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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友人像’과‘女人像’

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 글: 구광모

‘友人像’과‘女人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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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22일, 고려화회의 개강일에 사생상(寫生箱 스케치 박스)을 들고 춘곡 선생님을 찾아온 젊은 여인이 있었다. 갸름하고 둥그스름한 계란형의 흰 얼굴에 서글서글하고 맑게 빛나는 눈동자를 굴리며 춘곡에게 인사를 드리는 모습이 매력적이었다. 보통 키에 뛰어난 미인이랄 수는 없으나 세련된 자태와 재기가 넘치는 얼굴이 만 13세의 구본웅에게는 매우 인상적으로 보였다. 춘곡은 그녀가 동경에 유학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이고 한 달에 한 번씩 실기를 지도할 나혜석 선생님이라고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학생들의 소묘하는 모습을 둘러본 후 구본웅에게 특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의 굽은 등을 두드리며 열심히 하면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다고 격려해 주었다. 수업이 끝난 후 한 수강생이 그녀가 3·1독립만세사건 이후 체포되어 5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지난 늦여름에 풀려나 이번 학기부터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로 나가는 만 23세의 노처녀 선생이라고 그에게 알려주었다.

다음 달에 다시 만난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선생은, 구본웅에게 이제 막 그림공부를 시작해 테크닉은 배워야겠지만, 그림에 창의력과 에너지가 담겨 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그간 신체적 불구로 인한 고통과 좌절, 따돌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소년에게 재능이 있고 발전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그녀의 격려와 칭찬은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구본웅이 중학교 2학년 때인 1922년 6월에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조선미전 또는 鮮展)’가 영락정 총독부 상품진열관에서 개최되었다. 그는 고려화회의 선배들과 함께 조선미전 구경을 갔다가 진명여고 학생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한 남학생을 보았다. 이상이었다. 그들은 함께 고희동의 유화가 걸려있는 곳으로 갔다. 그 그림 앞에는 날아갈 듯한 한복을 화사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었다. 그의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돌아설 때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녀는 오랫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구본웅은 무엇에 끌린 듯 그녀 근처로 다가갔다. 그녀가 드디어 돌아섰다. 아! 기생 채경이었다. 이제는 현역에서 은퇴한 처지지만 1910년대에 서울에서 제일간다고 소문났던 그 유명한 채경이 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녀는 그림에서 돌아서자마자 갑자기 가슴 아래로 나타난 이상한 꼽추에 놀랐던 것 같았다. 그녀는 춘곡 고희동의 ‘美人圖(미인도)’들에서 자주 보던 바로 그 미인이었다. 채경은 그림 속의 모델이 아니라 바로 구본웅의 머리 속에 각인된 이상적인 미인이었다. 한참 후 이상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이상도 채경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은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연상의 기생에 넋을 잃어버렸다.

사생상(寫生箱)을 부러워한 이상

1923년 봄에 군병빈 교장은 학년별로 한 명씩 우수한 학생을 뽑아 부상으로 카메라를 주었다. 3학년 대표로는 물론 구본웅이 뽑혔다. 카메라가 아주 귀하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부상으로 받은 사진기는 미국 교회에서 기증한, 그 당시로는 매우 고급품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상을 받은 학생들에게 직접 사진기 작동법을 가르쳐 주고 사진을 찍어서 가져오면 인화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구본웅은 너무 신이 났다. 일요일이면 시내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남대문역에서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뀐 뒤의 경성역 간판도 찍었다. 일본 순사와 헌병도 숨어서 찍었다.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는 기생도 찍었다. 숙부를 따라 YMCA에서 열린 윤심덕 음악회에 가서 윤심덕과 반주자와 청중을 찍었다. 필름을 다 써서 교장실을 찾아가니 교장선생님은 필름을 새로 주셨다. 며칠 후에는 인화된 사진들을 주시며 그가 찍은 사진들이 구도도 좋고 내용도 아주 좋다고 칭찬해 주셨다. 그는 더욱 신이 나서 열심히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2년 뒤에 들은 사실이지만, 군병빈 교장은 사진을 두 장씩 인화하여 한 장은 미국에 우송했다. 이렇게 모아진 사진은 미국 기독교계와 미국 정부가 조선의 생활상과 시설 등을 파악하는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이 일로 훗날 교장선생님은 간첩 혐의로 일본 수사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제2회 조선미전’이 전년도와 같은 장소에서 1923년 5월에 개최되었다. 서양화 분야에서는 나혜석과 김창섭이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4등에 입상했다. 고희동은 제1회 때 조선인 입상자가 없었던 데 항의하는 뜻으로 아예 출품하지 않았다. 이번 조선미전에는 알몸(누드) 작품이 나왔다고 해서 전람회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첫날 기자들에게 공개했을 때 알몸 작품의 촬영을 금지한 것이 오히려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부풀려 놓았다. 구본웅과 이상은 둘째 일요일 오후에 전람회장에 갔다. 구본웅은 카메라를 목에 걸고 이상은 구본웅의 사생상(스케치 박스)을 들어주었다. 이상은 사생상을 무슨 보물상자처럼 껴안았다. 너무나 가지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예상대로 누드화인 김관호(金觀鎬)의 ‘湖邊(호변)’ 앞에는 남자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가운데만 가린 여인이 호숫가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었다. 여자들은 그 앞에서 얼굴을 돌리고 지나갔다. 작품 옆에는 ‘촬영금지’라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이상은 순사 몰래 사진을 찍자고 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이상이 옆을 막아주고 구본웅은 무릎을 구부려 ‘호변’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구본웅의 키가 작은데다 주변에 어른들이 둘러섰으며 이상이 또 막아주었기 때문에 순사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은 악동 같은 눈웃음으로 서로를 축하했다. 그런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마가 여자 알몸 그림 앞에서 왜 서성거리노. 까만 상자 들고 뭐하는 짓이고? 빨리 가그라. 이놈” 하는 어느 노인의 소리에 그들은 황급히 자리를 떴다. 꼬마라는 소리에 구본웅은 들떴던 기분을 잡쳐버렸다. 꼬마라는 단어는 그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자기도 만 열일곱 살이 넘었다고 소리치고 싶었다. 이런 친구의 화난 모습에 이상은 자기에게 한 말이라고 구본웅을 위로했다.

닭똥칠쟁이로 놀림받던 서양화가

1919년에 발족한 고려화회가 1923년 말 고려미술회로 확대되었다. 춘곡 고희동은 회원들에게 1924년 6월1일부터 21일까지 개최될 ‘제3회 조선미전’에 모두 출품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구본웅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경성제1고보에 낙방한 이후 관(官)에서 하는 것에는 학교고 전람회고 간에 근처에도 안가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열등감보다는 거부감이고 좌절감보다는 적개심이었다.

‘제3회 조선미전’ 심사결과가 발표되자 언론들은 “고려미술회가 조선미전의 권위를 독점했다”고 보도했다. 서양화에서 조선인 입상자 8명 중 6명이 고희동, 나혜석, 이종우를 비롯한 고려미술회 교사급이었다. 교사가 아닌 회원도 10명이나 입선했다. 고려미술회는 이러한 성과를 자축하기 위하여 10월21일부터 110점을 진열한 ‘제2회 회원전’을 개최했다. 구본웅도 ‘폐허’를 처녀 출품했다. 미술비평가 안석주(安碩柱)는 고희동과 구본웅을 포함하여 9명의 작가들이 전문가의 눈길을 끈다는 비평문을 발표하면서, ‘폐허’는 “석탑과 나무 따위가 열대의 분위기를 풍기는 독특한 풍경화”라고 평했다. 구본웅은 그림을 배운 후 처음으로 성취감에 취했다. 여기서 얻은 자신감은 다시 열정으로 불타고 집요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구본웅의 아버지 구자혁도 드디어 아들에게 서양화가의 길을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1920년 3월13일자 ‘매일신보’에서 오려낸 임장화(林長和)의 글과 1920년 7월7일자 동아일보에 난 변영로(卞榮魯)의 글이었다. 유미주의자 임장화는 “예술은 현실을 시화(詩化)하여 고통을 공상화하며, 비애를 색채화하며, 미를 종교화하며, 사람을 시화(詩化)함이 아닌가”라고 예술의 신비주의와 순아한 정신세계를 강조했다. 또한 시인 변영로는 미술평론을 겸한 듯 “(우리나라의) 수묵채색화가들이 모두 위대한 선인들을 복사하고 모방할 뿐”이라고 꾸짖으면서 “현금 프랑스 파리 살롱 회화전람회를 보라. 분방한 상상력과 선인의 방식을 무시한 대담한 표현력과 창조력의 결정이 아님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서양화가는 닭똥칠쟁이로 놀림을 받았다. 그래서 구본웅의 아버지는 그림 취미가 있는 외아들에게 닭똥칠을 평생의 직업으로 훈련시키다니, 하며 허탈해 했다. 구본웅은 아버지의 그 표정을 평생 동안 뇌리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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