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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에세이

달빛만 받으면 나는 증조할머니도 어머니도 된다

달빛만 받으면 나는 증조할머니도 어머니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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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하신 증조부님이나 조부와 아버지의 뜻이 국가로부터 포상을 받는 것은 아니란 걸 알지만, 학문적인 기록에는 증조부님의 함자 ‘류연옥’이 올랐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이 세상이 아닌 어느 완전한 세계(신의 세계)에서는 그분들의 삶이 인정받았으리란 믿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친일규명사업에서 정말 등재돼야 할 분과 결코 그래서는 안 될 사람을 제대로 가려내지 못하는 인간세계의 불완전함에 서글퍼진다. 그런 점에서 종교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가.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에게 자유와 법을 함께 주신 까닭은, 법의 한계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는 뜻이며 법 규제로써 겸손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 이브는 유혹에는 약했지만 산고(産苦)를 견뎌낸 인류의 어머니다웠다. 이브의 모성적 헌신이 없었으면 세상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남성은 정복하고 파괴하지만 여성은 어루만지고 쓰다듬어 일구어 생산하지 않았는가. 늘 못나고 못 가졌다고 여겨온 나도 상대적으로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아, 나도 모르게 권력에 길들여지고 권력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 건 아닐까. 단군 이래 온 국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박정희 대통령의 공로와, 권력자의 고질적 권위를 무(無)권위화한 노무현 대통령의 공로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조선 창국(創國)으로 무수한 피를 흘린 태조 이성계나 이방원의 죄도,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으로 보상되었으니 용서받을 거라 싶어진다. 이 두 분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는 중국문자를 쓰는 중국의 속방(屬邦)이 되었거나, 임란 이후 일제하에 살아야 했을지도 모를 일.

나 같은 속 좁은 사람이 두서없지만 이처럼 거룩한(?)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오로지 달빛의 덕이다. 아니 내 증조모님의 신앙이던 달빛과 그분의 기도 덕이 아닐까. 달을 보면 저절로 증조모님의 기도가 생각난다. 또 기도라면 내 어머니를 능가할 이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이 깊을수록 신의 도움을 갈망할 수밖에 없어, 어머니도 기도의 평생을 살다 가셨지. 냉돌 마룻바닥에 무릎 꿇고 밤샘기도 하시던 어머니 등에는 늘 희뿌연 달빛이 훠언히 어리 비췄지.





세상 모든 어머니는 그 자녀에게는 다 성모마리아이며, 현빈(玄牝)이며 관세음보살이다. 딸(엘리자베스 1세)의 왕위계승권을 위해서 어머니 앤은 단두대를 선택했지. 모든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어떤 권력도 포기할 것이다. 어머니가 있고부터 기도가 생겨났으리. 빌지 않고서는 키워낼 수 없다는 절망적인 결론에서 절대자와의 만남인 기도가 생겼으리. 기도야말로 약자의 호소이자 마지막 수단이며 가장 뜨거운 소망이니, 어찌 신을 감동시키지 않을 수 있으랴. 신이 모든 존재에게 주신 최대의 축복은 어머니를 주신 것. 이브에게 겸손을 가르쳐 모성이 되도록 하셨으니, 방법과 시기는 달라도 모든 어머니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다. 그건 성당과 교회와 절간이 어머니들로 채워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머니들의 기도가 있어서 이 나라가 이만큼이라도 유지된다는 신통하고 거룩한 생각까지도 증조모님과 어머니의 추모에 보태졌다.

신동아 2004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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