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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협소설 명인열전 ④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기존 질서 거부하는 하위주체의 데카당스

  • 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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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주의적 무협작가 좌백

실존주의적 무협소설의 지평을 연 작가 좌백

대만 무협소설의 주류는 일찍이 비평가 김현 선생이 분석했듯이 사회의 기성 윤리와 기성 질서에 편안하게 적응하는 데 성공하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러한 성공담을 ‘중산층적 질서의 승리(혹은 안정성)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며 ‘중산층적 삶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라고 본다. 여기에는 중산층적 삶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대도오’는 이와 정반대이다. 서문벽에게는 ‘생의 목표’라고 할 정도로 가치 있는 것을 대도오가 한마디로 부정하는 장면에서 보듯 ‘대도오’는 중산층적 삶의 의미를 불신하며 중산층적 삶에 대한 욕망을 비웃는다. 대만 무협소설의 주류가 중산층의 무협소설이라면 ‘대도오’는 하위주체의 무협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대도오’는 구룽(古龍)을 대표로 하는 대만의 신파 무협소설과 상당히 닮았다. 구룽의 무협소설 또한 중산층의 속물성에 대한 야유와 조소를 기본 태도로 삼고 있다. ‘대도오’에는 미리 주어진 삶의 의미 없이 그에 대해 질의와 탐색, 추구가 이뤄지는데, 구룽 역시 중산층에 대한 야유와 조소에서 출발하여 삶의 의미에 대한 실존주의적 탐색으로 나아간다. 때문에 ‘대도오’는 구룽과 닮았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구룽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구룽과 ‘대도오’ 사이에는 그 유사성보다 훨씬 더 큰 차이가 존재한다. 똑같이 반(反)중산층적이고 실존주의적이지만 구룽의 실존주의는 귀족적 데카당스인 데 반해 ‘대도오’의 실존주의는 하층, 소외된 자, 주변, 소수자, 즉 하위주체의 데카당스이기 때문이다. ‘대도오’는 워룽성의 전복일 뿐만 아니라 구룽의 전복이기도 한 셈이다. 만약 구룽이 ‘대도오’를 썼다면 대도오가 아니라 비극적인 운명을 지닌 철기맹의 젊은 맹주 운기준을 주인공으로 삼았을 것이다.

사실 ‘대도오’ 속에는 따로 독립시켜도 좋을 만큼의 매력적인 이야기가 몇 개 들어 있다. 운기준의 데카당스, 매봉옥의 성장, 노대의 고뇌 등이 그것이다. 좌백은 이 이야기들을 대도오를 주인공으로 한 흑풍조 이야기 속에 용해시켰는데, 좌백이 하필이면 대도오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흥미로운 점은 ‘대도오’가 양으로든 음으로든 1980년대 후반 한국의 독서시장을 장악했던 진융과 아무런 관련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한국 무협소설에 대한 진융의 영향’이라는 문제에 포함시켜 좀더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대도오’로 신무협 지평 열어

흔히 ‘창작무협’이라고 불리는 1980년대의 한국 무협소설은 주류인 워룽성과 신파인 구룽, 그리고 귀파(鬼派) 천칭윈(陳靑雲) 등으로부터 복합적인 영향을 받아 ‘창작’됐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한 아류에 그쳤고 일부는 아예 천박함으로 추락해버렸다. 나름대로 새로운 면모를 보인 게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천박함으로 추락한 것에서 나타났다. 아마도 그 예외로 주목되는 작품이 야설록과 용대운으로 이어지는 구룽 계열일 터이다. 그러나 이들은 나름대로 흥미롭게 구룽의 변형 내지 변주를 보여주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른 세계로의 전환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대도오’는 그 전환에 성공했다. 더구나 ‘대도오’는 단단한 문장과 절제된 언어라는 글쓰기의 기본적 덕성이 무협소설에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보여주었고, 무엇보다 글쓰기에 대한 양보할 수 없는 자존심이라는, 종래의 무협소설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귀중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대도오’가 아무리 새롭고 뛰어난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혼자만으론 하나의 예외적 작품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대도오’가 ‘신무협’이라 불리는 무협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던 것은 작가 좌백 자신이 ‘대도오’ 이후에도 신무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을 계속 써냈기 때문이다. 또 좌백 이외에도 다른 새로운 작가들이 좌백과 동지적 관계를 맺으며 신무협의 지평 형성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시대적 및 세대적 징후가 발견된다. ‘신무협’은 적어도 199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 특히 이 무렵의 젊은 세대의 어떤 정신, 마음의 움직임, 욕망의 움직임이 무협소설이라는 장르 속에서 자기 표현을 얻음으로써 생겨났다는 것이다. 좌백은 그 시대 젊은이의 자기 표현의 흐름에 물꼬를 터 준 장본인이다.

1995년 4월 ‘대도오’를 출판한 좌백은 곧이어 7월에 ‘생사박(生死搏)’을, 9월에 ‘야광충(夜光蟲) 1부’를, 1996년 1월에 ‘야광충 2부’를 펴냈다. 상당히 숨가쁜 듯 보이는 이러한 행보는 물론 ‘대도오’ 출판 이전에 이미 세 작품에 대한 구상과 집필 준비가 갖춰졌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세 작품은 물론 좌백다운 어떤 동일성이 관철되고 있지만, 그 동일성이 구현되는 구체적 방식은 각기 다르다. 좌백은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것을 싫어하는 작가다. 달리 말하면 그는 부단한 자기 갱신을 중시하는 예술가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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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전형준 서울대 교수·중국문학junaura@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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