 것은 고래로 만든다.”

그러니 고래 형태로 만든 경목(鯨木)으로 맞은 포뢰는 고통과 두려움에 못이겨 크게 울부짖을 터이니 의 포뢰가 이와 같이 힘겹고 고통스럽게 표현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포뢰는 용왕의 아홉 자식 중에 울기를 좋아하는 용이라 한다.

이 은 조선왕조 전기에 억불정책에 따라 각처에서 절을 허물 때 경상도 안동부로 옮겨와 안동부의 정문 문루인 관풍루(觀風樓)에 걸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화(成化) 5년(1469) 기축, 즉 예종 원년에 상원사를 세조의 원찰로 지정하면서 전국에서 가장 멀리 들리는 종을 구해 오라는 왕명에 따라 안동에서 상원사로 옮겨졌다 한다.

이 내용은 만력 36년(1608) 무신, 즉 선조 41년에 권기(勸紀, 1546∼1624년)가 편찬한 안동의 읍지인 ‘영가지(永嘉誌)’ 권6 고적(古蹟) 누문고종(樓門古鍾; 누문에 걸린 옛 종)조에 상세하게 실려 있다. 이제 그 내용을 옮겨보겠다.

“무게 3379근이며 이를 치면 소리가 크고 맑아서 멀리 10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 강원도 상원사는 곧 (세조의) 내원당이라, 멀리 들리는 종을 두고자 하여 8도에서 구하였는데 본부의 종이 가장 으뜸이었다. 성화(成化) 기축(1469)에 나라의 명령으로 장차 옮겨가려고 죽령을 넘는데 종이 슬피 울면서 지극히 무거워져서 넘을 수가 없다. 종의 젖을 떼어 본부(안동부)에 보낸 후에야 운반할 수 있었다. 지금도 상원사에 있다(重三千三百七十九斤, 撞之則聲音雄亮, 遠可聞百里. 江原道上院寺, 乃內願堂也. 欲置遠聞之鍾, 求八道, 本府之鍾爲最. 成化己丑, 以國命, 將移運踰竹嶺, 鍾幽吼極重, 難越. 折鍾乳, 送本府後, 可運, 至今在上院寺).”

이때 강원도 보안도(保安道) 찰방(察訪, 종6품) 김종(金鍾)이란 사람이 이 을 옮겨오는 일을 주관한 승려인 학열(學悅)이 역말을 함부로 쓰고 길을 마음대로 돌아와 인마(人馬)를 피로하게 했다는 장계를 올리는데 이 사실이 거짓으로 밝혀진다. 그러자 당시 20세로 왕위에 올랐던 예종은 어린 왕을 깔보는 처사라고 대로하여 김종을 참수하고 3일 동안이나 그 목을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걸어두게 하였다. 경상도 금종이 강원도로 옮겨지면서 강원도의 김종(金鍾)을 잡은 희한한 일이라 하겠다.

성덕왕과 당 현종의 ‘별난’ 우의

성덕왕은 소덕왕후가 돌아간 후에 어린 두 왕자에게 모든 희망을 걸고 국기를 굳건하게 다지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더욱 성군(聖君)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직 당으로부터 신라가 차지하고 있는 옛 삼국 영토에 대한 공식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라, 우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과 외교 관계를 원만히 지속해 나가야 했다.

더욱이 옛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북의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발해의 위협이 점점 커지면서 발해와 일본의 밀착 관계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당과 동맹관계를 철저하게 다져나가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 위에 당은 현종의 밝은 정치를 만나 이른바 개원의 다스림(開元之治)이라고 불리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이에 성덕왕은 정성을 다해 특산물을 선물로 보내니 당 현종도 성덕왕 25년(726)에 사신으로 온 왕제 김흠질(金質)에게 낭장의 벼슬을 주어 돌려보내는 예우를 베푼다. 이미 성덕왕은 13년(714) 2월에 대당외교담당관인 상문사(詳文司)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치고 왕자(문무왕이나 신문왕의 서왕자이거나 종실 중에 가왕자로 봉한 사람일 것이다) 김수충을 사신으로 보내 숙위(宿衛; 제왕의 측근에 머물면서 호위함)하도록 하여 김인문(金仁問, 629∼694년) 사후에 일시 단절되었던 숙위의 맥을 다시 이어놓았었다.

이에 당 현종은 감격하여 김수충에게 집과 비단을 하사하고 조당(朝堂; 조회를 베푸는 집)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는 특전을 내린다. 이로부터 신라 사신들은 가기만 하면 벼슬과 선물을 받고 궁전 안에서 연회를 베풀어주는 대접을 받았다. 숙위 왕자 김수충이 성덕왕 16년(717) 9월에 돌아오면서 공자와 그 제자들인 10철(哲) 72제자의 초상화를 가지고 돌아오는데, 이는 당나라 국학(國學; 현재의 대학에 해당)에 모셔져 있던 것을 모사한 것이었다.

이로부터 신라에서도 국학체제를 당나라식으로 수용해 나갔을 듯하다. 드디어 성덕왕 27년(728) 7월에는 왕제 김사종(金嗣宗)을 보내 당나라 국학에 신라 자제들을 입학시켜줄 것을 요청하게 되는데, 당 현종은 이를 쾌히 허락하여 신라 자제들의 당나라 유학길이 트이게 된다. 당 현종은 왕제 김사종이 마음에 들었던지 과의(果毅) 벼슬을 주고 숙위 왕자로 자신의 측근에 남아서 시중 들게 하였다.

이에 성덕왕은 29년(730) 2월에 왕족 김지만(金志滿)을 사신으로 보내 작은 말 5필, 개 한 마리, 황금 2000냥, 두발 80량, 바다표범가죽 10장을 선물한다. 당 현종은 감격하여 김지만에게 태복경(太僕卿) 벼슬을 주고 비단 100필과 자줏빛 겉옷과 비단띠를 하사하며 머물러 숙위하게 하는 한편, 성덕왕을 한번 만나보기를 청한다. 이융기가 김융기를 만나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성덕왕은 병을 핑계대어 당 현종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다음해인 성덕왕 30년(731) 2월에 왕족 김지량(金志良)을 사신으로 보내 이 사실을 통보한다. 그때 우황(牛黃)과 금 은 등 선물을 보내었던 듯 당 현종은 김지량에게 태복소경의 벼슬과 비단 60필의 하사품을 내려주고 돌려보내면서 성덕왕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보낸다.

“보내준 우황 및 금 은 등의 물건은 표문(表文)에 갖추어 쓰여 있어 잘 살펴보았다. 경은 두 아들을 둔 경사스런 복이 있고 삼한(三韓)은 좋은 이웃이 되었다. 지금은 인의(仁義)가 있는 나라라고 일컬을 만하고 대대로 공훈을 세우는 어진 일을 해왔다. 문장과 예악(禮樂)에서 군자(君子)의 기풍을 드러냈으며 정성을 들이고 충성을 보내 왕을 위해 힘쓰는 절개를 다하였으니 진실로 번방(藩邦; 울타리로 삼는 땅)의 요새이며 참으로 충의(忠義)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어찌 색다른 지방의 먼 풍속과 같이 놓고 말할 수 있겠는가. 더해서 정의(正義)를 그리워함에 더욱 부지런하고 직무를 말함에 더욱 삼가서 산을 오르고 바다를 건너는데도 험하고 먼 길에 게으름없이 폐백을 드리기를 항상 해의 첫머리에 하였다. 우리 왕법(王法)을 지켜 나라의 법전을 세워 놓았으니 이에 그 간절한 정성을 돌아봄에 심히 가상하다고 하겠다.

짐이 매양 새벽에 일어나 우두커니 서서 생각하고 밤에 의복을 입은 채로 자며 어진 이를 기다리는 것은 그 사람을 보고 마음을 터놓고자 해서였다. 경을 기다렸다 만나서 품은 마음을 펼치려 했더니 이제 사신이 이르렀고 질병에 걸려서 초청에 응할 수 없음을 알았다.

말과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어 근심만 더할 뿐이다. 날씨가 따뜻하고 화창하므로 나아서 회복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 경에게 물들인 비단 500필과 흰비단 2500필을 보내니 꼭 받아주기 바란다.”

당 현종은 성덕왕을 친구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다. 당 태종과 신라 태종의 극적인 만남을 재현하고 싶었겠지만 신라 태종 때처럼 급박한 처지가 아닌 신라에서 국왕의 당나라 방문 같은 위험을 무릅쓸 리 없어 이융기와 김융기의 극적인 상봉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 현종이 신라 성덕왕을 만나서 우의를 다지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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