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호

둘러대는 韓國語 핵심 찌르는 英語

언어구조와 사고방식

  • 권삼윤 < 문화비평가 > tumida@hanmail.net

    입력2005-03-24 14: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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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영어는 어떤 존재이기에 초등학생부터 나이 지긋한 중·장년까지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그토록 오랜 기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데도 영어를 만나기만 하면 목이 뻣뻣해지면서 주눅 드는 것은 또 무슨 까닭에서인가. 다양한 영어 학습법과 교수법이 등장하고, 영어교육시장도 엄청난 규모로 성장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껏 이렇다 할 묘약은 없다.

    그렇다면 ‘영어를 잘한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영어 학습의 목표가 바로 서고 그에 따라 효과적인 방책이 수립될 수 있다. 만약 어느 누가 자기의 뜻을 영어로 유창하게 말하고 또 남이 하는 영어를 부담 없이 알아듣는다면, 그를 가리켜 영어를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보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서는 물론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언어습관의 차이

    필자는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SLOOC)에서 국제협력업무를 담당했다. 각국 올림픽위원회(NOC) 대표들로 구성된 ‘서울올림픽대회 준비 상황 점검단’이 방한했을 때 그들을 수행하며 며칠을 함께 지냈다. 그들은 일주일 동안 경기장 시설, 선수촌 운영, 입장권 배분, 등록, 수송, 통역안내, 안전, 통신 등 각 분야의 준비상황을 둘러보았다. 점검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단장인 리처드 팔머(영국 NOC 사무총장)씨는 사적인 자리에서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문제는 안내야.”



    그는 “지금 단계에서 이를 공식화하기엔 부담이 될 것 같아 미스터 권에게 먼저 귀띔해 주는 것이니 다음 점검 때는 개선될 수 있도록 힘써 달라”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하소연 같기도 하고 불만 같기도 한 그의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어서 필자는 그에게 무슨 말이냐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필자가 알아들을 수 있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미스터 권, 영어를 잘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아. 그건 상대방이 무얼 말하는지 정확히 이해하고 그에 대해 신속히, 그리고 정확히 응대하는 것이야. 그런데 그 동안 우리가 만났던 서울의 안내원들은 발음도 좋고 히어링 수준도 괜찮은 것 같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요구 수준을 만족시켜주지는 못했어. 영어는 이해했을지 몰라도 우리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어.

    올림픽대회 기간은 무척 바쁜 때라 자신의 요구사항에 대해 길게 그리고 차분하게 설명할 수도 없고, 상대방의 설명을 차분히 들어줄 수도 없다네. 올림픽 안내원이라면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에 따라 명확하게 응대해야 하는데, 우리가 보기엔 서울은 아직 그게 부족해. 이건 아주 구조적인 문제라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솔직히 걱정이 되네.”

    그가 우려한 것은 우리와 그들의 언어습관의 차이에 기인한다. 구조적인 문제이긴 하나,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가 문제로 인식하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필자가 이 문제를 다시 들고 나온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가 도래했고 또 우리는 내년에 2002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영어교육이 어느 때보다 시급한 이때에 영어의 언어습관을 제대로 아는 것도 영어학습의 효과적인 방책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팔머씨가 지적한 것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하나는 “Yes”와 “No”로 간단하게 대답하면 될 것을 처음부터 장황하게 설명하려는 우리의 언어 습관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만약 외국인이 “여기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있으면 “Yes”, 없으면 “No”라고 대답하면 될 것을 “전화가 설치되지 않아 아직 문을 열지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외국인의 주된 관심사는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설치되어 있는지 없는지이지 왜 설치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대화에서는 자신의 견해를 집어넣기보다는 사실관계에 충실하게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런 말도 들려주었다.

    그때 만약 안내인이 “No”라고 대답하면 그 외국인의 다음 질문은 “여기서 제일 가까운 인포메이션 데스크는 어디에 있습니까”가 될 것이며, 그때에도 주위에 그런 것이 없다면 “No” 있으면 “Yes”라고 먼저 말하고, “Yes”라고 답했다면 현재 위치에서 그쪽으로 가는 방향과 거리 또는 사인보드의 모양 등을 설명해 주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인포메이션 데스크가 설치되지 못한 것이 마치 개인의 잘못인 것처럼 이런저런 설명을 늘어놓아 상대방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시각에서 보면 직접적인 회답을 피하고 요령부득(evasive)의 말을 늘어놓는 한국인(물론 일본인들도)의 언어습관은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을 크게 떨어뜨리는 것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이다.

    언어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의 말대로 ‘삶의 양식’이다. 그러므로 영어에는 영미인의 삶의 양식이 투영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영미인의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영어로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언어가 연장이고 도구(tool)라면 그 특징을 제대로 알아야 그 주인이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영어를 배우고 또 실생활에서 제대로 활용하려 한다면 영어의 특징, 그리고 영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영어를 쓰는 영미인들은 매우 논리적인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솔직한 대화’가 아니라 데이터에 기초한 ‘논리적 대화’일 것이다. “그들도 인간인데 가슴을 열고 이야기하다 보면 통하지 않을 게 있겠는가” 하고 협상에 임하는 경우 대개 실패로 끝나고 마는 것은 바로 이런 서구인들의 사고방식을 무시한 탓에 빚어진 결과다. 알맹이 없는 말로 그저 “내 처지를 이해해 달라”는 식의 하소연을 대하면 그들은 갖고 있던 애정마저 거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방식은 우리끼리는 통할지 몰라도 우리와 다른 삶의 방식 속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들에게는 요령부득으로 비칠 뿐이다.

    팔머씨의 두 번째 지적 역시 앞의 것과 대동소이하다. 경어나 내용상 전혀 불필요한 “Please” 또는 “I am sorry to trouble you”와 같은 말을 지나치게 쓰는 것이다. 공손한 태도를 보이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것도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되므로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말에는 경어와 존칭이 너무 많다. 그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나이와 전문분야가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때로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공개토론에서는 그걸 제대로 소화하기 쉽지 않다. 때로는 경어와 존칭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토론을 망칠 수도 있다.

    염화시중의 미소가 존중되던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경어와 존칭, 과묵이 가치일 수 있었지만 엄청난 정보를 짧은 시간 안에 소화해야 하는 지금과 같은 정보화 사회에선 그렇지 않다. 일일이 존칭을 쓰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해가면서 토론을 진행하기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같으면 비행중에 갑자기 난기류를 만나 기체가 흔들리게 되면 “난기류로 기체가 몹시 흔들리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좌석으로 돌아가셔서 안전벨트를 매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안내방송을 들려줄 것이나, 그들은 좌석 앞 위쪽의 사인보드에 ‘FASTEN SEATBELT’라는 불을 밝히고는 곧 “자기 좌석으로 돌아가 시트벨트를 매주십시오”로 끝낸다. 상황설명이나 ‘죄송합니다만’ 같은 말은 가능한 한 절제한다. 그래서 매우 사무적이란 느낌을 준다.

    전철역에서 “지금 전동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친절하고 공손하며 정중한 안내방송에 익숙한 우리에게 상대방의 질문에 ‘Yes’ 또는 ‘No’를 써서 한 마디로 답하는 것은 참으로 어색한 일이다. 그럴 때면 상대방에게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되어 자신을 뒤돌아보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다 보면 서론이 길어지고 때에 따라서는 ‘죄송합니다만’과 같은 불필요한 말을 끼워 넣기도 한다. 이게 우리 문화이고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영어는 다르다. 영어의 어순을 보아도 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영어에선 “Yes, I think so.” 또는 “Yes, I agree with you.” 또는 “No, I don’t think so.” 이런 식이다. 이처럼 그들은 Yes 또는 No를 먼저 말하고 화자(話者)의 행위나 판단은 그 다음에야 드러낸다. 또 부정조동사인 don’t가 본동사인 think보다 먼저 등장해 화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한다.

    그때 만약 화자가 자신의 행위나 판단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Yes, I think so, because…” 또는 “No, I don’t think so. There are 3 reasons: First, … Second, …Third,…”

    결론을 아끼는 한국인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설령 그것이 아무리 간단한 질문이라고 할지라도 결론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Yes’ 또는 ‘No’의 대답은 빼먹어선 안 된다. 누군가 전화로 “May I speak to Mr. Kim”이라고 했을 때 마침 Mr. Kim이 다른 전화를 받고 있어 연결이 어려운 경우라면, “No, the line is busy.”라며 No를 분명히 붙여야 하는 것이다.

    결론을 서둘러 말하고, 그것도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는 게 영어의 언어 습관이라면 우리말은 결론을 무척 아낀다. 제일 마지막에 가서야 ‘어쩔 수 없이’ 내놓는 식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말은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는 말도 생겨났는데, 이런 언어습관에 익숙하지 않은 서구인들은 우리의 장황한 서론에 이내 지쳐버려 우리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를 놓치기 쉽다. 우리의 대화가 그들을 계속 긴장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면 그들은 대화를 지속하는 데 흥미를 잃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결론의 도출이 느슨한 이러한 문장형식은 구어체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일반 문어체 문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 문장을 보자.

    ‘찬호가 던진 공에 우리 집 창문이 깨졌다.’ 이런 우리말에서는 정작 중요한 사건인 창문이 깨진 사실은 마지막에야 나타나고, 창을 깨게 만든 공에 대한 설명이 먼저 등장한다. 매우 묘사적(descriptive)이다. 그러나 영어에선 어순이 바뀌면서 문장도 이렇게 매우 정의적(definitive)이 된다.

    ‘My window was broken by the ball which was thrown by Chanho.’

    영어에선 한국어와는 달리 이렇게 중심어가 먼저 등장한다. 그리고 공에 대한 설명은 부차적인 사항으로 치부돼 맨 뒤로 돌려버린다. 미국의 언어학자 노암 촘스키는 이러한 언어구조를 ‘핵 선행(head-initial) 언어’라고 명명했다.

    영어는 잘 알다시피 명사형(일반명사, 대명사, 동명사구, 부정사구, 명사절 등)의 주어가 먼저 나오고 곧이어 주어의 행위나 상태 등을 알려주는 동사(verb)가 등장한다. 이런 문장에서 화자의 최고 관심은 주어일 수밖에 없다. 목적어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관심이 된다. 예를 들어 ‘I love you’라는 문장을 보자.

    여기서 화자(나)의 일차적인 관심은 사랑이란 행위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당신’은 이차적 관심에 머문다. 다시 말해 나는 사랑이란 행위를 하고 있는데, ‘당신’은 그 대상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어순을 갖는 한국어에서는 화자의 일차적 관심은 ‘당신’이다. ‘사랑’이란 화자의 행위보다 그 행위의 대상인 ‘당신’에게 화자의 관심이 더 쏠려 있다. 그러니까 당신에 대한 내 감정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영어 문장과 우리말 문장이 동일한 상황을 서술하고 있는데도 그 뉘앙스는 이처럼 다르다. 우리는 이러한 한국어의 문장구조를 통해 우리의 사고방식이 어떠한 지 미루어 짐작할 수도 있다. 우리의 사고세계에선 행위의 대상이 되는 타인 또는 사물이 늘 행위보다 앞선다는 사실 말이다.

    그래서 주어와 목적어는 운명 공동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이는 세상을 인연의 그물망(즉 인드라의 망)으로 바라보는 세계관이 은연중에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좋은 증거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는 목적어에 대한 서술을 서두에서부터 장황하게 늘어놓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상대방에게 전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장점을 발휘한다. 그런 다음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판단을 들려줌으로써 상대방이 화자의 견해에 신경 쓰지 않고 사물을 이해하거나 판단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참으로 친절한 언어습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우리(동양인)의 언어습관 내지 사고방식을 미국 미시건 대학의 인지심리학(Cognitive Psychology) 교수 리처드 니스베트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관계(표현 이전의 비가시적 관계를 포함해서)에 주목하여 ‘전관적(全觀的) 사고방식(Holistic Thought)’이라고 불렀다.

    그는 주체와 객체를 분리해(John gives a ring to Mary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주체인 John과 객체인 Mary 사이에 to를 두어 거리를 두고 있다) 가능한 한 객관적 시각에서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서구인들의 언어습관 내지 사고방식을 ‘분석적 사고방식(Analytic Thought)’이라고 부르면서 서로 대비해 그들의 행동양식과 문화를 분석하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지나쳐 자기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아무거나’라는 대답을 듣게 되는 메뉴선정에서 특히 잦다. 친구끼리의 사적인 모임에서야 문제가 될 것이 없으나 비즈니스 관계로 서로 바쁜 처지에서 만났다면, 그런 대답은 시간만 낭비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영미인들은 아예 “Which do you like coffee or tea?”라는 식으로 선택의 범위를 정해주고 상대방의 대답을 재촉한다. 그리고 그들의 교육은 개성을 기르고, 또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히도록 육성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일상화되다시피 한 토론수업은 바로 이를 위한 훈련 과정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Which do you like coffee or tea?”라고 묻는데, “아무거나(whichever)”라고 답한다면 우유부단하거나 개성 없는 인간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아무거나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Which do you like better?”라며 재차 물어오기 전에 커피든 차든 원하는 한 가지를 꼭 찍어서 대답해 주는 것이 서로를 위해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이왕 말이 나왔으니 전관적 사고방식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이러한 태도가 잘 나타난 것으로는 ‘주소 쓰기’를 들 수 있다. 우리는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 현대아파트 104동 802호’라는 식으로 주소를 쓴다. 명함에도 대개 OO회사 OO부 직책 이름 순으로 표기한다. 이름을 쓸 때에도 반드시 성을 먼저 쓴다. 철저히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지향한다. ‘수렴형(retrospective)’, 바로 그것이다.

    이에 반해, 서구문화권에선 자신의 고유이름(given name 또는 first name)을 먼저 쓰고 성(family name 또는 last name)은 그 다음에 적는다. 이어서 번지, 거리, 지역, 도시명 순으로 이어간다. 명함에서도 우리와 반대로 이름, 직책, 회사명 순서다. 이렇게 말이다.

    Colin Tweedy, Chief Executive, Arts & Business (A&B).

    영어에선 좁은 데서, 즉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 점차 넓은 곳으로 나아간다. 철저히 ‘확산형(progressive)’이다. 개인을 중시하는 사회에선 가까운 사이라면 퍼스트 네임만 부른다. 한마디로 개인 지향적이다. 모든 것이 개인으로부터 시작해 개인에서 끝난다. 그런 그들인지라 우리라면 쓰지 않을 ‘나(I)’와 같은 주어를 빼먹지 않고 반드시 집어넣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수렴형 주소 쓰기 방식을 취하는 우리 사회에선 누구의 자식이냐, 고향이 어디냐, 어느 학교를 나왔느냐, 어느 회사에 다니느냐가 주 관심사가 된다. 다시 말해 소속·장소 지향적이다. 이런 이유로 세종로, 을지로, 충무로, 퇴계로 등과 같이 사람의 이름을 딴 지명은 광복 이후 서양 문명의 영향을 받고서야 등장했다. 그 이전에는 인명이 들어간 지명은 거의 없었다. 대개는 종로, 사직동, 남산골, 송학동 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屬人文化’ vs ‘屬地文化’

    사람을 부를 때에도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그의 성을 앞에, 직책이나 직위를 뒤에 붙여서는 ‘김부장님’ ‘박사장님’ 하는 식을 택했다. 전통사회에선 여성들에게는 이런 직책이 없었으므로 그의 출신지를 넣어서 ‘마산댁’ ‘안성댁’ 하고 불렀다. 지금도 TV드라마를 보면 “성북동입니다” 라며 전화 응대하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철저히 장소·소속 지향적 사고방식을 지닌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문화는 ‘속인문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우리의 것은 당연히 ‘속지문화’가 된다.

    소속·장소 지향의 언어에선 움직임(動)이 중시되지 않지만 개인 또는 사람 지향의 확산형 주소 쓰기 방식을 취하는 언어에선 움직임이 중시된다. 그 움직임으로 해서 문장이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이 될 정도다. 그러므로 영어에선 시간개념이 공간개념을 앞선다. 이는 초청장 문안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초청장엔 반드시 시간(time)이 장소(place)보다 앞서 등장한다. 일반문장에서도 At 12:00 o’clock on August 15th at the Sejong Hall 식으로 표현된다.

    그들은 이렇듯 시간에 관심이 많다. 동사(verb)는 이런 시간관념을 나타내는 품사로서 영어에선 술부의 핵심을 이룰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문장의 중심이 된다. 이 동사의 의미를 언어학적 측면에서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언어학적으로 보면 영어는 ‘고립어’에 속한다. 벽돌을 하나둘 쌓아올려 건물을 짓듯이 센텐스를 구축한다. 그들의 건축방식도 이러한 ‘쌓기식’이니 언어구조와 건축방식 간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틀림없는 듯한데, 아니나 다를까 한국어, 일본어 등 동아시아 언어는 단어와 단어 사이를 ‘조사’라는 갖풀 내지 끈으로 이어 붙이는 이른바 ‘교착어’다. 이는 우리의 ‘짜기식’ 건축방식과 너무나 흡사하다.

    고립어와 교착어를 가르는 중요한 요소는 동사다. 교착어에선 동사가 숨어 있는 경우가 흔하나 고립어에선 항상 드러나 있다. 그 예를 보자.

    “She is beautiful”이란 영어에선 be동사의 존재가 분명하다. 그러나 같은 뜻의 “그녀는 아름답다”는 우리말에서는 그게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주어이자 명사인 ‘그녀’에 조사라는 형태로 알게 모르게 묻혀 있을 뿐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사의 존재가 분명한 고립어 계통의 언어에선 동사가 예사롭지 않는 변화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능동태 수동태도 그러하고 자동사, 타동사의 구별이 분명한 것도 특징이지만 무엇보다 시제(tense)에 따라, 주어의 인칭과 수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는 것이 매우 특이하다.

    그들의 동사는 현재, 과거, 미래의 세 단계 변화를 넘어서서 더 세밀한 변화를 꾀하는데, 예를 들면 과거의 경우에도 단순과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 과거, 현재완료, 과거완료 등이 있으며, 미래도 단순미래, 직전미래, 미래완료 등으로 구분하여 표현된다.

    이처럼 시제 표현이 세밀하게 구분돼 있는 것은 그들이 인간이나 사물을 이해하는 방식이 움직임에 기초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이 이러하다면 동사의 정복이야말로 영어 정복(?)의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필자는 팔머씨가 우리의 안내방식과 관련해 지적한 바를 중심으로 영어의 언어습관을 국어와 비교하며 그 차이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영어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영어의 언어습관, 나아가 영미인의 사고방식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필자는 우리가 굳이 영어를 배우지 않는다 할지라도 영어의 언어습관을 몸에 익히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상대방이 내 처지를 이해한다는 전제에서 대화를 이루어 나갈 수 없는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관계가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른 사람들 속에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정보화 사회의 삶이라고 한다면 그런 문화적 전통 속에서 발전해 온 영어의 언어습관을 익히는 것은 우리의 부족한 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는 생각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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