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호

사람이 희망이다

  • 김현미 동아일보 출판팀 차장 khmzip@donga.com

    입력2005-11-11 14: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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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희망이다

    자신의 불편함보다 남의 처지를 먼저 배려해 읽는 이의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책들.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읽을 때면 늘 멈칫하게 되는 대목이 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너는/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재 찰 일 없는 요즘에도 자꾸 눈길이 간다. ‘닥터 노먼 베쑨’의 전기를 처음 읽었을 때 뜨거워진 눈시울과 요동치던 가슴을 되살리기 때문이다. 탁월한 흉부외과 의사요 보건의료운동가, 스페인 내전에 참가해 반파쇼 투쟁을 벌였고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였던 혁명가. 1980년대를 지나온 사람들에게 ‘닥터 노먼 베쑨’은 필독서였다.

    그러나 ‘닥터 노먼 베쑨’을 읽고 가슴이 벅찼던 이들도 이제 자조와 냉소와 의심으로 가득 찬 중년이 됐다. 웬만한 일에 감동하지 않고, 어지간해서는 울지 않는다. 지하도에 엎드린 할머니의 동냥그릇에 100원짜리 동전을 던지면서도 측은한 마음보다는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고 했는데…’라는 분석과 논리가 앞선다. 오른쪽 다리에 의족을 한 채 8530km 캐나다 횡단을 기획했던 스물두 살의 청년 테리 폭스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그랬다.

    “내 장애가 자랑스럽다”



    열아홉 살 때 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잘라야 했던 테리는, 오랜 연습 끝에 세인트존스를 출발해 143일 동안 매일 42km를 달리며 암 연구 기금을 모금했다. 목표의 3분의 2를 달린 상황에서 암이 폐로 전이돼 달리기는 중단됐고, 1981년 6월28일 스물두 살의 테리는 세상을 떠났다. 테리가 시작한 ‘희망의 마라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수천억원의 암 연구 기금이 모아졌다.

    ‘스물 둘에 별이 된 테리’(동아일보사)는 캐나다의 영웅 테리 폭스의 삶을 그린 평전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캐나다인들이 “테리가 남긴 것은 수천억원의 기금이 아니라 용기와 단호함, 그리고 헌신이라는 위대한 정신”이라며 이 청년을 영웅으로 칭송하는 데 쉽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휠체어 탄 의사 이승복의 자서전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황금나침반)를 읽으면서 다시 테리를 생각했다.

    올림픽 금메달을 꿈꾸던 촉망받는 체조선수에서 하루아침에 사지마비 장애인이 된 이승복씨가 재활의학 전문의가 되어 비슷한 처지의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대목에서 테리가 떠올랐다. 이승복씨는 자신이 의사인 동시에 환자이기에 다른 의사들보다 환자의 마음을 더 빨리 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내 장애가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를 보고 가식이라고 냉소할 수 있을까.

    오지여행가에서 국제NGO ‘월드비전’의 긴급구호팀장으로 변신한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정말 힘들어 죽겠군. 무쇠로 만든 사람이라도 녹고 말겠다. 이렇게 입이 댓발이나 나와 죽겠다고 아우성치면 내 안의 내가 곧바로 튀어나와 이렇게 묻는다. 누가 시켰어?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되잖아. 아니, 누가 그만두겠대?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럼 왜 계속하고 싶은 건데? 답은 아주 간단하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내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다.”

    해럴 쿠시니라는 랍비가 이런 말을 했다. “죽음을 앞두고 ‘더 일했어야 했는데’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대신 모두들 ‘다른 사람을 좀더 배려했더라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마음을 썼어야 하는데….’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고. 부가 성공의 척도가 된 이 시대에, 가벼운 마음으로 잡은 책 몇 권이 나를 뜨끔하게 한다.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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