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호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

강원 홍천 물걸리

  • 글·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 yule21@empas.com 사진·권태균│ 사진작가 photocivic@naver.com

    입력2012-06-21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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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

    강원도 홍천군 물걸리 마을.

    “뭘 마이 멕여야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촌장 격인 할아버지가 진한 강원도 사투리로 말했다. “어떻게 마을을 평화롭게 할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맞는 말이다. 먹을거리가 있으면 평화가 찾아온다. 하지만 감자나 옥수수만으로 얼마나 잘 먹였겠는가? 아마 공평하게 골고루 잘 나눠 먹였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을 두고 유식한 사람들은 평등이라고 정의한다.

    사실 식량은 보편적 인권을 보증한다. 그래서 식량 인권이라고도 한다. 충분한 영양과 질 좋은 음식이면 더욱 좋겠지만 기본은 공평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화에서 군인과 인민군도 뭘 마이 멕이니까 금세 친해진다. 무대가 강원도라 옥수수를 많이 먹기는 했지만 포획한 멧돼지 바비큐로 인해 서로 굉장히 친해지지 않았던가. 보릿고개를 넘겨야 하는 한국인에게는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만큼 실감나는 말도 찾아보기 힘들다.

    헤르만 헤세에게 숲과 나무는 추억과 연결시켜주는 표상이다. 또한 죽음, 환생, 성장, 생명, 무사함, 풍요로움의 상징이다. 숲은 계절과 그들이 서 있는 경관과 주변을 비춰 보여주는 거울이다.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

    할아버지가 소 먹일 꼴을 준비하고 있다.

    조선시대엔 버려진 땅

    강원도로 향하며 영화 속의 공간인 동막골과 헤르만 헤세의 숲과 나무를 문득 떠올리게 된다. 울창한 삼림의 아마존이 지구의 허파라면 강원도는 한반도의 허파쯤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눈먼 자식이 효자 노릇하고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실감나는 강원도 땅이다.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숲, 감자, 옥시기(옥수수의 강원도 사투리) 정도다.

    다산 정약용 생가가 있는 양주를 지나 양평 땅을 벗어나면 변변한 묘지조차 하나 없는 게 강원도 땅이다. 반가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 조선시대 강원도 영서지방은 아예 버려진 땅이었다. 가끔은 유배지로 등장하지만 그나마 아주 뜸해 역사책에서도 변변한 글 한 줄 찾아보기 힘들다. 요즈음 말로 스토리가 없다는, 한마디로 얘깃거리가 없다는 의미다.

    그중에서 강원도 북동쪽의 땅은 오랫동안 버려진, 세인의 관심 밖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 땅이 요즘 들어 서울 사람들의 전원주택지로, 단골 여름 휴가처로, 새삼 눈길을 끌고 있으니 묘한 이치다.

    맑은 인상 스님이 차 권하니…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

    물걸리의 재래식 사이렌 탑. 손잡이를 돌리면 ‘왜애앵’ 소리가 난다.

    홍천으로 가는 길은 그 옛날 길과는 달랐다. 20대 때, 캠핑을 간 홍천강 모곡 유원지는 건장한 예닐곱의 남녀 대학생도 무서움을 탈 만큼 인적이 뜸했다. 그래서 “살모사 껍질 벗겨 그녀의 목에 걸면/그녀는 깜짝 놀라 내 품에 안기겠지”라는 노래를 부르며 밤새 불침번 서느라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중년 세대는 눈치 챘겠지만 “조개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면/그녀는 깜짝 놀라 내 품에 안기겠지”라는 윤형주의 ‘라라라’를 패러디한 우스개 노래다. 그러나 이날의 추억이 새록새록 한, 멀고먼 홍천 땅은 이제 잘 닦인 도로 덕분에 서울에서 불과 3시간 남짓이면 충분했다.

    서울 사람들이 설악산 나들이할 때 자주 이용하는 44번 국도를 따라 홍천강을 거슬러 가다보면 철정, 인제, 원통을 지나 설악산에 이르게 된다. 철정터널을 빠져나와 451번 지방도로로 갈아타고 가다보면 홍천강 상류가 나온다. 홍천강은 여기서부터 조그만 지류인 내촌천으로 이름을 갈아 치운 채 굽이굽이 계곡을 따라 흐른다. 444번 또는 451번 지방도를 달리다보면 물걸리가 나온다. 대승사와 기미만세 공원의 팻말이 보인다. 홍천에서도 가장 외진 이 지역은 마을 전체를 도로가 마름모꼴로 감싸고 있다. 가다보면 똑같은 길이 나온다. 그래서 외지 사람들의 경우 무슨 귀신 씐 것 같아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을 입구에는 척박한 산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념탑이 서 있다. 기미독립만세를 기념하는 탑이다.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던 그날의 감격을 새긴, 산골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이다.

    탑에는 기미년 4월 3일 마을 사람인 김덕원, 전성렬 의사 등이 주동이 돼 인근 홍천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 기린면의 다섯 고을에서 수많은 군중이 운집해 이곳 물걸리, 동창마을 등에서 자주독립 만세를 외쳤다고 기록돼 있다. 역사 시간에 졸지 않은 것 같은데 처음 듣는 강원도 사람들의 독립운동 얘기다.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

    한 상 가득한 대승사 점심 공양. 비빔밥 한 가지지만 군침이 돈다.

    기념탑을 지나면 물걸리 사지(物傑里 寺址), 널찍한 절터가 눈앞에 나타난다. 절의 건물은 허물어진 지 오래다. 폐허가 되어 방초만 푸르다. 하지만 석조여래좌상 등 국가 지정 보물이 다섯이다. 알려지지 않은 사찰이 남긴 흔적으로는 더없이 화려하다. 그러나 지척거리에서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 대승사는 대웅전 한 칸이 전부인 더없이 궁벽한 사찰이다. 탐방 길에 나선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야단법석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인파가 몰렸고 형형색색 연등은 프러시안블루의 봄 하늘에 눈부시다.

    가난한 절에도 꽃은 피어 있었다. 산골 할머니 틈에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일행에게 맑은 인상의 스님이 “차 한잔 하겠느냐”고 말을 건넨다. 스님의 법명은 ‘각해’, 조계종단의 비구니인데 어찌어찌한 인연으로 태고종 사찰인 이곳에 나 홀로 주석하고 있다고 한다. 승가대학을 나온 지식인 스님답게 눈빛이 곱고 깨끗하다.

    많지 않은 연등은 하늘을 듬성듬성 가리며 봄바람에 출렁거린다. 부자의 연등은 법당 가까이 자리하지만 빈자와 과부의 연등은 사람들 눈에도 잘 띄지 않는 냄새나고 어두운 뒷간을 희미하게 밝힌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빈자일등(貧者一燈)’, 가진 자의 고급스러운 일만 개의 등보다 가난한 자의 보잘것없는 한 개의 등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가.

    시주단지에는 흔한 만 원짜리를 찾아보기 힘들다. 천 원짜리 몇 장과 도회 사람들이 지니기에 불편해하는 나들이 나온 동전들이 천금의 무게로 버티고 있다. 팔순 촌로의 저 검고 투박한 손에 담긴 간곡한 기원은 무엇일까? 산골 할머니의 간절함에 초여름 따가운 햇살이 외려 서늘하다.

    대승사를 뒤로하고 10여 분을 달리면 사이렌 탑이 나타난다. 요즘 보기 드문 나무로 지은 재래식 싸이렌 탑이다. 장정 서넛이 손잡이를 힘껏 돌리면 동력이 발생하고 그 힘으로 사이렌 소리가 퍼져 나간다. 무장공비가 심심찮게 나타나던 시대에는 요긴했으나 지금은 퇴적한 유물로 오히려 가치가 있어 보인다.

    물걸리 곳곳에는 작약과 금낭화가 자주 눈에 띈다. 며느리밥풀꽃이라고 불리는 금낭화는 그 옛날에는 너무 귀해 눈에 띄면 ‘심봤다’라고 고함치고 경배를 올린 뒤 관찰했다는 꽃이다.

    강원도 영서지방 홍천은 이제 지척의 거리로 다가오고 있다. 서울-홍천 고속도로에 이어 2015년 개통을 목표로 동홍천-양양 간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다. 무려 서른다섯 개의 터널을 뚫는 험한 공사가 끝나면 강원도는 이제 경기도 땅만큼이나 서울 사람에게 가까운 곳이 된다. 그리하여 인제로 연결되는 사연 많은 행치령 고갯길은 잊힌 과거로 사라질 것이다.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

    물걸리 사지 석조비로자나 불상. 보물 541호다.

    산골처녀 슬픔 담은 그 노랫말

    강원도는 설움 많고 버려진 땅이라 구슬픈 민요가 많다. “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난다”는 ‘한오백년’부터 정선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등이 그것이다.

    “아주까리 동백아 열지 마라/ 누구를 괴자고 머리에 기름.”

    강원도아리랑의 한 구절이다. 노래에 등장하는 ‘괴다’는 말은 사랑하다는 의미의 토종말로, 짝사랑에 애태우는 산골 큰애기의 가슴앓이를 묘사하고 있다.

    “산중의 귀물은 머루와 다래/ 인간의 귀물은 나 하나라네.”

    맞는 말이다. 강원도는 한국 사람에게 이제 하나의 귀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리랑 고개다 주막집을 짓고/ 정든 님 오기만 기다린다.”

    그러나 그 많은 굽이굽이 옛길은 개발 바람에 밀려 울창한 숲 속으로 하나둘 스스로를 숨기고 있다. 감꽃을 주우며 헤어진 사랑, 그 감이 익을 땐 오시겠느냐고 단봇짐을 싸던 산골처녀의 슬픔을 담은 그 옛날의 노랫말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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