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6월호

분디나무와 초피나무

  • 글: 이오덕 아동문학가

    입력2003-05-27 10: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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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디나무와 초피나무
    우리 마을에 지난해 농사를 짓기로 작정하고 이사 온 집이 한 집 있다. 그 집 아주머니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서울 근처에 살 때 등산을 좋아해서 남한산성에 자주 갔는데, 한번은 산길을 올라가다가 같이 가던 한 사람이 어떤 나무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산초나무라고 하더란다. 귀한 양념이 되는 초피 열매를 맺는 산초나무가 바로 이것이구나 싶어 그 뒤로 산에 올라갈 때마다 그 나무만 찾아다니면서 열매를 따 모았고, 그 열매 따는 재미로도 산에 자주 오르게 되었다. 따 모은 열매가 몇 되나 되었다.

    그런데 양념을 만드는 방법도 몰랐고, 열매가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할까 하다가 ‘옳지, 고향 어머니께 갖다드리면 귀한 선물이 되겠구나’싶어 거창에 계시는 친정어머니께 갖다드렸더니, 어디서 이렇게 많이 따 모았느냐면서 좋아하셨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양념으로 먹기보다 시장에서 팔면 돈이 되겠다 싶어 장날에 시장에 가지고 갔다. 장바닥에 펴 놓고 이것이 초피라고 했더니 사람마다 귀한 것을 본다면서 구경하는데, 어떤 사람이 그것을 몽땅 다 사갔다. 그래서 돈을 벌게 해준 딸에게 고맙다고 전화로 알려왔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을 근처 산에 흔하게 있는 분디나무를 보고 그 아주머니가, 여기도 귀한 양념이 되는 열매가 달리는 산초나무가 있다고 좋아하면서 들려준 이야기다. 그래서 그 아주머니한테, 이 나무는 초피나무가 아니고, 기름을 짜는 분디라는 열매를 맺는 분디나무라고 했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게 틀림없이 남한산성에서 열매를 딴 나문데…” 했다. “아주머니 말이 맞아요. 남한산성에서 땄다면 이 나무와 같은 나무란 것이 확실하지요. 그런데 이 나무 열매는 양념이 안 됩니다. 옛날에는 이 열매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켰어요. 기름 짜는 열매를 맺는 분디나무와 양념감이 되는 열매를 맺는 초피나무는 아주 비슷해서 잘 알아낼 수 없어요.” “그럼 산초나무는 어떤 나문가요?” “그건 잘못 쓰는 한자말입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분디나무와 초피나무가 어떻게 다른가를 자세히 말해주었더니 그때야 아주 크게 놀라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분디를 초피로 알고 그렇게 열심히 따 모으고, 그걸 귀한 선물이라고 어머니께 갖다 드리고, 그 어머니조차 그런 줄 알고 장에 가서 팔고, 그것을 산 사람도 초피로 알고 비싼 돈을 주고 사가서 양념 재료로 더 좋은 값을 요릿집 같은 데서 받으려고 했구나 싶어, 한동안 멍하니 말이 없었다.

    대관절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 까닭은 분디나무와 초피나무가 아주 비슷해서 분간하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 두 나무를 우리말 그대로 말하지 않고 그만 산초(山椒)라는 한자말 한 가지만 써서 똑같이 산초나무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못된 한자말을 쓰기 때문에 우리가 사물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올바른 표현도 할 수 없게 되고, 잘못된 행동을 하고 마는 일이 얼마나 많겠는가? 하필 이런 나무 이름뿐 아니다. 풀 이름, 곡식 이름들이 그렇고, 사람이 먹고 입고 자고 일하는 모든 행동을 나타내는 온갖 풍성한 우리말들이 한자말에 잡아먹히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혼란, 잘못된 앎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 온갖 학문의 이론, 말로 빚어내는 예술이라는 문학이 우리말이 될 수 없는 한자말을 뼈대로 해서 이뤄져 있다면 이보다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 나무 이야기를 이어 보겠다. 이것은 보통으로 살아가는 일반 국민들만 이렇게 두 나무를 혼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말을 연구한다는 사람들,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까지 이런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는 분디나무와 초피나무와 산초라고 되어 있는 나무를 사전에서 어떻게 말해놓았는가 싶어, 온갖 우리말 사전을 있는 대로 다 찾아보았고, 백과사전과 식물도감도 있는 대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전마다 설명해놓은 말이 달랐다. 공통되는 것은 ‘산초’라는 한자말 나무 이름이 표준으로 되어 있다는 것뿐이었다. 어떤 사전에는 분디나무를 산초나무라 했고, 어떤 사전에는 초피나무를 산초나무라 했다. 그리고 초피나무와 분디나무를 잘 구별할 수 있도록 요령 있게 설명해놓은 사전은 보지 못했다. 북녘에서 낸 사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여기서 분디나무와 초피나무가 어떻게 다른가를 말해보겠다. 이것은 내가 책을 읽어서 머리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지로 산에서 보고 그 열매를 딴 삶에서 알고 있는 것이다. 우선 나무 이름인데, 내 고향 경북 청송에서는 분디(또는 분지)나무를 난디나무라고 했다. 내가 어렸을 때는 가을에 농사일을 대강 마치고 추수를 할 때까지 잠시 틈을 내어 모두 산에 올라가서 꿀밤(도토리)을 땄는데, 꿀밤을 따러 이 산 저 산 다니다가 난디나무를 만나면 난디도 함께 땄다. 난디가 잘 익어서 그 껍질이 갈라지면 윤기 나는 새까만 열매가 진한 향기를 뿜는데, 그걸 따 모은다. 난디는 기름을 짜서 등잔불을 켰다. 접시에 담아서 거기다가 문종이로 심지를 만들어 담가서 당황(성냥)으로 불을 붙이면 온방이 환하게 밝았다. 석유가 들어오기 전에는 거의 모든 집에서 이 난디 기름으로 등잔불을 켰고, 석유가 들어온 뒤에도 석유 호롱불과 함께 오랫동안 이 난디 기름을 썼다.

    요즘은 이 열매를 어떤 약으로 쓴다고도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좀 덜 익었을 때 따서 된장에 넣어두면 된장 맛이 아주 좋다. 간장에 넣어도 먹을 만하다. 앞에서 어느 아주머니가 남한산성에서 따 모았다는 열매가 바로 이 분디나무의 열매였던 것이다.

    다음은 초피나무인데, 곳에 따라 조피나무, 지피나무, 쥐피나무, 죄피나무라고도 한다. 초피는 기름을 짜는 것이 아니고 양념으로 쓴다. 고추같이 맵고 탁 쏘는 맛이 나기 때문이다. 이 초피나무가 내 고향에는 없었다. 내가 초피나무를 본 것은 영덕 지방의 산에서다. 처음 그 나무를 보았을 때는 난디(분디)나무인 줄 알았다. 나무의 크기며 뻗어난 가지며 잎과 열매까지 조금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피나무가 어째서 다 같은 경북의 북부지방인데 청송에는 없고 영덕에는 있는가?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 초피나무는 바다가 가까운 산에만 있다고 한다. 바닷바람을 맞아야 이 나무가 산다고 하는데 정말 그런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평안도나 함경도 바닷가 산에도 초피나무가 있어야 할 터인데, 북녘에서는 없는 줄 안다.

    분디나무와 초피나무가 아주 비슷해서 알아보기 어렵다고 했는데, 쉽게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 잎이 나 있을 때는 그 잎을 따서 입에 넣어보면 된다. 분디는 분디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냄새가 날 뿐이지만, 초피는 맵고 톡 쏘는 맛이 난다. 그리고 열매가 맺었을 때는 그 열매를 맛보아도 그렇다. 만약 겨울이나 이른봄이 되어 잎도 열매도 없을 때는 가지에 돋아나 있는 작은 가시를 살펴볼 일이다. 분디나무는 가시가 하나씩 어긋나 있지만, 초피나무는 두 개씩 마주 나 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책으로 아무리 애써 알려고 해도 이 두 나무를 구별할 수 없다. 두 나무를 잘 알고 있는 나 같은 사람도 사전에 나와 있는 나무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 그만 뭐가 뭔지 머리 속이 뒤죽박죽으로 되고 마니 말이다. 모든 우리말 사전이 그렇고, 식물사전이고 백과사전이고 도감의 설명이 죄다 그렇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 설명해놓은 말이 어려운 한자말로 되어 있어서도 그렇지만, 같은 나무를 말해놓은 것이 다르고, 또 모든 사전에서 우리말 나무 이름을 쓰지 않고 산초라는 한자말을 표준으로 해놓았기 때문에 어떤 사전에서는 분디나무를 산초나무라 했는데 다른 사전에서는 초피나무를 산초나무라고 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학생들이 방 안에서 책으로 자연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머리만 썩힐 뿐인 바보 같은 짓인가를 알 수 있다.

    앞에서 산초란 말이 또 일본말을 따라가는 말이라고 했는데, 그 얘기를 좀 하고 싶다. 벌써 10년쯤 지난 일인데, 우리 아이가 이 근처에 조그만 농산물 가공 공장을 차려서 그 제품을 가락동 시장에도 보내고 더러는 일본에도 보내고 했을 때다. 한 번은 일본사람이 찾아와서 어떤 나뭇가지를 보이면서 이런 나무가 이 근처 산에 있는가 묻더란다. 그것은 분디나무였기에 아, 그런 나무는 얼마든지 있다면서 그 일본사람을 데리고 가까운 산에 가서 분디나무를 보여주었더니, 그 일본사람이 잎을 뜯어 코에 대보고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아니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이거 산쇼오(山椒) 아닙니다.”

    하고는 자기가 가져온 나무의 잎을 뜯어서 한번 냄새를 맡아보라고 하는데, 코에 대보았더니 그것은 분디나무가 아니고 초피나무였다. 그래서 여기는 그 나무가 없지만 다른 데 가면 있다고 했더니 그 열매를 따 모을 수 있는 대로 모아달라고 해서 그렇게 약속을 했다. 그 뒤로 초피를 따러 다녔는데, 지리산에도 초피나무가 있었고, 내 고향 청송에서도 100m가 넘는 보현산에는 초피나무가 있어서 그 열매를 두 트럭이나 모아서 일본으로 보냈다. 지리산이나 보현산은 바닷가에 있는 산이 아닌데 어째서 초피나무가 있을까? 아주 높은 산이라면 바다에서 좀 멀리 있어도 바닷바람을 맞을 수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일본말 사전에는 그 어느 사전에도 ‘산쇼오(山椒)’나무만 올려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초피나무라고 하는 나무인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일본말과 일본글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고부터는 그만 이 ‘산쇼오’곧 산초나무가 그대로 초피나무라고 알려져버렸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은 실제로 분디나무와 초피나무를 구별할 줄 모르고, 또 초피나무보다 분디나무가 더 널리 각 지방에 있으니 그만 산초란 것이 분디로 되기도 하고 초피로 되기도 해버렸다.

    일본에서는 ‘산쇼오’, 곧 초피나무만 있고 분디나무는 없는가? 일본은 섬나라가 되어서 아마도 초피나무가 많을 것이다. 어쩌면 분디나무는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 까닭은, 사전에서 ‘산쇼오’를 설명하면서 그와 비슷한 나무가 있다는 말은 어느 사전에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가령 분디나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나무라 사람들이 그 나무 이름조차 모르는 듯하다. ‘이누산쇼오(개산초)’란 나무가 있는데, 그것이 우리나라에 있는 분디나무인지 모른다. 우리는 옛날에 분디 기름을 등잔불로 소중히 썼기에 분디나무를 귀하게 여겼지만, 일본은 사방이 바다가 되어서 바다에서 잡은 고기 기름으로 얼마든지 등불을 켤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래서 산에 있는 나무 열매를 따서 기름을 짤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분디나무 같은 것은 그 이름조차 ‘이누산쇼오(개산초)’라고 해서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최근에 일본의 어느 문학작품을 우리말로 옮겨놓은 책을 읽었더니 거기 산초나무가 나왔다. 원문은 보나마나 ‘산쇼오(山椒)’를 그대로 따라 써놓은 것이다. 우리가 한자말을 쓰게 되면 이렇게 해서 자주 일본말을 따라가게 되고, 그래서 초피나무는 산초나무가 되고, 그런데도 실제로는 초피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모르니 거의 모든 사람이 분디나무를 산초나무라고 알고 있다. 이런 말의 혼란을 일으킨 책임은 죄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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