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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박사의 ‘왕의 한의학’

평생 약 달고 산 허약 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天壽

조선 최장수 왕 영조

  • 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평생 약 달고 산 허약 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天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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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약 달고 산 허약 체질 철저한 자기관리로 天壽

영조는 평생 인삼이 든 처방을 애용했다.

현종도 마찬가지다. 1721년 10월 기록엔 “심화가 불어나 화열이 오르내리면서 정신이 아득하고 권태가 있어 치료하기 힘든 지경이니 조섭을 위해서 세제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시킨다”라고 적혀 있다. 경종도 즉위 후 2년에 도승지가 올린 상소를 읽다 화열이 오르고 심기가 폭발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성계와 아버지 숙종의 체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듯하다.

하지만 영조는 달랐다. 일생 동안 화열을 돋우는 인삼을 달고 살았다. 그가 가장 많이 복용한 것도 한의학 처방 중 인삼이 가장 많이 포함된 건공탕이었다. 영조 41년의 처방 기록에 의하면 매일 8.8돈(30g)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인삼을 복용했다. 영조 스스로도 “제조에게 인삼의 정기를 얻어 건강하다”고 말할 정도로 대단한 인삼 애호가였다. 그런데 그의 아들 사도세자와 손자 정조는 숙종과 경종 등 전대 왕들처럼 화열이 많은, 따라서 인삼이 맞지 않는 체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사도세자의 경우를 보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 왜 사람을 죽이게 됐는지 물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마음에 화증이 나면 견디지 못해 사람을 죽이거나 닭 같은 짐승이라도 죽여야 마음이 풀어지기에 그랬습니다”라고 답했다. 결국 이 병이 커져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불렀다는 데는 역사적으로 이의가 없다.

정조는 더욱 치열하게 내면의 화병과 싸웠다. 화를 내리는 가미소요산과 우황, 금은화를 밥 먹듯 먹었다는 건 잘 알려져 있고 소량의 인삼도 극도로 경계해 복용하지 않았다. 죽는 순간까지 인삼을 기피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영조는 숙빈 최씨의 체질을 이어받아 소음인에 가까운 체질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조가 일생 동안 보인 정치적 행태는 매우 자학적이었다. 대신들과 문제가 생기면 이를 쟁점으로 탕약 복용을 거부해 약자로서 탄압받는 임금의 모습을 부각했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능동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여론을 환기시키는 소음인의 특징을 보인 것이다. 영조 50년엔 유생과 백성들을 모아놓고 현상금을 내걸어 탕제 정지 여부를 묻는 행사도 벌였다. 또한 소식(小食)을 즐기고 기름진 음식과 술을 피하는 등 절제된 식생활을 이어나갔다. 소화 기능이 약한 소음인 체질이 아니고선 실천하기 힘든 식습관이다.



수동적 소음인 특징 뚜렷

왕위에 오르는 과정도 순탄치 못했다. 그는 이복형 경종 밑에서 왕세제로 있으면서 조금만 한눈팔면 목숨이 끊어질 수 있는 살얼음판을 걸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궁녀들의 여종인 무수리였다. 왕의 어머니라곤 상상하기 힘든 천한 신분을 딛고 영조는 출발점에 섰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상대로 저주의 굿판을 벌인 후 죽임을 당한 것은 숙빈 최씨가 진실을 알린 덕분이었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고 난 후 경종과 영조는 갈등관계에 돌입한다. 자기 어머니를 죽인 원수의 자식인데 예뻐 보일 리가 만무할 터.

경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고리 권력’인 실세 환관 박상검과 영조 간에 불거진 갈등은 1인자와 2인자의 간극을 보여주면서 불안한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를 확인시켰다. 뒤이은 목호룡의 고변은 왕과 왕세제 간 일촉즉발의 순간순간으로 이어졌다.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 의혹은 남인과 소론 강경파에 의해 더욱 증폭됐다. 경종은 상극의 음식인 게장과 단감을 먹고 죽었는데, 영조 31년 5월 20일 소론의 선두주자로 반란을 꾀했던 신치운은 스스로 “신은 영조 즉위년인 갑진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신의 역심입니다”라고 말했다가 죽임을 당했다. 경종 독살설의 의혹이 영조 재위 31년까지 뻗친 것이다. 게다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죄책감은 결코 다른 왕들보다 작은 스트레스가 아니었을 것이다.

영조가 앓은 질병은 대부분 소화력 부진이나 복통 등 한랭성 질환이었다. ‘골골백세’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체질이었다. 다만 궁궐 밖에서 생활하던 18세에 두창을 크게 앓은 것을 제외하면 본인의 판단과 선제적 대처로 질병을 예방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를 괴롭힌 질환은 산증(疝症)이었다. 경종 재위 시절 왕세제였던 그는 산증으로 경연(經筵)을 자주 쉬어야 할 정도로 통증이 심했다. 산증은 한의학적 병명으로, 현대의학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하복냉통증후군이다. 요즘으로 말하면 소화불량과 전립선질환이 복합된 것이며, 여성으로 말하면 생리통과 냉대하로 인한 자궁 하복통 질환을 의미한다.

동의보감은 ‘산증은 부위별 분류에 따라 전음(前陰)에 배속하였다. 전음은 종근이 모이는 곳이며 종근이란 음부의 털이 나는 곳에 가로놓인 뼈의 위아래에 있는 힘줄이다’라고 설명했다. 아랫배에 병이 생겨 배가 아프고 대소변이 잘 나오지 않는 것을 산증이라고 하는데 이는 찬 기운으로 인해 생긴다. 송나라 양사영의 ‘직지방(直指方)’은 보다 구체적으로 묘사했다. ‘산증이란 음낭과 아랫배가 아픈 것이다.…오한과 발열이 생기다가 대소변을 보지 못하거나 설사가 나기도 하는데 적취(積聚·몸 안에 쌓인 기로 인해 덩어리가 생겨 아픈 병)가 생겨 술잔 같거나 팔뚝 같거나 쟁반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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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곤 │갑산한의원 원장·한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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