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신동아 로고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이슈 취재

뜨는 사극, 속 끓는 디자이너

거액 스폰서 디자이너 행세, 우후죽순 카피·표절

  •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뜨는 사극, 속 끓는 디자이너

3/3
“정구호도 표절당한다”

독창성이 부족한 대신 한복 업체는 전통 한복 디자인과 바느질 쪽에 특기를 갖고 있다. 현재 방송 중인 KBS 근초고왕 의상 제작 업체의 경우 홈페이지를 통해 “디자인은 KBS아트비전 이민정씨가 했고, 저작권은 KBS에 있으며, 제작은 유경패션이 했다”라고 공지했다. 이렇게 서로 역할을 인정하고 업무를 분담하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그러나 이런 사례는 드문 편이다. 한 한복 디자이너는 “요즘 한복 숍 매출의 90%는 결혼산업과 관련돼 있다. 젊은 소비자들이 예복이나 웨딩화보 촬영용으로 한복을 구입하기 때문에 ‘누구 디자인’이냐는 것에 민감하다. ‘어느 드라마 의상을 만든 디자이너 작품’이라고 소문나면 매출이 크게 느는데, 그런 부가 효과를 얻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이처럼 디자이너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 환경이다 보니 특정 디자이너가 만든 창의적인 디자인이 다른 디자이너에 의해 도용되는 사례도 일어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 한 사람으로, 영화 ‘스캔들’ ‘황진이’ 등의 의상을 맡아 새로운 스타일의 한복을 선보인 정구호 제일모직 전무는 2006년 한 패션잡지와 함께 한복 화보를 진행한 적이 있다. ‘패션 디자이너 정구호가 오직 이 매체만을 위해 만든 한복’이라는 설명과 함께 공개된 의상은 기존 한복의 틀을 깨는 디자인과 참신한 소재 사용으로 패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다. 문제는 이 중 ‘서양 옷에 쓰이는 프린트, 선홍색 꽃무늬의 실크 레이스를 이용해 만든 저고리와 붉은 레이스 치마가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는 설명이 붙은 한복과 ‘전체 은박을 장식한 저고리와 플리츠스커트를 덧입은 치마의 모던한 조합. 과감한 은박 프린트와 질감이 다른 스커트를 풍성하게 레이어링한 새로운 시도가 신선하다’는 설명이 붙은 다른 한복을 연상케 하는, 디자인적으로 유사한 의상이 이후 방송된 한 사극에 등장했다는 점. 이 때문에 한때 해당 드라마 의상 제작에 정구호 디자이너가 참여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 드라마 의상 협찬사 대표가 자사 홈페이지와 화보집 등을 통해 이 의상을 자신의 대표작으로 소개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정 전무는 “해당 디자이너가 화보에 공개한 한복 디자인을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는데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사실은 사실이다. 나중에 해당 방송사 PD가 (내게) 양해를 구했다”고 답했다. “디자인 저작권을 침해당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내가 문제제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나는 한복 디자이너가 아니지 않나”라고 했다.

이혜련 부장은 “디자인 표절은 참 다투기 힘든 주제다. 2000년쯤 한 드라마 의상을 제작한 뒤 저작권 등록을 해볼까 생각했는데, 모든 디자인을 그대로 본뜬 뒤 소매 끝부분을 좀 바꾸거나 색깔만 미세하게 달리 해도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명난다더라. 굳이 힘들게 등록할 필요가 있나 싶어 그 뒤부터 마음을 비웠다”고 했다.



디자인권 등록, 계약서 명기

문제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젊고 창의적인 디자이너들이 의상 디자인 분야를 떠날 수 있다는 점. 이진희 대표는 “10여 년 동안 이 일을 하면서 많이 상처 입고 좌절도 겪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업계 사정을 다 알려주면 과연 후배들이 이쪽 일을 시작할까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더 늦기 전에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MBC미술센터는 그 일환으로 드라마 의상디자인을 특허청에 등록하기 시작했다. ‘이산’ ‘돌아온 일지매’ ‘선덕여왕’ 등의 작품에서 인기를 모은 의상 17건을 등록한 상태다.

MBC미술센터 이기화 총무팀장은 “요즘은 드라마가 뮤지컬이나 연극 등으로 제작되고, 주인공을 형상화한 캐릭터가 제작되는 등 의상의 콘텐츠 활용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소속 디자이너의 디자인 저작권을 보호받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들 드라마 의상을 디자인한 이혜란 차장은 “‘이산’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에서 왕이나 왕자가 입는 옷은 붉은색 곤룡포와 잠옷뿐이었다. 세손이 주인공인 드라마를 하면서 집무복이나 일상복을 새롭게 디자인해보고 싶어서 흑룡포에 은색 수를 놓은 의상을 만들었는데 이후 여러 업체에서 카피해 신랑의 한복 화보 촬영용 의상으로 인기를 끌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저작권을 주장한 적은 없다. 아직 그럴 만한 환경이 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저작권 전문가인 홍승기 변호사는 “지금 우리나라의 경우 드라마 스태프 중 작가나 음악감독 정도만 창작물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미국·영국 등에서는 의상 디자이너도 디자인료와 별도로 저작권 계약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우리도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존중하고 애초에 계약을 맺을 때 디자인을 2차적으로 활용할 경우 수익 분배 등에 대한 내용을 명시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신동아 2011년 4월호

3/3
송화선│동아일보 신동아 기자 spring@donga.com
목록 닫기

뜨는 사극, 속 끓는 디자이너

댓글 창 닫기

2022/10Opinion Leader Magazine

오피니언 리더 매거진 표지

오피니언 리더를 위한
시사월간지. 분석, 정보,
교양, 재미의 보물창고

목차보기구독신청이번 호 구입하기

지면보기 서비스는 유료 서비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