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물고기’ 시절부터 한국적 리얼리즘을 탐구하는 작가로 공인받은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시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1990년대에서 출발해 1970년대까지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는 구성은, 줄거리의 인과성에 관계없이 한 인물의 내면세계를 고요히 관찰하는 것만으로도 영화의 사실성을 충분히 담보해낼 수 있음을 증명한 희귀한 사례다.
‘시대에 관한 슬픈 우화’라는 평을 듣기도 한 ‘박하사탕’은 광주민주화운동 등의 한국 현대사를 배경 삼아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영혼이 어떻게 파멸해 가는지를 역구성해 보여줌으로써 이른바 386세대의 열렬한 호응을 이끌어냈다.
‘시월애’는 데뷔작 ‘그대 안의 블루’로 페미니즘 비평 진영의 환대를 받았던 이현승 감독이 오랜만에 선보인 작품이다. 이정재, 전지현이라는 청춘스타를 캐스팅한 이 영화는 ‘동감’과 유사한 판타지 멜로의 틀을 갖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남녀가 우체통을 매개로 사랑을 나누는 것. 영화는 같은 장소, 엇갈린 시간대에서 펼쳐지는 애달픈 사랑을 조용히 뒤따라간다.
디테일을 강조하는 이 감독 특유의 감수성으로 인해 ‘시월애’는 다른 판타지 멜로물과 차별된다. 그럼에도 전작에서 보여줬던 스타일 위주의 연출에서 벗어나지 않은 점, 그리고 젊은 세대의 도회적 속성에 대한 찬양에 작품의 방점을 찍은 점으로 인해 구태의연한 멜로물로 평가될 개연성이 충분한 작품이다.
올해의 한국영화는 어떤 모습일까. 작년에 비해 주춤한 듯한 인상이 짙다. 무엇보다 ‘…JSA’나 ‘반칙왕’처럼 이른바 ‘대박 영화’를 아직은 보기 힘들다. ‘천사몽’, ‘광시곡’ 등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표방한 영화들이 차례로 실패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조악한 내러티브와 미숙한 연기, 장르영화로서의 기본기를 갖추지 못한 작품들이 결국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들이다.
오히려 ‘하루’, ‘불후의 명작’,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등 일단의 멜로 영화가 평단의 홀대에도 불구하고 여성 관객층과 소통에 성공해 일정 수준 이상의 흥행수익을 올린 것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는 “한국영화는 각종 영화제를 통해 홍상수, 김기덕 등 걸출한 ‘작가’를 배출하는 데 성공했다. 상업영화의 약진도 아시아권에서 한국영화를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 시점에 한국 영화인들은 일본·홍콩의 영화산업 및 연출자들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아야 한다. 길고 지속적인 하향세를 그리고 있는 양국의 전철을 밟지 않는 것이야말로 한국영화가 장기적으로 발전하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올 한 해는 2~3년간 계속돼 온 한국영화의 상승세가 지속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가름하는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다. 모쪼록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경제적인, 무엇보다 새롭고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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