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7월호

하나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

  • 입력2003-06-26 10: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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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
    내가 있는 이 무너미 마을은 지금 스무 집쯤 된다. 아침 저녁으로 쳐다보는 해발 640미터의 부용산이 사방으로 밋밋하게 그 산줄기를 문어발처럼 수없이 뻗어 놓아서, 그 산등성이마다 골짜기마다 크고 작은 마을들이 마치 숨바꼭질하듯이 숨어 있다. 무너미는 그런 마을 가운데 하나다. 모두 고추 농사와 담배 농사를 하여 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70대에서 80대까지의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들이 예닐곱 분쯤 있어서 농사철이면 모두 밭에 나가서 큰 일꾼 노릇을 했다. 그런데 작금년에 와서는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나버려서 마을에는 일꾼을 얻지 못해 담배 농사고 고추 농사고 많이 줄이게 되었다. 젊은이들이라 해봐야 30대가 둘쯤이고, 거의 모두 50대와 60대지만, 이런 남정네들은 기계로 무엇을 실어 나르거나 한꺼번에 후닥닥 해치우는 일이나 잘할 뿐, 밭고랑에 앉아서 온종일 풀을 뽑거나 고추를 따는 일은 대체로 싫어한다. 허리가 꼬부라진 할머니들은 일을 빨리 하지는 못하지만 엎드려서 쉬지 않고 꾸준히 하니 젊은이들보다 더 낫다. 그런 노인네들이 다 없어졌으니 농사일이 순조롭게 될 수 없다.

    이 할머니들은 거의 모두 자식들이 없거나 있어도 먼 도시로 가버려 혼자 살았다. 채소고 담배고 고추고, 돈벌이를 하려고 농사를 짓는 집들은 집마다 빚을 산더미처럼 지고 사는데, 이 할머니들은 제 땅 한 평 없이 오두막집에 살아도 빚 없이 지낸다. 농사철에 품을 팔아 그 돈으로 한 해를 사는 것이다. 오히려 도시에 나가 있는 자식들이 가끔 와서 늙은 어머니한테서 돈을 뜯어가는 경우가 예사로 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그런 할머니 가운데 한 분의 이야기를 하겠다.

    하나 할머니, 이것이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할머니 이름이다.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성조차 모른다. 하기야 옛날부터 아낙네들은 이름이고 성이고 없었다. 서울서 왔으면 서울댁이고, 전주서 왔으면 전주댁, 경상도 한실 골짜기에서 왔으면 한실댁이라고 했을 뿐이지. 그런데 무슨 댁이 아니고 하나 할머니라고 하게 된 것은, 셋째며느리가 낳아놓은 손녀 하나를 데리고 산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셋째아들이 죽고 나서 아이 엄마가 어디로 가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그 손녀가 초등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 아이 엄마가 나타나 그 아이를 데리고 가버렸다.

    할머니 나이가 올해 85세. 지금은 회갑이 다 된 첫째며느리와 단둘이 살고 있다. 지난해까지 농사철이면 날마다 이웃집에 불려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는데, 워낙 나이가 많아서 힘이 들기도 하지만 비슷한 나이의 노인들이 다 떠나버려서 혼자 그렇게 일을 할 수가 없어 올해부터는 들일을 그만두고 서울 사는 막내딸 집에 한참 가 있다가 이곳에 와서 첫째며느리와 한참 지내다가 한다. 다음은 할머니가 살아온 이야기인데, 지난해 우리 집 고추밭을 매면서 우리 아이한테 들려준 것이다(이 마을에서 농약을 안 뿌리고 호미로 김을 매는 집은 우리 집뿐이다).

    할머니는 이북 출신이었다. 고향이 평양 근처였는데, 땅을 많이 가진 지주로 일제 시대에도 잘살았던 모양이었다. 해방이 되자 북녘에는 곧 소련군이 들어와서 공산주의 세상이 된다고 해서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오게 되었다. 해방 직후라 아직 38선이 막히지 않아서 누구든지 넘나들 수 있었던 것이다. 소 열 몇 마리에 쌀과 귀중품을 싣고 한 식구가 모두 넘어왔는데, 그때 할머니 나이가 열대여섯쯤 되었던 처녀였다. 식구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가 하나.



    월남한 뒤로는 서울에서 자리를 잡았고, 곧 오빠가 결혼을 하고 자기도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6·25의 난리판이 벌어졌다.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죽고 오빠도 죽고 남편까지 잇달아 전사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어머니와 올케와 자신 이렇게 세 과부뿐이었다. 넉넉하던 살림도 아주 거덜나서 이제는 그날그날 입에 풀칠을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어찌할 수가 없어 어머니가 아주 가슴아픈 결심을 하고는 딸과 며느리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이대로 같이 있다가는 모두 굶어죽을 수밖에 없다. 이제부터 따로 헤어져서 저마다 살 길을 찾아 어디든지 가도록 하자.” 이래서 딸은 딸대로,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정처 없이 가게 되었다. 그 길로 딸, 곧 이 할머니는 이곳 저곳 떠다니다가 마지막으로 표착한 곳이 이곳 충북의 산골짝 무너미 마을이었고, 이 마을에서 다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재혼을 한 상대가 방앗간(정미소)에서 일하는 기술자였지만, 재산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뱅이라 온 마을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갖다주어서 혼례식을 치렀다. 그러고는 세월이 흘러 여섯 남매-아들 넷, 딸 둘을 낳아 길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시밭길로만 걸어온 할머니의 험난했던 삶은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나서도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그 길이 험악해서 사람으로 마땅히 지녀야 할 정신마저도 흐트러지게 될 정도였다. 그 방앗간 기술자라는 남편은 알고 보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술고래였고 노름꾼 이었다. 맏아들이 좀 자라나서 농사일이라도 할 만하니까 남의 집 머슴으로 보냈다. 미리 앞당겨 한 해 새경(한 해 동안 일해준 값으로 주인이 머슴에게 주는 돈이나 곡식)을 받는다는 조건으로 아들을 그렇게 머슴살이를 시켰다. 그렇게 해서 새경을 미리 받으니 제대로 온전히 받지 못했고, 조금밖에 못 받은 그 돈조차 아비는 술과 노름으로 다 날려버리곤 했다. 둘째아들도 셋째아들도 그렇게 해서 머슴살이를 시켰다. 그런 남편과 그렇게 남의 집에 팔려간 자식들을 두고 살았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애간장이 탔겠는가. 그러다가 맏아들은 이 마을에서 장가를 갔는데, 그 아버지를 닮아서 술주정뱅이로 살다가, 아이 셋을 남기고 끝내 술로 죽었다. 이 마을 윗돔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 세 아이를 키우던 맏며느리는, 이제 큰딸이 시집을 가고, 큰아들은 도시에 가서 공장 노동을 하고, 둘째아들은 군에 가버려서 혼자가 되어, 아랫돔에 역시 홀로 있는 시어머니인 이 할머니한테 와서 함께 지내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할머니의 둘째아들도 셋째아들도 그 아버지를 닮아 술만 마시고 살았다. 모두 장가를 갔지만 둘째아들은 술에 중독이 되어 사람 노릇도 못하고 죽었고, 그 며느리는 아들 하나를 데리고 어디로 가버렸다. 셋째아들은 술을 하도 먹어서 부인이 도망을 가버린 뒤에 역시 술로 죽었다. 바로 이 셋째며느리가 버리고 간 딸아이를 데리고 키웠는데, 그래서 하나 할머니가 된 것이다. 그 뒤로 그 딸아이(곧 손녀)마저 제 엄마가 와서 데리고 가버렸다.

    할머니의 남편인 그 술고래가 아직 살아 있을 때였다. 맏아들 내외하고 한 집에서 살고 있었는데, 며느리가 아들아이를 낳았다. 손자가 난 것이다. 그런데 시어머니가 또 딸을 낳게 되었다. 이 할머니는 부끄럽기도 하고, 그보다는 워낙 먹을 것이 없는 터라 아이를 키워낼 자신이 없어서 그만 자기가 낳은 그 딸아이를 부엌에 안고 나가서 목을 졸라 죽이려고 했다. 두 손으로 아이 목을 꼭 조르고 있는데 며느리가 달려가서 이래서는 안 돼요 하고 울면서 말렸고, 그래서 죽을 뻔했던 아이가 살아났다. 맏며느리는 자기 자식과 시어머니가 낳은 그 딸아이까지 같이 키웠다. 밭고랑에 엎드려 김을 매던 하나 할머니는,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식을 목 졸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을 하면서, 잡고 있던 호미를 거꾸로 돌려 그 호미 자루와 호미 날 사이의 목 있는 데를 두 손으로 꽉 움켜쥐는 시늉을 해 보이더라고 했다.

    이 하나 할머니가 낳은 딸 가운데 막내는 이렇게 해서 죽다가 살아났는데, 맏딸 이야기가 또 있다. 맏딸은 처녀 때 집을 나가버렸다. 스무 해도 넘게 소식이 없었는데, 지난해 어떤 고등학생이 와서 이 무너미 마을에 우리 외갓집이 있다는데 하고 찾더란 것이다. 그래서 얘기를 해보니 그 옛날 집을 나간 이 할머니의 맏딸이 낳은 아들이었고, 그 나이가 열여덟 살이나 되었다. 그래서 뜻밖에 만난 그 외손자를 따라 딸을 찾아갔더니, 전라도 어느 바닷가 시골 마을이었고, 그다지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바다에서 고기도 잡고, 농사도 지으면서 살고 있더라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지금 하나 할머니는 맏며느리와 단둘이 살고 있지만, 가끔 서울에 있는 막내딸네 집에 가 있기도 한다. 자식들이 다 죽고, 어디로 가버리고 하였지만, 그 막내딸만은 친정어머니한테 효성이 지극하다고 한다. 목을 졸라서 죽이려고 했던 그 딸자식이 도리어 효녀가 된 것이다.

    함께 사는 맏며느리는 성이 황씨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황씨가 아닌 모양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그 어머니가 황씨 집으로 개가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어머니를 따라가서 의붓아버지의 성을 따라 황씨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 마을 사람들이, 네 성은 신씨인지 김씨인지 모른다고 일러주더라고 했단다.

    고추밭을 매면서 들려주는 할머니의 이야기가 대강 끝났을 때, 듣고만 있던 우리 아이가 할머니한테 이북에서 살던 어렸을 때 일이 생각나면 들려달라고 했더니 이런 말을 하더라 했다. “왜, 거, 새벽에 동쪽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별 있지요? 그 별, 샛별을 우리 고향에서는 김일성 별이라 했어요. 모두 그랬어요.” 역시 북녘에서는 김일성이란 전설 속의 영웅을 모두 믿고 있었구나 싶다.

    자기 자식을 목 졸라 죽이려고 했다면 얼마나 지독한 사람이겠는가 하고 누구나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참으로 정이 많은 분이다. 벌레 한 마리를 밟지 않으려 한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그것을 잊지 않고 반드시 그만한 갚음을 해준다. 이웃집 농사일을 도와줄 때도 자기 집 일처럼 언제나 성실하게 한다. 그리고 이 마을 할머니들은 모두 이 하나 할머니 같은 착한 분들이었다. 이분들이 이제 다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뒤로 젊은이들판이 되었는데, 거의 모두가 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도시에서 자라나거나 도시물을 먹은 이 젊은이들은, 앞서 가버린 할머니들과는 아주 딴판으로, 정반대로 살고 있다.



    지금까지 할머니 한 분이 살아온 이야기를 대강 설명하듯이 적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거의 모든 집들이 그 사정은 집마다 다르지만 온갖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사실은 이 마을뿐 아니고 이웃에 있는 어떤 마을도 다 그렇다. 내가 듣고, 보아서 알기로 경상도고 전라도고 강원도고, 어느 산골에 가도 바닷가에 가도 이런 사람들로 우리 겨레가 이뤄져 있다. 이른바 풀뿌리 백성들의 참모습이 이러하다. 이들이 흘린 땀과 피가 우리 강산을 지켜주고, 이 겨레의 목숨을 이어오게 하였다. 이들이 산과 들에서 일하면서 풀어낸 이야기와 부른 노래가 진짜 우리 겨레의 말이요 문학이요 예술이다. 양반들이 방안에서 읊은 한시가 우리 것일 수 없고, 구중에서 부르던 노래가 참된 우리 겨레의 것일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책만 읽은 사람들이 머리로 만들어내고 있는 문학이란 것, 예술이란 것이 정말 어떤 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땅에 소리 없이 묻혀갔고 묻혀가는 우리 백성들이 살아온 역사에서 오늘날의 이 뿌리 없는 도시 문화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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