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월호

원불교 성직자 40여 명 배출한 명당

  •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cyh062@wonkwang.ac.kr

    입력2005-04-04 16: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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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불교 성직자 40여 명 배출한 명당
    백두산에서 시작된 백두대간은 3000리를 내려오다가 지리산에서 마지막 여정을 푼다. 지리산은 그 둘레 길이가 500리가 넘는 한국 최대의 덕산(德山)이다.

    500리 둘레에는 돌아가면서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등 이름난 고을들이 들어서 있다. 이들 고을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환지리산(環智異山)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지리산의 험준한 산악지역을 연결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일종의 문화 실크로드라 할 수 있다. 지리산의 길을 따라서 영·호남 간 물적·인적 교류는 물론 유·불·선에 정통한 기인, 달사들이 오가면서 수많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사연을 남겼던 것이다.

    그 실크로드의 한 축인 전라도 남원에 가면 죽산박씨(竹山朴氏)의 고택인 몽심재(夢心齋)가 유명하다. 남원의 죽산박씨들이 500년 동안 세거(世居)하고 있는 동네가 남원시 수지면 호음실(虎音室, 보통 ‘홈-실’이라고 부른다)에 있고, 그 홈실 중심에 몽심재가 자리잡고 있다.

    몽심재가 남원 인근에서 회자된 것은 과객을 잘 대접하였기 때문이다. 찾아오는 손님을 후하게 대접하기로 유명했던 몽심재는 당연히 조선 후기 지리산 로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남원은 구례, 순천 지역에서 한양으로 올라갈 때 거쳐야 하는 곳이다 보니 몽심재는 자연 구례, 순천 쪽에서 과거 보러 올라가는 선비들이 들르는 단골 사랑채가 되었다. 전라도뿐 아니라 함양 쪽에서 넘어오는 영남 선비들도 남원을 거쳐서 한양으로 올라갔는데, 별일 없는 한 몽심재에 머물렀다. 대접이 후해서 선비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들렀다.



    만석꾼 집안의 적선

    조선시대 대갓집에서 중요시했던 일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충실히 지내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찾아오는 손님을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일이었다. 특히 후자의 접빈객(接賓客) 풍습은 타인에 대한 적선(積善)의 의미와 함께 그 행위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자연스럽게 수집하는 효과도 있었다.

    신문도 없고 전화도 없고 자동차도 없던 시대에 다른 지역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의 입이다. 내 집을 찾아오는 손님들이야말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전달해 주는 뉴스전달 매체이기도 하였다. 특히 독서를 많이 한 식자층의 방문은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인품과 지성을 갖춘 식자층은 다른 지방에 대한 소식뿐만 아니라, 집주인과 더불어 문학과 역사와 철학을 토론하면서 기인, 달사들과의 인맥을 형성시켜 주는 일도 했을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엮어지는 공간은 그 집안의 사랑채다. 명문가의 사랑채는 접빈객이 이루어지는 남자들만의 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을 접대할 수 있는 사랑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재력이 충분히 뒷받침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적어도 100석 이상의 재산이 있어야 손님 대접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반열에 오를 수 있었고, 전국에 소문날 정도가 되려면 3000석 이상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조선시대 서민가족(6인 기준) 한 가구의 1년 쌀 소비량이 평균 5가마 정도였다는 통계를 감안하면, 1000가마의 쌀은 200 가구가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이고, 3000가마는 600가구(3600명)가 1년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호구책이다. 그러니 예나 지금이나 돈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바로 이런 문화사업이다.

    아무튼 조선 후기 전라도 남원지역에서 만석꾼 소리를 들으며 과객 대접이 후하기로 소문났던 몽심재는 죽산박씨 연당(蓮堂) 박동식(朴東式, 1763∼1830년) 고택의 사랑채다.

    지리산 자락인 견두산(犬頭山) 아래에 자리잡은 이 고택의 사랑채 당호(堂號)가 몽심재인 것엔 까닭이 있다.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하고 개성 근처 만수산(萬壽山) 남쪽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賢)의 영수인 송암(松菴) 박문수(朴門壽, 시호는 忠顯)의 시에서 유래한다. 몽심재를 건립한 연당의 14대조인 송암은 도연명과 백이, 숙제의 고결함과 지조를 흠모해 ‘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元亮)이 꿈꾸고 있는 듯하고,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 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구나)란 시구를 남겼는데, 이 시의 첫줄 끝자인 몽(夢) 자와 둘째 줄 끝자인 심(心) 자를 따서 몽심재라고 지은 것이다.

    언뜻 보아서는 문학적인 냄새를 풍기는 이름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대의명분과 지조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가시밭 길을 택했던 조선 선비의 단호한 각오가 묻어 있다.

    몽심재가 자리잡은 남원 수지면 호곡리 호음실은 남원 일대에서 손꼽히는 명당이다. 남원 사람들이 양택지로 손꼽는 명당은 대략 네 군데다. 첫째가 남원시 주생면 상동리 이언(伊彦)으로 남원양씨 집성촌이다. 국회의원 양창식씨가 이곳 출생이다. 둘째는 주생면 지당리에 있는 지당(池塘)인데, 남원윤씨와 남양방씨 집성촌이다. 방예원 사법고시연수원장이 남양방씨 출신이다. 셋째는 대산면 죽곡리에 있는 대곡(大谷)으로 남원진씨와 장수황씨 집성촌이다. 황희 정승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넷째가 수지면 호곡리에 있는 호음실(虎音室)로 바로 죽산박씨 집성촌이다.

    남원 4대 양택지에 관한 이야기 한 토막. 옛날 어느 스님이 남원 일대를 둘러보면서 지당이라는 동네의 산세가 아주 훌륭하다고 했다. 그래서 지당을 남원 일대에서 제일가는 명당으로 평가하였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하나 넘어 옆동네로 가보니 방금 보고 온 지당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산세를 갖춘 곳이 나타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순간적으로 “이런!” 하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이런”이라는 스님의 탄식이 한문으로 옮겨져 ‘이언(伊彦)’이 되었다는 구전이다.

    또 남원의 남쪽 방향에 자리한 견두산(犬頭山) 호곡리(好谷里) 호음실(虎音室)도 풍수적 설화가 전해진다. 원래 견두산은 호랑이 호 자가 들어간 호두산(虎頭山)이었고, 호곡리 역시 호랑이 이름이 들어간 호곡리(虎谷里)였다. 그러던 것이 개 견(犬) 자와 좋을 호(好) 자로 바뀌게 된 배경은 호랑이와 관련된 풍수 때문이다.

    지리산이 가까운 남원에는 호랑이에게 사람이 물려 죽는 피해가 많았다. 호환(虎患)은 조선시대 가장 무서운 재앙에 속하였다. 장례를 중요시하던 조선사회에서 죽은 사람의 시체는 물론 뼈마저 찾을 수 없어 장사를 지낼 수 없으니까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호식(虎食)당하는 수가 태종 2년에 수백 명이라 했고, 영조 30년에는 경기도 지방에서 한 달 동안에 무려 120명이 호랑이에게 당했다고 한다.

    말이 나온 김에 호식총(虎食塚)도 살펴보자. 범이 먹다 남긴 사람의 시체가 산 속에서 발견되었을 때 화장을 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놓은 것이 호식총인데, 흥미로운 점은 그 돌 위에 시루를 엎고 시루 구멍에다 물레에 쓰는 쇠가락을 꽂아 놓은 것이다.

    민속학자 최성민씨는 돌을 쌓은 것은 ‘신성한 곳’이라는 표시이기도 하지만 ‘창귀’의 발호를 막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창귀는 호식당한 사람의 귀신으로 범의 호위병 노릇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불러내 범의 먹잇감을 만든 뒤 자기는 그 대신에 범의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귀신이다. 그래서 돌로 무덤을 쌓아둠으로써 이 귀신을 꼼짝못하게 하는 동시에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게 해 벌초하려다 창귀에 걸리는 피해를 막으려는 것이다.

    또 시루는 ‘철옹성’임을 뜻하는 동시에 솥 위에 올라앉는 형국으로, 뚫린 구멍과 함께 하늘을 상징한다. 사악함과 불결함, 모든 것을 찌고 삶아 죽이는 시루를 엎어놓으면 창귀도 그 안에서 꼼짝못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아홉 개의 시루 구멍으로 귀신이 빠져나갈 수 없도록 벼락을 의미하는 쇠가락도 꽂았다. 쇠가락을 꽂은 또 다른 이유는 물레에서 가락의 용도처럼 창귀도 묘 안에서 맴돌기만 하고 나오지 말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호환을 얼마나 두려워했던지 사주명리학에 등장하는 각종 흉살(凶殺) 에도 ‘백호대살(白虎大殺)’이라는 살 이름이 들어 있을 정도다. “백호에게 물려가 죽는다”는 의미의 백호대살은 불의의 사고를 당하여 피를 흘리고 죽는다는 살이다. 이 살이 있는 사람은 본인이 피를 흘리고 사고를 당하거나, 아니면 가까운 피붙이가 피를 흘리고 죽는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백호대살을 교통사고로 해석하는데, 자동차에 치이면 길에서 피를 흘리고 죽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동차가 예전의 호랑이 노릇을 하는 셈이다.

    아무튼 남원에서 속출하는 호환을 해결하기 위해서 당시 전라감사였던 이서구(李書九, 1754∼1825년)가 남원을 방문하였다. ‘서전’ 서문(序文)을 구천독(九千讀)하였다고 해서 이름을 ‘서구(書九)’로 지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는 그는 서화담-이토정-이서구-이운규-김일부로 이어지는 조선조 유가(儒家) 도맥(道脈)의 반열에 올라 있는 인물이다. 고위관료를 지냈으면서도 재야의 학문인 천문, 지리에 능통했다고 평가받았던 당대의 이인(異人)이었던 것이다. 그는 전라감사를 정조와 순조 때 두 번이나 역임하였으며 오늘날까지도 회자되는 선정을 많이 베풀어 전라도민에게는 특별한 감사로 기억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 이서구가 남원을 방문하여 내린 처방은 남원 남쪽의 호두산에 어려 있는 호랑이 정기가 너무 강하니 이를 눌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진압 방법은 첫째로 호두산을 견두산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둘째는 호두산의 맥이 내려와서 뭉친 지역인 호곡리 명칭을 호곡리(好谷里)로 바꾸는 것이었다. 셋째는 사람들이 운집하는 장소인 광한루 옆에 돌로 된 호랑이상(虎石像)을 세워 호두산을 바라보게 하였다. 호두산의 호랑이 기운을 돌로 만든 호랑이상으로 하여금 대항하게 한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바꾸고 돌로 만든 호랑이상을 세운 후에 신기하게도 호환이 사라졌다고 한다. 천문·지리·인사를 하나로 관통하는 법칙은 상응(相應, correspondence)이다. 지상의 호랑이와 돌로 만든 호랑이 그리고 사람이 부르는 호랑이 이름은 4차원에 들어가면 어떤 형태로든지 서로 상응한다는 이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道人이 나오는 청룡장

    몽심재의 풍수는 어떤가. 지리산 노고단에서 내려오는 지맥 중의 하나는 만복대를 거쳐 해발 775m의 견(호)두산에서 일단 숨을 멈춘다. 그런 다음 견두산에서 다시 5km를 내려와 호음실에서 기운이 맺히면서 자리를 하나 만들어 놓는다. 그 자리가 몽심재와 죽산박씨 종택이 있는 자리다.

    그러니까 몽심재는 옆으로 누워 있는 호랑이 머리 부분에 터를 잡은 셈이다. 바로 호두혈(虎頭穴)이다. 몽심재 터는 호랑이 턱 아랫부분에 해당한다. 앞의 안산은 호랑이 꼬리로 본다. 이렇게 호두산의 호랑이 정기가 호곡리를 거쳐 마지막으로 뭉친 터가 이 지점이기 때문에 홈실이 남원 4대 양택지에 든다.

    몽심재의 지세에서 한 가지 특기할 점은 안대(案帶, 案山)가 아주 가깝다는 점이다. 안대가 대문 앞에서 100m도 안 될 정도로 아주 가깝게 붙어 있다. 돌을 던지면 닿을 정도다. 이런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물형으로 볼 때 이 안대는 호랑이 꼬리에 해당하고, 청룡 백호로 따지면 좌청룡에 해당한다. 좌청룡이 동시에 안대 노릇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터 앞의 안대는 다른 곳에서 내려온 지맥이 자리잡는 것이 정상이지만, 자기 본신(本身)에서 분기한 청룡이 좌측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내려가면서 안대를 만드는 경우가 드물다. 몽심재는 그 보기 드문 사례 중 하나인데, 이런 경우 발복이 빠르다고 본다. 외부에서 온 맥보다 자기에게서 나간 맥이 안대가 되면 감응하는 효과가 훨씬 빠르다는 뜻이다. 이치를 따져보아도 남의 팔보다는 자기 팔이 훨씬 가까울 뿐 아니라 자유자재로 사용하기에 편할 게 아닌가.

    풍수에서는 안대가 터와 가까울수록 거기에 비례해서 발복하는 시간이 빠르다고 본다. 하물며 본신이 안대를 이루면 감응이 속발(速發)한다. 반대로 안대가 너무 멀어 100년 후에 발복하는 터도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 몽심재의 백호는 분명한 모습이 아니다. 약한 편이다. 따지고 보면 청룡의 맥이 지나치게 길고 튼튼해서 이와 같은 형국이 조성되었다. 백호보다 청룡이 훨씬 길고 튼튼한 경우를 풍수가에서는 ‘청룡장(靑龍藏)’이라고 부른다. 청룡장 터에서는 도를 닦는 도인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래서 불교 스님이나 도교의 단학 수련자들은 청룡장 터를 선호한다.

    이와 관련해 몽심재 안대를 자세히 보면 그 모습이 아미사(蛾眉砂)와 비슷한 점이 눈에 들어온다. 아미사는 초승달 형태로 흔히 여자의 눈썹과 같이 생긴 사격(砂格)을 가리킨다. 필자의 풍수 선생님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이처럼 잘생긴 아미사가 터 앞에 있으면 여자들이 훌륭하게 된다고 한다. 아미사는 여자를 상징하므로 남자보다는 여자 후손이 복을 받는다고 믿는 까닭이다.

    풍수에는 성 차별이 없다. 그 동안 답사했던 명묘(名墓) 가운데 아미사가 유달리 좋았던 것이 5공 때 보사부 장관을 지냈던 김정례씨의 선산으로 기억된다. 전남 담양에 있는 김 전장관의 증조부 묘를 보면 정면에 나지막한 아미사가 보기 좋게 자리잡고 있다.

    지금부터 대략 100년 전쯤 전라도 일대를 풍미한 지관 문선전(文宣傳, 성이 문이고 宣傳官 벼슬을 지냈음)이 이 묘를 잡아주면서 “100년 후에 여자 판서가 나온다”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때는 사람들이 “여자가 무슨 판서를 할 수 있느냐”면서 다들 웃었는데 결과적으로 여자 후손이 장관을 지냈다.

    홈실 몽심재 터가 도인이 많이 나오는 청룡장이라는 점, 안대가 아미사라는 점, 그리고 물형이 호랑이 꼬리라는 점을 종합하면 이 터에서 힘 있는 여자 도인이 많이 나올 수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홈실의 죽산박씨 가운데 원불교에 출가한 교무(敎務)가 40여 명이나 된다.

    원불교에서는 출가한 성직자를 교무라고 부른다. 90여 가구 남짓한 시골 동네에서 도를 닦는 직업 성직자가 40여 명이나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다. 40여 명 가운데 남녀 비율을 보면 남자가 10명, 여자가 30명쯤 된다.

    원불교에서 여자교무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생활을 한다. 그래서 홈실에서는 사위 구경하기가 힘들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동네에서 쓸 만한 여자들은 거의 원불교로 출가를 해서 독신생활을 하니 사위가 적을 수밖에 없다. 여자 성직자가 많이 배출된 사실을 풍수학인이 분석할 때는 몽심재를 포함한 동네 앞의 잘생긴 아미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몽심재 터는 단점도 발견된다. 무엇보다 국세가 좁다는 점이다. 안대가 바로 앞을 가로막아서 약간 답답한 감을 준다. 야무지고 실속 있는 터이기는 하지만 시원하게 터진 느낌이 부족하다. 이 단점 때문에 남원 4대 양택지 가운데 네 번째로 꼽히지 않았나 싶다.

    이런 답답함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집터를 되도록 높은 지점에 잡아야 한다. 사랑채 마루에 앉아서 안대를 바라볼 때 안대 높이가 눈 높이에 일치하는 것이 좋다. 안대가 눈 높이보다 훨씬 올라가면 오히려 안대가 집터를 누를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사랑채 위치를 보면 이 원칙에 맞추었다. 몽심재의 원래 터는 경사진 언덕이라서 뒤로 올라갈수록 위치가 높아진다. 사랑채(몽심재)도 언덕 위로 올라간 지점에 지었다. 안대의 높이를 감안하였다는 증거다.

    그러다 보니 몽심재가 높은 축대 위에 자리잡은 모양이 되어 처음 방문하는 사람에게 위엄 있는 인상을 준다. 이 집의 안채보다 사랑채인 몽심재가 규모에서도 훨씬 크고 당당하다. 몽심재에 올라가는 계단의 수도 5계단이나 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랑채의 계단 수가 많을수록 그 집의 품격도 비례해서 높아진다고 생각하였다. 임금이 머무르는 한양에서는 궁궐보다 개인주택의 사랑채 계단이 더 높으면 문제가 되기 때문에 통제를 받았다. 즉 대신의 사랑채가 2계단 이상 올라가면 문제가 되었다는 말이다. 대원군이 살았던 운현궁은 3계단인데, 이는 임금의 아버지라서 그만한 대접을 하느라고 궁궐과 같은 3계단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은퇴해서 지방에 거주하던 정승댁이나 판서댁에서는 이러한 법도가 느슨하게 적용되었던 것 같다. 간혹 3∼4계단을 설치한 집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몽심재의 5계단은 지나치게 높다. 결국 이는 풍수적인 이유로 인해 부득이 사랑채를 높게 잡아야만 했기 때문에 발생한 특수한 건축으로 해석된다.

    사랑채 형태는 ‘5칸 접집’으로 불린다. ‘접집’은 사랑채의 앞면과 뒷면 양쪽으로 문과 마루가 설치되어 있음을 뜻한다. 앞면도 사용하고 뒷면도 사용하는, 두 겹으로 되어 있다는 말이다. 5칸 건물이지만 두 겹으로 되어 있으므로 실제 사용 가능한 면적은 10칸이다. 평수로는 26평이다. 홑집에 비해서 접집이 개방적인데, 경상도보다 전라도에서 접집이 많이 발견된다.

    인물 내는 사랑채 마당 앞 큰 바위

    몽심재의 풍수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사랑채 앞마당 중간에 놓여 있는 커다란 화강암 바위다. 가로 3m 높이 1.5m 크기의 이 바위는 원래부터 이 터에 있었던 것이라고 한다.

    집 안에 이처럼 큰 바위가 있으면 범상치 않다. 바위 자체가 강력한 에너지를 함축하고 있어서, 그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상서로운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이러한 집안에서 인물이 날 경우 바위의 정기를 받아서 태어났다고 하는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그러므로 바위를 함부로 옮기거나 훼손하는 일은 꺼린다. 필자는 근래에 이러한 바위들을 포클레인으로 함부로 치우고 나서 좋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바위 모양이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편평하면 그 위에서 바둑을 두거나 좌선을 하거나 낮잠을 자는 것도 좋다. 지기(地氣)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몽심재 마당의 바위에는 ‘주일암(主一岩)’, ‘존심대(存心臺)’, ‘청와(淸窩)’와 같은 글자들이 암각돼 있다. 역대 집주인들이 새겨놓은 글씨로, 이 집 선조들도 바위의 존재를 특별하게 인식하였다는 증거다.

    이외에도 몽심재 마당의 바위는 풍수적으로 혈구(穴口) 기능을 한다. 대개 혈구는 연못인 경우가 많지만 이와 같은 바위가 그 기능을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사랑채 앞의 정면 일직선상에 놓여 있어서 혈구 기능이 더욱 분명하다.

    사랑채 좌향이 남향에서 약간 서쪽으로 튼 간좌(艮坐)인데, 대문의 방향은 인좌(寅坐)다. 인좌는 간좌보다 15。쯤 더 서쪽을 바라보는 방향이다. 사랑채의 좌향과 대문의 방향을 이처럼 차이가 나게 설치한 것은 이 바위를 피해가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간좌 대문을 설치하면 사랑채와 대문 사이를 바위가 중간에 가로막게 된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호랑이의 의미를 가진 인좌(寅坐) 대문은 호랑이가 키워드인 호두혈(虎頭穴) 형국과도 일치하는 좌향이다. 호랑이 혈에 호랑이 대문이다.

    몽심재는 건축구조에서 다른 고택들과 구별되는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인들을 위한 배려에서 잘 나타난다. 대문을 마주보았을 때 대문 좌우측으로는 문간채가 설치되어 있다. 문간채는 대문 옆에 붙어 있는 방이기 때문에 하인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몽심재는 대문의 오른쪽 문간채에 대청이 한 칸 더 설치되어 있는 특이한 구조다. 가로 세로 3m 크기의 대청인데, 난간 손잡이까지 마련되어 있어서 정자와 같은 형태다. 이 집에서는 문간채 옆의 이 정자를 ‘요요정(樂樂亭)’이라고 부른다. 요요정은 하인들의 휴식을 위한 전용 공간이다. 조선시대 정자는 양반들만의 공간이었으므로 노비나 종들은 감히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몽심재의 주인은 날씨가 더울 때 양반들만 정자에서 쉴 것이 아니라, 하인들도 자기들끼리 마음 편히쉴 수 있도록 문간채 옆에 요요정을 만든 것이다.

    노비와 종들을 배려하기 위해 만든 정자 요요정. 집주인의 너그러움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문간채 옆에 아랫사람들을 위한 별도의 정자를 설치한 고택은 몽심재가 전국에서 유일할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힘없는 사람들에 대한 배려, 이것이 수백 년간 집안을 유지시키는 원리이자 명문가의 필요충분조건일 것이다.

    남원의 죽산박씨들이 홈실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한 것은,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 고려말 두문동 72현의 수장인 박문수(朴門壽)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개성 만수산의 문(門)을 막았다고 해서 이름을 문수라고 하였다.

    이 가문이 남원에 정착한 시기는 박문수 손자인 박자량(朴子良) 때다. 조선 초기 한성판윤으로 있다가 숙부인 박포(朴苞, ?∼1400년)가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 대항하다가 패배하여 참수당하였다. 그 바람에 박자량도 좌천되어 전라관찰사로 내려왔다가 처가인 남원 양씨가 살고 있던 남원 수지(水旨)면 초리(草里)에 눌러앉게 되었다. 남원은 한양과 멀리 떨어져 이방원의 감시권에서 벗어난 지역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선비들이 낙향하면 대개 처가 동네에서 정착하는 일이 많았다. 이는 조선 중기까지 여자도 유산을 어느 정도 물려받을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박자량은 초리에 명륜(明倫)과 화락(和樂)이라는 두 서당을 짓고 후배들에게 글만 가르치는 조용한 생활을 한다.

    그러다가 박자량의 후손인 박계성이 충절로 이름을 떨친다. 박계성은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켜 권율 장군을 도와서 금산, 행주 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권율 장군의 추천을 받아 한성판관에 제수된다.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구례 석주관(石柱關)과 산동(山洞) 등지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고, 남원부사 임현(任鉉)의 원군요청으로 율치에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석주관 전투는 임진왜란사에서 가장 처절했던 전투의 하나로 유명하다. 그 부인이 남편의 전사소식을 듣고 자결하였고 계성의 친동생 승성과 종제 언정도 진주싸움에서 순절하였다. 후대에 면암 최익현은 이를 일가삼충렬(一家三忠烈)로 칭하였다.

    죽산박씨는 수지면 초리에서 300년을 살다가 옆동네인 호곡리로 집단 이주한다.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문중사람들만 걸린다는 문질(門疾)로 인해서 죽산박씨들이 여기저기로 이주하면서 일파가 호곡리로 이주한 것이다. 이때가 대략 1700년대 초반이다.

    호곡리로 이사온 뒤에 집안을 비약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하나 있다. 다름아닌 명당에 얽힌 이야기다. 박원유라는 인물은 호곡리에 처음 들어온 박시채의 조카이자 종손이었다. 그는 집안의 문질로 인해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박시채의 집에서 살았다.

    박원유는 해마다 찾아오는 탁발승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하다못해 냉수 한 그릇이라도 공양하였다. 영조 14년(1738) 그가 열두 살 되던 해 가을에 그 스님이 또 찾아왔다. 탁발승은 “그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묏자리는 염려 말라…”며 돌아갔는데 그해 12월2일 아침에 또 찾아와 “간밤에 어머니가 별세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지금 건너산 어떤 곳에 이르면 그곳에만 눈이 녹아 있을 터이니 그곳에 장사지내면 후일에 홍삼백팔이 나고 자손이 흥성하며 부자로 살리라고 예언하고 홀연히 떠났다. 박원유는 어려운 가운데 간신히 그곳에 어머니 묘를 썼는데 스님의 예언대로 증손, 고손대에 벼슬이 났다. 문과(대과라고도 하고 붉은 패를 주니 홍패라고도 한다) 급제 3명, 소과(생원·진사이니 백패를 준다) 8명을 배출하여 죽산박씨의 벼슬이 끊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만석을 누린 거부(몽심재)가 나왔고 사촌·육촌 간의 같은 항렬이 82명이나 번창하였다. 이를 보고 세상사람들은 죽산박씨 집안에 명당바람이 났다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박문수의 자손

    죽산박씨들이 호곡리로 이주한 뒤에 종가도 현재 호곡리 홈실 몽심재의 바로 옆으로 옮겨왔다. 종가의 대문에는 ‘삼강문(三綱門)’이라는 현판이 자랑스럽게 걸려 있다. 삼강에 해당하는 충신, 효자, 열녀가 모두 배출된 집안임을 나타내는 현판이다.

    종가 오른쪽으로는 중시조인 박문수의 불천위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 주련에는 ‘隔洞柳眠元亮夢 登山薇吐伯夷心’이라는 박문수의 시구가 말없이 서 있다.

    몽심재는 종가에서 분가한 연당 박동식의 고택이다. 1700년대 후반에 세워졌다고 한다. 몽심재의 제1대 주인이자 박문수의 16대손에 해당한다.

    2대 주인은 승지(承旨) 벼슬을 지낸 박주현(朴周鉉)이다. 1910년 경술년 국권피탈 직전 일제는 합방의 정지작업으로 각 지역에 민회(民會)를 만들고 남원의 유력인사인 박주현을 회장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박주현이 불응하자 일제는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한 고문을 했고,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몇 달 있다가 사망한다. 박주현이 죽은 후 얼마 있다가 한일합방이 되었는데, 이번에는 박주현의 사돈으로 곡성에 살고 있던 소송(小松) 정재건(鄭在健, 1843∼1910년, 송강 정철의 8세손)이 자결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정재건은 구한말 정언(正言) 벼슬을 지내면서 승지를 하던 몽심재 주인 박주현과 심교(心交)를 맺었던 절친한 선후배 관계이자 사상적 동지였다. 그래서 서로 딸과 아들을 결혼시켜 사돈을 맺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자기를 알아주던 지기이자 사돈이 일제의 고문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고 몇 달 있다가는 국권피탈로 나라까지 망하였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정재건은 선비로서 더 이상 목숨을 유지하며 산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치욕이라고 여겼다.

    그는 사랑채에 들어가 의관을 정제하고 상투를 천장에 매단 다음, 단도로 오른쪽 목을 세 번 찔렀으나 여의치 않자, 다시 왼쪽 목을 두 번 찔러 장렬히 순국하였다. 천장에 상투를 맨 까닭은 죽은 후에도 의관이 흐트러진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으려는 선비의 자존심이었다. 그가 자결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망한 나라의 신하로서 의리상 구차하게 살 수 없고, 나는 맹세코 명치 치하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9월4일에 칼에 엎드려 죽습니다… 형(박주현)이 돌아가셨다니 내 만 가지 생각이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소. 한번 가서 영정 앞에 통곡하지도 못하고 나라가 망하여 이미 극에 달했으니 진실로 이 세상에 차마 욕되게 살아 남을 수 없소. 이제 장차 웃음을 머금고 지하에서나 서로 만날 따름이오.”

    정재건의 유서를 보면서 역시 경술년에 자결한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년)의 절명시 가운데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가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덮고 지나간 천년 세월을 회상하니, 인간으로서 식자층 노릇하기가 정말 어렵구나)’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국권피탈이라는 국가적인 치욕을 당했을 때 전라도의 뜻 있는 선비 2명이 자결하였는데, 한 사람은 잘 알려진 매천 황현이요, 다른 한 사람은 알려지지 않은 소송 정재건이다. 매천은 전남 구례 사람이요, 소송은 전남 곡성 사람이다.

    몽심재의 3대 주인은 2대 박주현의 장남인 박해창(朴海昌, 1876∼1933년)이다. 순절한 정재건의 사위이기도 하다. 품계가 높지는 않지만 학문에 자질이 있는 선비들에게 주는 직책인 비서감랑 홍문관 시강(秘書監郞弘文館侍講) 벼슬을 지냈다. 홈실에서는 보통 비랑공이라고 부른다.

    고조, 증조 때부터 근검절약하여 모은 재산이 비랑공에 이르러 드디어 만석이 되었으며, 박비랑은 남원의 3대 만석꾼에 꼽힌다. 이때가 몽심재 인심의 절정기였다. 그의 땅은 구례 산동까지 뻗어 있었고, 추수기에 쌀을 저장하는 쌀 창고는 구례의 이평과 산동, 남원 읍내 3군데에 있었다고 한다. 그는 소작인들을 후하게 대하였고 그가 죽자 생전에 그에게 신세를 진 영호남의 과객들이 여러 곳에 자발적으로 유혜비(遺惠碑)를 세워 그의 덕망을 기렸다.

    박비랑은 1923년 사재를 털어 몽심재의 청룡자락 뒤편에 초등학교를 건립하였다. 남원에서는 여덟 번째 세워진 초등학교다. 한때 500명이 넘던 학생 수가 지금은 50명으로 줄기는 했지만 지금도 이 초등학교는 여전히 청룡자락 뒤편에 건재한다.

    박해창도 사돈과 관련된 일화가 하나 있다. 박해창이 홍문관에 근무할 때 같이 근무한 동료가 하나 있었다. 경상도 진주의 용암에 살던 진주정씨였다. 당시 조정에서 박해창은 ‘박한림(翰林)’ 정씨는 ‘정한림(翰林)’으로 불렸는데, 영호남을 배경으로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지방색 차이로 인해 자주 다투었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임금이 두 사람을 불러서 “너희가 자주 다투어서 안 되겠으니 사돈을 맺게 해야겠다”며 각자에게 아들이나 딸이 있느냐고 물었다. 마침 전라도 남원의 박한림에게는 아들이 있었고, 경상도 진주의 정한림에게는 적령기의 딸이 있었다. 임금이 제시한 영호남 화합책의 일환으로 두 집안은 반강제로 혼사를 맺어야 하였고, 그 혼사로 인해서 남원 사람들은 진주의 사돈집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근래에 사돈인 정씨 집안 사람들이 사업에 크게 성공해서 박씨 집안 손자들이 진외가인 정씨 집안의 덕을 상당히 보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영호남 화합책으로는 피를 섞는 방법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동시에 확실한 효과를 거두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원불교와의 인연

    만석꾼 박해창은 2남2녀를 두었다. 장남은 일제 때 동경대학을 나왔으며, 차남이 바로 원불교의 원로인 상산(常山) 박장식(朴將植) 교무다. 올해 91세의 고령이지만 자태가 학처럼 고고한 풍모다. 일생을 법도에 맞게 살아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특유의 고요함과 은은한 광채를 풍긴다.

    상산 박장식은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법대 전신)를 나와서 개인사업을 하다가 일생의 스승인 소태산(少太山, 원불교 창시자)을 만난다. 상산은 소태산의 인품과 경륜에 깊은 감명을 받고 31세에 원불교로 출가를 결심한다. 당대의 재벌인 만석꾼의 아들이자 경성법전을 나온 인텔리가 도를 닦겠다고 출가를 감행한 사건은 당시 남원의 뉴스거리였다.

    법학을 전공한 상산은 원불교에 들어와서 원불교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교헌(敎憲)’을 제정하는 데 주력하였고, 상식에 바탕한 원칙을 지키는 삶을 살았다.

    원불교는 잡음이 별로 없는, 비교적 조용한 종단이라는 것이 외부인사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종교단체의 경우 최고책임자인 종권(宗權)이 교체되는 시기에 대체로 잡음이 일어나거나 분파가 발생할 소지가 있는데, 원불교는 1대 소태산에서부터 4대 좌산(左山) 종법사에 이르기까지 종권교체 과정이 매우 원만하고 조용했다. 그것은 ‘교헌’에 대한 구성원들의 신뢰와 준수가 철저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민족종교인 원불교가 교헌에 의한 합리적인 종권 교체 전통을 수립한 데에는 원로인 상산의 투명하고 합리적인 인품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한다.

    또 상산의 원불교 출가는 홈실의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뒤를 이어 죽산박씨 가운데 40여 명이 원불교 교무를 지원한 것이다. 상산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기 집(몽심재 바로 옆 건물)을 원불교 교당으로 개조하였고, 이 교당에서 교무들이 줄줄이 배출되었다.

    상산의 조카인 박제권(朴濟權) 교무도 원불교에 출가하여 일본교구장으로 요코하마에서 20년간 포교를 하였으며, 형님의 손자인 박성기(朴聖基) 교무도 미국 캘리포니아 교당에서 근무하면서 원불교에 바탕한 영성운동을 20년 넘게 전개해 왔다.

    ‘한국의 마더 테레사’ 박청수

    여기서 배출된 교무들 중 서타원(誓陀圓) 박청수(朴淸秀) 교무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의 원불교 여자교무 복장을 하고 전세계의 어려운 현장을 보살피고 다닌다. 그녀가 가는 어려운 곳마다 한국의 따뜻한 인정이 건네진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한국의 마더 테레사’다.

    그녀는 지난 20여 년간 국경, 인종, 이념, 종교를 초월하여 세계 50개국을 대상으로 무지와 빈곤, 질병퇴치에 힘써오고 있다. 오랜 내전으로 지뢰가 많이 묻힌 캄보디아에는 지뢰 제거를 위해 영국의 할로재단을 통해 미화 11만달러 지원했는데, 이 일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지뢰를 제거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천주교 나환자복지시설인 성 라자로 마을을 25년간이나 도왔고, 성바오로 수도회 베타니아집 은퇴 수녀들과도 15년간 교류하고 있다. 1991년에는 북인도 히말라야 설산의 오지인 라닥에 마하보디 기숙학교를 세우도록 후원하였고, 한국의 따뜻한 겨울옷과 담요 등 7만여 점을 3500m 고지에 올려 보내 설산 사람들에게 전달했다. ‘마더 박청수기념자선재단’을 설립하고 게스트룸 36개를 만들어 수입원을 마련해 자체운영을 도왔다. 50병상의 종합병원 ‘마하보디마더박청수자비병원’도 설립하였는데 이 병원은 히말라야 라닥 뿐만 아니라 인도 카슈미르주 전체를 통해 최초로 민간인이 세운 병원이다. 그런가 하면 캄보디아의 정신적 지도자 마하 고사난다 스님을 통해 담마 예트라 평화운동을 지원하고 킬링필드로 지식인들이 희생되어 교육을 담당할 교사가 부족한 그곳에 단기교사 양성기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벌이는 제생의세(濟生醫世: 불쌍한 사람을 구제하고 세상을 치료함) 활동을 모두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정도다. 한국 여자로서 이만큼 세계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도 드물다. 청룡자락이 아미사 안대로 내려온 호두혈의 형국은 여자도인을 배출한다고 하는 풍수가의 예언이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리산 문화권을 왕래하던 영호남의 과객들에게 후한 인심으로 유명했던 몽심재. 그 몽심재의 적선 좋아하던 유풍(遺風)이 원불교를 통하여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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