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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와인 ⑧

레르미타 vs 핑구스

전통품종 중심 블렌딩으로 승부수 이방인의 단일 토착품종 고집

  • 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레르미타 vs 핑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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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미타 vs 핑구스

핑구스의 오너 피터 시섹.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는 2004년과 2005년 빈티지의 레르미타에 대해 98점으로 평가했다. 이러한 높은 평점은 보르도 1등급 샤토에서도 흔하지 않은 일이다. 특급 와인의 증표인 숙성력 역시 굉장하다. 파커가 짐작한 레르미타의 수명은 2045년까지로 약 40년 동안 숙성해갈 걸로 보았다. 아주 유혹적인 블랙 체리, 검붉은 산딸기 향내가 난다고 평했다. 레르미타는 한마디로 굉장한 힘과 질감이 느껴지는 풀바디(Full Bodied) 와인이다. 아주 긴 여운을 지녀 삼키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 향기가 진동한다. 그렇지만 묘하게도 가볍고 생동감이 넘친다. 균형이 뛰어나 돌처럼 무거운데 이상하게도 곧 공기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알바로는 전통 포도의 중요성에 매달린다. 그래서 프리오라토에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산지 개발에 나섰다. 비에르초에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동해 여러 빈티지를 연이어 출시했다. 알바로는 이미 세계적인 양조 스타 반열에 올랐다. 와인 전문지 ‘와인 스펙테이터’가 2003년에 선정한 ‘올해의 인물’이며, ‘디캔터’ 2009년 7월호에 보도된 ‘와인업계 파워 리스트’(격년 조사)에서 43위에 올랐다. 이탈리아 최고의 양조가 안젤로 가야(47위)를 넘어섰다.

타국에서의 성공

스페인 와인산업을 끄는 힘이 스페인에서만 나오는 것 아니다. 양조기술 표준화 덕분에 세계는 이미 고급 기술을 얼마든지 살 수 있다. 포도밭만 좋으면 얼마든지 고품질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최근 들어 고품질 와인의 후보지로 급부상한 스페인을 와인세계에서는 ‘뉴 스페인’이라고 이름 붙였다. 뉴 스페인의 저력은 내국인, 외국인 가리지 않고 다국적 전문가들을 받아들이는 데서 나온다.

와인산업에서 외국인은 그저 컨설턴트다. 잠깐 들러 기술을 지도하고 떠나는 자들이다. 소위 ‘플라잉 와인메이커’는 성수기 때 자기 고장에서 일하고, 비수기에는 적도를 넘어 남반구 혹은 북반구로 날아가 컨설팅을 한다. 스페인은 이러한 컨설턴트를 정착자로 만드는 묘한 힘을 가졌다. 산티아고 거리를 걷는 순례자처럼 외국 컨설턴트들은 스페인 땅덩어리에 매료되어 발바닥으로 포도밭을 누빈다. 철새처럼 계절이 바뀌면 고향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스페인에 터를 마련하고 정착해 고품질 와인 생산에 매진한다. 이런 사람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이가 바로 핑구스의 오너, 피터 시섹이다.



피터는 양조가 집안 출신답게 이국땅에서 보란 듯이 성공했다. 보르도 그라브에서 양조전문가로 이름을 날린 그의 삼촌 이름도 피터라서 어린 시절부터 핑구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는 삼촌을 따라 어디든 갔다. 결국 스페인까지 와선 5ha의 오래된 포도밭을 구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템프라니요로 덮인 밭은 볼품없었으나 그는 끈질긴 노력과 뜨거운 열정으로 밭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템프라니요는 가르나차처럼 스페인 토착 품종이다. 리오하와 리베라 델 두에로에서 잘 자란다. 피터는 오직 템프라니요로만 핑구스를 만든다. 가르나차를 주품종으로 그밖에 여러 품종을 블렌딩하는 레르미타와 구분된다. 아무래도 한 가지 포도를 고집하는 것은 힘겨운 결정이다. 여러 포도를 섞는 것이 보험에 드는 셈인 반면, 단일 품종을 고집하는 건 양조가로서 쉬운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보람은 있다. 완숙한 포도를 얻을 수 있다면, 완벽한 포도를 얻을 수 있다면 그 포도의 특성이 밭의 풍토를 투명하게 드러내기에 ‘개성 와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 세상에 와인을 담그는 자가 수십만 이상인데, 그들의 하나같은 소원은 자신의 포도밭 특성이 담긴 개성 와인을 만드는 것이다. 단일 품종은 그런 매력이 있다.

출시와 동시에 고급 와인 반열에

피터는 1995년 빈티지를 시작으로 핑구스를 출시하고 있다. 핑구스 밭은 소출이 극도로 제한돼 1ha당 12헥토리터 정도이며, 빈티지가 아무리 좋아도 20헥토리터를 넘지 않는다. 로마네 콩티가 35헥토리터이니 얼마나 소출을 줄이는지 짐작이 간다. 포도나무 한 그루에서 한 병도 채 얻지 못할 정도니 희소성이 실로 대단하다. 이는 부르고뉴의 그랑 크뤼에 해당하는 특성이다. 전 세계 와인 애호가 숫자에 비해 턱없이 적은 양이라 도저히 수요에 부응할 수 없으니 값이 비싸지는 건 당연한 결과다.

거기다 최초의 빈티지는 그 희소성에 기름을 붓는 사건이 따랐다. 겨우 325상자(3900병) 생산된 핑구스 1995년 빈티지는 출시되자마자 대서양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미국으로 보내는 75상자가 항해 중 풍랑을 맞아 유실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수량이 적은 와인이 사고까지 당하는 바람에 더 구하기 힘들어졌다. 수집가들은 무조건 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다. 무언가를 모으는 사람들은 그러한 에피소드가 가치를 한껏 높인다는 걸 경험적으로 터득했기 때문이다.

핑구스는 어떻게 해서 출시되자마자 보르도 1등급 와인과 비슷한 가격에 거래됐을까? 세상에 비싼 와인이 얼마나 많은가. 저마다 자신의 와인이 최고 와인으로 평가받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명성을 얻어 고급 와인으로 대접받는 확률은 아주 낮다. 핑구스는 출시와 동시에 고급 와인 대열에 오른 예외적인 와인이다. 한마디로 핑구스는 신데렐라같이 등장했다.

여기에는 로버트 파커의 평가가 한몫했다. 피터가 보르도에 사는 삼촌(Peter Vinding-Diers)을 만나러 갔을 때, 그 자리에는 보르도 와인 판매상, 영국과 미국의 유명 와인수입상 등도 함께 있었다. 그들은 여러 와인을 시음하고 있었는데, 피터가 자신의 와인도 좀 마셔보라고 병을 내밀었다. 전문가들은 항상 새로운 와인에 대해 목말라 있다. 그 자리에 있었던 수입상은 이튿날 미국으로 돌아갔고, 파커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핑구스를 소개했다. 파커는 그 품질에 크게 감동받아 갓 데뷔한 와인임에도 높은 평점을 줬다. 파커는 96~100점을 부여하면서 스페인에서 나온 어린 와인 중에 이런 와인은 처음 맛본다며 찬사를 보냈다. 2002년을 제외한 빈티지 전부에 높은 점수를 줬다. 1995년 빈티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평점 98점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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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용│와인평론가 고려대 강사 cliff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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