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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 류일엽 / 일러스트·박진영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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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식 싹튼 학교생활

박재호는 망국 10년 만인 1920년 3월24일생이며 출생지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오기동 삼계리다. 부모대에 계룡산 도읍설(都邑說)에 현혹되어 아버지 삼형제가 모두 가산을 팔아 계룡산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결국 민족독립도 이룩하지 못하고 생계유지도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됐다.

하여 부득불 고국을 등지고 낯설고 물선 중국으로 오게 됐다. 그때가 1923년이다. 몽골 등지를 전전하다 나중에 지린 판스(盤石)현 옌퉁산(烟筒山) 훠사오거우(火燒溝)에 정착했다. 이 마을의 주민은 모두 한족(漢族)이고 조선인은 그들뿐이었다. 말하자면 사면초가 속에서 박씨 일가는 바이장칭(栢長靑) 지주의 토지를 소작 맡아 한전(旱田)을 수전(水田)으로 개답(開沓)했다. 형제 중 부모의 일손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큰아들 재영(在榮·당시 19세)뿐이었다.

그 마을 부근 시다디(西大地)와 솽먀오쯔(雙廟子)에 한국인 애국지사들이 설립한 민족소학교가 있었다. 박재호는 둘째형 재유(在裕)와 함께 을반(乙班)에서 공부했다. 그때 비로소 그는 단군(檀君) 국조(國祖)를 알았고 태극기를 보았고 애국가도 배웠다. 여기서 그의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러나 10세 미만의 일이니 다만 개념일 뿐이지, 기타 구체적 정황은 잘 알지 못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의 집에도 다녔고, 백형(伯兄)도 총을 차고 다녔다.

중국 땅에서 자라는 반일세력은 일본에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교묘한 민족 이간책으로 중국 둥베이 군벌의 눈에 조선인이 일제의 앞잡이로 비치게끔 만들었다. 봉계군벌(奉溪軍閥)의 처지에서 보면 조선인이 둥베이와 몽골로 이주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었다. 일단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에 민족분쟁이 일어나면 영사재판권 문제와 연결될 것이고, 조선인이 반일투쟁을 할 경우엔 일본측이 군사도발을 할 수 있는 빌미를 잡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이주 조선인은 중국옷을 입지 못하고 총기를 휴대하지 못하며 공안국의 허가 없이는 거주하지 못했다. 심지어 1929년 이후엔 조선인 토지경작에 대한 금지령이 내려졌다.



야반도주와 만주사변

바로 그러한 때인 1930년, 박재호네는 중국인 동네에서 홀로 소작을 하고 있었으므로 솔가도주(率家逃走)했다고 한다. 한밤중 쥐도 새도 모르게 마을을 나와 50리 길을 걸어 옌퉁산에서 펑톈(奉天·오늘의 선양(瀋陽))행 기차를 탔다고 하니 어지간히 급박한 사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펑톈에 이르러 곧장 수용소에 들어갔다고 한다. 여기서 수용소라고 하면 당시 펑톈에 주재한 일본영사관의 ‘보호’를 받는 곳임에 틀림없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이 있다. 당시로서는 일본 제국주의를 두고 하는 비유라 하겠다. 중국 정부의 심사를 건드려, 만주로 이주해 농·공·상업 등에 종사하며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자금을 마련하는 조선인을 박해하게 해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멸하려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동시에 수용소를 만들어 각지에서 도망온 조선인을 수용하는 것으로 명줄을 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저들의 노예로 전락시키려는 수작이었다.

수용소에서 주는 배급은 겨우 연명할 만한 양의 좁쌀과 소금, 무며 감자며 채소 등속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어른들은 날품을 팔고 어린애들은 사탕과 궐련(卷煙) 장사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듬해인 1931년 봄, 박재호 일가는 펑톈 서쪽 스리쉬(十里許)에 있는 중양차오(中央橋)로 이주해 벼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수재가 들어 농사를 망쳤다. 하늘도 무심했다. 알몸으로 훠사오거우를 떠난 그들은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값싼 메밀가루를 사서 가지가지 남새며 나물을 섞어 연명했다.

그해 9월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났다. 중국에서는 ‘9·18 사변’이라 부른다. 바로 그날 일본군은 펑톈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는 북대영을 습격하고 펑톈거리를 폭격했다. 다음날 아침엔 펑톈을 점령했고, 그뒤 불과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둥베이 전역을 손아귀에 넣었다. 일본 관동군의 공격에 패한 둥베이 주둔 중국군은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 학살로 패전의 분풀이를 하고 그 재산에 대한 약탈로 군비를 보충했다. ‘시어미 역정에 개 배때기를 찬다’는 식으로 일본군에 대한 분풀이를 적수공권(赤手空拳)의 온순한 조선인에게 했다. 그 불똥이 박재호 가족에도 튀었다.

마침 중양차오를 지나던 중국군이 재호의 백형 재영씨를 보고 “조선인은 왜놈의 앞잡이(二鬼子·왜놈은 鬼子이고 조선인은 두 번째 鬼子라는 뜻)”라면서 불문곡직 총을 들이댔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아슬아슬한 찰나에 마을의 중국인들이 좋은 사람이라고 보증하고 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가슴에 시한폭탄을 안은 것처럼 조마조마한 나날을 보내던 박재호 일가는 끝내 만선척식회사(滿鮮拓植會社) 소속인 선양현 사링둥산바오(沙嶺東山堡)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만 사는 마을로 보통학교도 있었다.

재호는 근 2년이나 중단했던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종형과 그는 3학년에, 여동생 옥희(玉姬)는 1학년에 입학했다. 괴뢰 만주국이 서고 둥베이 전체가 일제의 천하가 됐으므로 학교 교육도 완전히 일제의 노화교육이었다. 조선어문 한 과목만 제외하고 모든 학과가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일본문 교과서로 수업이 진행됐다. 그러나 교사 중에 숭실전문 출신인 김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는 학생들에게 애국 노래를 가르쳐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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