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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배우 열전 ⑥

목마른 소녀 정윤희

눈부신 외모로 스크린 장악한 1970년대‘트로이카’의 전설

  • 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목마른 소녀 정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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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정윤희는 ‘고교 얄개’에서 연인 사이로 연기한 하명중과 함께 ‘목마와 숙녀’(이원세 감독)에 출연한다. 악성빈혈에 시달리는 발랄한 여대생 정윤희는 운동밖에 모르는 순진하고 무뚝뚝한 대학 야구선수 하명중과 만나 사랑을 하고, 죽음으로 이별을 한다. 미국 영화 ‘러브 스토리’와 비슷한 내용의 멜로드라마였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 이듬해 출연한 사극 ‘임진왜란과 계월향’에서 정윤희는 임권택 감독과 만난다. 배우는 좋은 감독을 만났을 때,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다. ‘으악새’ 영화(액션 폭력 영화에 대해 무시하는 표현으로 배우들이 ‘으악’ 하며 쓰러지는 장면만을 찍는다고 붙여진 이름)를 닥치는 대로 찍었던 그 옛날의 임권택 감독이 아니라 영화감독으로 자의식을 갖기 시작하던 변화기의 임권택 감독을 만난 것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그는 이 영화와 배우에 대해 흥미가 없었다. 친구였던 제작자 정진우 감독의 부탁으로 TV에서 인기가 있던 정윤희를 써 TV 방송국에 작품을 팔 의도로 영화를 만든 것이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임권택 감독은 이 영화를 “하기는 해야 하는데, 참” 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정윤희로서는 불행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나는 77번 아가씨’가 만들어졌다. 얼굴은 예쁘지만 연기는 안 되는 배우. 그러나 대중은 그녀가 나오는 영화,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출연해 남성 관객의 욕망을 충족해주는 영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정윤희는 남성 관객의 욕망과 그것을 정확하게 노린 영화 제작자들에게 몇 년간 소모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김국환이 부른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 ‘꽃순이를 아시나요?’ 로 더 유명한 영화 ‘꽃순이를 아시나요?’(정인협 감독, 1978)에서 정윤희는 시골에서 서울로 와 다방 레지가 됐다가 사진작가, 레슬링 선수 등등의 남자를 거치면서 결국 ‘꽃순이’란 이름으로 환락가를 전전하는 몸이 되는 역을 맡는다. 이후 그녀가 출연한 영화의 배역은 거의 모두 비슷하다. 발랄하고 청순한 여대생 아니면 순진한 시골처녀로 서울에 올라와 불행에 빠지는 비운의 여주인공이었다. 남성 관객들은 그녀가 무엇을 연기하는지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만을 보러 극장으로 몰려들었다.

1979년. 정윤희가 영화배우로 기억된다면 그래도 이 작품이라 할 만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영자의 전성시대’(1975) ‘여자들만 사는 거리’(1976) ‘겨울여자’(1977)로 1970년대 후반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떠오른 김호선 감독의 영화 ‘죽음보다 깊은 밤’(1979)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한 여자가 망연한 얼굴로 누워 있다. 죽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잠에 빠진 것인가? 그녀가 누워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 없는 어둠. 그녀는 어둠 속에 누워 있다. 이어 유행가 소리. 여자들의 악다구니 소리. 술주정뱅이들이 길 구석에서 구토를 하거나 오줌을 누는, 말 그대로 지옥과도 같은 뒷골목 술집 거리에 젊은 여자가 서 있다. 그녀는 정윤희. 여대생이다. 의처증에 걸려 걸핏하면 술손님들에게 패악질을 하는 아버지, 모진 수모를 참아내며 족발을 팔아 생계를 꾸려가는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정윤희는 자신의 집인 족발집 앞에 섰다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행패 부리는 모습을 보고는 발길을 돌려 달아난다. 그녀가 향하는 곳은 남자친구가 일을 하는 밤업소. 음대생인 남자친구는 밤업소의 밴드에서 건반연주와 노래를 하며 학비와 생계비를 벌고 있다. 정윤희는 남자친구가 부르는 노래를 나지막이 따라 부른다. “나는 불꽃처럼 세상을 태워 한 움큼 재가 되어 세상에 흩어진다네” 여대생인 정윤희는 아버지를 증오하는 여자다. 그녀는 어머니처럼은 안 살겠다고 집을 뛰쳐나온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세상을 불태우는 찬란한 불꽃이 되고자 하는 여자다.

죽음보다 깊은 밤

목마른 소녀 정윤희

정윤희는 1984년 사업가 조규영 씨와 결혼하며 스크린을 떠났다.

1978년 상업적인 성격이 농후한 한국 영화에서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이 노골적으로 나온 예는 흔치 않다. 정윤희는 지긋지긋하게 가난하고 폭력적인 아버지에게서 도망치는 1970~80년대 한국 여성의 콤플렉스를 표현하는 여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뿐 아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키가 160cm 밖에는 안 되는 작은 여자’라 말하며, ‘남자에게 귀여워 보이고 싶은 것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현실에서의 정윤희와 배우 정윤희의 정체성을 스스로 규정하는 듯한 대사를 한다. 이제 정윤희는 한 사람의 여배우가 돼가는 것이다.



정윤희는 가난한 남자친구의 등에 올라타 부잣집 담장을 넘겨다보며 커다란 정원과 아름다운 조경수를 사달라고, 소꿉장난을 하듯 자신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처지를 즐긴다. 그러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언젠가 그녀가 날아오르거나 불꽃으로 타버릴 유일한 장점이자 약점이다. 잘생긴 재벌 2세의 눈에 들어 모델 제의를 받고 와인과 양식을 대접받고 가난한 남자친구의 자취방으로 들어온 정윤희는 가난한 남자친구가 정성껏 준비한 김치찌개를 발로 차서 뒤엎어버리고 “이게 뭐야. 이렇게 살 바엔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어”라며 히스테리를 부린다. 끝내 남자친구를 별 볼일 없는 딴따라라고 부정하며 재벌 2세에게 가버린다. 그녀는 세상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여자다. 오직 자신만을 사랑한다. 1970년대 말 새롭게 싹트기 시작한 여성의 욕망. 남자에 의해 잘잘못이 가려지고 남자에 의해 인생이 좌우되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살고 싶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여성을 정윤희는 연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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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영화감독 dook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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