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5월호

조선의 한글 연애편지 스캔들

  • 고승철│저널리스트·고려대 미디어학부 강사 koyou33@empas.com

    입력2011-04-21 11: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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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한글 연애편지 스캔들

    조선언문실록 <br>정주리·시정곤 지음/ 고즈윈/ 240쪽, 1만1800원

    “한글은 세계 여러 문자 가운데 가장 과학적인 문자다.”

    “세종대왕의 가장 위대한 치적은? 훈민정음 창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청소년 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다. 좀 삐딱한 학생은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점에 대해 “국수주의적인 자화자찬(自畵自讚)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품었으리라. 어떤 학생은 한글이 위구르 문자를 베꼈다느니, 인도 어느 지방의 글자와 비슷하다느니 하는 주장에 귀가 솔깃하기도 했으리라.

    세종(1397~1450) 당대에는 한글 창제가 백성들에게 피부에 와 닿는 일은 아니었다. 먹고살기가 최대 과제인 때여서 세종의 중요 치적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이란 농업기술 서적과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이란 의학 서적을 보급한 것이 꼽힌다. ‘농사직설’ 덕분에 농민은 농산물 생산량을 크게 늘려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을 늘리려면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워야 할 때였다. ‘향약집성방’은 중국에서 수입한 값비싼 약재 대신 조선 땅에서 나는 약초를 이용하는 방법을 모아놓은 책이다. 이 책은 소아과와 부인과를 독립 항목으로 내세울 만큼 출산과 양육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향약 의술에서 해열제가 개발돼 소아병인 홍진, 두창 등으로 사망하는 아기가 줄어들면서 인구증가율이 높아졌다.

    한글이 만들어진 지 600년이 돼간다. 창제 당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디지털 시대가 열렸다. 한글이 편의, 속도를 생명으로 하는 온라인 체제에 가장 적합한 문자임이 속속 입증된다. 과연 세종의 최대 치적이 한글 창제임을 실감한다. 한국인이 한글 없이 말글살이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알파벳, 한자, 한글이 세계 3대 문자라는 주장을 펼쳐도 무리가 아닌 듯하다. 한글의 중요성을 한글날에만 외칠 게 아니라 평소에도 인식해야 하지 않나.



    세자도 언문 배워 한문 읽어

    한글 전문가가 집필한 ‘조선언문실록’은 한글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추적한 책이다. 정주리 동서울대 교양학부 교수와 시정곤 카이스트(KAIST) 인문사회과학과 교수의 공저다. 책날개의 저자 소개란을 보자. 정주리 교수에 대해서는 ‘국어학에 발을 내디딘 후 국어의 의미를 밝히는 데 관심을 가져왔다. 특히 국어 동사와 구문의 관계, 언어와 사회의 관계, 인간의 정신과 언어 코드의 비밀스러운 공모 관계를 밝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시정곤 교수에 대해서는 ‘말글 속에 숨어 있는 무한한 힘과 놀라운 질서의 세계에 매료돼 그 비밀을 찾는 언어 탐정으로서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왔다. 대중과 호흡하는 말글살이 연구를 지향한다’고 씌어 있다. 저자들이 언어에 숨은 비밀을 찾는 전문가여서 내용이 흥미진진할 듯하다.

    책 제목에 붙은 ‘실록’은 ‘조선왕조실록’에서 비롯됐다. 한글이 창제된 세종 25년(1443)부터 마지막 왕인 순종 때까지 ‘조선왕조실록’의 한글 관련 기록을 찾아 분석한 것이다. 저자들은 “우리는 한글로 명명되기 이전, ‘언문’으로 불리던 우리 문자가 조선 백성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숨 쉬고 있었는지를 기록 영화 보이듯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저자 서문을 직접 옮겨보자.

    어떤 때는 사랑하는 임에게 띄우는 편지에 쓰이고, 어떤 때는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문에 쓰이고, 또 어떤 때는 암호 문자처럼 쓰이고, 또 어떤 때는 누군가를 고발하는 투서에 쓰이면서 삶 속에 녹아들어 간 한글의 모습을 생생하게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는 사건, 스캔들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다. 한글 자체를 고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한글을 어떻게 사용했는가를 보려 한 때문이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이야기는 실록에 기록된 것이니만큼 당대에 이목을 끈 중요한 사건이었다. 정치적 사건에서부터 백성의 생활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을 아우르고 있다.

    중국을 사대(事大)하고 공식 문서는 한문으로 써야 했던 시대에 세종이 한글 창제에 나선 것은 엄청난 정치적 결단이었다. 최만리 등 관료권력이 훈민정음 창제가 옳지 못하다고 상소를 올리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세종은 1446년 9월 훈민정음을 세상에 공포하고 일반 백성뿐 아니라 지배 계층에서도 이 글자가 널리 쓰이기를 바랐다. 하급 관리인 서리를 뽑는 시험에 훈민정음을 포함시키라고 명하기도 했다.

    이 책의 1장인 ‘언문을 사랑한 임금’에서 임진왜란 때 피란을 가던 선조가 백성들에게 언문 교서를 내리는 상황이 자세히 소개됐다.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물리치라는 내용인데 백성들에게서 폭넓은 지지를 얻고자 한문 교서를 언문으로 번역하도록 지시했다. 1592년의 일이니 훈민정음이 창제된 후 146년이 지난 때였다. 이미 언문은 백성들 사이에서는 유용한 소통 도구로 자리 잡았다.

    조선시대에는 세자가 학문을 두루 익혀야 했다. 어릴 때부터 엄청난 공부에 시달렸다. 나이 어린 동궁이 옛 성현의 어록을 읽고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숙종은 언문을 아는 보모를 왕세자에게 붙여주었다. 언문으로 가르치면 매우 효과적이라는 건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연애편지 스캔들로 궁녀 처형돼

    한글이 만들어진 이후에야 한자음을 제대로 적을 수 있었다. 그전에는 같은 한자를 두고 읽는 발음이 달라 혼란이 심했다. 유생과 사대부도 왕실에서처럼 한문과 언해본을 대조해가며 공부했다. 우리말을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 있는 언문의 유용성에 그들은 감탄했다. 관료들이 쓰는 공식 문서에도 언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숙종 때의 대학자 남구만은 “문과에 응시하는 유생 중에 어려서부터 언문으로 글을 익혀 읽기만 하다가 정작 과거에 오르게 되면 한문 편지 한 장을 쓰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고 개탄했다.

    이 책의 2장인 ‘사대부, 언문 편지를 쓰다’에서는 사대부가 아내, 어머니, 시집간 딸, 첩 등 여성에게 편지를 쓸 때는 언문을 사용하는 여러 사례를 담았다. 연산군 때의 일이다. 연산군은 전국의 기녀를 궁궐로 불러 모으는 채홍사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한곤이라는 중급 관리는 자신의 첩이 채홍사에게 끌려갈까 걱정돼 “예쁘게 꾸미면 뽑혀 갈 것이니 꾸미지 말라”고 당부하는 언문 편지를 썼다. 이 편지가 발각돼 한곤은 국왕을 능멸했다는 대역죄인으로 몰려 사지가 찢기는 능지처참형을 당했다.

    ‘암클’은 한글과 여성을 모두 비하하는 말이다. ‘암컷이 쓰는 글’이니 요즘 기준으로는 막된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이 언문을 즐겨 사용했다. 궁궐에서는 왕후나 공주, 궁녀들이 애용했다. 말하는 대로 쓰니 편했다. 특히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연애편지 쓰기에는 언문이 좋았다.

    이 책의 3장 ‘여성의 삶과 언문’에는 조선시대의 유명한 스캔들이 나온다. 세조 때 덕중이란 궁녀의 연애편지 사건을 보자. 덕중은 사모하는 귀성군 이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언문 편지를 써서 환관 최호, 김중호에게 주었다. 지체 높은 이준에게 덕중 자신이 접근하기는 어려웠으므로 환관에게 전달을 부탁한 것이다. 이준은 이 편지를 받고 아버지 임영대군에게 사실을 고한다. 임영대군은 아들 이준을 데리고 국왕 세조에게 가서 이를 아뢴다. 세조는 두 환관을 기강문란죄로 다스려 궁궐 밖으로 끌어내 때려죽이게 했다. 세조는 편지를 쓴 덕중은 살려두려 했다. 덕중은 세조가 수양대군인 시절에 정을 맺은 여인이었다. 왕위에 오른 후 후궁으로 삼아 아들을 낳게 했다. 그 아들이 곧 죽었고 덕중은 후궁에서 궁인으로 강등됐다. 국왕에게서 버림받은 덕중은 잇달아 스캔들을 일으켰고 마침내 편지 심부름을 한 환관 둘을 죽게 한 것이다. 신하들이 덕중도 처형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람에 세조도 어쩔 수 없었다. 덕중은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4장 ‘백성의 소통법’에는 백성들의 말글살이 실태가 실렸다. 캐나다 선교사 제임스 스카스 게일은 1909년에 출간한 ‘전환기의 조선’이란 책에서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도 한 달 남짓 공부하면 성경을 읽을 수 있다”면서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천 명 가운데 한 명이 읽을 수 있는 데 비하여 조선에서의 읽기는 거의 보편적”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영국인 지리학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저서에서 ‘한강 유역의 하층민들이 한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당에서는 한문만 가르치지는 않았다. 한자의 음과 뜻을 언문으로 표기한 교재가 널리 사용됐다. ‘훈몽자회’가 그런 책이다. 학생들은 한문을 잘 익히려면 언문부터 배워야 했다. 5장 ‘언문, 국문이 되다’에서는 한글이 더욱 널리 쓰이는 상황을 알린다. 임진왜란 때 작전지시 등 비밀문서는 언문으로 작성됐다. 만약 왜군에게 넘어가더라도 그들이 언문을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에 간 사신이 국내에 중국 사정을 알리는 문서를 작성할 때도 언문으로 썼다. 중국인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896년 4월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했다. 띄어쓰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한글학자 주시경이 고안한 표기법을 따랐기 때문이다. 신문 창간자 서재필은 미국에서 의사가 된 최초의 한국인인데 영문처럼 한글도 띄어쓰기를 해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했다.

    한글 사용 인구는 남북한 및 재외교민 등 모두 7500만명을 헤아린다. 소수 언어가 사라지는 추세인데 어떤 언어가 살아남으려면 사용인구가 1억명은 돼야 한단다. “한국어와 한글을 외국인에게까지 널리 보급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간다. 한국어 사용 인구 1억명 시대를 맞이하려면 종합 대책을 세워 꾸준히 추진해야 할 것이다. 한글이 가장 과학적인 문자라는 점을 요즘엔 문자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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