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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60년 특별연재/책으로 본 한국 현대인물사⑨

전태일

시대의 불꽃으로 타오른 한국 노동운동의 깃발

  • 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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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생각 많고 가슴이 따뜻했던 전태일.

1963년 전태일은 대구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다. 훗날 그는 이때를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절은 잠깐이었다. 그해 겨울 아버지의 명령으로 전태일은 학교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재봉틀 한 대에 온 가족이 매달려야 했다. 공부에 굶주린 전태일은 동생 태삼이를 데리고 서울로 가출했다가 견딜 수 없어 다시 대구로 되돌아갔다.

이듬해에는 어머니가 단신 상경, ‘식모살이’에 나섰다. 전태일은 이번에는 막냇동생을 데리고 다시 서울로 가출했다. 코흘리개 여동생을 굶겨 죽일 것만 같은 두려움에 서울 미아보호소에 맡겼다. 그의 일기를 통해 당시 삶을 엿보자.

“그 전에 덕수궁에서 구두를 닦고, 저녁에는 신문을 팔고, 밤 1~2시에는 야경꾼을 피해 다니며 조선호텔 앞에서부터 미도파백화점 앞과 국립극장 앞, 명동 뒷골목을 쓸며 담배꽁초를 주워 모아 생계를 유지하고, 잠은 덕수궁 대한문, 지금의 수위실에서 가마니를 덮고 잘 때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건만….”(1967년 2월20일자)

1964년 봄 무렵 전태일은 평화시장에 첫발을 들여놓는다. 그의 나이 17세 때. ‘시다’(명색은 견습공이었으나 온갖 잡일을 다했다-필자 주)로 첫출발을 했다. 그 시절 평화시장은 어떤 곳이었던가? 1961년 서울의 청계천 6가에서 동대문 운동장 쪽으로 3층짜리 연쇄건물이 들어섰다. 연건평 7400여 평(2만4400여㎡). 여기에 피복 제조업자와 의류상들이 모여들었다. 1968년에는 통일상가가, 이어서 1969년에는 동화시장이 들어섰다. 전국 규모의 기성복시장이 들어선 것이다.

“평화시장 일대는 통틀어 여공이 약 80~90%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면 좋을 것이다. …시다는 대부분 가정이 어려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12~15살의 소녀들이 기술을 배워 집안을 도와 보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간다.”(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1983)



여덟 평 남짓 연옥

전태일이 본격적으로 평화시장 노동자로 일하게 된 것은 1965년 가을 무렵부터다. 삼일사라는 학생복 맞춤집에 시다로 들어갔다. 월급은 1500원. 하루에 간신히 먹고 자는 데 120원이 들 때다. 모자라는 돈은 구두를 닦거나 껌과 휴지를 팔아서 때웠다. 재봉 기술은 집에서 어느 정도 익힌 터라, 전태일은 남보다 일찌감치 ‘미싱 보조’가 됐다.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이 함께 모여 살게 된 것이 이 무렵이었다. 1966년 가을에는 평화시장 뒷골목 통일사에 미싱사로 들어갔다. 전태일의 가슴은 꿈과 희망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현실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평화시장은 한마디로 연옥이었다. 작업장은 8평(26㎡) 남짓. 비좁은 실내 가득 재봉대와 작업대가 들어차 있었고, 핏기 없이 누렇게 뜬 얼굴의 종업원 32명이 죄수처럼 끼어 앉아 온종일 일벌레처럼 지냈다. 높이 3m 정도의 벽 중간에 수평으로 칸막이를 대고 2층을 만들었으니, 천장 높이는 1.5m 정도. 닭장 같은 다락방이었다. 여기에서 겨우 열서너 살짜리 소녀들이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일했다. 하루 종일 햇빛 한번 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화장실을 가는데도 눈치를 봐야 했다.

작업장에는 환기장치도 없었다. 통풍과 채광도 안 됐다. 작업 도중 날리는 옷감 먼지와 실밥을 뒤집어쓴 채 온종일 앉은뱅이처럼 일했다. 머리 바로 위에 백열등을 켜놓아 시력이 성할 리 없었다. 화장실은 남녀 공용. 2000명 이상이 겨우 3개의 화장실을 나눠 쓰고 있었다. 상수도 시설은 400여 작업장에 단 3곳뿐이었다. 그나마 제한급수이고, 목욕시설이나 세면장을 제대로 갖춘 작업장은 없었다. 한겨울에도 난방이 안 돼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는 극도로 나빴다. 1970년에 조사한 내용을 보자. 재단사 100%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 위장병, 신경통 등을 앓았다. 미싱사의 90%는 신경통,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까지 질병을 안고 있었다. 평화시장 업주가 종업원의 정기검진을 실시한 적은 거의 없었다. 병 치료에 신경을 써준 적은 더더구나 없었다.

평화시장에서 5년 이상 일하고도 건강하다는 종업원은 있을 수 없었다. 있었다면 신통한(?) 일이라고 자조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었다. 그들은 아파도 아픈 줄을 모르고 지냈다. 설령 무슨 병에 걸렸대도 방법이 없었다. 속수무책이었다. 무슨 돈으로 치료를 할 것이며 병원 갈 시간은 또 어떻게 낼 것인가? 병이 깊어진 뒤 그들이 가야 할 길은 딱 하나였다. 직장을 그만두거나 해고당하는 길.

여공들의 따뜻한 오빠

“한 공장의 30여 명 직공 중에서 겨우 2명이나 3명 정도를 평화시장주식회사(평화시장 업체들의 연합기구로, 오로지 그들만의 이익단체-필자 주)가 지정하는 병원에서 형식적으로 검진합니다. 필름도 없이 X-레이 촬영을 하며, 아무런 사후지시나 대책이 없습니다.” (1970년 전태일의 조사에서)

1966년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보조가 됐고, 이듬해에는 재단사가 됐다. 작업장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자리는 봉제업체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였다. 업주의 돈벌이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재단사의 능력, 그리고 재단사가 업주에게 얼마나 협조를 잘하느냐 않느냐에 달려 있었다. 대부분의 재단사는 업주와 철저하게 유착돼 있었다. 전태일은 달랐다. 그는 불쌍한 노동자를 위해 일하기로 작정하고 그 자리에 올랐다.

전태일은 어린 여공들에게 친절하고 따뜻한 ‘오빠’였다. 정에 목마르고 혹심한 노동에 시달리던 여공들은 그에게 온갖 하소연을 했다. 전태일은 점심을 굶는 여공들에게 버스 값을 털어 풀빵을 사주고 자신은 청계천 6가에서 집까지 걸어갔다. 두세 시간이 걸렸다.

일이 늦게 끝나는 날엔 자정을 넘겨 통금에 걸렸다. 그런 날엔 미아리 파출소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음날 새벽에 집에 잠깐 들렀다가 다시 출근했다. 이런 생활은 그가 죽을 때까지 되풀이된 일과였다. 몸이 고된 것은 물론, 시다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게 된 뒤로는 가슴을 칼로 저미는 고통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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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무한│언론인, 현대사연구가 ymh687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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