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풍류가 흐르는 강, 영험이 깃든 산 경남 밀양

  • 입력2003-06-23 14: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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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류가 흐르는 강, 영험이 깃든 산 경남 밀양

    밀양강변 대밭에 있는 아랑사당 주변에는 나비와 들장미가 지천이다

    바람이 풍경(風磬)을 울리는가, 아니면 풍경이 바람을 부르는가. 산속 요사채에서 맞는 밤은 그야말로 청아하다. 먼 듯 가까운 듯 나무들이 울고 계곡이 우릉대는 소리 또한 낮고 중후한 배경음으로 깔린다.

    찰그랑거리는 풍경 소리에 마음의 티끌이 털려 나간다. 어쩌다 신발 끄는 소리라도 들린 듯싶어 문을 열면 바람만 가볍게 문풍지를 간질이고 있다. 졸졸대는 약수터 옆 돌계단을 지나 대광전 이르는 길에 밝혀놓은 보라색 불빛도 어슴프레하다. 객의 마음은 벌써 명징의 세계로 달려간다.

    표충사 감싸안은 불기둥

    산의 이름은 재약산, 절은 표충사다. 산에 덮인 풀이 모두 약초요, 흐르는 물 또한 약수란 뜻에서 재약(載藥)이란 이름을 얻었다. 원래 죽림사, 영정사로 명명됐던 절은 임진왜란·정유재란 때 승병을 이끌어 왜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사명당 송운대사의 사당(祠堂)을 이 곳으로 옮기며 표충사란 이름을 갖게 됐다.

    표충사 주지는 혜오스님이다. 경남 밀양시내에서 불과 20분 거리여서 저녁 공양(식사) 전에 도착한다고 했으나 경관에 취한 우리 일행이 해질 녘에야 절에 닿자 스님은 약간 삐쳐 있었다. 방에 들인 뒤에도 차만 서너 잔 거푸 권할 뿐 좀처럼 말머리를 잡지 않는다.



    “절 입구 상수리나무가 승군(僧軍)처럼 도열했고 그 사이로 흐르는 내는 마치 세월을 담고 있는 듯해 그걸 감상하느라 늦었다”고 지각 변명 겸 절 찬양을 하자 스님은 그제서야 천천히 말문을 연다.

    “잘 오셨소. 이 절은 정말로 진기가 서린 곳이오, 작년에 내 눈으로 그걸 직접 확인했다오….”

    작년 12월7일 오후 6시경 저녁 공양을 마치고 주지실로 막 들어서는데 아래켠에서 불이 났다며 소동이 일었다는 것이다. 놀라 나가보니 가람 입구 쪽 표충사당에서 벌건 불기둥이 하늘로 솟았고 이내 경내 맨 위켠 관음전에서도 불기둥이 솟더니 어느덧 두 쌍이 어우러져 무지개처럼 절 전체를 감쌌다는 것이다.

    “땅의 기운과 우주의 기운이 합해졌을 때 진기가 불기둥처럼 하늘로 솟구친다고 그래요. 중 생활 몇십 년 만에 그런 영험스런 일은 나도 처음 보았다오.” 신심이 깊은 사람이야 스님의 설명에 어찌 토를 달겠냐만 기자는 그럴 수 없는 법. “혹시 사진을 찍었다던가 뭐 그런 증거라도 없습니까?”고 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스님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사진을 찍었는데 빼보니까 해를 찍은 것처럼 그냥 허옇게 나와요”라고 한다. 그러더니 “사는 데는 직견과 곡견이 있는 법. 있었으면 있었던 것이지 그걸 없다고 의심하거나 있었음을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이 다 부질없는 일 아니겠오”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어쩐 일인가. 요사채에 들어서도 잠은 오지 않는다. 바람결 풍경 소리에 마음은 한없이 산사 주변을 떠돈다. 창문을 여니 운무가 맞배지붕을 누를 듯 내려앉고 있다. 석등에서 나온 가물가물한 빛이 그런 운무와 어울려 무지개처럼 절을 감쌌다. 그예 화백을 깨워 절 밑 주막에 내려가 약초술을 대여섯 사발 들이켜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풍류가 흐르는 강, 영험이 깃든 산 경남 밀양

    표충사에서 솟았다는 불기둥은 혹 이런 모양새였을까

    굵은 빗줄기 소리에 잠이 깨었다. 표충사 경내 37개 누·전·각·당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와 처마를 타고 내리는 낙수 소리…. 가람 전체를 휘감은 대나무밭을 어루고 핥으며 내려앉는 비에 후두둑 놀라 떠는 댓잎의 탄식…. 이 모든 것이 잘 짜인 오케스트라처럼 어우러진다. 멍이 풀리듯 시원한 가슴을 헤집고 새벽 예불을 드리는 스님들의 목탁소리가 끊어질 듯 끊어질듯 이어진다.

    사명대사는 13세에 출가, 선문에 들었다가 어느 여름날 소나기에 지는 낙화를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이 절에서 열반한 조계종 초대종정 효봉스님은 “무(無)” 한마디를 남기고 입적했다던가. 비는 오는데 가야할 길은 멀다. 어제저녁 그토록 감싸안는 듯하던 산사는 오는 사람 반기지 않았듯 떠나는 손에게도 아쉬움을 표하지 않는다.

    ‘오늘 아침 한 조각 구름 서쪽으로 날으더니 / 굴리던 염주소리 문득 끊어지고 / 마지막 다만 한마디 ‘무’ 라는 말씀 남겨놓고 / 가부좌 하신 채로 어디로 가시는고’.

    효봉선사 비문을 소리내어 읽으며 절을 내려오는데 동행한 밀양신문 장현호 기자가 “너무 감탄하지 마세요. 밀양엔 보고 감탄할 게 아직 많습니다”며 소맷자락을 끈다.

    그의 말은 맞았다. 표충사를 나와 삼랑진 읍으로 내려갔다가 왼쪽 산길로 꺾어 30여 분을 올라가 만난 것은 경이, 그 자체였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꼬부랑 산길이 지겹게 느껴질 무렵 느닷없이 그 너덜겅이 나타났다. 가도가도 끝이 없을 것 같던 숲이 어느 순간 뚝 끊기더니 크고 작은 물고기 형태의 검은 돌밭이 한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풍류가 흐르는 강, 영험이 깃든 산 경남 밀양

    비 오는 날의 밀양시내는 고즈넉하다

    만어산의 불영경석이다. 수천 수만 개의 돌이 하나같이 머리를 바싹 쳐들었다. 산 위에서 울리는 소리를 귀담아들으려는 모양 같기도 하고 숨이 막혀 너덜겅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치솟으려 발버둥하는 모습 같기도 하다. 만어산 정상께부터 중턱까지 100여 m. 울퉁불퉁 뻗어나간 너덜겅은 온갖 형상의 박제 물고기를 산 가득 심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돌은 두드려보면 경쇠소리가 난다. 돌 하나하나가 다 고개를 치켜든 것도 신기한데 몸에선 쇳소리가 나니 문득 이 돌들이 모두 살아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인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이 모든 돌을 다스리고 호령했음직한 불영석과 마주하는 순간 극에 달했다. 말로는 도무지 설명이 불가능한 어떤 신비를 만났을 때의 떨림이 뱃속 깊숙이 전해진다.

    풍류가 흐르는 강, 영험이 깃든 산 경남 밀양

    사명당 기념비와 그 옆을 지키고 선 향나무

    만어사 미륵전에 ‘모셔진’ 불영석은 있는 그대로만 말하면 상체가 앞으로 기운 형태의 너럭바위다. 높이 7.8m. 두꺼비가 머리를 내밀고 좌정한 듯한 이 바위의 신비는 그를 향해 고개를 치켜든 너덜겅의 수만 돌들을 장중하게 굽어보는 압도적 자세에 담겨 있다. 가슴팍에는 은은한 붉은 색이 감돌아 검은 물고기 돌들을 다 포용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옛 사람들은 이 불영석과 너덜겅의 돌들을 묶어 “동해의 고기와 용들이 부처님의 설법에 감동해 만어산에 올라와 돌이 되었다. 불영석엔 은은한 부처님 미소가 흐르고 물고기 돌들은 설법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고개를 쳐들었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럼 돌에서 나는 쇳소리는? 그건 부처님의 말씀과 자비가 몸 안 가득히 찼다는, 그래서 공양하는 종소리를 내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겠는가.

    아랑이 나비되어…

    만어산을 내려와 밀양강을 따라 시내로 들어오는 길목에 들장미가 화사하다. 비 그친 뒤 나온 해조차 촉촉이 젖은 장미의 아름다움이 눈부신지 구름 속으로 이내 몸을 가린다. 비 온 뒤에는 잠자리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법인데 이곳 밀양에선 어쩐 일인지 나비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안내하는 장기자는 “나비들은 바로 아랑의 넋”이라고 설명한다.

    풍류가 흐르는 강, 영험이 깃든 산 경남 밀양

    만어사 미륵전의 불영석과 검은 물고기 돌

    조선 명종 때 고을 부사의 딸 아랑낭자가 유모의 꾐에 빠져 밀양강변에 달구경을 나왔다 치한의 습격을 받았다.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지만 시신은 유린돼 영남루 밑 울창한 대밭에 버려졌다. 딸을 잃은 부사는 실의에 빠져 자리를 옮겼고 이후 부임하는 부사들마다 첫날밤 의문의 죽임을 당하는 괴변이 벌어졌다.

    다른 전설처럼 아랑낭자 전설의 결말도 비슷하다. 담 센 부사가 부임, 낭자의 원혼으로부터 사연을 듣고 범인을 잡아들인다. 낭자의 혼이 나비가 되어 치한의 어깨 위에 앉은 때문이다.

    사건 이후 400여 년이 지났다. 낭자의 원혼을 달래려 밀양강변 대밭에 세운 아랑사당엔 언제나 나비들이 날고 있다. 들장미가 아름답다한들 여기선 하늘하늘 나는 나비의 멋에 비하지 못한다. 한을 벗은 아랑이 나비가 되어 풍류와 운치가 흐르는 강변 누각을 노니는데 어떤 아름다움이 그를 당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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