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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가 명택 10

한국적 살롱문화 溪山風流의 산실

전남 광주 기세훈(奇世勳) 고택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한국적 살롱문화 溪山風流의 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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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이 지닌 자연의 향기는 대숲에서 나온다. 전체 대지 3500평 가운데 사랑채 뒤쪽으로는 700평의 대숲이 조성되어 있다. 대나무 숲에 들어서면 왠지 모르게 청정한 느낌이 든다. 옛 선비들은 그런 느낌을 유현(幽玄)하다고 표현하였다. 대숲에서 그윽하고 현묘함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소리에 있다. 대숲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바람이 불 때마다 ‘사각사각’하는, 대나무 이파리가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가 들린다. 선비라면 그 대나무 이파리에서 나는 소리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한다. 일이 바쁜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소리다. 그 소리를 한참 듣다 보면 집착과 번뇌가 사라지는 것 같다. 이름하여 망우송(忘憂頌)이다.

폭포에서 나는 물소리 다음으로 듣기 좋은 소리가 바로 대 잎에서 나는 소리라고 한다. 폭포를 사람의 손으로 만들기는 매우 어렵지만, 대나무 숲은 인공으로 충분히 조성할 수 있다. 아무튼 선비집에서 대나무를 심는 것은 그 푸른 절개를 높이 사는 데도 이유가 있겠지만, 한발짝 더 깊이 들어가면 소리에 그 이유가 있다 하겠다.

집터 뿐만 아니라 대다수 절터에 대밭이 조성돼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남도 지역의 폐사지를 답사할 때마다 발견되는 점인데, 산 중턱에 푸른 대밭이 조성돼 있으면 그 자리는 옛날에 절이 있었던 곳이라고 짐작하면 거의 틀림없다.

대숲에는 또 하나의 소리가 있다. 새들의 소리다. 대나무는 줄기와 잎이 빽빽하기 때문에 밤에 새들이 몸을 숨겨 잠들기에 좋다. 특히 참새들이 많이 모여든다. 이 고택의 대숲도 마찬가지여서, 줄잡아 수백 마리가 모여 있는 것같다. 그야말로 온갖 잡새들이 지저귀는 통에 늦잠을 잘 수 없다.



새들이 지저귀는 시간대도 각기 다르다. 한낮에는 시시때때로 꿩들이 운다. 석양 무렵은 까치들의 시간대다. 마치 노인의 쉰 목소리처럼 ‘까악 까악’ 하고 운다. 까치는 제일 높은 나무에 앉는 습관이 있고, 멀리 있는 것도 잘 볼 수 있는 시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까치가 울면 손님이 온다는 옛말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초저녁에는 소쩍새가 지저귄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영락없이 ‘솥쩍다 솥쩍다’하는 소리인데, 그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수만년 전의 태고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같다. 새벽에는 특유의 낭랑한 목소리로 뻐꾸기가 지저귄다. 해가 뜨는 아침에는 수백 마리의 참새떼가 ‘지지 배배’ 단체로 합창한다. 삶의 의욕을 북돋우는 소리로 들린다.

대나무 숲은 단순한 숲이 아니라 부수적으로 온갖 새들의 합창을 인간에게 선사하는 서라운드 스피커를 달고 있는 숲이다.

한편으로 대나무를 심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집 뒤에 대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놓으면 범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한다. 옛날에는 호랑이가 많아서 사람이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호환(虎患)이 많았다. 어지간한 탱자나무나 싸리나무 울타리 정도는 호랑이가 쉽게 뛰어 넘는다. 그러나 빽빽한 대나무 숲은 호랑이가 쉽게 뚫지 못한다고 한다.

또 하나 현실적인 이유는 돈이 되기 때문이다. 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수공예품이 많다. 대자리, 대발, 죽부인, 광주리, 바구니 등 플라스틱이 없던 시대에 대나무는 일상생활에 긴요한 생필품이었던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나무는 곧 생필품이었던 만큼 장날에 나가서 곧바로 현금과 바꿀 수 있는 고부가가치 자원이었다. 담양을 포함한 이 일대는 우리나라 최대의 대나무 산지라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맛이 달콤한 죽로차(竹露茶)

고택의 대나무 숲 속에는 또 하나의 귀한 물건이 자라고 있었다. 바로 차(茶)나무들이다. 널따란 대숲 아래에는 푸른빛 차나무들이 티 내지 않고 자리잡고 있다. 같은 차나무라 하여도 대나무 숲의 차나무를 가장 좋은 것으로 친다.

대숲은 사시사철 그늘이 드리운다. 이는 햇빛과 그늘이 이상적으로 배합된 반음반양(半陰半陽)의 조도(照度)를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차나무가 성장하는 데 가장 이상적인 배경이 바로 반음반양이다. 따라서 대나무 숲에서 자라는 차는 그 맛이 뛰어날 수밖에 없는데, 특별히 이를 죽로차(竹露茶)라고 부른다. 대나무의 아침 이슬 기운을 받아 먹으면서 자란 차 잎으로 만든 차라는 뜻이다.

죽로차는 그늘에서 자란 덕에 차 잎이 연하고 부드러워 쓴맛을 내는 탄닌 성분이 적다고 한다. 맛이 달콤하다는 이야기다. 뿐만 아니라 차 잎이 연하면 솥단지에서 덖어 비빌 때 차 잎에 자잘한 상처가 많이 생기므로 뜨거운 물에 차를 우리는 과정에서 맛이 잘 우러난다고 한다. 그래서 옛날부터 대밭에서 자라는 차를 상품(上品)으로 간주한다.

차 잎은 물에 우려먹는 용도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차나무 생엽(生葉)을 다른 채소와 함께 얹어 구운 돼지고기를 쌈해 먹으면 그 맛이 색다르다. 실제로 생엽을 씹어보면 시원하고 향긋한 맛이 오래도록 뒤끝에 남는데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것과 같다.

이외에도 차 잎은 식중독으로 배가 아플 때 먹는 가정상비약으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에, 남쪽 지방의 선비집에서는 집 뒤에 차나무를 심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집에서 사용하는 식수도 보통 지하수가 아니라 대나무 숲을 통과한 자연수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대나무 뿌리는 그물코처럼 깊고 촘촘하게 뻗어 가는 속성이 있는데, 물이 촘촘하게 뻗은 대나무 뿌리를 통과하면서 자동적으로 정제된다고 한다. 자연정수의 효과가 발생하는 셈이다. 그래서 대숲 밑에서 흘러나온 물을 알아준다. 이렇게 고택의 대숲은 집의 품격을 높여주는 역할 뿐만 아니라 다른 측면에서도 실용적인 장점을 지니고 있다.

자연의 향기를 좀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집은 전남에서 유명한 양택 가운데 한 집에 들어간다. 흔히 전남의 양택을 꼽을 때 해남의 녹우당(윤선도 고택), 구례의 운조루, 그리고 기세훈 고택(애일당)을 꼽는다. 그래서 가끔 풍수를 연구하는 풍수마니아들이 버스를 대절해 답사차 다녀가곤 하는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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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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