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호

어느 며느리의 7년 치매 간병 일기

  • 글: 문영숙

    입력2004-10-28 10: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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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며느리의 7년 치매 간병 일기
    1978년 5월. 나는 결혼을 하면서 곧바로 맏며느리로서 시부모님을 모셨다. 그때 시어머님의 연세는 53세였다.

    시어머님은 의지가 굳고 개성이 강한 분이었다. 시어머님은 이북이 고향으로, 황해도 황주에서 유복한 집안의 5남매 중 막내로 자라셨다. 유교 사상에 철저한 친정아버지 밑에서 엄하게 성장했는데도 시어머님은 단옷날이면 이웃동네로 그네를 뛰러 다녔을 정도로 다혈질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38선을 넘어올 때도 야밤을 통해 혼자서 넘어왔다. 그만큼 여성이지만 대장부다운 기개가 있는 분이었다.

    월남한 뒤 결혼을 한 후에도 5월5일 단옷날이면 서울에서 멀리 강릉까지 가서 그네뛰기 대회에 참가했고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시집왔을 때 주방에는 시어머님이 그네뛰기대회에서 부상으로 받았다는 스테인리스 그릇들이 눈에 띄었다.

    시어머님은 성격이 곧아 누구에게든지 자신의 주장을 쉽게 굽히지 않았다. 시아버님도 상당히 강직한 분이었는데 일상생활에서는 시어머님이 더 강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활발하고 강한 분이었지만 건망증이 유난히 심했다. 내가 시집와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 시어머님의 건망증 증상이었다. 시어머님은 일단 눈에 보이지 않으면 의심부터 했다. 때로는 돈을 가지고 승강이도 했고, 물건이 무조건 없어졌다고 하는 탓에 곤란한 경우를 수도 없이 겪었다.

    시어머님은 밖에 나갔다 들어오시면 난데없이 집에 놓아두었던 돈이 얼마 중 얼마가 없어졌다며 찾아보기도 전에 누가 왔었느냐고 의심했다. 그러면서도 며느리인 나를 의심하지는 않았다. 무작정 누가 들어와서 훔쳐갔다고 단정짓는 바람에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맞서고 그런 승강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졌다.



    당시 나의 친정은 어렵게 살았다. 더구나 내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친정어머니를 모시다가 시집오게 되었고 혼수도 내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그런데 시집에서 돈이 없어졌다고 하며 의심을 받는다는 것은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없어졌다던 돈을 하루 이틀쯤 지나면 시어머님의 친구들이 꾼 돈을 갚는다며 가져왔던 것.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는 시어머님의 병적인 건망증을 이해하게 됐다.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빌려주었거나, 다른 곳에 두고 찾는다는 확신이 생겨 내 스스로 시어머님의 방에서 찾아내든지, 아니면 며칠 기다리면 분명 누군가가 빌려갔다가 가져올 것이라며 넘겨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 몇 건은 정말로 끝까지 모를 때가 있었다. 그런 시어머님의 건망증 때문에 나의 시집살이는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심적 고통이 더 컸다. 그런 것들이 치매의 전조증상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적절한 치료도 가능했을 텐데…. 그때는 그저 시어머님의 성격을 감당하기가 힘들다는 생각뿐이었다.

    시아버님의 죽음

    시아버님은 64세에 돌아가셨다. 죽음은 모든 것을 용서받는 최후의 종착점일까? 남편을 하나의 굴레로 생각하며 하루라도 빨리 그로부터 벗어나기를 절실히 바라던 것 같던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을 떠나보낸 후 심한 자책으로 힘겨워했다. 특히 시아버님에게 소홀했던 것을 제일 가슴 아파했다.

    대부분의 남편들이 아내를 잃고는 오래 살지 못하고 아내의 뒤를 따라 가는 것도 역시 홀로서기의 어려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시어머님은 워낙 종교에 몰두하셨기에 식구들은 믿음을 통해 쉽게 헤어나시리라 생각했다.

    다만 늘 곁에서 지켜봐야 하는 나로서는 시어머님을 위로해 드리는 것밖에는 달리 대책을 세울 수도 없었다. 하지만 시어머님의 우울증 증세는 다른 사람보다 정도가 심했다. 식사를 하다가도 ‘나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면서 자주 울었다.

    원하는 반찬을 기껏 준비해서 드리면 ‘내가 이런 것을 먹을 자격이 없는데’ 하면서 물리고 또 요구하기를 수십 번.

    시아버님은 굉장히 자상한 편이었다. 때로는 불 같은 성격으로 인해 주위를 힘들게도 했지만 잘만 맞춰드리면 식구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신경써주는, 정이 많은 분이었다. 그런 점을 시어머님은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뒤에야 가슴 깊이 느꼈고 이제는 그렇게 자신에게 세세하게 대해 줄 사람을 잃었다는 허무감에 깊이 후회했다.

    여기에 시아버님만큼 당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불안감으로 평소에 가졌던 사람에 대한 불신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아들이 당신을 쫓아낸다든지, 지니고 있는 금전까지 모두 빼앗을 것이라든지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에 늘 불안해했다.

    내가 절대로 아들이 그런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 설득해도 시어머님 자신이 믿는 오직 한 사람, 며느리인 나에게마저 “너도 남편이라고 두둔하느냐”면서 의심했다.

    그 시기 시어머님은 당신이 필요한 만큼 재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시아버님이 대령으로 예편하면서 연금수급자였기에 배우자 몫으로 나오는 연금은 시어머님 혼자 용돈으로 쓰시기에 충분했다.

    당시 살림은 자연히 내가 맡았고 시어머님은 살림에 대해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시아버님이 돌아가심과 동시에 며느리인 나에게 살림까지 내주고 나서 집안에서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 없어졌다는 허탈감도 치매와 관계없이 우울증의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집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이 아무것도 없다는 극도의 상실감이 할퀸 상처를 그때 나는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주위에서도 착한 며느리에, 손자 손녀에, 살림걱정할 필요도 없고, 무엇이 힘드냐며 늘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 시어머님을 비정상인 것처럼 몰고 간 점도 있었지 싶다. 만약 그때 살림을 더 하시게 하든지 시어머님이 아니면 안 되는 한 가지 짐이라도 지워드렸다면 그 긴장감에 그렇게 쉽게 심신이 허물어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아무 할 일이 없어 ‘나는 필요없는 인간’이라는 자포자기 상태로 발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젊은 사람들이 어른을 잘 모신다고 생각하여 아무 일도 못하게 하고 그냥 편히 쉬라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이제 당신이 우리를 위해 해줄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게는 지금 95세 되신 친정어머니가 생존해 계신다. 친정어머니를 옆에서 지켜보면 작고 하찮은 일이라도 자식을 위해 무엇인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할 때 아주 행복해 하신다. 그걸 보면서 시어머님이 한꺼번에 살림을 놓게 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이 남는다.

    우울증과 함께 온 불면증

    시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우울증으로 인해 힘들어하던 시어머님은 잠이 오지 않는다고 호소했다. 단골 한의원에서 보약을 지어먹고,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영양주사를 맞는 등 당신 스스로 지극히 건강을 챙기면서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 머지않아 죽을 것 같다며 두려워했다.

    시어머님은 낮에는 코까지 골며 잘 주무셨다. 밤이면 낮에 잔 분량만큼 잠이 없을 것이었지만, 본인은 늘 한잠도 못 잤다고 주위 사람에게 하소연했다. 일 없는 시어머님을 위해 마당에 탁구대를 놓고 공을 주고받기도 하고 함께 산책을 하기도 했지만 잠을 못 잔다는, 시어머님의 강박관념은 점점 더 심해져갔다. 심지어 이웃 사람에게 ‘지금 몇 달째 한잠도 못 잤다’고 하는가 하면 ‘이러다가 며칠 못 가서 죽을 것 같다’느니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잠에 대해 하소연했다.

    시어머님은 그런 상태에서도 아침이면 언제나 교회로 전도를 나갔다. 하루는 같은 교회의 교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시어머님의 옷차림이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그 날은 시어머님이 외출할 때 집안일을 보고 있어서 시어머님의 옷차림새를 눈여겨보지 못했는데 긴 팔 옷의 겉에 짧은 소매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때가 이른 봄이어서 블라우스만 입을 철도 아닌데 겉옷 위에 짧은 반소매의 여름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다며 나에게 집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냐고 물었다. 또 예전과 달리 전도를 하는 도중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금방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면서 자주 허둥지둥 한다고 했다. 그날 이후로 나도 시어머님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요즈음 젊은 세대는 옷을 입을 때 자유롭게 자기취향대로 형식을 무시하고 입는다지만 시어머님의 옷차림은 나이 든 어른의 모습으로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정상이 아니었다. 그 일을 계기로 비로소 정신과 진료가 필요함을 느끼고 시어머님을 설득해 정신과를 찾게 되었다.

    병원에 가기로 한 날, 집에서 가까운 종합병원을 두고 시어머님은 다니는 교회의 아는 사람이 모 부서 과장으로 있다는, B병원으로 가기를 원했다. 가뜩이나 병원에 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일단은 정신과 진료를 받을 요량으로 집에서 차로 한 시간 이상 걸리는 B병원을 찾아갔다.

    외래 진료를 하는 동안에도 시어머님은 잠을 못 잤다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의사의 문진을 받고 기초검사와 뇌 단층촬영을 했다. 모든 검사가 끝난 뒤 의사는 환자와 가장 가까운 보호자와 상담을 원했다. 한집에서 살며 늘 곁에서 모시는 내가 적임자였기에 내가 의사와 만났다.

    의사는 시어머님의 뇌 사진을 보여주면서 뇌가 많이 위축되어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함께 살아오면서 시어머님에게 느꼈던 점들을 소상히 말하라 했다. 나는 숨김없이 그동안 겪어온 일들을 차근차근 말했다. 내 말을 다 듣고 난 의사는 시어머님의 병명을 ‘기질성 우울증 및 노인성 치매’라고 진단을 내렸다.

    기질성이란, 즉 젊어서부터 아무도 믿지 않으려는 심한 의심,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으려는 편집증을 동반한다고 했다. 체력이 좋을 때는 그런 증상들을 몸 스스로 제어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서 체력이 약해지면 점차적으로 정신이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게 되고 치매증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살아오면서 내가 느낀 황당했던 일들도, 또는 약간은 불편했던 점들도 사실은 치매의 시초 증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의사의 말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그동안 섭섭하게 생각했던 부분들을 되돌아보며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시어머님으로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으며, 이제 병자인 시어머님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새벽에 시어머님이 밥을 빨리 해야 한다며 10여분 간격으로 나를 부르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얼굴은 붉게 상기되고 눈동자가 튀어 나온 형상이 되어버렸다. 아이들이 놀라 나에게 청심환을 먹이는 등 한바탕 난리를 쳤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화가 치밀어서 일어나는 증상이라 했다. 또 그런 증상이 나타날까 겁이 났다. 의사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님을 그냥 무조건 재워달라고 애원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제대로 학교생활을 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수면이 부족한데 밤잠까지 설치니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고.

    그 즈음부터 내 신경질도 늘어갔다. 시어머님과 실랑이를 하고 나면 식은땀이 버적버적 솟곤 했다.

    여러 명의 선옥엄마

    그 무렵 시어머님은 나를 여러 사람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며느리인 선옥엄마가 여럿이어서 도대체 누가 진짜 며느리인지 분간이 안간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아들보고 왜 애초에 선옥엄마만 데리고 살지 이 여자 저 여자를 데리고 사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처음에는 시어머님이 그냥 횡설수설하시나보다 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내가 큰 소리를 내고 화를 낼 때는 시어머님 생각에 본래의 며느리가 아닌 다른 사람 같았으리라.

    그렇게 시어머님을 객관적으로 판단하면서 나는 또 내 모습과 내 행동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되었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성격이 거칠어지고 말을 안 듣는 시어머님을 억지로 목욕시키는 과정에서 시어머님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었구나 생각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고 가슴이 아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아닌데…, 내가 나를 다루기도 점점 버거워졌다.

    특히 아이들 앞에서 시어머님과 실랑이를 벌일 때 더 난감했다. 아들애가 그무렵 사춘기에 들었는데 그때 시어머님의 착각증세가 악화돼 사소한 일에도 시어머님에게 큰 소리를 내야 할 때가 많았다. 어느 날 아이에게 심부름을 시켰는데 아이가 아주 불손한 태도를 보이며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갔다. 그래서 내가 화를 내며 “너, 이 녀석 지금 엄마한테 무슨 행동이 그래” 하고 야단을 쳤더니 아이는 대뜸 나보고 “엄마도 할머니한테 큰 소리 내잖아” 그러면서 대꾸를 하는데 그때처럼 당황스러운 적도 없었다. 바로 그런 면들이 시어머님을 모시며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었다.

    부모보다는 자식이 앞서는 경우라 할까. 시어머님께 평소보다 많은 안정제를 투여해 주로 잠을 재웠다. 마음 한 쪽에 죄스러움이 움텄지만 솔직히 내게는 시어머님보다는 아이들이 우선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비쳐지는 내 모습 때문에 많이 괴로웠다.

    약물과용으로 인한 체력감소

    약을 시간별로 조절해서 밤에는 무조건 잘 수 있게 평소의 약에 반 알을 더 드렸다. 덕분에 새벽마다 되풀이되던 ‘잠 깨우기 전쟁’은 두어 달 만에 사라졌다. 낮에도 주로 잠을 자 황당한 요구가 줄어들어 나로서는 훨씬 편했다. 대소변을 볼 때 거들고 식사시간만 맞춰 드리면 그 외 시간은 대개 주무셨다. 한번 잠이 들면 세상 모르고 몇 시간씩 주무셨기 때문에 나는 아주 오랜만에 휴식을 맛보았다. 비로소 시어머님이 잠자는 시간을 통해서나마 내 시간도 조금씩 가질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그런 시간이 한 3개월 정도 지속된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별 일 없으신가 하고 시어머님 방에 갔더니 소변으로 요가 흥건했다. 잠에 너무 깊이 취해서 그랬나 보다 하고 옷을 갈아입히고 요를 빨았다. 새 요를 깔아드리고 아침을 준비해서 식사를 시키려다 보니 또 요가 축축히 젖어 있었다.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소변보는 것을 모르겠느냐 물으니 자신도 모르게 나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내 일신의 편안함을 위해 무리하게 재운 탓에 몸에 무리가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 날 하루 종일 시어머님 곁에서 대소변을 가려 드리려 해도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그 날부터 약 일체를 끊었다. 우황청심환을 드시게 하고 비로소 몸을 일으켜 운동을 시키려 하니 몸이 많이 야위고 힘도 빠져 있었다. 몇 개월 동안 주로 잠만 잤으니 근육이 퇴화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말도 어눌해졌고 일으켜 앉히면 금방 어지러워했다. 무엇보다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니 큰일이었다.

    근 일주일 동안 시어머님과 같이 자면서 조금씩 운동도 시켜드리고 시간 맞춰 대소변을 보게 해 드렸지만 소변은 잠깐 사이에 흘러 일일이 요를 빨아댈 수가 없었다. 결국 환자용 기저귀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물불을 안 가리고 무조건 밖에 나갈 때는 제발 다리에 힘이라도 빠져 누워계시기만 해도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되고 보니 마음이 또 착잡했다. 사람 마음이란 이렇게 간사하고 변화무쌍한 것인지 측은한 연민에 혼자 눈시울을 적시기도 했다.

    치매가 시작된 지 5년째 접어들면서 시어머님의 신체는 조금씩 중환자로 변해갔다. 운동을 하지 않은 근육은 점점 쇠약해지고 곁에서 부축하지 않으면 거동하기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다릿심도 없고 목욕을 시켜 드리려 해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웠다.

    혼자 계실 때 보면 틀니도 잇몸에 제대로 끼워져 있지 않고 입안에 위험하게 들어가 있어 혹 기도라도 막히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앞섰다. 차고 있는 기저귀 안으로 손을 자꾸 집어넣는 바람에 손과 끼고 있던 반지에 오물이 묻기 일쑤였다. 늘상 끼고 계시는 반지는 살이 점점 빠지면서 헐거워져 분실위험도 있었지만 시어머님은 절대 손에서 빼는 것을 허락지 않아 그 반지에 신경이 쓰였다.

    그 무렵 가끔 찾아오셔서 나를 도와주던 시작은할머님이 오셨다. 그 분이 반지 때문에 신경쓰는 것을 보더니 예전에 하던 방법으로 헝겊을 반지에 감아 헐거워진 것을 조이게 해 주셨다. 그러나 홀로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그처럼 반지에 헝겊을 감아 끼우고 있으면 며칠 지나지 않아 까맣게 때가 타곤 했다. 그 때마다 헝겊을 갈아 끼워 드리는 것도 일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아예 반지를 빼서 안전한 곳에 보관하고 싶었지만 그것을 빼려하면 얼마나 완강하게 거부하시는지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뒤로 시어머님은 할머님만 오시면 다른 것은 잊어도 반지에 헝겊을 대는 것은 잊지 않고 항상 새로 해 달라고 졸랐고, 할머님도 으레 반지를 새로운 헝겊으로 싸서 시어머님의 손가락에 끼워드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손에 반지를 끼는 것이 위생상 좋지 않아 결국 아들이 반강제로 빼서 안전한 곳에 보관했다. 가끔 반지 생각이 난다고 하실 때면 갖다 보여드리고 다시 끼워 달라는 것을 억지로 말려서 보관하기를 반복하다 어느 날부터는 아예 잊었는지 다시는 찾지 않았다.

    지금 돌아보니 시어머님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영원히 잊어가셨다. 처절하리만큼 집착하던 것들도 어느 날 하나 둘 망각의 세계에 묻어버렸다. 해가더 갈수록 착각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대로 잊혀져가는, 결국 정신의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너무나 눈물겨운 일인데 그때는 그저 힘든 상황에서 언제 벗어날까, 제발 무슨 일로라도 내게 조르지만 않는 나날이 되기를 그렇게도 소망했었다.

    치매가 발병한 지 6년째 접어들던 겨울이었다. 이젠 정신이 몽롱하여 무의식적인 행동을 자주하는 탓에 늘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혼자 걸을 수 없는데도 본인은 그 사실을 잊고 일어서다가 넘어지거나 대소변을 보고도 의사표시를 하지 못했다. 내가 “소변보셨어요?” 하고 물으면 늘 “안 봤어” 하고 같은 대답을 반복했다. 그 때문에 시간마다 일일이 기저귀를 검사해야 했다.

    드디어 손에 장갑을 끼우고

    그런데 어느 날부터 기저귀를 손으로 잡아 뜯기 시작했다. 그것을 착용하고 계신 것이 불쾌해서인지 답답해서인지 밤에 기저귀를 갈아드리려고 방으로 가면 밤새 기저귀를 손으로 전부 잡아 뜯어 방바닥이 솜뭉치로 덮여 있곤 했다.

    그나마 소변이나 대변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것을 치우면 그만이었지만 간혹 다 뜯은 후에 요 위에다 대소변을 봤다든지 아니면 이미 대변을 본 기저귀를 뜯어놓았을 땐 난감했다. 겨울이라서 이불이나 요에 오물을 묻히면 빨아 말리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식사나 간식은 드리는 대로 잘 드셨고 소화도 잘 시켰는데 그럴수록 대소변의 양이 많고 일절 의사표시를 하지 않기 때문에 냄새로 혹은 기저귀 검사로 확인해야 했다.

    한편으로는 수시로 기저귀를 뜯어 특단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손을 묶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고 생각다 못해 양손에 벙어리장갑을 끼워 드렸다. 그런데 그것은 시어머님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벗을 수가 있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시 손이 자유롭지 못하도록 벙어리장갑 안에다 솜을 두툼하게 넣고 장갑의 목에 끈을 달아 묶어 혼자 벗을 수 없게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아예 손가락이 없는 통 벙어리장갑이었다. 그 안에 목화솜을 두툼하게 넣었다. 엄지손가락도 없는 그냥 둥근 자루 같은 것이었기에 그것을 끼워드리면 손가락을 마음대로 쓸 수 없어 기저귀를 뜯지 못하셨다. 그 다음부터 내가 나갈 일이 생긴다던지 밤에 주무실 때 그 통장갑을 끼워드리곤 했다. 물론 그것을 낀 시어머님은 답답하셨겠지만 더 큰 일이 벌어지면 뒷감당하기가 힘들어 나는 마음이 편치 않으면서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시누이가 오든지 친척들이 병문안을 와서 보고는 안쓰럽게 생각하기도 했지만 가끔 와서 보는 사람들이 나의 고충을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시어머님이 자리보전하면서 식사시간이 제일 힘들었다. 억지로라도 운동을 시킬 요량으로 식사시간에는 반드시 식탁까지 모셔 왔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식사하실 때 자주 사레가 들렸다. 그럴 때면 틀니가 입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온 식탁에 밥알이 튀는 것은 물론 호흡에 지장을 주어서 곁에서 뒤처리하기가 겁이 났다.

    사레가 들리면 시어머님도 너무나 힘들어서 식사도 마치지 못하고 그냥 들어가 누우시곤 했다. 그런 일이 잦아지면서 식사 때마다 조심스러웠다. 혹 기도가 막히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밥 대신 죽으로 바꿨다. 상체를 반쯤 일으켜 비스듬히 앉은 상태에서 죽을 드시면 그런대로 괜찮았다.

    죽을 드시면서 자연스레 틀니도 사용하지 않게 됐다. 발병한 지 6년째 접어들면서 시어머님은 다리는 물론 가슴의 뼈들이 그대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말라갔다. 다만 살아 있는 부분은 소화기관이 전부인 양 그렇게 뼈와 가죽만 남은 모습이 보기 민망스러웠다.

    혈액순환을 돕기 위하여 목욕을 시킬 때면 남편이 몸을 부축하고 있어야 구석구석 닦을 수 있었다. 손등이나 손목을 닦다 조금만 세게 붙잡아도 멍이 들었다. 그 만큼 근육이 약해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목욕을 시키려면 옷을 벗지 않으려 힘을 써서 반강제로 밀어붙이기도 했는데 하루가 다르게 몸이 약해졌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둔부에 욕창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런데 둔부보다는 뜨거운 방에 한 자세로 오래 누워 있어서 그런지 방바닥에 닿는 발뒤꿈치가 까맣게 변색되곤 했다. 그래서 수건을 동그랗게 뭉쳐서 발뒤꿈치에 고여 드렸다.

    어느 며느리의 7년 치매 간병 일기
    한여름을 맞으면서 엉치뼈 부분이 조금씩 변색되어갔다. 드디어 욕창이 생기나보다 하고 수입의료기 가게에 가서 욕창방지 매트를 사왔다. 전기를 꽂아 요위에 깔면 요철처럼 돼 있는 부분에 순차적으로 공기가 들어갔다 나갔다 하면서 혈액순환을 돕는 장치였다. 그 매트를 깔고 그 위에 왕골 돗자리를 펴서 최대한 혈액순환이 잘되도록 하면서 혈관이 장시간 눌리지 않도록 노력했다. 파우더를 바르고 때때로 비벼주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안으로 물을 떠다 세수를 시켜드리기 시작했다. 축 늘어진 시어머님의 몸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님에게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 말이 없으니 억지로라도 말을 걸어 비록 필요치 않은 말일지라도 자꾸 되뇌이게 하면서 초점 잃은 시어머님의 눈을 대하면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솟았다. 너무나 힘들었던 지난 일들이 떠오르고 이젠 이렇게 모든 것이 잊혀져가는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동안 내가 힘들 때 시어머니께 해댔던 푸념들이 커다란 자책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어느 때는 아무 느낌이 없는 것 같은 시어머님의 두 손을 잡고 “어머니, 나 나쁜 며느리죠?” 하면서 “그동안 어머니께 불손하게 대했던 것들 다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하고는 내 설움에 복받쳐 엉엉 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시어머님은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아무 반응도 없어 더 안타까웠다.

    드디어 욕창 발생

    그해 겨울 어느 날 기저귀를 갈다보니 둔부에 조그맣게 물집이 생겨 있었다. 방을 너무 뜨겁게 해놓은 상태에서 장시간 한 자세로 누워계셔 화상을 입은 것 같았다. 연고를 발라 드리기도 했지만 결국 며칠 후에 살이 헤져 상처가 생겼다.

    수입의약품 코너에 가니 마침 독일에서 만든 욕창 치료용 반창고가 들어와 있었다. 일반 반창고처럼 생긴 것인데 크기가 다양하고 상처부위에 그냥 붙여놓으면 분비물을 흡수하면서 새살을 돋게 해 주었다. 값은 일반 반창고보다 몇 배나 비쌌지만 그것을 샀다.

    그 무렵부터 시어머님은 음식을 드시면서도 무슨 맛인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사과를 드리면서 무슨 과일이냐 물어도 과일인지 다른 음식인지조차도 구별하시지 못했다. 그냥 입안에 들어오면 삼킬 뿐. 마치 어린아이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것처럼 과일을 갈아서 한 숟갈씩 떠 넣어드리거나 딸기나 바나나 등은 갈아서 유동식으로 드렸다. 다행히 배변시간은 거의 일정했고 설사나 변비 등으로 고생하신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소화를 잘 시켰다.

    욕창은 그 선에서 더 번지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화학섬유가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아 동대문 포목시장에 가서 순면을 끊어다 잠옷을 직접 만들어 입혀드렸다. 시어머님이 발병하기 몇 해 전 양재를 배웠던 덕분에 가능했다. 겨울에는 융을 끊어다 옷을 지어드렸다.

    해가 바뀌고 7년째로 접어들던 봄, 시어머님은 말을 잃으셨다. 억지로 시켜야 한마디 겨우 할 정도였다. 식사를 드리면서도 “맛있어요, 어머니?” 하고 물으면 그냥 입만 벌렸다. 누가 찾아와서 인사를 하면 그저 눈인사만 할 뿐이었다. 식사시간 외에는 늘 주무셨다. 점점 눈의 초점을 정확히 맞추지 못해 마주 대할 때도 눈 맞춤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살아 있다는 의미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그냥 음식을 드리면 받아먹고 정기적으로 배설하는 그 외의 일상은 모두 죽은 상태나 다름없는 나날이었다. 내가 잠시라도 안 보이면 그토록 불안해하셨는데, 이제는 그러지도 않고 어디가 아프다고 하소연하는 일도 없었다.

    날씨가 더워지면서 목욕이 제일 힘들었다. 남편이 시어머님을 부축하고 있으면 나는 재빨리 온 몸을 씻겨드리곤 했다. 거의 누워만 계시던 탓에 허리가 제대로 버텨주지 못했다.

    뼈만 남아 안쓰러울 정도로 처참한 시어머님을 안고 남편은 몇 번씩이나 한숨을 쉬곤 했다. 어머님의 나신을 안고 있으면서 남편이 느끼는 소회는 나보다 휠씬 더 깊으리라. 그 이면에 나에 대한 미안함도 많은 듯 시어머님 목욕을 끝내고 같이 땀으로 뒤범벅이 된 상태에서 남편은 내게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삶과 죽음의 그림자를 확인하며

    밤에 자다가 화장실이라도 가게 되면 시어머님의 방으로 가서 호흡을 점검하곤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도 혹시 하는 마음으로 시어머님의 방문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열고 기척이 없으실 때는 자는 얼굴을 들여다보며 숨을 쉬시는지 흔들어도 보고 숨소리를 확인해야 안심이 되었다.

    낮에 외출했다가도 서둘러 돌아와 기저귀를 갈기 전 숨소리부터 확인하고 살짝 흔들며 “어머니” 하고 불러보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매일의 삶이 불안했다. 병원에 찾아가면 의사는 “이미 뇌가 많이 상해 회복이 불가능하니 그냥 섭생만 잘해드리라”는 말뿐이었다.

    잘 드시던 식사도 양이 점점 적어지더니 얼마쯤 드시면 숟가락을 입에 대도 입을 열지 않았다. 식사를 하실 때도 갓난아기가 입가에 무엇이 닿으면 본능적으로 입을 벌리는 것과 흡사했다. 죽보다 물이나 주스를 드릴 때가 더 조심스러웠는데 사레에 들리면 호흡이 불규칙해지면서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 그렇게 숨이 멎는 상황이 올까봐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6월 말로 접어들던 어느 날이었다. 날씨가 더워 면으로 만든 얇은 옷을 입히고 하루에 두세 번씩 돌아 눕히는데 옆으로 눕히기 위해 등을 보이게 몸을 젖히는 순간이었다.

    방바닥에 닿는 척추의 양쪽 뼈 부분 피부조직이 마치 까만 쌀알을 뿌려놓은 것처럼 변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나의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척추를 따라 두 줄로 거뭇거뭇한 점이 나란히 찍혀 있는 모습을 어디에 비유할까. 바나나의 노란 껍질이 오래되면서 거뭇거뭇해지고 썩어가는 모양과 색깔 그대로였다. 욕창 방지 매트를 깔고 수시로 몸을 살폈어도 그런 모습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날씨는 덥고 이대로 몸이 썩어간다면 어떻게 감당해야할지 앞이 캄캄했다. 모든 것이 이젠 끝이구나 싶었다. 그러면서도 근육의 조직이 시시각각 괴사하고 있는 것은 혈액순환이 안 된다는 증거인데 이럴 바에는 하루라도 빨리 마지막 가실 길로 가시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가 아닐까하는, 조금은 냉정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심장만 살아서 며칠을 연장한다 한들 그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 자신이 이런 경우라면 어떤 길을 선택할까. 그런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점심을 드리니 확연히 느낄 정도로 반응이 미약했다. 입을 벌리는 모양도 전보다 어줍고 삼키는 힘도 약했다. 이대로 음식을 드려야 하나. 죽을 한 숟가락씩 떠 넣어드리며 시어머님의 의식을 살폈다. 불러도 대답이 없지만 분명히 의식은 있었다. 내가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니 내 손을 잡는 힘이 미약하게나마 느껴졌다. 상을 물리고 난 후 나는 시어머님의 손을 잡고 내가 생각해도 당돌한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머니, 이대로 편안히 아버님 곁으로 가세요. 집은 아무 걱정 안 하셔도 다 잘해나갈 거예요. 힘드시면 편안히 눈을 감으세요. 아버님 곁으로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죠. 편안히 가세요. 어머니….”

    시어머님께 드린 말은 솔직한 내 마음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시어머님의 의식이 흐려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누이가 와서 엄마를 외쳐 불러도 별 반응이 없었다. 며느리가 어디 있느냐 물으면 그래도 내 쪽을 쳐다보는 듯했지만 이제는 며칠 못 사실 것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오랜 간병에 시달려서인지 나에겐 시어머님의 처참한 몰골이 안타까울 뿐 더 사셔야 한다는 절박함 같은 것은 없었다.

    마지막 가시는 길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집에서 운명을 하신다면 이 여름에 어떻게 장례를 치를까 걱정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병원으로 모시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119 구급차를 불렀다. 가는 동안 시어머님은 벌써 호흡곤란이 왔다. 병원에 도착해 담당의사와 상담을 하고 우선 응급실로 모셨다. 시어머님은 산소 호흡기를 쓰고 나서 바로 의식을 잃었다. 갑자기 움직인 탓에 상태가 더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입원실은 며칠을 기다려야 할 상황이었고 그나마 응급실에 빈 침대가 있어 그날 밤은 그곳에서 보냈다. 다음날 아침 응급실 당직 의사는 집으로 모셔가서 조용히 임종을 맞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산소호스를 떼면 그대로 돌아가실 상황이었는데 그것을 떼고 집으로 모셔온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시어머님을 119 구급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시동생은 어디 갔는지 응급실 주변을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시누이는 아이들을 학교에 등교시키기 위해 잠깐 집에 들렀다가 오겠다고 했다. 남편은 집에서 가져 온 차를 직접 몰아야 했다. 결국 나 혼자서 구급차에 타고 시어머님을 팔베개 한 상태로 안고 집으로 향했다. 남편이 앞장섰다.

    구급차가 원효대교를 건너 전자상가에 막 진입할 무렵 시어머님은 갑자기 깊은 숨을 몰아쉬셨다. 겁이 덜컥 났다. 운전기사에게 “호흡이 안 좋은데 어떻게 하면 되냐”고 다급히 물었지만 기사는 그냥 가자는 것이었다. 나는 다급히 시어머님의 가슴을 마사지하며 어머니를 외쳐 불러봤지만 숨은 곧 끊어질 것 같았다. 구급차가 전자상가 끝에서 유턴을 할 즈음 집을 200여m 앞에 놓아두고 시어머님의 호흡은 긴 심호흡을 끝으로 그대로 멎어버렸다. 내 팔베개를 한 채로 그렇게 시어머님은 눈을 감으셨다.

    묘한 인연인지 시아버님의 임종 때도 다른 식구 아무도 보지 못한 채 나 혼자 지켰는데, 시어머님의 마지막 모습도 결국 나 혼자 지켜봐야 했다.

    빈소를 차린 날 폭우가 쏟아졌다. 입관하는 시어머님의 몸은 너무나 처참해서 안타까움을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뼈만 앙상한데다 수의를 입히는 과정에서 욕창 치료용 반창고를 떼어낼 때 살점이 그대로 묻어났다. 너무나 처참한 광경이었다. 남편은 입관하는 내내 서럽게 울었다. 슬픔은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 먼발치에서 본 사람보다 크다. 나도 그동안의 일들이 회한으로 떠올라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했다.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한 인간은 있을 수 없고, 작은 일로도 자족할 수 있는 모자람의 미학을 가지는 사고가 필요한 것 같다. 욕심을 내면 항상 부족하고, 마음을 비우면 항상 풍족한 것이 아닐까. 시어머님은 비록 나를 힘들게는 하셨지만 내게 많은 것을 베풀고 가셨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시어머님을 여의고 한동안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TV에서 치매 환자를 그린 드라마를 방영할 때면 눈물을 펑펑 쏟곤 했다. 지난 일들이 떠올라 때로 후회스럽고 시어머님께 큰 소리를 쳤던 일들, 미워했던 일들이 마음에 사무쳐 괴로웠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시어머님을 생각했던 것보다 시어머님이 나를 생각한 부분이 훨씬 깊고 넓었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을 알지 못했던 내가 후회스럽다.

    이 글을 통해 시어머님과 나의 7년간의 연극 같은 나날을 되짚어보면서 내일을 알 수 없는 나의 여생이 과연 어떻게 흘러갈까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시어머님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것은 아니기에 더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나름으로 잘산다고 할 수 있을지, 그 알 수 없는 미래가 안개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다만 오늘, 현재의 모든 일들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내면을 다독이며 살아야겠다는 다짐만이 내가 내일의 삶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란 생각뿐이다.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복용하면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잠을 자고 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돼 우리 집을 찾아가자는 둥, 내 방에 데려다 달라는 둥, 엉뚱한 착각으로 괴로워했다. 외래 진료를 하는 날 의사에게 그런 고충을 얘기하자 의사는 우울증을 치료하기보다 치매치료에 비중을 두어 약을 지어 주었다.

    그러나 치매 치료약을 먹으면 또 우울증이 급속하게 심해졌다. 다시 의사에게 우울증에 대해 상의하면 또 마음을 안정시키는 안정제를 투여하였다. 그 양이 조금만 균형을 잃으면 치매가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때때로 사람을 착각한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발생했다.

    시어머님은 친구들과 전화통화를 하고나면 실제로 그들과 한자리에서 함께 얘기를 나눈 것으로 착각해 집안 곳곳을 헤매며 친구들을 찾곤 했다. 아무리 전화로 통화한 것이라고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했다. 병원에 들러 그런 일을 설명하면 의사는 치매증상을 완화시키는 약으로 대처했다. 그러나 그 약을 복용하면 다시 우울해져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하고 불행하다”면서 심각한 자기 비하의 감정에 빠졌다.

    곁에서 간호하는 내 입장에서는 심한 치매보다는 우울증이 나을 것 같아 의사에게 치매치료에 비중을 둬달라고 호소했다.

    그나마 불면증은 조금씩 호전되는 듯했으나 자신이 불행하다는 감정은 갈수록 심해졌다. 작은 일에도 울기 일쑤였고 시어머님의 한숨소리가 집안에 그칠 날이 없었다. 그 다음 병원에 들렀을 때는 의사에게 어떻게든 우울증 증세를 조금이라도 낫게 해 달라고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당시 시어머님은 기질성 우울증과 치매 사이를 마치 줄타기 하듯 상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 머리카락 한 올만큼의 차이로도 예민해졌다. 의사는 치매를 치료하려 하면 우울증 증세로 치닫고, 우울증을 치료하려 하면 치매가 오니 자신으로서도 여간 난감한 경우가 아니라고 오히려 나에게 호소했다.

    우울증이 심할 때면 시어머님은 식구들 몰래 당신의 침구 밑에 칼이나 가위 등을 숨겨놓곤 했다. 아무리 같이 사는 며느리라 해도 24시간을 옆에서 감시할 수 없기에, 잠시라도 빈 시간에 혹여 그런 용구들로 자해행위라도 할까봐 여간 신경이 곤두서는 게 아니었다.

    침구를 갈다가 그런 것들을 발견하고 “왜 이런 것을 숨겨 놓으셨느냐”고 물으면 시어머님은 모른다고 시치미를 뗐다. 나는 점점 불안해져서 그 다음 진찰 때 우울증 치료에 중점을 두어 달라고 의사에게 청했다. 혹 그러다가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맑은 정신이 아니더라도 위험은 피해가자는 계산이었다.

    우울증 약을 복용하면서 정신이 점점 흐려져서인지 시어머님은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전날 유년시절의 꿈을 꾸고는 당신의 친정어머니가 왔었다며 찾아오라고 성화를 부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어머님의 경우 치매가 시작되면서 유독 당신이 어렸을 때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행동한다는 점이었다. 당신의 아들을 보고 친정오빠로 착각하는가 하면 당신은 또 자신의 친정어머니가 되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행동할 때가 많았다.

    전날 밤 당신의 친정어머니와 금강산에 다녀온 꿈을 꾸면 다음날 또 가야한다고 친정어머니를 찾는 것이었다.

    꿈과 현실을 분간하지 못하고

    돌이켜 보면 나도 미련할 만큼 효과 없는 행동을 하곤 했다. 시어머님이 그런 착각을 할 때마다 힘들여 사실을 설명했으니 말이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목이 아플 정도로 한 말을 또 하고 또 하다가 지쳐 하루해가 저물곤 했다. 아무리 해봐야 소용없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왜 그렇게 사실에 대해 설명하려 애썼는지…. 그 당시에는 치매라는 병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런 시어머님이 야속하기만 했고 답답하기만 해서, 왜 나는 이런 시어머님을 모셔야 하는지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잠시라도 내가 한눈을 팔면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하루하루 어떻게 견뎌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밉던 시어머님이 순간순간 나를 일깨우는 경우가 있었다. 일반적인 치매환자와 달리 시어머님은 정신을 놓기 전까지 맏며느리인 나에 대한 신뢰가 남달랐다. 보통의 경우 치매가 오면 며느리한테 밥을 안 준다느니, 굶긴다느니 한다는데 시어머님 경우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예를 들어 내가 아프다고 하면 ‘한숨 자라’는 등 순간이나마 신통할 정도로 배려해 주고는 내가 잠잘 수 있게 조용히 기다리곤 했다. 나는 그런 상황을 역이용해서 시어머님이 이것 해달라, 저것 해달라며 볶아대기 시작하면 “어머니 저 몸이 아파 약 먹고 좀 쉬어야겠어요”하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시어머님은 금세 조용해졌다.

    시어머님께는 죄송했지만 나는 그런 점을 가끔 이용했다. 시집와서 여간해선 아파 누워 본 적이 없는 내가 시어머님을 이용했던 경우라고 할까.

    시어머님은 점점 과거로 돌아가서 현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집에 가자고 졸랐다. 당시 우리 집은 시어머님이 30대에 구입한 집이었다. 그때 회갑을 넘긴 나이였으나 30여년 넘게 살아온 집인데도 집에 가고 싶다든지, 방에 데려다 달라든지 무조건 조르기 시작하면 그 어떤 설명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점점 치매가 깊어가 병원에서도 치매치료를 중점으로 다시 약을 썼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우리 집은 일본식 건물이라서 유난히 문이 많고 창문이 커서 현관문을 이용하지 않고도 언제든지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였다.

    날씨가 따뜻한 어느 봄날이었다. 시누이네 아이들이 와서 마당에서 놀고 있었고, 나는 잠시 목욕탕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불과 1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는데 목욕탕에서 나와 보니 시어머님이 방에 없었다. 마당에서 놀던 조카들에게 할머니 어디 가시는지 보았느냐고 물으니 나일론 끈으로 호미를 돌돌 말아 가지고 밖으로 나가셨다는 것이었다.

    그 무렵 집나간 치매노인들이 결국 집을 찾지 못하고 거리를 헤매다 잘못되는 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큰일이다 싶어 시어머님을 사방팔방 찾아 다녔다. 그렇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파출소로 구청으로 쫓아다녔으나 한 나절이 지나도록 시어머님을 찾지 못했다. 가까이 지내던 시어머님 친구들과 교회의 교우들한테 전화를 걸어 시어머님을 보면 아무데도 못 가시게 하고 연락을 달라고 당부하는 동안 마음 한편에서는 별별 불안한 생각이 다 들었다.

    집에서 한강이 가까웠기에 혹 한강으로 가신 것은 아닌지 하여 남편이 한강 둔치를 훑고 다녔지만 허사였다. 물건이라면 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찾는 사람 눈에 쉽게 띄는데 사람은 계속 움직이니 서로 지나치면 같은 길을 가면서도 엇갈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그 때 알았다.

    이제 절차를 밟아 가출신고를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모두가 허탈해 있는데 바로 그때 시어머님이 아랫동네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걸어오시는 게 아닌가. 반갑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내가 달려가서 어디 갔었느냐고 물으니 나물 캐러 갔다 온다는 것이었다. 시어머님의 손에는 비닐봉지와 호미 그리고 나일론 끈이 그대로 들려 있었다. 우리 집은 뜰이 넓어 봄이면 호미로 꽃모종도 하고 씨앗도 심느라 호미가 마당 한켠에 늘 걸려 있었다.

    그제야 한숨 돌리고 집으로 모셔와 나물을 캐러 어디로 갔었느냐 물으니, 당신의 고향 뒷동산이라고 갔는데 온통 돌이 덮여 있어 나물은 하나도 보지 못했노라 하셨다. 시어머님이 나물을 캐러 가신 곳은 다름 아닌 용산전자상가였다. 그때 용산 청과시장이 가락동 농수산물시장으로 이전을 하고 그 자리에 전자상가를 조성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라 네모 반듯한 보도블록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그러니 시어머니의 눈에는 나물은 보이지 않고 돌만 깔려 있을 수밖에.

    그래도 스스로 집을 찾아 오셨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 뒤로 또 어디로 나가실지 몰라 시장을 갈 때도 늘 불안했고 잠깐 나갈 일이 생기면 마음이 급해서 번개처럼 뛰어다니곤 했다. 지금도 그때의 습성이 남아있어 나는 어디를 가나 늘 마음이 바쁘고 걸음이 유난히 빠르다.

    첫 번째 정신과 입원

    치매가 점점 심해져서 의사의 권유대로 입원을 하게 되었다. 약을 제대로 쓰려면 시어머님을 지켜보면서 양을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들 학교 때문에 내가 병상을 지킬 수가 없어 간병인을 두기로 했다.

    그러나 거의 한 달이 다 되도록 시어머님의 치매기는 도무지 나아지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감당하기 어려운 간병비를 주면서 계속 병원에 모실 수는 없었다. 시어머님은 육체적으로는 아주 건강한 상태였다. 의사는 환자 체력에 맞게 잠자는 약을 줄테니, 환자 본인이 안절부절 못하고 힘들어하는 경우나 곁에서 간호하기가 너무 힘들어 도저히 감당을 못할 때 아주 소량씩 먹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시어머님의 체력은 한결 좋아졌다. 하지만 치매상태는 악화됐다. 하루 종일 물건과 숨바꼭질을 하는 바람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당시 시어머님 명의로 예금통장이 몇 개 있었는데 잠깐 어디다 두셨는지 그것을 찾느라 온통 집안을 뒤집어놓았다. 그런 일이 잦아 한번은 시어머님께 통장을 확인해드리고 “자꾸 잊으시니까 내가 안전한 곳에 보관하겠으니 다시는 손대지 마시라”고 신신당부를 드렸다. 그러나 내가 화장실을 가거나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시어머님은 그 통장을 다른 곳으로 옮기곤 없어졌다고 하고 했다. 찾을 때까지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옷장에 두었다가, 카펫 밑에 깔았다가, 가방에 넣었다가, 도자기에 넣었다가, 별별 장소를 정해놓았다. 더 이상 손대지 않기로 약속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누가 곁에 없으면 어떻게 통장 둔 곳을 알고 꺼내어 다른 곳에 감추는지 신기한 일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이불장에서 이불을 다 내렸다가 올리고 옷장에서 옷을 다 꺼냈다가 다시 걸기를 수차례. 그도 안돼 내가 가지고 있을 테니 찾지 마시라고 하고 보관하고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달라고 성화여서 그러지도 못했다.

    짜증이 나서 견딜 수도 없었지만 시어머님과 통하지도 않을 약속을 한 나도 참 한심스러웠다. 어느 때는 저녁시간을 넘길 때까지 통장을 찾느라 집안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 정신으로도 아들한테는 알리지 말라면서 아들이 집에 오면 가만히 참으셨는데 그런 부분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저 신통할 따름이었다. 나도 처음에는 시어머님이 요구하는 것이라 남편이 모르게 했지만 시어머님이 정신적으로 정상이 아니라는 판단을 한 뒤에는 남편과 상의했다. 다만 그나마 나한테만이라도 모든 것을 털어놓는 시어머님의 믿음이 깨질까봐 남편은 끝까지 모른 체하기로 했다. 사실 그 때문에 더 힘들었다.

    “사둔, 우리 노래나 하고 놉시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눈만 뜨면 어제 둔 통장이 없어졌다고 찾고 다시 없어지는 일이 수도 없이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남편이 들어왔을 때 도저히 참아낼 수 없어 남편에게 통장을 관리하든지 어떻게 좀 해보라고 했다.

    그날 급기야 남편이 통장을 보관하겠다며 시어머님의 양해를 구했지만 바로 다음날 또 통장을 봐야겠다고 조르는 통에 특단의 대책이 마련됐다. 남편의 기지로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줄에 통장을 매달아 놓기로 한 것이다.

    집 구조가 일본식이어서 천장이 상당히 높아 의자를 놓고 올라가야 닿을 정도였기에 통장을 실로 묶어 그 곳에 대롱대롱 매달아 놓았다. 그리고 시어머님께 통장 생각이 날 때마다 그것을 보고 안심하라 했는데 그 일로 통장을 갖고 매일같이 벌이던 숨바꼭질은 끝나게 되었다. 누워서 바로 보이는 장소에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면서도 시어머님이 직접 내릴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옮겨지지는 않았다.

    시어머님이 자리에 완전히 누우실 때까지 통장은 천장에 그렇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우리 집에 온 손님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모습을 보고 재미있다고 웃곤 했다.

    얼마 후 나는 잠시 외출할 시간에 보호자 노릇을 해달라며 친정어머니를 모셔왔다. 친정어머니는 원래 몸이 불편하셔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시어머님 혼자 계신 것보다는 훨씬 마음이 놓였다.

    친정어머니께선 시어머님이 엉뚱한 일로 조르면 옆에서 아기를 다루듯 “사둔, 우리 노래나 하고 놉시다” 하면서 ‘석탄 백탄 타는데 연기도 김도 잘 나는데 이내 가슴 타는 데는 연기도 김도 아니 난다’며 노랫가락을 흥얼거리셨다. 언제 그런 노래를 부르셨는지 친정어머니의 레퍼토리는 여남은 곡은 족히 되는 듯했다. 그 뒤로 시어머님은 매일같이 친정어머니께 노래를 하라고 졸라댔다.

    나는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니를 보면서 대조적인 면을 많이 발견했다. 친정어머니는 두메산골에 묻혀 살던 전형적인 시골 노인이다. 한일 합방이 된 1910년에 벽촌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 되던 해 친모를 잃었다. 위로 오빠 한 분을 두고 외할아버지는 재혼을 했기에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일곱 살 되던 해 소아마비를 앓아 그 때부터 왼손과 왼발이 자유롭지 못했다. 때문에 결혼도 만혼으로 나와 오빠를 늦게 낳았는데 아버지마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찢어지게 가난하고 고달픈 삶을 사셨다.

    늘 주려는 친정어머니와 받기를 소망하는 시어머님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본 친정어머니는 마음이 부자셨다. 비록 가난했지만 어릴 때 우리 집엔 이웃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먹을거리라야 고구마나 면사무소에서 배급받은 밀가루 음식이 전부였지만 작은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

    그에 비해 시어머님은 어릴 때도 유복하게 자랐고 남편 또한 사회에서 인정받을 만한 위치에 있었기에 언제나 당당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시어머님은 가난하지도 않았고 신체 건강했으며 든든한 남편이 받쳐주는, 쉽게 말해 최소한의 삶을 유지하는 수준이 아니라 주위에서 부러워할 만한 환경이었다. 그러나 즐겁게 살기보다는 늘 현실에 불만스러워 했다.

    나는 그 무렵 시어머님과 친정어머니, 두 분의 삶을 비교하면서 타인에게 작은 것이라도 나누어주려는 사람은 늘 넉넉한 기쁨을 맛보는 반면, 타인에게 받으려 하는 사람은 항상 부족함에 불만을 느낀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친정어머니는 늘 자식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환경을 안타까워했고, 시어머님은 늘 자식이나 주변에서 작은 것이라도 받기를 소망하셨기에 항상 성에 차지 않았다.

    그때 나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란 삶의 철학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항상 즐겁게 살아야 한다는 것. 또 한 가지, 욕심을 버리라는 것. 많이 누리고도 더 요구하는 삶은 항상 갈증의 삶이며 언제나 부족해서 마음의 만족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친정어머니는 그런 성격 탓인지 올해로 95세에 불편한 몸인데도 정신이 총총하고 아픈 데 없이 살아계시다. 친정어머님이 지금 걷지를 못한다고 우울해하며 자신과 주변을 들볶는다면 나로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닐텐데 그대로 수용하고 편안하게 사셔서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1991년 겨울 친정어머니께서 집으로 돌아가고 다시 혼자서 시어머님을 모시며 버거운 생활을 하던 때였다. 남편은 불 같은 성격이라 순간적으로 내가 말실수라도 하면 그것이 꼬리가 되어 쉽게 부부싸움으로 번지곤 했는데, 그 날도 나는 초저녁에 남편과 말다툼을 했다. 남편은 늘 힘들게 시어머님을 모시는 내게 미안해했고 나는 나대로 작은 일에도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든데 몰라주나’ 싶어 서운한 마음에 기분이 상하곤 했다. 남편은 남편대로 자격지심에 작은 일에도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때가 잦았다.

    다음날 시어머님은 많이 우울해 보였다. 우리부부가 싸운 것을 아시는지 내게 전같지 않게 대했다.

    그 날은 정상인 것처럼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걱정해 주시기도 했다. 그 때문에 나는 안심하고 있었는데 오후에 잠깐 사이 시어머님이 집을 나가셨다. 급히 남편한테 연락하고 파출소에 시어머님이 입고 나간 옷을 소상히 설명하면서 신고했다. 시누이 내외와 시동생 부부에게도 알려 사방팔방으로 찾아 나섰다.

    동네는 물론 한강변, 공원 등을 샅샅이 살폈으나 찾을 수 없었다. 평소에 기차를 타고 금강산에 간다는 소리를 자주 했기에 서울역에 나가 인상착의를 설명하며 수소문해도 알 수가 없었다. 혹시 교통사고를 당해서 병원에 있을지도 몰라 시내 병원의 응급실도 모두 알아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남편은 행려병자가 사고를 당하면 가게 되는 보라매병원 응급실과 영안실까지 다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대로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이튿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는데 동네 세탁소 아저씨가 우리 집 대문을 급하게 두드렸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마침 일찍 출근하는데 기차선로 옆에 이 집 할머니 같은 분이 쓰러져 있는 걸 보았다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길로 달려가 보니 시어머님은 온통 피투성이가 되어 건널목의 선로 옆에 앉아서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바닥으로 훑어내고 계셨다.

    우리 동네에는 용산에서 수색까지 운행하는 기차가 통과하는 건널목이 있다. 옛날처럼 신호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어 이곳으로 열차가 지날 때는 ‘땡 땡’ 신호가 울리고, 역무원이 상주하며 신호를 관리한다. 주로 수색에서 석탄을 실어 나르는 화차였는데 가끔은 용산역에서 차선을 바꾸기 위해 후진하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그 건널목에서 시어머니는 머리에 상처를 입으신 것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시어머님은 천천히 후진하는 화차에 올라타려다 바깥쪽으로 넘어지면서 선로에 머리를 부딪친 것이었다. 느리게 후진하는 기차였기에 그만했지 만약에 제대로 달리는 기차에 그렇게 부딪혔다면 시어머님의 시신도 찾지 못했을거라 했다.

    그 길로 상처에 수건을 대고 지혈을 시키며 가까운 여의도성모병원 응급실로 갔다.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상처를 씻어내고 봉합을 했는데 머리를 무려 열세 바늘이나 꿰맸다. 눈 위에서부터 정수리 옆까지 찢어졌다. 다행히 상처가 깊지는 않아 뇌를 다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시어머님께 왜 그곳에 갔었느냐 물으니 금강산에 가는 기차를 타다가 미끄러지셨다고 했다. 하지만 왜 금강산에 가려고 했냐는 물음에는 그냥 속상해서라고 얼버무렸다. 그 전날 우리 부부가 다투는 것을 보고 마음이 상하신 게 분명했다. 나는 그런 일을 당하신 시어머님이 원망스러우면서도 우리 부부 때문에 일이 그 지경까지 발전되었다는 것에 자책감이 앞섰다.

    돈에 대한 지나친 집착

    시어머님은 그 상처 때문에 얼마 동안 다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다니던 병원에서 정신과 진료기록을 모두 가져와 아예 이번 기회에 정신과 치료도 집에서 가까운 성모병원으로 옮겼다. 전문 정신병동이라 보호자는 면회시간만 입실이 허락되어 그나마 간병인을 두지 않아도 되었다. 소지품도 아주 간단한 것만 허락되었는데 세면도구가 전부였다.

    아침에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병원으로 달려가면 시어머님은 옆 침대의 환자와 물건을 가져갔다고 실랑이를 하곤 했다. 어느 날은 비누를, 어느 날은 칫솔을 가져갔다고 하는 바람에 옆 침대의 시어머님보다 훨씬 젊은 우울증 환자는 나를 붙잡고 억울하다고 하소연했다.

    시어머님은 간단한 물리치료와 머리에 상처가 아물 때까지 상처를 소독하는 정도의 치료만 받았다. 정신과에서도 외과와 병행해서 회진을 했지만 이미 아는 병세라서 특별한 이야기도 없었다. 안정제를 썼는지 낮에는 주로 주무셨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침에 병원에 가니 시어머님은 침대 시트 밑에 두툼한 종이봉투를 움켜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며 반색했다. 내가 그것이 무어냐고 물으니 돈이라 했다. 그 종이봉투 속에는 만원권으로 상당량의 현찰이 들어 있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어느 교우에게 빌려줬던 돈을 전날 밤에 받아 밤새 침대 시트 밑에 놓고 불안해서 화장실도 못 갔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받고 밤새 얼마나 노심초사했을지 상상해보니 참 기가 막혔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에게 보호자한테 연락도 안하고 입원실로 현금을 갖다 주는 교우의 자질도 한심스럽고, 모든 것을 비밀로 하다보니 그런 경우를 맞는 시어머님도 한심스러웠다.

    돈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그 교우에게 전화를 했다. 세상에 정신이 온전치 못한 병자에게 돈을 돌려주려면 간단하게 수표를 끊든지 하지 그렇게 무책임한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상대방은 시어머님이 꼭 현찰로 되돌려 달라고 부탁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보호자인 나한테만이라도 연락을 해 줘야지 알 만한 분들이 그렇게 처신하면 어떻게 하냐고 질책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어머님은 돈에 대해 애착이 무척 강했다. 이 세상에 돈에 대해 애착이 없는 사람이 없겠지만 시어머님의 경우는 어느 정도 여유로운 환경이면서도 늘 변변한 옷 하나 못해 입었고 번듯한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 한 끼 하는 것도 아까워하셨다. 특히 돈에 관한 한 아들을 병적으로 의심해서 당신이 가진 돈의 액수를 아들이 알까봐 늘 전전긍긍했다.

    불효자 오명 벗은 남편

    드디어 상처의 실밥을 다 빼고 퇴원했다. 그 때는 반짝하듯 치매증상이 덜 했다. 하루는 같은 교회에 다니는 장로라며 어떤 사람이 찾아왔다. 그 분은 시어머님이 통장과 현찰 얼마를 맡겼는데 생각해보니 가정의 불신에 동조하는 것 같아 영 마음이 편치 않아 돌려주려고 왔다며 나에게 내 놓았다. 그 사람의 말이 시어머님이 며느리는 믿는데 아들이 며느리를 닦달하면 며느리가 사실대로 말할까봐 며느리에겐 못 맡긴다고 했단다.

    이런 일이 언제까지 반복될는지 한숨이 나왔다. 시어머님은 시어머님대로 돈 때문에 불안해 하셨고, 남편은 남편대로 시어머님으로 인해 주위에서 불효자로 낙인찍히고…. 이대로 더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사실과 다르게 남편이 타인으로부터 받는 오해의 소지를 하루빨리 없애야 될 것 같았다.

    그 무렵 시어머님은 당신의 재산 중 얼마를 하나님께 기증하기로 예전부터 약속했다며 시행하고 싶어했다. 그런데 아들이 알면 그런 곳에 돈을 쓴다고 당신을 쫓아낼 것이 분명하니 비밀로 해야 된다면서 걱정만 하고 있을 뿐 실행하지 못했다. 특히 교우들이 병문안을 오면 교우들한테 아들 때문에 그 일을 못한다고 하소연을 하곤 했다.

    나는 그 기회를 적절히 이용해 시어머님의 아들에 대한 불신도 줄이고, 또 타인들에게 오해를 받는 남편의 불명예도 벗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교회 장로를 만나 현재의 사정을 충분히 설명하고 시어머님에게 만약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가족 몰래 쉬쉬하며 내놓는 기부금을 달갑게 받으시지 않을 것이며, 아들과 상의해서 즐겁게 낸다면 축복이 있을 거라고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드디어 정해진 날 남편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교회에 나가 여러 장로 앞에서 시어머님이 얼마를 기증하시니 잘 받아달라고 해 그 일은 마무리가 되었다. 그로써 시어머님이 불효자로 만든 남편은 오명을 벗게 되었으며 시어머님 자신도 늘 불안해하던 속앓이가 조금은 줄어들었다.

    착시 현상

    1992년 봄, 겨울 동안 신체적으로 움츠린 생활을 하신 탓인지 걸음걸이가 정상과 달랐다. 어디를 모시고 가려면 다리보다 머리와 가슴이 먼저 앞으로 나가 자주 넘어졌다. 아무리 천천히 가시라고 잡아끌어도 윗몸이 자꾸 앞으로 숙여졌다.

    그리고 당신 집이 아니라며 우리 집으로 제발 좀 데려다 달라고 애원했다. 견디다 못해 할 수 없이 마당으로 모시고 나가 지금 집에 가고 있다하면 잠잠해 지셨다. 그런데 빨랫줄에 널려 있는 하얀 빨래가 바람에 흔들거리면 그 빨래를 보고 사람으로 착각하여 ‘아저씨 동대문 가는 버스 여기서 타요?’ 하면서 차를 태워달라고 졸랐다. 내가 아무리 이게 빨래지 어디 사람이냐고 손으로 만져보게 해도 소용없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정원에 놓아두었던 의자를 가져와 거기에 앉히고 “지금 버스 탔어요” 하고는 흔들어 주다가 한참이 지난 후에 “이제 다 왔어요. 내려요” 하면 정말 그런 줄 아셨다. 그렇게 시어머님과 함께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하며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가끔 시어머님 친구들이 문병차 와서는 “당신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이냐? 요즘 세상에 이런 며느리가 어디 있느냐” 하며 나를 칭찬하면 시어머님도 “그래 나는 복이 많아” 하시면서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다가도, 나를 보고 “밥 하는 아주마이” 하고 부르곤 해서 나를 어이없게 했다.

    한 가지 느낀 것은 집에 식구 외 다른 사람이 오면 긴장을 해서인지 아주 정상인처럼 별로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손님들이 가고 다시 편안해지면 또 엉뚱한 소리를 하곤 했다.

    더 곤란한 경우는 시누이나 시동생, 그리고 동서가 오면 시어머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안부도 묻고 이상이 없어 보여 내가 지나온 날들의 증상을 얘기해도 자기들 보기는 그렇지 않은데 하고 이상히 여길 때였다.

    날마다 아침이 되면 당신의 집에 가신다고 졸라서 마당까지 나왔다가, 빨래를 보고 버스로 알고 또 태워드린다고 의자에 앉혔다가, 어느 날은 다 왔다고 하면 집에 들어가자 해서 당신 방으로 모셔오는 것이 통했는데, 어느 날은 반대로 의자에서 일어나 방으로 모셔 오려하면 내 집에 가야한다고 막무가내로 버텼다.

    그럴 때면 담 밖으로 상체를 내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아저씨! 우리 집 좀 가르쳐 주세요” 하고 떠들기도 했다. 지나가던 어떤 사람은 사실인줄 알고 “집이 어딘데요?” 하고 묻기도 하고 아는 사람들은 “할머니, 그 곳이 할머니 집이에요” 하고 대꾸해주었다. 그러면 시어머님은 “에이 아저씨도 모르누만” 하고는 다시 조르곤 했다.

    어떤 때는 집안에서 창문을 두드리며 집에 데려다 달라고 무조건 조르기도 했다. 나도 말리다 지쳐 그대로 방관만 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하루는 앞집에 사는 아저씨가 초인종을 누르기에 나가 보니, 할머니가 아무도 없어서 문을 열어달라고 소리치는 줄 알았다고 했을 정도였다.

    약을 복용하는 탓인지 점점 걸음걸이가 앞으로 쏠려 잘 넘어져 잠깐만 한 눈을 팔면 무릎 혹은 팔꿈치 등에 멍이 생기곤 했다. 그렇다고 약을 드시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하루 내내 성화를 대서, 의사는 보호자도 견뎌야 하니 소량의 약은 계속 써야 한다 했다. 어떤 날은 약을 써도 주무시지 않아 온 종일 둘이 씨름 아닌 씨름을 해야 했다.

    당신 뜻대로 되지 않는다며 물건을 붙잡고 버틸 때는 얼마나 힘이 센지, 내가 오히려 끌려갈 지경이었다. 실제 시어머님은 팔심이 대단히 셌다. 하루하루 갈수록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사과 서리

    같은 해 오월쯤이었던 것 같다. 아침부터 부슬비가 부슬 내렸다. 우리 집은 앞뜰에 경사가 심한 언덕이 있고 그 위에 벽돌담이 쳐져 있다.

    그 언덕에는 자연석들로 조경되어 있고, 그 사이사이 철쭉과 단풍나무가 심어져 있다. 보통 사람도 오르기 힘들 정도로 경사져 넘어지면 머리를 다칠 위험성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눈 깜짝 할 사이 시어머님이 마당을 지나 그 곳을 기어오르고 있지 않은가. 신발은 물론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여기저기 상처가 날 것이 뻔했다. 갑자기 부르면 돌아보다 넘어질까봐 살금살금 달려가 뒤에서 안아 내리려 했다. 내가 뒤에서 감싸 안자 시어머님은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버둥거렸다. 시어머님의 손힘이 얼마나 억센지 여기를 왜 오르느냐 물으며 내려가자고 아무리 소리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남편도 없는 아침나절이라 혼자서 끙끙대며 어린애를 야단치듯 시어머님을 끌고 간신히 들어와 목욕탕에 앉혔다. 입고 계신 옷은 비가 오는 날인지라 흙범벅이 되었고 나도 덩달아 온통 흙투성이였다. 옷을 벗기는데 안 벗으려고 얼마나 힘을 쓰시는지. 억지로 목욕을 시켜 방으로 모시고 들어와 자리에 뉘었다.

    그러는 동안 시어머님은 손목 여기저기에 멍이 들었고 나도 어깨와 허리가 뻐근했다. 시어머님은 기진하셨는지 조용한 것 같아 벗어놓은 옷들을 빨고 나도 온통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씻었다. 마침 그때 동서가 왔다. 내가 점심준비를 하려고 주방에 나와 있는데 시어머님은 동서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야? 작은 애야. 아까는 사과가 먹고 싶어서 남의 과수원에 몰래 들어가 사과서리를 하려 했는데 그만 사과를 따지도 못하고 주인한테 들켜서 잡혔단다. 그런데 그 주인이 나를 억지로 끌고 연못으로 가서 옷을 죄다 벗기고 물벼락을 맞히더니 조금 전에야 겨우 풀어줬단다. 옷은 다 빼앗겨서 이제 내가 입을 옷이 없어 야단이야.”

    나는 과수원집 주인이었고 시어머니는 사과서리를 하다 들켰기에 그리도 안 따라 오려고 있는 힘을 다해 버티신 것이었다. 그 무렵 시어머님은 속되게 표현한다면 한 마리 원숭이를 연상하게 하는 행동이 잦았다. 화장대 위 그 좁은 데 올라가서 쪼그리고 앉아 있기도 하고 장식장 위에 가까스로 매달려 장과 함께 넘어지기 일보직전에 발견되는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좁은 툇마루에서 현관 바닥으로 떨어져 다칠 뻔한 적도 여러 차례였다. 때문에 그 곳에 알루미늄 파이프로 지지대를 만들어 그것을 잡고 다니게 했다. 그런데 그 알루미늄 지지대의 좁은 공간에 매달려 꼭 정글 속 원숭이처럼 위태롭게 계시곤 했다. 위험해 못하게 하면 버스를 타고 있다며 내려오지 않았다. 시어머님의 치매는 점점 깊어가고 아이들 뒷바라지도 힘겨워 나는 자주 아이들한테 짜증을 내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신과 외래 진찰을 받으러 가는 날엔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보지만 진찰을 끝내고 돌아 나올 때는 언제나 허탈했다. 그저 약을 최대한 조절해보라는 것뿐 명쾌한 답은 없었다.

    잊어버린 화장실

    그 무렵 시어머님은 평소보다 자주 소변을 보려 했다. 혹 요로에 염증이 생겼나 싶어 외래 진찰 때 검사를 해 보아도 별 이상이 없었다. 흔히 말하는 ‘오줌소태’가 와서 그런지 몰라 옥수수 수염을 달여 드렸지만 다른 것은 다 잊고 오로지 소변만 생각하시는 듯했다.

    그러면서 화장실의 위치를 기억하지 못하고 헷갈리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간다고 해서 데려다 드리면 앉았다가 금방 일어나서는 문을 열고 나오는 즉시 다시 화장실에 데려다 달라고 졸라댔다. 잠시 같이 계시던 시작은할머님은 하루 종일 시어머님을 모시고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했다.

    아무리 병이라 해도 곁에서 시달리다 보면 역정도 내고 투정도 부리게 마련인가보다. 내가 시어머님을 모시는지 아니면 어린애를 야단치는지 하루에도 수십 번 회의가 들고 내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억지로 방으로 모셔와 다른 데로 신경을 돌려보려 해도 소용이 없었다. 내가 가끔 소리쳐서 그런지 내가 없으면 할머님을 더 조르고 내가 있으면 조금 눈치를 보는 듯도 했다.

    어느 며느리의 7년 치매 간병 일기
    시어머님을 모시면서 죄스러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시어머님은 속으로 며느리인 나를 끔찍이도 믿고 배려했다. 다른 사람은 못 믿어도 나만큼은 당신 딸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배려하는 편이었다.

    당시 시어머님의 상태로는 이해하기 힘든, 이런 일도 있었다. 화장실 간다고 할머님한테 가르쳐 달라고 성화를 대는데 할머님이 시어머님을 보고 “이 사람아, 자네 때문에 나도 병이 나고 에미도 병이 나서 죽을 지경이네. 지금 변소에 가봐야 그냥 나올 텐데 왜 그래. 한참 기다렸다 가야 소변도 나오지 않나. 좀 참아 보세. 지금 에미도 병이 났어”라고 말했더니 시어머님은 정색을 하고 “에미, 약은 먹었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오히려 할머님에게 선옥엄마 약 먹고 좀 쉬게 조용히 하라면서 그토록 졸라대던 화장실도 잠시 잊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할머님이 주방에라도 나가서 그릇 소리를 내면 선옥엄마 자는데 깬다고 오히려 야단을 칠 정도였다. 그런 시어머님을 대하면서 순간순간 짜증도 나고 투정도 부리면서 한편으로는 ‘내가 이러다 죄받지’ 하는 갈등이 밀려왔다. 그럴 때는 나도 참 많이 괴로웠다.

    방안에서 좌변기 사용

    화장실에 대한 강박관념 탓인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데려다 달라고 조르는 통에 식구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러다가 결국 종로 5가에 있는 의료기 가게에 가서 좌변기를 사오게 되었다. 방안에 놓고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방안에서 해결하도록 했다. 눈에 좌변기가 보여서인지 더 이상 화장실을 가르쳐 달라거나 데려다 달라고 조르는 일은 없어졌다. 다만 가끔 대변을 볼 때 실수하지 않는지 곁에서 지켜봐야 했다. 한번은 뚜껑을 열지 않고 그대로 변을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점점 운동능력과 지각능력이 떨어져갔다. 젓가락은 물론 숟가락조차 제대로 들지 못했고 음식 흘리는 것은 다반사가 돼버렸다. 반찬 한 가지씩 숟가락에 얹어 드렸지만 밥이나 국도 흘리지 않고 온전하게 드시지 못했다.

    처음에는 식구들과 한 상에서 그런대로 같이 식사를 했지만 나중에는 아이들과 남편을 먼저 들게 하고 나중에 시어머님과 둘이서 먹어야 마음이 편했다. 옆에서 보고 시중드는 내가 더 답답해 얼마 후에는 아예 직접 밥을 먹여 드렸다. 그 편이 훨씬 편했다. 턱받이까지 만들어 식사시간마다 채워 드렸다.

    인지능력이 떨어지고 시력도 점점 나빠져갔다. 안과 치료를 정기적으로 받았지만 왼쪽 눈은 예전에 포도막염을 앓은 후유증까지 겹쳐 거의 실명상태였다. 오른쪽 눈도 점점 나빠졌다. 하지만 안경은 위험할 수 있어 되도록이면 착용하지 않게 했다.

    시어머님은 치아가 일찍 상해 틀니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사 후 양치질을 하려면 틀니를 빼야 하는데 진짜 이인 줄 착각해 다른 사람은 만지지도 못하게 했다. 젊으셨을 때 치통으로 고생하시던 시절로 돌아가서 입을 꼭 다물고 함부로 만지면 이가 부스러진다며 두 손으로 입을 감싸쥐고 놓지 않았다. 매일 싸우다시피했다. 며느리보다 아들이 큰 소리로 말해야 입을 벌리고 틀니를 빼게 해서 양치질을 할 때마다 남편을 불러야 했다. 시어머님은 이웃이나 친지 등 병문안을 오는 사람이면 누구를 막론하고 돈을 놓고 가라고 하는 바람에 대처하기가 민망할 때도 많았다.

    평생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는데도 누가 왔다가 가려 하면 돈이 없다면서 좀 놓고 가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 어느 때는 쌀을 사야 한다고 하고, 또 어느 때는 틀니를 해 넣어야 한다는 핑계를 댔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문구점에서 파는 장난감 모조지폐였다. 그때 시어머님은 돈의 액수는 물론 진짜인지 모조인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돈과 비슷한 크기의 빳빳한 종이도 돈으로 생각했다. 시어머님을 속인다는 죄스러움도 있었지만 매번 연속되는 요구에 어쩔 수 없었다.

    그 후부터는 누가 찾아오면 미리 설명을 하고 곤란하지 않게 그 모조화폐를 이용하도록 했다. 아주 오랜만에 찾아오는 사람은 요구하지 않아도 그냥 기분 좋게 해드리기 위해서 얼마의 돈을 내놓기도 했지만, 자주 오는 사람들은 매번 그럴 수 없는 터라 서로가 곤란하지 않게 그 방법을 사용했던 것. 역시 돈이란 모든 것을 잊어가면서도 마지막까지 소유하고 싶은 애물임을 실감하면서. 시어머님의 요 밑에는 그렇게 모조화폐가 쌓여갔다. 시어머님은 액수도 모르면서 그것을 보고 흐뭇해하곤 했다.

    시력이 떨어지고 활동시간이 줄어들면서 다릿심도 빠져갔다. 걸음걸이는 뒤뚱뒤뚱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운동을 시작했다.

    방에서 다리운동을 하시라고 하나 둘을 세어가며 구령을 붙여주면 곧잘 하다가도 점점 아기들의 장난질처럼 동작을 작게 했다. 또 손을 들어 만세를 열 번만 해보라 하면서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노라면 처음엔 잘하다가도 내가 보지 않으면 손가락만 까딱까딱 하고 계셨다. 손뼉을 치라고 시켜도 두어 번 소리를 내다가는 이내 멈춰버렸다.

    숫자를 세면서 하라고 하면 처음에는 곧잘 세다가 어느 순간에 계속해서 같은 숫자만 반복할 때가 많았다. 하나부터 열까지를 온전히 세지 못했다. 여섯 하고 여덟을 한다던지 아홉을 빼먹을 때도 흔했다. 무슨 운동이든 시키면 한두 번 따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곁에서 억지로 시키려면 아예 하지 않으려 해서 점점 운동의 횟수도 줄어들게 되었다.

    체력이 떨어지면서 어디를 막무가내로 가는 것을 쉽게 막을 수 있어 그나마 간호하는 나로서는 다행스러웠다. 다행히 그때까지도 식사는 규칙적으로 잘 드셨다. 매일 같은 양을 억지로라도 먹여드린 덕분인지 소화기관은 건강했다. 운동량이 부족하다보니 자연히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시어머님은 하루에 몇 번 억지로 시키는 운동 이외에는 전혀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물론 실내에서 하는 것들이었지만 옆에서 직접 붙잡고 억지로 시키지 않으면 혼자서는 하는 척하다가 그냥 주저앉기 일쑤였다.

    장롱이 돌다

    치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 5년여로 접어들던 때였다. 일상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력이 나빠져 안과치료는 더 이상 무의미했다.

    그 무렵부터 시어머님은 갑자기 장롱이 돌고 어지럽다고 했다. 왜 가만히 있는 장롱이 돌겠느냐며 함께 장롱을 만져보고 시어머님을 장롱에 기대어 서 보게도 했지만 한번 그런 생각에 빠져들면 한동안 헤어나지를 못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장롱을 돌지 않게 해 달라고 조르기 시작하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때 딸이 중학교 3학년이었다. 토요일이었는지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는데 집에 들어오니 엄마와 할머니가 장롱이 돈다고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웠던지 딸은 방망이와 알루미늄 양푼을 들고 방으로 들어와 마치 무당이 굿을 하듯 소리 높여 “장롱아 돌지 마라, 돌지 마라 제자리에 가만히 있거라” 하면서 방망이로 징을 치듯 양푼을 쳐대니 그제야 시어머님은 “아휴 이제 되었다. 이제 안 돌아”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뒤로는 무조건 장롱이 돈다면 딸애가 하던 몸짓을 그대로 따라했다. 어느 때는 잘도 듣다가도 “에이 너보다 선옥이가 해야 잘 들어” 하면서 학교에 가 있는 손녀를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착시와 착각은 상황에 따라 때와 장소만 다를 뿐 여전히 보호자가 감당하기 힘든 상태로 발전해갔다. 그 무렵부터 시어머님은 나를 부를 때 ‘밥하는 아주마이’로 부르기 시작했다.

    “내가 누구예요?” 하고 물으면 어느 때는 별것을 다 묻는다는 식으로 웃기도 했지만, 어쩌다 준비 없이 나를 부를 때는 “아주마이”라고 부르곤 해서 누구를 찾느냐고 다그쳐 물으면 나를 가리키며 “밥 하는 아주마이 말야” 하고 말했다.

    새벽전쟁

    큰 딸이 고등학교 1학년, 그 밑 아들이 중 3때의 일이다. 아들은 밤늦게까지 학원수업을 받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귀가했고, 당시 외고에 입학한 딸도 학교가 워낙 먼 거리인 데다가 야간자율학습까지 마치면 자정이 다 돼야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약간의 간식을 먹고 잠이 들면 불과 네댓 시간 자고 또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그 즈음부터 시어머님은 새벽 두세 시가 되면 일어나 밥을 달라고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워낙 오래된 집이어서 방 사이에 방음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안방에서 하는 말소리가 애들 방에 그대로 들렸다. 처음 며칠간은 그러다 말려니 생각했지만 그런 날이 계속됐다. 시간도 어쩌면 그렇게 정확한지 아이들이 막 단잠이 들 새벽 두 시에서 세 시 사이에 나를 깨우셨다.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선옥아 아침해라 늦겠다”로 시작해서 내가 방으로 달려가 지금 새벽이니 제발 주무시라고 애원을 하면 “알았어” 하고는 누우셨다. 내 방으로 돌아와서 자리에 누워 막 눈을 감으려 하면 채 5분도 되지 않아 시어머님이 다시 문을 드르륵 열고 “야 밥해야 돼, 애들 늦겠어” 하고는 또 조르곤 했다.

    새벽에 대여섯 번 실랑이를 하고 나면 날밤을 새우기가 일쑤였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시어머님 옆에서 자면서 못 일어나게 지키기로 했는데 내가 살짝 잠이 들만하면 다시 일어나서 같은 소리를 반복했다. 한밤에는 일상적인 말소리도 왜 그리 크게 들리는지, 세 번째나 네 번째 시어머님의 말소리가 들리면 정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느낌이 들었다.

    내 자신의 성정을 다스리기도 버거워 어느 때는 시어머님과 둘이서 이불로 머리까지 폭 뒤집어쓰고 이대로 자자고 억지를 쓰기도 했다. 내 자신이 너무나 한심스러웠다. 쿨쿨 자는 남편을 깨워 짜증도 냈지만 나보다는 한참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있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내 스스로도 예민해져서 자리에 누우면 또 언제 시어머님이 부를까 초조해졌다. 그러다가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온 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은 심한 스트레스에 견딜 수가 없었다.

    낮에 나 혼자 감당하는 몫은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지만 한참 공부해야 할 아이들이 피해자가 된다는 생각에는 그대로 묵묵히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

    더구나 딸애는 D외고에 들어가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던 때였다. 중학교까지 성적이 전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던 애가 수재만 모인 집단에 가서 자기 성에 차지 않는 성적을 받자 매사에 민감해져 있었다. 그런데다가 대부분 강남 학군에서 온 날고 기는 아이들 틈에서 그 애들 부모의 10분의 1도 신경 써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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