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환이 부른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꽃순이를 아시나요?’ 로 더 유명한 영화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협 감독, 1978)에서 정윤희는 시골에서 서울로 와 다방 레지가 됐다가 사진작가, 레슬링 선수 등등의 남자를 거치면서 결국 ‘꽃순이’란 이름으로 환락가를 전전하는 몸이 되는 역을 맡는다. 이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배역은 거의 모두 비슷하다. 발랄하고 청순한 여대생 아니면 순진한 시골처녀로 서울에 올라와 불행에 빠지는 비운의 여주인공이었다. 남성 관객들은 그녀가 무엇을 연기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만을 보러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1979년. 정윤희가 영화배우로 기억된다면 그래도 이 작품이라 할 만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 ‘여자들만 사는 거리’(1976) ‘겨울여자’(1977)로 1970년대 후반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김호선 감독의 영화 ‘죽음보다 깊은 밤’(1979)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여자가 망연한 얼굴로 누워 있다. 죽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잠에 빠진 것인가?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둠. 그녀는 어둠 속에 누워 있다. 이어 유행가 소리. 여자들의 악다구니 소리. 술주정뱅이들이 길 구석에서 구토를 하거나 오줌을 누는, 말 그대로 지옥과도 같은 뒷골목 술집 거리에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정윤희. 여대생이다. 의처증에 걸려 걸핏하면 술손님들에게 패악질을 하는 아버지, 모진 수모를 참아내며 족발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정윤희는 자신의 집인 족발집 앞에 섰다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행패 부리는 모습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 달아난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남자친구가 일을 하는 밤업소. 음대생인 남자친구는 밤업소의 밴드에서 건반연주와 노래를 하며 학비와 생계비를 벌고 있다. 정윤희는 남자친구가 부르는 노래를 나지막이 따라 부른다. “나는 불꽃처럼 세상을 태워 한 움큼 재가 되어 세상에 흩어진다네” 여대생인 정윤희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여자다. 그녀는 어머니처럼은 안 살겠다고 집을 뛰쳐나온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불태우는 찬란한 불꽃이 되고자 하는 여자다.
죽음보다 깊은 밤

정윤희는 1984년 사업가 조규영 씨와 결혼하며 스크린을 떠났다.
정윤희는 가난한 남자친구의 등에 올라타 부잣집 담장을 넘겨다보며 커다란 정원과 아름다운 조경수를 사달라고, 소꿉장난을 하듯 자신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처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언젠가 그녀가 날아오르거나 불꽃으로 타버릴 유일한 장점이자 약점이다. 잘생긴 재벌 2세의 눈에 들어 모델 제의를 받고 와인과 양식을 대접받고 가난한 남자친구의 자취방으로 들어온 정윤희는 가난한 남자친구가 정성껏 준비한 김치찌개를 발로 차서 뒤엎어버리고 “이게 뭐야. 이렇게 살 바엔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라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끝내 남자친구를 별 볼일 없는 딴따라라고 부정하며 재벌 2세에게 가버린다. 그녀는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다. 오직 자신만을 사랑한다. 1970년대 말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여성의 욕망. 남자에 의해 잘잘못이 가려지고 남자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살고 싶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여성을 정윤희는 연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