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호

성 노예 오달리스크의 비애

  • 입력2009-12-08 15: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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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노예 오달리스크의 비애

    <오달리스크> 1753년, 캔버스에 유채, 51×64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남자의 정력은 평생 마르지 않는 샘물이지만 그렇다고 시도 때도 없이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분명 화수분이건만 필요하다고 매번 용솟음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신체적 한계로 남자 매춘부가 여자 매춘부보다 적다.

    그럼에도 남자들은 자신의 정력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정력이 무한대일 줄 아는 것이다. 본인밖에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른바 정력남의 로망은 자신의 성적 욕망을 채워줄 하렘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슬람의 술탄에게 많은 처첩을 거느리는 것은 권력과 부와 정력을 상징했다. 하렘의 규모는 술탄의 능력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부유한 술탄은 보통 10여 명, 제국의 술탄은 무려 300~400명의 여자를 두었다.

    하렘에서 사는 여자들을 통틀어 오달리스크라고 하는데, 술탄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는 노예들이다. 오달리스크는 술탄의 총애 정도에 따라 신분에 차이가 났다. 술탄의 아이를 낳은 여자는 노예이면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누리는 혜택을 거머쥐었다. 이 때문에 오달리스크는 술탄의 눈에 들기 위해 시간과 정열을 쏟아 부었다.

    술탄의 사랑을 받는 여인을 그린 작품이 부셰의 ‘오달리스크’다. 커튼과 침대 시트가 뒤섞인 침실에서 튼실한 엉덩이를 드러낸 오달리스크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흐트러진 침대 시트와 오달리스크의 엉덩이는 술탄과의 사랑을 암시하며 침대 위의 구겨진 커튼은 술탄과의 요란했던 섹스를 상징한다.



    성 노예 오달리스크의 비애

    <그랜드 오달리스크> 1814년, 캔버스에 유채, 91×162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프랑수아 부셰(1703~1770)는 풍만하면서도 아름다운 엉덩이를 강조하기 위해 상반신에 옷을 반쯤 그려 넣었으며 탁자 위에 있는 도자기 물병과 진주 목걸이는 호화로운 하렘의 생활을 암시한다.

    오달리스크는 술탄의 사랑을 받기 위해 몸매 관리는 물론 성적 기교를 배우는 데에 큰 돈을 쓴다. 하지만 정력이 넘치는 술탄도 매일 밤 많은 오달리스크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술탄이 아니면 섹스를 할 기회가 없었던 오달리스크는 성 충동을 달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성 충동을 달래고 있는 오달리스크를 그린 작품이 앵그르의 ‘그랜드 오달리스크’다.

    화려한 실내에서 오달리스크는 공작 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다. 공작 털 부채는 성 충동을 달래는 도구로서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성적 자극 수단으로 사용됐다. 앵그르는 오달리스크가 성 충동을 달래고 있음을 표현하기 위해 여성의 성감대 중 발을 선택했다. 잘 정리 정돈된 침실은 술탄의 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여인의 허리가 이상하리만큼 길고 엉덩이도 비정상적으로 크게 그려진 것은, 앵그르가 남성의 사랑을 받는 여성의 이상적인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전통적인 원근법과 명암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성 노예 오달리스크의 비애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 1842년, 캔버스에 유채, 72×100cm, 볼티모어 워터스 아트 갤러리 소장

    외부와 격리된 하렘에서 오달리스크는 술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살지만, 남자라곤 달랑 한 명이다보니 사랑받지 못하는 날이 더 많다. 성적으로 가장 왕성한 나이지만 섹스하는 날보다 독수공방하는 날이 더 많은 오달리스크는 무료한 일상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음악을 듣기도 한다. 권태를 떨쳐내지 못한 오달리스크의 일상을 그린 작품이 앵그르의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다.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여인의 누드와 이국적인 환상이 결합된 작품이다.

    여자 노예는 악기를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오달리스크는 손을 머리에 얹은 채 몸을 비튼 자세로 잠들어 있다. 뒤에는 흑인 남자 노예가 방을 지키고 있다. 오달리스크가 옷을 벗고 있는 것은 언제든지 술탄의 사랑을 받기 위해 준비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노예의 무표정한 얼굴은 노래에 관심이 없음을 드러낸다.

    성 노예 오달리스크의 비애

    <오달리스크> 1828년, 캔버스에 유채, 54×65cm, 스톡홀름 근대미술관 소장

    앵그르는 이국적인 풍경을 강조하기 위해 침대 시트와 부채 그리고 향로를 배치했으며 그것들은 벌거벗은 오달리스크가 누워 있는 방안과 어우러져 향락적인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앵그르는 이 작품에서 원래 오달리스크를 까만 피부의 터키 여인으로 표현하고자 했으나 에로티시즘을 강조하기 위해 백인 여인으로 묘사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는‘그랜드 오달리스크’ 이후 말년에 이 주제에 천착했다. ‘노예와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란 주제로 1839년과 1842년에 작품을 제작한다. 두 작품은 오달리스크가 누워 있는 침대 시트 무늬와 남자 노예 뒤로 보이는 풍경만 다를 뿐 제목과 구도가 같다.

    술탄은 자동차를 바꾸듯 기분에 따라 기존의 오달리스크를 죽이거나 내쫓고 새로운 여자를 맞이하기도 했다. 반면 오달리스크에겐 성적 자유가 없었다. 성적 욕망을 달래기 위해 오달리스크는 남근 대용품을 사용하기도 하고 다른 여자와의 사랑으로 욕망을 채우기도 했다. 동성애에 빠진 오달리스크를 그린 작품이 마티스의 ‘오달리스크’다.

    성 노예 오달리스크의 비애
    박희숙

    동덕여대 미술학부 졸업

    성신여대 조형대학원 졸업

    강릉대학교 강사 역임

    개인전 9회

    저서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클림트’‘명화 속의 삶과 욕망’ 등


    나이든 오달리스크가 벌거벗은 채 침대에서 상반신을 세우고 아랍 전통 옷을 입은 오달리스크를 바라보고 있다. 무방비 상태로 잠들어 있는 젊은 오달리스크를 바라보는 벌거벗은 오달리스크는 미소를 짓고 있다. 두 사람의 자세는 사랑하는 사이임을 암시한다.

    앙리 마티스(1869~1954)는 남자의 에로틱한 환상을 표현하기 위해 오달리스크라는 소재를 택했다. 마티스는 오달리스크의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바로크식 벽지를 배경에 그려넣었다. 장식적인 벽지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오달리스크에게 집중하는 시선을 분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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