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제41회 2000만원 고료 논픽션 공모 우수작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 류일엽 / 일러스트·박진영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3/18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회의는 7일부터 시작됐다. 둥베이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온 18∼19개 현 조선인 교민회 대표의 모임이었다. 복잡한 상황인 데다 각지 대표들이 저마다의 주장을 고집하는 바람에 7일간 갑론을박을 반복하다 간신히 연합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회의 기간에 박재호는 대회석상에서 지방 정세 보고를 하는 기회에 주타이현의 현지 실정을 알리고 좌중의 동정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방명록과 취지서, 영수증을 들고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동정금(同情金)을 청했다. 그러나 회의석상에서는 한껏 동정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렸다.

선양으로 떠날 때만 해도 총회를 통해 교민이 일치단결하면 만난(萬難)을 물리치고 오래지 않아 만주에서 조선인의 평화와 자유가 실현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돌아올 때는 그러한 낭만을 잃었다. 과연 자유와 평화가 실현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와 절망이 한 가슴을 채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48년 4월, 공산당 군대가 지린을 점령하고 뒤이어 창춘도 그렇게 됐다. 그해 11월 선양이 함락되면서 둥베이는 공산당의 천하로 변했다. 이에 앞서 1947년 가을 공산당이 집권한 주타이 일대에서는 토지개혁이 시행됐다. 원 교민회 회장 장용림은 청산투쟁을 맞고 퇴임하고 그 빈 자리를 박재호가 메우게 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공산당이 일으킨 계급투쟁의 폭풍은 모든 민족운동을 휩쓸어버렸다. 주타이현 민족해방동맹 이석대(李石大) 주임이 나서서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1948년 8월12일은 박재호에게 생전생후를 통해 가장 큰 일이 생긴 날이다. 아내 신순생(申順生)이 아들을 낳은 것이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순간 그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은공과 애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몸소 체험으로 확인했다. 부모가 돼보지 않고는 부모의 마음을 모른다는 말의 참뜻을 그는 28세에 이르러서야 체험한 것이었다. 그는 아들의 이름을 길진(吉鎭)이라고 지었다. 진은 돌림자라서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길자를 선택한 것은 지린성에서 났다는 의미도 있다. 그것은 세 살 때 고향을 떠나온 몸이 이국 타향에서 생명의 연장인 아들을 보았다는 뜻이자 모든 풍파는 자신의 대에서 그치고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길하라는 자식에 대한 사랑의 뜻도 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식에게 발전된 사회, 평화롭고 자유로운 행복한 사회를 마련해주기 위해 생명을 바칠 각오로 싸웠다. 그는 사회가 필요로 하면 칼산에 오르고 불바다에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감격시대

바로 그러한 때 주타이 교민회 농사부장 우종현이 지린성 농업청 수리국에 임직(任職)을 하고 오래지 않아 인마허농장을 재건하는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우선 지린시 강북에서 조선인 농호 50여 호와 피란을 떠났던 인마허 10여 호의 주민을 집단이주시켰다. 그리고 조선민족 학교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원래 있던 남산학교는 광복 직후 중국인들이 뜯어가버려 터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주타이현 조선인 사회는 이른바 약동하는 감격의 시대를 맞은 셈이었다. 박재호는 민족사회의 부름을 받고 민족의 민생문제 해결과 후대 양성을 위해 ‘어리고 귀여운 길진이와 몸이 성치 않은 처를 의식주조차 없는 채 두고’(일기 중에서) 인마허로 갔다. 그는 학교를 꾸렸고 이철우(李哲雨)를 교장으로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중국인과 손을 잡고 중조소비합작사(中朝消費合作社)를 창설했다. 합작사의 주임으로 황재중(黃載仲)을 천거했다.

후대 양성을 목적으로 한 학교가 가동되고 민족의 생계 보장을 목적으로 한 합작사도 가동되자 박재호는 참군(參軍)을 선택했다. 1949년 4월의 일이다. 그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독립단 경위련(警衛連) 11반·독립연대 경위중대 (11분대)에 편입되어 반장(班長·분대장) 겸 군인회(軍人會) 회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군인생활은 반년에 그쳤다. 결핵을 앓아 퇴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슴 찢는 비보였다. 아내가 결핵으로 시름시름 앓다 병사한 것이다. 겨우 세 살 난 길진이는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아들을 안자 길진이는 “와!” 하고 울음보를 터뜨렸다. 너무 오래 아버지와 떨어져 있어서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순수한 민족주의자

박재호는 얼마 동안 일을 놓고 집에서 보양한 뒤 건강이 회복되자 학교에서 교도주임 자리를 비워놓고 모시러 왔다. 감사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사절했다. 그는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 현의 조선인을 하나로 규합하는 단체를 만드는 사업에 착수했다. 이른바 교민회와 같은 성격의 민족단체였다. 교민회는 국민당의 지지하에 세워진 조직이지만, 이번의 민족단체는 공산당의 지지를 받아서 만들려는 것이었다. 박재호에겐 국민당의 삼민주의든 공산당의 마르크스주의든 별 의미가 없었다. 그는 색깔이 무엇인지 가리지 않고 오직 민족에 유리한 것이면 모두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순수한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그의 노력으로 1949년에 전 현 조선인 대표대회가 소집됐다. 그런데 회의는 중도에서 막을 내렸다. 처음엔 정부에서도 허가했는데 정작 회의가 진행되자 중지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후에 박재호가 쓴 자서전을 보면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

3/18
류일엽 / 일러스트·박진영
목록 닫기

한 독립운동가의 운명

댓글 창 닫기

2020/02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