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失鄕記

이역 땅에서의 풍찬노숙(風餐露宿) 27년

失鄕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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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정보학교는 대구방송국 가까이 있는 달성국민학교 교사를 징발해 쓰고 있었다. 교문을 가로질러 ‘we bring light to the darkness’라는 학교 슬로건이 걸려 있었는데, 참 맘에 들었다. 나는 내가 택한 이 길이 내 인생에도 빛을 던져주기를 간절히 빌었다. 노통(노어 통역) 2기는 모두 24명으로 대부분 중하사관의 현역 군인인 데다 이북 출신이었다. 3개월 내내 오전에는 강의를 듣고 오후에는 군사 훈련을 받았다.

외출이 허락되는 일요일에는 주로 목욕탕을 찾았다. 일주일 내내 밀린 세탁을 할 목적이었는데, 목욕탕 주인도 정보학교 학생이라는 이유로 눈감아줬다. 팔자에 없는 빨래에 이골이 날 즈음 나는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때를 밀고 있는 한 사내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철도전문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던 박주병 선생(가명)이었다.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를 가르치면서도 소련 과학의 우수성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던 골수 사회주의자 박선생을 남한 땅에서 조우(遭遇)하다니…. 우리는 근처 다방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 후 선생님과 나는 일요일마다 목욕탕에서 만났다. 만날 때마다 박선생은 내게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했다. 6·25 전쟁이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많이 씻어버리긴 했어도 ‘20대에 사회주의를 모르면 하트가 없는 놈이고 40대에 사회주의를 버리지 않으면 헤드가 없는 자’라는 말이 유행할 때였다.

후보생 생활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중위 임관을 코앞에 두고 당시 학교장이던 변응오 대령에게 불려갔을 때 나는 박선생 일이 마음에 걸려 가슴이 철렁했다. 교장실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변교장 곁에는 교무부장이 긴장한 채 서 있었다. 뭔가 서류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던 변교장이 “호출받고 출두하였다”는 나의 신고에 고개를 들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는 내게 변교장이 다짜고짜 “자네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가?” 하고 물었다. 순간 맘이 놓인 내 입에서 얼떨결에 스무 살이라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만으로는 몇 살인가?” “열 아홉입니다.” 교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떻게 국가의 간성이 되겠다는 사람이 공문서를 위조했느냐”며 취조하듯 물었다. 나는 “장교가 되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고 솔직히 대답했다. 교장은 더 이상 물을 것도 없다는 듯이 교무부장에게 “임관 상신 명단에서 이후보를 빼라”고 지시했다. 순간 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어쩔 줄 몰라 서 있는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류를 계속 넘기던 교장이 지나가는 말투로 내 성적을 교무부장에게 물었다. “전체 성적은 4등이고 노어는 1등”이라는 대답에 변교장은 한동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그럼 그냥 나이를 네 살 더해서 육본에 제출하라”고 했다. 교장실을 나오는 나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나는 다시는 목욕탕에 가지 않았다.

軍 최연소 중위



마침내 학수고대하던 임관일이 밝았다. 1954년 3월8일이었다. 아침 일찍 정보학교 정문 옆 세탁소에 맡겨놓았던 잘 다려진 정복을 입고 임관식을 마쳤다. 육군 중위 계급장과 나이 네 살을 덤으로 받았다. 전선에서 중증 폐결핵을 얻어 밀양 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던 형도 나를 축하해주러 왔다. 임관식이 끝난 후 형은 나를 데리고 학교 근처 중국집으로 갔다. “너희 중대장을 만났는데 칭찬이 대단하더라”며 자장면과 탕수육을 사줬다. 형이 “중위님, 꼬마 중위님” 하며 나를 놀리던 기억이 난다. 형은 아직 소위 계급장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형은 밀양으로 돌아가고 나는 금의환향을 하게 됐다. 수 개월 만에 산지항에 내리는데 검문소의 경찰과 헌병들이 나보다 먼저 경례를 올려붙였다. 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이 어린 중위라는 사실에 가슴이 뿌듯했다.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고향 화북까지 여객버스가 있었지만 나는 걸었고 땅거미가 질 때쯤 고향 마을에 당도했다.

마을 입구에는 돌이 성처럼 쌓여 있었다. 제주도 여타 마을과 마찬가지로 4·3 사건의 그림자가 검게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이 번갈아가며 문을 지켰는데 해가 지면 출입을 금했다. 죽창을 들고 문을 지키던 사람이 나의 신분을 확인하기는 해야겠는데 노을 빛에 반짝이는 중위 계급장 위세에 눌려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내가 먼저 “저 이한용 동장의 둘째아들입니다”라고 신분을 밝혔다. 그제서야 그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통과시켜주었다. 그 무렵 아버지는 동장 일을 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어느새 소식을 듣고 동네 꼬마들을 앞세워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나의 계급장과 휘장을 만지느라 난리법석을 떨었다.

마을 사람들이 물러간 후 아버지는 농사 얘기를 꺼냈다. 아버지의 한숨에 호롱불이 펄럭였다. 우리 집안은 제주시 동쪽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논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라산 줄기로부터 우리 논으로 물이 흘러내려왔다. 논과 접해서는 샘물이 있어 동촌에서 제주시로 가거나 제주시에서 동촌으로 가는 사람들이 잠시 쉬며 목을 축였다. 권농일(勸農日)에는 도지사가 우리 논으로 와서 모를 심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 논 건너편 산 쪽에 있는 마른 밭 주인이 자기네 친척 검사의 위세를 믿고 물꼬를 자기네 밭으로 돌려버렸다는 게 아닌가. 아무리 우리가 피난을 왔고 4·3 사건 때 할아버지와 삼촌이 억울하게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지만 그 밭주인이 우리를 업신여긴다고 생각하니 분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검사라는 사람이 소환장도 없이 아버지를 검찰에 출두시켜 물길을 포기하도록 종용했다니. 나는 묵묵히 아버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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