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영계곡의 물소리는 깊고 웅장하다
한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불영사 계곡도 1984년 울진-영주간 36번 국도가 확장 포장된 뒤에야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에서 서면 하원리까지 15km에 이르는 이 협곡은 신선이 구름을 타고 노닌 곳이 예구나 싶을 정도의 선경이다. 왕피천이 심하게 휘돌며 급한 물살을 이루고 주변 산을 깎아먹으면서 만든 100m쯤 높이의 기암절벽이 돌고돌아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해발 1000m가 넘는 통고산의 온갖 산자락을 타고 내려와 합류한 물이 우르릉 쿵쾅 소리를 지르며 내달리고 수백 평은 됨직한 너럭바위들도 그런 물의 기세에 하얗게 질린 듯 말을 못한다. 워낙 계곡이 깊고 물소리 또한 웅장해서인가, 새들조차 계곡으로 내려갈 엄두를 못 내고 길가 전봇대에 몰려 앉아 천리 땅 끝을 망연히 내려본다.
우리의 화백도 불영계곡의 웅장함에 넋을 놓았다. “어떤 붓으로도 이 깊고 푸르고 무겁고 듬직하며 상상을 끊는 절경을 다 그려내진 못할 것”이라더니 “멋진 바다에 멋진 내륙의 협곡까지 왔으니 작업일랑 나중에 생각하고 그냥 쉬었다 갑시다” 하며 붓을 내린다. 문득 우리의 화필기행도 이 울진에서 끝날 듯한 예감이 든다.

절집 연못의 자라들은 비구니의 심성을 닮은 듯하다
애초 절터 연못에 있는 아홉 마리 용을 쫓아내고 절을 지어 구룡사로 불렸으나 부처님 형상을 한 바위가 항상 못에 비치는 걸 보고 불영사로 개명했다고 한다. 부처 형상이 비친 그 연못엔 어른 팔뚝보다 큰 비단 잉어들이 한가로이 유영하고 있다. 연못 안 바위섬에는 자라 수십 마리가 떼지어 올라앉아 여름 햇볕을 즐긴다.
자라들은 이따금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관광객들 사이로 기어다니기도 하는데 전혀 겁이 없다. 한마디로 여유만만이다. 번뇌를 벗어던진 비구니들의 깨끗한 심성에 감화되어서일까, 손으로 잡아도 발버둥치지 않는다. 세상 밖에서야 지지고 볶으며 싸움을 하건 말건 산사의 오후는 잉어와 자라와 사람과 산새 같은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한데 어울린 가운데 빠르게 저물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