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호

양창순 박사의 ‘마음경영’ 강의

나르시시즘 광맥을 캐면 성공이 열린다

  • 양창순 신경정신과 전문의 lamb55@hanafos.com

    입력2005-09-09 15: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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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창순 박사의 ‘마음경영’ 강의

    서울 여의도 빌딩숲. 직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본인과 타인의 나르시시즘적 본능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당신자신이 되라(Be Yourself)”는 말은 강력한 힘을 발휘해 많은 사람의 인생을 바꿨다. 실제로 잭 웰치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인생에 중요한 전기가 되는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고 개발해 ‘온리 원’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결심을 실천했고 누구보다 성공한 인물이 됐다.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에 대해 알아야 한다. 문제는 마음이란 것이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마음, 그까짓 것 신경 끄지 뭐!” 하고 쉽게 외면해버릴 때가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위에 올라서기만 하면 “지금 당신 마음은 분노 40%, 불안 30%, 시기심 20%, 기타 우울 짜증 10%입니다”라고 분석해주는 저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그런 저울은 없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지표는 있다. 그것 한 가지만 알고 있으면 심리의 80%는 이해할 수 있다. 내 마음을 움직이는 힘에 대해 알면 우린 당연히 남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도 가질 수 있다. 그 힘의 원천이자 ‘심리 중의 심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이다.

    자기애는 제2의 본능

    매슬로라는 정신의학자는 인간의 욕구에도 단계가 있다고 했다. 첫 단계가 의식주의 욕구이고 그 다음이 안전의 욕구, 이어서 사랑과 인정의 욕구, 자기 실현의 욕구가 있으며 맨 꼭대기에 영생의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하위 욕구가 만족돼야만 상위 욕구에 대한 갈망이 생겨난다고 봤다. 반대로 상위 욕구가 만족되면 하위 욕구가 덜 만족돼도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랑과 인정의 욕구가 딱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인정의 욕구가 만족되면 의식주의 욕구나 안전의 욕구가 만족되지 않아도 우린 행복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 욕구가 중요한 이유는 바로 나르시시즘과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애’를 말한다. 풀어서 설명하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옳고 가장 중요하며 세상은 그런 나를 인정해줘야 한다”는 심리다. 정도와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그와 같은 심리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 아닌데, 난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난 것 같은데’라는 열등감도 사실은 나르시시즘의 다른 표현이다.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는 불안감이 열등감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을 가리켜 에리히 프롬은 ‘제2의 본능’이라는 표현을 썼다. 즉 동물적 본능을 상실한 인간에게 나르시시즘은 생존을 위한 본능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신체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숨을 쉬고 음식을 먹어야 한다. 그런 것처럼 정신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르시시즘은 우리에게 두 번째 본능이자 정신적 양식이다. 따라서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우린 언제까지나 정신적 허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60억의 인구가 존재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60억개의 세상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이 세상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 자기중심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

    마이클 잭슨이 아동 성추행 혐의로 재판을 받을 때 이야기다. 그는 자신을 넬슨 만델라에 비유했다. 그 터무니없는 말에 화가 난 오프라 윈프리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자 오프라 쇼에 나온 한 게스트가 딱 한마디로 오프라를 이해시켰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말이었다. 자기가 당하면 음모에 희생당하는 거고, 상대방은 그 음모를 꾸미는 나치가 되는 게 자기 중심성으로 가득 찬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다.

    나쁜 쪽으로든 좋은 쪽으로든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적이다. 이 역시 나르시시즘의 또 다른 면이다. 따라서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의 심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감정이 생각의 3배

    흔히 인간을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감정이다.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미 그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 뇌의 부위 중 생각에서 감정으로 가는 네트워크가 하나라면 감정에서 생각으로 가는 네트워크는 그 세 배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니 생각이 감정을 컨트롤하기 전에 이미 사람은 감정적이 되어 그것이 행동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생각이 엔진이라면 감정은 가솔린이라고 했다.

    이처럼 중요한 감정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심리가 나르시시즘이다. 우리는 언제 감정적으로 가장 충족된 기분을 느끼는가. 중요한 존재로서 내가 충분히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다. 즉 나의 나르시시즘이 한껏 만족됐을 때 우리는 감정적으로 가장 안정된 상태를 경험한다. 반대로 우리가 분노하고 우울하고 불안한 이유는 대부분 자신의 나르시시즘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도 단지 시험에 떨어지고 사업에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로 인해 자신의 나르시시즘이 상처 입었기 때문이다. 자살하는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심정을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어한다. 그리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위로해주며 “우린 네가 필요해”라고 말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프랑스의 정신의학자 프랑소아즈 돌토는 “우리의 행동 하나에도 언제나 수많은 복합적 동기가 작용한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나르시시즘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주고 존중해주고 나의 나르시시즘을 충족해줄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우리가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대인관계에서나 가족관계, 사업에서 성공한 리더들을 보면 이미 나르시시즘의 원리를 실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사업이든 인간관계든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고 있는 사람이 성공하게 마련이다.

    짐 콜린스 역시 “리더들은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이라고 자신의 책에 쓰고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런 뜻에서 리더로서 진정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나르시시즘의 심리를 이해하고 그것을 폭넓게 적용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직장인들이 찾아와서 한결같이 털어놓는 이야기도 나르시시즘의 충족에 관한 것이다. 일 힘든 것, 월급 적은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자신을 무시하거나 윽박지르는 상사는 참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입는다는 것은 나의 생존본능이 침해당한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반발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끔 다니던 회사를 배신하고 경쟁 회사로 기밀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뉴스에 오르내리곤 한다. 언뜻 우린 그들이 대우나 돈 때문에 그런 짓을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과거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가 더 큰 원인인 경우가 많다. 그것도 상처 준 쪽에서는 기억도 하지 못하는 자잘한 모욕이나 윽박지름 같은 것이 무의식에 차곡차곡 저장됐다가 ‘너 한번 물 먹어봐라!’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정신의학적으로 그와 같은 심리를 ‘수동공격성’이라고 한다. 다음은 이 심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권위적인 아버지와 그 아버지가 무서워서 매우 순종적인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억압된 감정은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는 법. 아들은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성적을 떨어뜨렸다. 걱정이 된 아버지는 아들에게 상담을 받게 했다. 아들은 상담과정에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게 싫어서 결코 공부를 잘할 생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은 매우 똑똑한 아들이 매출을 턱없이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다. 그 역시 회사를 발전시켜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 한번 물 먹어봐라!

    우리는 자신이 억압당한다고 느끼면 화가 나게 되어 있다. 상대방이 만만한 사람이면 화가 나도 불안하진 않다. 그리고 대개 화풀이를 해서 분노를 쌓아두지 않는다. 하지만 상대방이 내게 위해를 가할 만한 파워를 갖고 있으면 얘기가 다르다. 화가 나지만 한편으로 몹시 불안하다. 상대방이 내 분노를 눈치채고 위협해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불안감은 피해의식을 가져오고 피해의식은 다시 분노를 일으킨다. 분노, 불안, 피해의식, 분노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 악순환에 잠식당할 때 나타나는 것이 바로 수동공격성의 심리다.

    조직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예는 흔하다. 물론 사장이나 임원들 앞에서 내색하는 직원은 없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일을 게을리하거나 교묘하게 타이밍을 놓치거나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거나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그대로 묵살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조직 내에 냉랭한 분위기가 조성되거나 생산성이 떨어지는 경우 조직 전체가 수동공격성의 함정에 빠진 건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특히 리더들은 자신의 심리상태를 수시로 체크해보는 것이 좋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할 필요가 있다. 리더의 심리가 조직원들에게 퍼져나가 결과적으로 그 조직의 심리상태와 조직문화를 대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리더로서 성공하는 사람은 나르시시즘을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족관계는 인간 심리의 전시장이자 전쟁터라고 할 수 있다. 인간관계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관계가 사실은 가족관계다. 그런데도 우린 가족관계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오해가 있기 때문이다.

    양창순 박사의 ‘마음경영’ 강의
    첫 번째 오해는 가족관계를 단순하고 평면적이라고 여기는 점이다. 그러나 가족관계는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입체적이다. 사실 가족만큼 성별, 나이, 살아온 문화가 다른 사람들이 모인 관계도 드물다. 그런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가장 스트레스가 많은 공간 내에서 가장 많은 요구를 하고 또 그 요구가 즉각적으로 충족되기를 바라는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가족에게 요구하는 것들 중에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에게는 결코 요구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또 가장 급격하게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입는 것도 가족관계다. 가족만이라도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주기를 바라는데 그렇지 못하면 아픔이 클 수밖에 없다.

    두 번째 오해는 가족관계는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나 가족관계만큼 많은 노력이 필요한 관계도 없다. 물론 상담을 받으러 오는 부부들은 모두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노력은 대개 상대방을 내 마음에 들도록 개조하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결혼이 ‘연애의 무덤’인 까닭

    흔히 결혼을 ‘연애의 무덤’이라고 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연애할 때는 상대방의 나르시시즘을 충족해 주기 위해 고민하는데 결혼하면 내 나르시시즘을 더 중요시한다. 여기서 모든 부부싸움의 원인이 생겨난다.

    세 번째 오해는 가족은 서로 자신의 감정을 다 표현해도 된다고 여기는 점이다. 그러나 가족관계에서도 감정의 여과장치는 필요하다. 우리가 집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편한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정신적으로도 편안하게 쉬고 싶어진다. 그런데 누가 옆에서 비난이나 공격의 화살을 던져보라. 긴장을 풀고 있는 만큼 더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그건 부부 사이든 부모 자녀 사이든 마찬가지다. 내 가족이니까 내가 대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나를 가장 잘 알고 나를 가장 많이 지켜봐주는 가족 구성원들이 나를 칭찬하고 인정하고 사랑해줄 때 나의 나르시시즘은 100퍼센트 충족되게 마련이다.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의 대상이 된다면 나의 나르시시즘은 바닥까지 추락할 수밖에 없다.

    네 번째 오해는 가족에겐 지나친 기대를 걸어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점이다. 그러나 가족끼리도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기대치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우리는 자주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충족시키기 위해 배우자나 자녀들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뤄주기를 바란다. 때론 실현 불가능한 기대를 가족에게 걸곤 한다. 가족 사이에 원망과 적개심이 쌓이는 것도 높은 기대 때문인 경우가 많다. 정신상담을 통해 기대치를 현실적으로 낮추고 나서 가족관계가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분노를 폭발하지 말라

    리더의 자리는 험난하다. 가장 먼저 눈을 맞고 가장 늦게까지 눈이 녹지 않는 곳이 산의 정상이다. 가장 높이 솟아 있으니 남의 눈에도 가장 먼저 띈다. 그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 한편으론 자신이 이끌고 있는 조직을 위해 어떤 문제라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직원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간관계는 그야말로 거미줄과도 같다. 리더는 나이, 성별, 성장과정의 문화, 생각하는 신념이 모두 다른 사람들을 조직의 목표대로 이끌어가야 하는 책임을 안고 있다. 외부에서 불어오는 비바람으로부터 조직을 보호해야 하는 것도 리더의 일이다. 그런 뜻에서 성공한 리더들이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운이 좋아서였다고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전쟁터를 누벼야 하는 것이 리더의 자리이다.

    리더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문제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스트레스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조약돌만한 것일지라도 사람의 정신적 균형을 흔들어놓는다. 따라서 리더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에 일정한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있다.

    리더십의 두 축은 자기관리와 대인관계다. 그 두 가지를 다 잘해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나르시시즘의 이해와 활용이다.

    내가 나에게 적용하는 것이 나르시시즘의 음이라면 남에게 적용하는 것은 양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그 음과 양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으면 문제가 생겨난다. 내 속에 나르시시즘이 너무 취약하면 낮은 자존감으로 인해 부정적인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런 타입은 다른 사람의 나르시시즘도 배려하지 않는다. 반대로 내 속의 나르시시즘이 너무 비대해도 곤란하다. 자만심으로 인해 남의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내 속에 최적의 나르시시즘이 자리잡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의 나르시시즘은 조절하고 다른 사람의 나르시시즘에 대해서는 배려하고 존중할 때, 즉 나르시시즘의 음과 양 사이에서 균형을 취할 때 그는 리더로서 자기관리뿐 아니라 대인관계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다.

    리더로서 최적의 나르시시즘을 갖기 위한 방법 중 중요한 몇 가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는 자만심과 자긍심을 구분하는 것이다. 자긍심이란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보는 능력을 말한다. 따라서 남의 평가에도 예민하지 않다. 반면에 자만심은 남의 평가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런 타입이 리더일 경우, 그 조직은 리스크 관리에 허점을 드러내기 쉽다. 자신의 단점을 보지 못하듯이 조직의 리스크를 무시하다가 낭패를 보는 것이다.

    자긍심이 있는 사람은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과 비교할 뿐이다. 반면에 자만심에 가득 찬 사람은 끝없이 자신과 남을 비교한다. 그러면서 남보다 더 주목받지 못하면 금방 상처를 입는다. 또한 자긍심이 있는 사람은 아부와 칭찬을 구별할 줄 알지만 자만심에 들떠 있는 사람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해 아첨꾼들에 둘러싸였다가 좌절을 맛보기도 한다.

    두 번째는 파괴적인 분노를 조절하는 것이다. 분노는 사실 리더가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감정의 하나다. 그 이유는 리더가 받는 스트레스와 연관이 있다. 지금은 성공한 위치에 있지만 언제 실패해서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 생산성이나 업적에 대한 과중한 책임감, 조직원들이 기대대로 따라와주지 못할 때 느끼는 좌절감 등은 리더를 짓누르는 가장 큰 스트레스다. 그런 상황에서 언제나 신경이 가파르게 곤두서 있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작은 일에도 화를 내는 것이다.

    리더에게는 파워가 있으므로 화를 내는 것이 매우 쉽다. 리더는 언제 어디서든 자신의 분노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분노를 마구 폭발하다가는 자신의 마음이 황폐해지는 건 물론이고 조직에도 수동공격성이란 검은 그림자가 스며들게 된다. “분노와 어리석은 행동은 나란히 걷는다. 그리고 후회가 그 둘의 발꿈치를 문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리더는 이 말을 꼭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화를 내지 말라는 거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렇진 않다. 단 파괴적인 분노는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이 필요하다.

    “사장님, 이젠 할 말이 없습니다”

    첫째, 화가 나 있을 때는 가능한 한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자신이 왜 화가 났는지, 지금 느끼는 분노의 정도가 적절한지, 만약 아니라면 왜 부적절한 감정을 느끼는지, 혹시 불안해서 더 화를 내는 건 아닌지, 그렇다면 불안을 어떻게 조절할지 따위를 생각하는 것이다.

    둘째, 긍정적인 감정의 표현은 그 자리에서 하되, 부정적인 감정의 표현은 시간을 두고 하는 것이 좋다. 상대방의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주는 일은 최소한 내 마음속 분노의 불길을 끈 뒤에 실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셋째, 관심과 경청의 능력을 키운다. 사람들은 그런 자신을 상대방이 인정해주고 존중해주기를 바란다. 그런 소망이 채워지면 순한 양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따라서 리더로서 대인관계에 성공하려면 이러한 나르시시즘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해야 한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무엇보다 이 경청의 능력을 타고났음을 알 수 있다. 이제껏 한번도 노사갈등이 없는 회사의 최고경영자는 노조가 진이 빠져서 “사장님, 이젠 할말이 없습니다”라고 할 때까지 그들의 말을 들어준다고 한다. 집에 가서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한다. 갈등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다.

    정신과 의사로서 내담자들에게서 가끔 듣는 이야기가 있다. “얘기는 내가 했는데 돈은 왜 당신이 받느냐”는 것이다. 그럴 때 “당신 이야기를 이만큼 진지하게 들어준 사람이 나말고 또 있느냐”고 하면 모두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리더로서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 우정 어린 관계를 맺고 그러면서도 업적을 달성하고 싶다면 이 경청과 관심의 중요성을 반드시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게다가 그런 능력은 훈련으로도 얼마든지 개선해 나갈 수 있다.

    넷째, 조직과 가족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동안 가족 같은 직장이 슬로건이었는데, 그게 틀렸다고 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가족과 조직은 우선 목표가 다르다. 조직은 생산성이 목표다. 따라서 결과가 중요하다. 그러나 가족은 결과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목표다. 조직은 합리적인 집단이다. 모든 과정이 합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나 가족은 비합리적이다. 그런데 그 둘을 혼동하는 데서 문제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가족관계에서 결과에 치중한 나머지 그 결과에 이르지 못하는 가족구성원을 밀쳐낸 경우 그는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입게 마련이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성공의 길

    내 마음의 본질에 나르시시즘이 깊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마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내 마음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면 내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 이런 단계가 되면 상대의 마음도 보인다. 상대의 ‘나르시시즘 본능’을 존중해주게 된다. 그러면 상대의 마음을 얻게 된다. 이는 성공으로 가는 간단하면서도 확실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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