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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5회 신동아 논픽션 공모 우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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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측에서는 유빈의 심장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난 너무 억울해 부들부들 떨었다. 억장이 무너지는 듯 분해 미국대사관에 전화해 도움을 요청했다. 대사관에서는 부검해서 밝히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상담해주었다.

아들의 가슴을 메스로 가르는 부검을 허락하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죽은 아들을 다시 한 번 죽여야 하다니. 하지만 기막힌 운명은 현실이었다. 유빈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한 치의 누명이나 오해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운구는 한독병원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옮겨졌다. 그때 경황이 없어서 아들의 건강한 장기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에게 기증하지 못했던 것은 두고두고 후회가 된다.

부산에서 올라와 나의 일을 수습해주던 동생이 조카의 부검을 감독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운구를 따라갔다. 부검 결과 아들의 사인은 감전사로 밝혀졌다. 당연한 사실을 뒤집어보려는 서울대 측의 억지 때문에 유빈은 두 번이나 죽어야 했다. 불쌍하고 가엾은 내 아들.

그 당시 안타까운 마음으로 여러 일을 도와주셨던 어학연구소 소장 박남식 교수님과 우리 유빈을 직접 지도하신 문희자 교수님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물론 모두 다 기억이 안 나지만 고마운 분이 많았다. 유빈의 무덤에 빨리 푸른 잔디가 자라게 하기 위해, 관절염이 심해 다리를 절룩이면서도 개울물을 양동이로 나르던 박남식 교수님이셨다. 난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캐나다 부차드가든에서 꽃씨를 사서 보내드렸다. 서울대 어학연구소와 기숙사 주변에 심어달라고. 유빈이의 영혼이 꽃으로 피어나게.

새끼 잃은 어미의 절규는 시가 되어 모아졌다. 서울대 어학연구소의 도움으로 ‘하늘로 치미는 파도’가 1년 만에 책으로 출간됐다. 사람들이 출판기념식도 마련해주었다. 고마웠다. 사고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내 가슴속은 찢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아픔은 새록새록 깊게 자라났다. 1년을 멍청하게 살다가 정신이 조금씩 들면서 아픔이 점점 깊어졌다.



서울대 기숙사, 내 사랑하는 아들이 숨진 곳. 내가 그곳 기숙사에서 며칠간 문희자 교수님과 작품 교정을 보며 편집을 의논할 때였다.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 그곳에 있기가 곤혹스러웠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아들을 느끼려 애썼다. 내 자신이 무척 이율배반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유빈이가 엄마가 쓴 책으로 다시 태어나리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다.

문희자 교수님과 며칠을 함께할 때 난 유빈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교수님으로부터 얘기를 들으며 내 무너진 가슴의 피와 살이 다시 요동쳤다. 하지만 우리 유빈을 추억할 수 있어 행복했다.

“교수님! 열심히 한국어 공부해서 A학점 받아 우리 엄마 기뻐하시는 모습 보고 싶어요.”

“유빈이 학생은 효자구나. 어머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종강 때 서울에 축하해주러 오시겠대요.”

“유빈은 좋겠구나.”

“네. 부산 외삼촌 집에도 가고 의왕에 계신 이모 집에도 가고. 어머니가 여행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미국에 가서는 어머니가 캐나다 여행도 가자고 했어요. 대학 가기 전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 서울대로 연수를 보내던 로스앤젤레스공항이 아들을 본 마지막 공간이 될 줄이야. 그 후 가끔씩 부지불식간에 공항 쪽으로 차를 달리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마지막 정담을 나누던 공항의 카페테리아를 뒤지며 아들의 흔적을 찾았다. 그 당시 나는 반쯤은 정신 나간 여자였다.

나는 아들과 시간을 함께하던 곳을 찾아 폴의 이름을 불렀다. 김소월 님의 시,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초혼’을 기억하며 펑펑 울었다. 그림자라도 잡으려는 심정으로 샌타모니카와 말리부비치, 베니스비치, 마리나델레이 해변으로 미친 사람처럼 헤집고 다녔다. 서울을 방문할 때는 버스에 붙은 ‘서울대’란 글자만 보아도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픔을 통해 배운 것들

서울대로 연수를 가지 않겠다던 아들을 억지로 보낸 어미. 서울대말고도 연수 프로그램을 가진 다른 좋은 대학이 있었다. 이왕이면 최고로 좋은 학교에 보내야겠다는 나의 일류병과 명문대학병 때문에 아들을 서울대에 보내 사고가 일어났다. 왜 많은 사람이 서울대를 못 보내 안달일까? 서울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대통령도 되고 그런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지만, 내 경우는 일류를 좋아하는 허영심 때문이었다. 결국 그 허영심이 아들을 잃게 했다. 아무튼 아들이 떠난 후 나는 일류니 명문이니 하는 단어를 내 삶에서 지웠다. 언제 어디에서든 최선을 다하는 삶이 아름다운 삶이란 것을 아들의 죽음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의 영혼과 이름이라도 위로하려고 장학재단을 운영했다. 지역사회를 위해, 공부는 잘하지만 환경이 어려운 학생을 도와야겠다는 그런 기본적인 지각은 내겐 없었다. 물론 장학재단을 운영한 이유가 아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들을 향한 죄의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나의 몸부림이었다.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장학재단 운영을 통해서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온갖 체험을 할 수 있음은 값진 공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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